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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유경희의 아트살롱

‘아를의 카페’라는 환상


‘밤의 카페테라스’, 1888년, 캔버스에 유채, 81×65.5㎝, 크뢸러뮐러 미술관 소장

서른세 살 늦은 나이로 화가의 길에 들어선 반 고흐. 예술에 대한 그의 열정은 지나쳤다. 네덜란드에서 온 반 고흐가 파리에서 목격한 것은 인상주의자들이 더 귀하고 더 나은 목표에 쏟아야 할 열정으로 서로를 헐뜯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는 그리스 조각 등 고전미술이 성취했던 고요하고 단순한 미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공동의 사상을 가진 공동체가 절실하다고 생각했다. 1888년, 그는 파리의 불협화음으로부터 벗어나 고갱과 같은 친구들과 함께 대화하면서 이상적인 예술세계를 펼칠 수 있다는 생각을 실천에 옮긴다. 자신과는 매우 다른 기질을 가진 고갱을 초대해 공동 아틀리에에서 작업하기로 약속을 받아내고 말이다.

그러나 프랑스 남부도시 아를은 아주 적막하다 못해 지루하기까지 한 시골마을이었다. 오락거리라고는 찾아보기 힘든 이곳에서 반 고흐는 주로 독서, 쓰기, 걷기, 수다로 소일했다. 이런 그의 취향에 가장 잘 맞는 공간이 카페였다. 자신이 읽은 책과 예술에 대해 수다를 떨고 싶었고, 자신의 말에 맞장구쳐주는 영혼의 동반자를 만날 수 있는 장소로는 카페만 한 곳이 없었던 것! <밤의 카페테라스>(1888)는 반 고흐의 이런 인간적인 열망이 담겨 있다. 이 그림을 보고 있으면 별이 빛나는 아를의 밤에 테라스에 앉아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하거나 누군가를 애타게 기다리는 반 고흐의 환영이 보이는 것만 같다. 이 그림이 세상에 선을 보인 것은 반 고흐의 죽음 이후였다. 이 그림은 처음엔 <커피하우스>라는 제목을 달고 전시되었다.

언젠가 동생 테오에게 보낸 편지에서 반 고흐는 “나는 카페를, 그 속에서라면 그 누구라도 스스로를 파멸시킬 수도, 미치게 할 수도, 아니면 범죄를 저지르게 할 수도 있는 그런 곳으로 그려보고 싶다”라는 말을 한 적이 있다. 반 고흐의 이 말은 적어도 자신의 삶 속에서는 충분히 실현되었다. 그것을 감히 ‘미학적 파멸’이라 말해도 괜찮을 것 같다. 올가을에는 아를의 별밤을 헤매고 싶다.


유경희 | 미술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