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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2017.11.23 연천 ‘조선왕가’의 설경
  2. 2017.11.20 잘 지내
  3. 2017.11.20 겨울 준비
  4. 2017.11.20 웃는 남자
  5. 2017.11.13 전시인가, 과시인가
  6. 2017.11.10 낯선 얼굴들
  7. 2017.11.10 의미의 시차
  8. 2017.11.09 고려의 제례공간 숭의전
  9. 2017.11.06 터널
  10. 2017.11.03 웃는 연습
  11. 2017.11.03 시각과 사각
  12. 2017.10.30 삼대의 모국어
  13. 2017.10.27 어두운 섬광
  14. 2017.10.27 사랑
  15. 2017.10.26 포천아트밸리
  16. 2017.10.20 핀치투줌
  17. 2017.10.20 당황
  18. 2017.10.16 나는 여행자가 되고 싶었다
  19. 2017.10.13 현기증
  20. 2017.10.13 대화

경기 의정부에서 동두천을 지나 연천으로 이어지는 3번 국도는 연천 시내로 들어가기 직전 우측의 2차선 도로와 만난다. 재인폭포로 이어지는 이 도로를 따라 약 4㎞를 달리면 도로 왼쪽으로 여러 채의 한옥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앞쪽으로 펼쳐져 있는 널찍한 평야는 가슴 시리도록 시원함으로 다가온다. 

 

평야 앞쪽으로는 한탄강이 크게 굽이쳐 흐르고 뒤쪽에는 나지막한 산을 등지고 있어 이 한옥은 그야말로 배산임수의 명당에 자리하고 있다. ‘조선왕가’라는 이름을 가진 한옥 호텔이다. 겉으로 봐서는 지어진 지 얼마 되지 않아 보이는데 왜 조선왕가라고 이름을 지었을까? 서울에서 멀리 떨어진 이 북쪽에 조선왕가와 무슨 연고가 있기는 한 걸까?

 

 

내용은 이러했다. 원래 이 한옥들은 현재 명륜동에 있던, 고종의 손자 이근이 살았던 건물이었다. 그런데 1936년 일제강점기 때 지도에 이 한옥들을 종택(宗宅) 영역으로 표기한 것으로 보아 이 한옥들이 왕실의 종택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종택은 1947년 황실 어의의 후손인 조인섭씨의 명의로 넘어갔다가 1976년 극동그룹으로 다시 이전, 그러고는 2008년 현재의 소유주인 남권희 박사가 매입하기에 이른다. 

 

남 박사는 매입한 이 종택을 2년여 기간에 걸쳐 원형의 모습 그대로 이곳 연천에 옮겨 놓았다. 명륜동에 있던 종택을 해체하는 과정에서 나온 상량문에는 1935년에 중수를 했다는 기록이 있어 이 종택의 나이가 200년 가까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지어 중심 건물인 염근당(念芹堂)의 대들보는 수령이 600년이나 된다 하니 이 한옥이 얼마나 긴 세월을 품고 있는지 새삼 놀랍다. 

 

다만 옮기는 과정에서 나무의 겉을 다듬었기에 오랜 세월의 느낌이 덜 배어나올 뿐이다. 이러한 배경으로 이 한옥의 이름을 조선왕가(朝鮮王家)로 명명하였다 하니 수긍이 간다.

 

조선왕가는 약 3000평의 대지 위에 ‘ㅁ’자 형태의 염근당과 뒤쪽 별채로 되어 있는 회덕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입구의 현대식 건물은 호텔 로비, 세미나실, 카페 등으로 호텔을 지원하는 시설이다. 

 

꽃피는 봄이나 만산홍엽이 지는 가을날, 자연에 묻힌 고즈넉한 염근당 한옥 추녀 아래에서 펼쳐지는 멋진 음악회가 눈에 그려진다. 또한 염근당 밖 잔디마당에서 바라본 조선왕가의 조용한 설경은 이런 모습이리라.

 

<윤희철 대진대 교수 휴먼건축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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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피 칼, 잘 지내(Take care of yourself), 2007, 혼합재료, 가변설치


“사랑은 재앙입니다.” 서로 다른 속도로 타오르거나, 미묘한 감정의 엇박자 속에 식어 버리거나, 혹은 습관인 양 유지하는 사랑을 이렇게 정의한 소피 칼의 진심을 알 길은 없다. 출장길에서 남자친구로부터 일방적인 이별 통보의 e메일을 받았을 때, 소피 칼은 행간에 녹아 있는 그의 마음을 제대로 이해할 수 없었다. 어떤 일이 있더라도, 내가 당신을 처음 만났을 때와 마찬가지로 당신을 사랑한다는 것을 기억해달라며, 이 마음은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라며, 잘 지내기를 바란다는 문장으로 끝맺는 ‘이별 편지’가, 완전한 이별의 선언인지, 계속 만나고는 싶다는 뜻인지 파악할 수 없었던 그는 친구에게 편지를 보여주면서 해석을 부탁했다.

 

그 이후 작가는 좀 더 많은 여성, 특히 각자의 분야에서 전문성을 가지고 활동하는 이들의 해석을 받아보기로 한다. 그의 메일을 받아본 107명의 전문직 여성들은 그들의 언어로 편지의 의미를 해석했고, 작가는 그 내용을 사진과 영상에 담아 작업으로 완성했다. 법조인은 편지의 법적 영향력을 분석했고, 편집자는 문법과 철자의 오류를 교정했다. 범죄심리학자는 그 남성을 ‘뒤틀린 조종자’라고 평했고 무용수는 그 내용에 반응하는 춤을 선보였다.

 

소피 칼은, 이별이라는, 결코 면역이 생기지 않는 통증의 시간에서 이렇게 빠져나왔다. “이 작업을 시작한 후 한 달 정도가 흐른 뒤로는 더 이상 고통스럽지 않았어요.” 심지어 그가 다시 만나자며 돌아올까 봐 두려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되면, 편지 끝문장을 따서 ‘잘 지내’라고 명명한 이 작품의 의미가 사라져버릴 것만 같았다. 거리를 두고 고통을 바라보는 시간을 거쳐 그의 사랑은 이렇게 끝났고, 전 남자친구의 바람대로, 소피 칼은 잘 지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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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7일자 지면기사-

 

캔버스에 아크릴(61×72㎝)


가을을 느끼기 전에 벌써 겨울이 와버렸습니다. 단풍 구경은 해보지도 못하고 두꺼운 겨울 외투를 꺼내어 입었습니다. 아직 마무리를 짓지도 못했는데 올해가 끝나갑니다. 시간은 갈수록 빨라만 집니다.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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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7일자 지면기사-

 

이한열 열사(왼쪽)와 어머니 배은심 여사, 1986년, 이한열기념사업회 제공.


“얘야, 사진 한 장 찍자”고 했을까, 아니면 “엄마, 사진 찍어요” 했을까? 누가 먼저 말을 꺼냈는지 알 수 없지만, 분명 가을 햇볕이 환해서, 노란 국화가 탐스러워서 카메라 앞에 섰을 것 같다. 사진 찍고 싶을 만큼 햇살이 좋았던, 국화가 예뻤던 그날은 두 사람의 소박한 모습으로 동결된다.

 

어찌 보면 그다지 특별할 것 없는 평범한 기념사진이지만, 보는 사람의 마음을 흔드는 구석이 있다. 저기 해맑게 웃는 청년이 바로 이한열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이한열 열사가 저리도 예쁘게 웃는 아이였단 말인가. 내가 사진으로 기억하는 이한열은 1987년 6월9일, 연세대 정문 앞에서 머리에 최루탄을 맞고 이종창에게 부축당한 채 피를 흘리는 모습뿐이다. 그렇기에 단 한 번도 웃는 모습을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이처럼 어떤 사진이 누군가를 기억하는 대표 이미지가 될 때, 그 사진은 강력한 기억의 수단이지만 동시에 망각의 도구가 된다. 하나의 이미지만 강하게 남고, 다른 이미지들은 서서히 지워지거나 그 존재를 상상조차 할 수 없기 때문이다. 한 장의 사진을 보며 정작 확인할 것은 프레임 안에 보이는 기억뿐만 아니라 프레임 밖에 숨겨진 망각의 빈자리이다.

 

문득, 이한열의 어머니 배은심 여사는 무척 억울하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생때같은 아이를 하루아침에 잃는 것도 그렇지만, 저리도 웃는 게 예쁜 아이가 머리에 피를 흘리며 쓰러지는 모습으로만 기억되는 일은 얼마나 억울할까.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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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홍식, 플라뇌르 인 루브르 뮤지엄, 2016~2017, 스테인리스강 위에 돋을새김, 실크스크린, 150×120㎝ ⓒ 김홍식

 

“처음 루브르박물관에 들어서던 순간을 기억한다. 에스컬레이터를 가득 메우고 내려가는 사람들의 파도. 스펙터클은 루브르가 아니라 그 군중이 이미 만들어내고 있었다. (…) 미술관의 관람객은 볼거리에 집착한다. 소비한다. 거대 미술관은 약탈한 수집품으로 가득 찼고, 그 소장품을 다시 약탈하는 군중이 가득하다. 소유하고 싶은 욕심에 약탈하는지, 너무나 사랑해서 탐하는 건지. 스냅샷을 날린다. 나는 뷰파인더를 통해 그들을 바라보는 군상을 주목한다.”

 

김홍식의 관심사는 현대 도시가 겪고 있는 변화와 움직임을 관찰하고 기록하고 탐구하고 이해하는 일이다. 도시 산책자가 되어 이곳에서 발생하는 현상들을 지켜보고, 그 현상들이 우리의 삶과 어떤 관계를 맺는지 관찰하면서 의미를 추적한다.

 

그 산책의 발길이 ‘미술관’에 닿았다. 미술관 안에서 그는 ‘미술품’과 ‘관람객’ 사이 펼쳐지는 또 하나의 풍경을 목격한다. ‘인류 문화의 보고’라는 미술관에 몸을 들인 사람들은 유명한 미술품이 놓여 있는 방을 향해 순례객처럼 행렬을 만들고, 목적지에 도착하면 카메라를 들어 올린다. 이후 그들 중 몇몇은 자신이 포착한 장면을 사회관계망서비스(SNS)에 올려 네트워크 안에 있는 지인들과 공유할 것이다.

 

작가는 루브르를 찾는 이들이 반드시 방문해야 한다고 믿는 ‘모나리자’ 앞에서 보고, 기록하고, 기억하고, 전달하고, 망각하는 행위들이 마치 거대한 퍼포먼스처럼 펼쳐지는 장면을 담았다. 작품과 관객과 작가의 시선이 꼬리를 물고 오고가는 ‘미술 감상’의 순간, 금빛 액자 안에서 찬란하게 빛나는 ‘예술’은 묻는다. “미술관에 온 내가 보는 것은 무엇인가.”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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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에 아크릴(72×61㎝)


어떤 얼굴이 진짜일까요? 편안하게 미소 짓는 얼굴, 열심히 일하고 있는 얼굴, 활짝 웃는 얼굴, 피곤하고 짜증이 나 있는 얼굴, 멍하니 딴 세상을 보고 있는 얼굴? 문득 거울을 보면 낯선 얼굴이 나를 노려보고 있습니다. 거울 속에서 점점 나 아닌 다른 사람이 보이고 있습니다. 낯선 그와 대화를 해보면 다시 비슷해질까요?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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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작가는 자신의 전시회 때 도슨트 프로그램에 몰래 참여한다.

관객 사이에서 자기 작품에 관한 설명을 듣는다니 왠지 짓궂다. 도슨트 입장에서 원작자를 앞에 두고 이야기하는 건 민망한 일이기 때문이다.

 

Sub/Ob-Ject, WeⅠ, 2017 ⓒ기슬기

 

반면, 발화자(주체)가 아닌 청자(객체)의 위치에서 작품을 바라보는 건 작가에게 유의미하다. 작품의 의미가 청자에게 어떻게 (오)작동하는지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기슬기의 ‘Sub/Ob-Ject’ 시리즈를 보며 이미지를 둘러싼 주체와 객체의 경계를 교란하거나 역전시킨다는 측면에서 앞서 말한 작가의 행위가 떠오른다.

 

기슬기는 외국인과의 인터뷰 과정에서 얻은 단편적인 이야기를 모티브 삼아 이미지를 제작했다. 하지만 그 안에는 일본어와 한국어의 차이, 발화와 청취의 시차, 기록과 기억의 격차가 존재한다.

 

그러니 그 이미지는 결국, 발화자에게 비롯된 이야기를 통역자와 청자가 번역하고 왜곡시킨 결과물일 수밖에 없다.

 

작가는 전시장에 작품과 일정한 거리를 두고 철장을 설치하고, 이 안에서 카메라로 관객을 관찰하는 퍼포먼스를 수행한다. 이미지를 바라보다가 자신도 카메라의 대상이라는 걸 인지할 때, 관객은 철장의 안과 밖 어디에 있는지 혼란스럽게 된다.

 

그리고 전시장에서 자신은 시선의 주인인지, 대상인지 의심하기 시작한다. 안과 밖, 주체와 객체, 내 눈이 어디에 있는지 확신할 수 없다면, 우리는 스스로 본 것을 믿어도 될까.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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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두천을 거쳐 연천으로 가기 전 전곡에서 파주로 이어지는 37번 국도를 접어들면 연천의 유명한 전곡 선사유적지를 지나게 된다. 유적지를 지나 잠시 차를 달리면 북쪽에서 흘러내려오는 임진강변으로 고려시대의 종묘인 숭의전(崇義殿)에 다다른다. 차에서 내려 왕건이 물을 마셨다고 전해지는 ‘어수정(御水井)’에서 물을 한잔 마시고 홍살문이 있는 언덕길을 오른다. 경사진 언덕길을 잠시 오르면 우측의 절벽 저 아래로 크게 굽이쳐 흐르는 임진강의 모습이 눈에 가득 들어온다. 조선조 태조는 새 왕조를 건설하면서 전통적인 예법에 따라 전 왕조의 위패와 왕릉을 보존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이곳에 왕건의 전각을 세웠고 정종 때는 왕건 외에 고려왕 7명의 제사를 받들도록 하였다.

 

그러나 세종 때에는 제후는 5묘를 세워야 한다는 예법에 따라 왕건을 포함한 4위로 축소하여 받들도록 하였다. 문종 때에는 이 사당을 전대의 왕조를 예우한다는 의미의 ‘숭의전’으로 명명하고 복지겸, 홍유, 신숭겸 등 고려의 충신 16인을 함께 제사 지내게 하였다. 조선조는 건물의 관리와 제례를 고려왕조의 후손에게 맡겨 고려 왕족의 불만을 잠재우고자 하였다.

 

일제시대에도 이러한 전통은 이어져 왔으나 6·25전쟁 때 전각이 소실되었다. 1970년대에 왕씨 후손이 정전을 복구하였고 이후 국비 및 지방보조로 현재와 같은 전각들이 모두 완성되었다. 지금도 매년 봄과 가을에는 이곳에 모셔져 있는 위인들의 후손이 고려시대의 왕과 신하의 복식을 하고 큰 제사를 올리는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

 

종묘에서 종묘제례가 이루어지듯이 고려시대의 제례가 이곳 숭의전에서 열리고 있으니 고려시대의 제례를 볼 수 있는 귀중한 관광자원이 아닐 수 없다. 고려의 4왕을 모시는 숭의전, 고려 충신 16인을 모시는 배신청 및 제사에 필요한 전각 등 모두 5개의 전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각들과 이를 둘러싼 담장과 문들은 아기자기한 우리 전통건축의 아름다움을 잘 보여준다.

 

앞쪽에 왕씨 자손이 심었다고 전해지는 600년 가까이 되는 느티나무의 역동적인 모습과 숭의전에서 보여주는 단아한 한옥미는 한 폭의 그림으로 다가온다.

 

<윤희철 대진대 교수 휴먼건축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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뒤늦게 찾아봤던 드라마 <터널>에서 터널은 ‘운명과 시간이 교차하는 곳’이었다. 연쇄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던 형사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터널을 통해 미래로 가고, 그곳에서 과거와 미래의 연결고리를 발견하면서 범인을 추적하고 진실에 다가가는 내용. 진실에 닿기 위해 필요한 건 시간여행인 걸까. 시간은 종종 많은 것을 해결해준다.

 

익숙한 주변 풍경에 낯선 기운을 불어넣는 데 탁월한 피터 도이그가 화면에 담은 터널은 무지개색이었다. 꿈인 듯 현실인 듯 알 수 없는 기묘한 화면의 톤 덕분에 사람들은 피터 도이그의 그림을 통해 몽환적인 상황을 만나곤 한다.

 

피터 도이그, Country-rock(wing-mirror), 1998~1999

 

토론토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한 이 터널에 무지개가 뜬 건 1972년의 일이다. 노르웨이 출신 베르그 욘슨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친구를 애도하는 마음을 담아 어두운 터널 입구에 무지개색을 입혔다. 모름지기 무지개란, 잠깐 떴다가 덧없이 사라지는 한시적인 판타지이건만, 소년은 시간이 흘러 페인트가 벗겨지면 다시 칠하고 또 칠하기를 반복하며 이 판타지를 붙잡았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고요한 풍경을 치고 들어온 현란한 페인트색에 거부감을 표하던 마을 사람도 언제부터인가 소년을 도와 무지개를 그렸단다.

 

너무 익숙해서 당연하게 여기다가 사라진 뒤에야 황망하게 만드는 많은 것들. 소년은 훌쩍 떠난 친구와의 우정을 터널 앞 무지개로 기억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베르그 욘슨은 자신을 ‘꿈 지킴이’라고 칭하면서 이 무지개가 서로 인사도 잘 안 하고, 잘 웃지도 않는 토론토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를 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덧붙였으니, 누군가에게 무지개 터널은 좋은 기억을 상기시키는 장소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지나간 것은 아름답게, 사라진 것은 애틋하게 추억의 장소에 깃들어 시간여행을 인도한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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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에 아크릴(61×72㎝)

 

웃는 연습을 해봅니다. 입꼬리를 살짝 올리고 이빨을 드러내며 한껏 웃어 봅니다.

즐거워지는 연습을 해봅니다. 머릿속에 행복한 생각들을 가득 넣어 봅니다.

 

이렇게 웃는 연습을 하고 이렇게 즐거워지는 연습을 하면서 웃음 가득한 재밌는 그림을 그려 봅니다.

 

이렇게 그림을 그릴 때가 언제나 즐겁고 행복합니다.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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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데군데 찌그러졌다. 드문드문 빨간 도색도 벗겨졌다. 각질처럼 허옇게 일어난 타이어 표면은 심하게 마모됐다. 둥근 휠 가운데 호랑이 엠블럼은 작지만 눈에 박힌다. 범퍼 밑에는 물먹은 주황빛이 반짝인다.

 

이렇게 열심히 사진을 들여다봐도 왜 찍었는지, 무엇을 보여주려고 하는지 단서를 찾을 수는 없다.

 

Red car by the river fig 9 ⓒ목정욱

이처럼 목정욱의 ‘Car’ 연작(2006~2017)은 어떠한 이야기도 담지 않은 파편적인 이미지의 연속으로 이뤄진다. 산산조각 난 앞 유리창, 먼지와 때가 잔뜩 낀 헤드라이트, 절연 테이프로 칭칭 감은 사이드 미러 등이 담긴 사진을 보며 알 수 있는 건, 피사체가 자동차라는 것뿐이다. 작가의 프레이밍은 형태와 색의 윤곽을 선명하게 묘사하지만, 어떤 정보를 제공하거나 설명하지는 않는다. 전체를 가늠할 수 없고, 특정한 형태와 색을 가득 채운 클로즈업은 묘한 궁금증을 유발한다.

 

그러나 그 궁금증은 끝내 해소되지 않을 것이다. 촬영자인 작가 본인조차도 왜 찍었는지 똑 떨어지게 말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오랫동안 자동차 이미지를 수집하고 이를 추려 전시까지 했는데도 말이다.

 

그 이유는 애써 말로 할수록 궁색해진다. 그건 어쩌면 언어의 논리가 아닌 망막의 논리에 따라 움직였기 때문은 아닐까. 말하자면 어떤 대상을 찍는 이유를 먼저 정하고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우선 눈을 따라 움직이고, 그 결과물을 바라보며 자신의 망막에 왜 맺히게 됐는지 되짚어보는 것이다. 그건 자동차를 바라보는 자신의 시각과 자동차밖에 볼 수 없었던 자신의 사각을 동시에 역추적하는 일이기도 하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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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는 프랑스의 지배를 받던 알제리에서 태어났다. 엄마의 모국어는 아랍어다. 이후 엄마는 프랑스로 이주해 딸 지네브 세디라를 낳았다. 프랑스어를 쓰며 성장한 그는 이후 런던으로 유학을 떠났고 그곳에서 딸을 낳았다. 딸은 영어로 말한다. 서로 다른 나라에서 태어나 서로 다른 언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삼대’는 이렇게 탄생했다.

 

지네브 세디라, 모국어, 2002, 3채널 비디오, 5분, 테이트모던 설치장면 ⓒ지네브 세디라

 

지네브 세디라는 자신의 가족 내에서 일어나는 문화적 정체성의 이동에 대한 이야기를 담아 3채널 영상 작품 ‘모국어’를 완성했다. 작가와, 그의 엄마, 딸, 세 여성은 서로서로 대화를 나눈다. 처음 전시장에 들어서서 화면을 마주한 관객들은, 영상을 통해 각자가 어떤 대화를 나누고 있다는 것 정도만 파악할 수 있다. 모든 영상의 소리는 헤드폰을 통해서만 들을 수 있다. 소리가 없기 때문에 서로의 말에 반응하는 동작, 표정을 좀 더 유심히 보게 된다. 대화가 잘 이루어지는 것도 같고 머뭇거리는 느낌도 있다. 곧 헤드폰을 하나씩 끼고 그들의 대화 내용을 들어보면, 그들이 서로 다른 언어로 이야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첫 번째 비디오 속 엄마와 나는 아랍어와 프랑스어로 대화한다. 두 번째 비디오의 나와 딸은 프랑스어와 영어로 대화하며, 마지막 할머니와 손녀는 아랍어와 영어로 대화하는 중이다. 엄마와 딸은 그런대로 묻고 답하며 대화를 주고받는데, 할머니와 손녀는 불편해 보인다. 각자의 모국어로 말을 건네지만, 상대방의 이야기를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두 사람은 대화를 이어가지 못하고 쑥스럽게 미소 짓는다. 작가가 연출한 이 어색한 대화의 시간은 문화적 정체성이 어떻게 형성되고, 또 세대를 거쳐 어떻게 계승되는지 묻는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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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막한 새벽, 칠흑처럼 먹먹한 어둠 속에서 플래시가 강하게 터진다. 창백한 섬광을 마주한 병사의 헬멧과 얼굴 그리고 요대의 버클이 부러질 듯 딱딱하게 빛난다. 그 옆에는 90㎜ 주포를 장착한 M48A2C형 패튼 탱크가 어둠의 물결에서 차갑고 육중한 몸체를 뒤척인다. 프레임 끝과 끝에 아슬아슬하게 걸린 탱크와 병사가 그려낸 평행선이 기묘한 긴장감을 불러온다. 그 안에서 어깨를 맞댄 어둠과 밝음의 선명한 대비가 눅눅한 불길함을 자아낸다.

 

1979년 10월27일 오전 4시에 비상계엄이 선포된 후 중앙청에 배치된 계엄군과 탱크(경향신문사).

 

지금으로부터 38년 전, 1979년 10월27일 새벽에 찍힌 장면이다. 오전 4시 비상계엄령이 선포됐고 수도경비사령부 소속의 계엄군이 탱크와 장갑차를 몰고 중앙청을 점거했다. 뚜렷하게 보이는 탱크와 그 뒤로 어렴풋한 중앙청 건물 그리고 승용차들이 모두 비현실적으로 다가온다. 유신체제를 통해 박정희가 영구집권을 획책했던 시절에 그가 지워진 세상은 그야말로 비현실과 다름없다. 또한 일국의 대통령이 술자리의 여가수와 여대생 앞에서 총을 맞고 쓰러지는 사건은 그야말로 초현실적이다.

 

모두 알다시피 전날 26일, 박정희 대통령은 서울 종로구 궁정동 안가에서 김재규 중앙정보부 부장에게 총격을 당해 사망했다. 15년 10개월 16일간 청와대에 거주하면서 죽어서야 청와대를 떠나는 그의 운명은, 고향 후배이자 육사 동기였던 측근에게 배신을 당한 그의 최후는 꽤나 을씨년스럽다. 그렇게 기나긴 1인 독재정권과 유신체제는 드디어 종말을 고했다. 하지만 을씨년스러운 시대의 비극은 광주를 거쳐 한동안 이어지고 말았다. 그 슬픔은 사진 속의 음산한 어둠처럼, 스산한 섬광처럼 우리 곁을 아직도 맴돈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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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에 아크릴(72×61㎝)


“사랑은 마주 보는 게 아니라 같은 방향을 보는 것이다”라는 말도 있지만, 서로의 눈동자에 비친 사랑하는 사람의 모습을 보는 것 또한 행복한 일입니다. 사랑을 좀 다르게 그려보고 싶었지만, 어디서 많이 본 듯한 그림이 되어 버렸습니다. 사랑은 하는 것도, 그리는 것도 어렵습니다.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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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재는 견고하고 중후하게 보여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건물의 마감재로 많이 애용되고 있는 재료이다. 석재들 가운데 건물에 가장 많이 사용되는 재료가 화강석이다. 포천은 그 화강석의 대표적인 주산지로서 ‘포천석’이라 함은 질 좋은 화강석을 지칭하는 용어가 되었다. 포천석은 1960년대 이후 국토개발과 함께 전국의 건축 현장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었다. 포천시 신북면 일대는 포천석이 많이 생산되던 곳으로 1980년대에는 3만평에 달하는 면적에 종사한 인원이 수백명에 이를 정도였다 한다. 그러나 1990년대 중반부터 오랜 채석으로 채석량도 줄고 값싼 중국산 석재의 수입으로 채석은 사양산업이 되고 만다. 그리하여 2000년대로 접어들면서 업체들이 하나둘 떠나간 채석장은 훼손된 자연만이 덩그러니 남게 되었다.

 

 

훼손된 자연을 복원해 보고자 포천시는 2003년 경기도의 지원으로 이곳을 문화공간으로 개조하는 사업을 시작하였다. 채석으로 생겨난 커다란 구덩이에 빗물을 모아 멋진 호수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주위에 조각공원과 자연 지형을 살려 만든 크고 작은 야외공연장 등을 조성함으로써 폐 채석장은 멋진 문화공간으로 탈바꿈한다. 그 문화공간은 ‘포천아트밸리’로 이름지어졌다. 입구에 위치한 돌 문화전시관과 창작체험관을 둘러본 후 모노레일을 이용하여 정상에 오른다.

 

오르내리는 모노레일 안에서 바라보이는 채석장의 흔적과 바위에 얽힌 전설을 듣는 것도 인상깊다. 정상에 다다르면 채석장의 모습을 그대로 간직한 수직의 직벽들로 둘러싸인 호수가 시선을 사로잡는다. ‘천주호’로 이름지어진 이 호수 주변에는 흥미롭고 다양한 조각상들로 조성된 조각공원이 펼쳐져 있다. 이 호수와 조각공원은 <내 마음이 들리니> <달의 연인> <푸른 바다의 전설> 등 다양한 TV 드라마 촬영지로 애용되고 있다. 가장 위쪽에 위치한 천문과학관도 다양한 첨단 장비를 갖춘 천체과학 체험장으로 인기가 높다. 높이 45m의 직벽을 활용한 미디어파사드와 야간조명, 힐링 숲 등이 곧 조성된단다. 아트밸리 입구까지 연결된 구리~포천고속도로는 더욱 많은 수도권 시민들의 발걸음을 이곳으로 이어줄 것으로 여겨진다.

 

<윤희철 대진대 교수 휴먼건축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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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음증을 소재로 다룬 영화 <이창>(1954)의 주인공 제프리.


스크롤 스크롤, 클릭 클릭 그리고 핀치투줌(두 손가락으로 화면을 확대하는 것). 눈과 연동된 손가락은 스마트폰 위에서 분주하지만 유연하게 움직인다. 때로 손가락이 눈보다 더 빨리 반응하기도 한다. 그렇게 손가락으로 수많은 이미지들을 훑어보며, 어떤 사진에서 나도 모르게 두 손가락을 벌린다. 그리고 ‘아차!’ 아찔함을 느낀다.

 

벌어진 손가락 사이로 얼굴 같지 않은 얼굴, 몸뚱이 같지 않은 몸뚱이가 드러났다. 그건 사람이지만 사람이라고 할 수 없는 시커먼 형체처럼 보였다. 세월호 참사 희생자의 시신이었다. 그 사진은 세월호 청문회 때 참고인으로 출석한 희생자 정동수 학생의 아버지 정성욱씨가 공개한 아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그 사진을 두 손가락으로 집요하게 헤집으며, 나는 과연 무엇을 확인하고 싶었던 걸까, 도대체 무엇을 더 봐야 했던 걸까. “더, 더, 더”를 외쳐대는 눈과 손가락은 기어코 어디까지 봐야만 그 탐욕스러운 놀림을 멈출 것인가?

 

며칠 전, 미국프로농구(NBA) 개막전에서 보스턴 셀틱스 소속의 고든 헤이워드가 왼쪽 발목이 완전히 뒤로 꺾이는 끔찍한 부상을 당했다. 당시 코트 위에 있던 양팀 선수들은 모두 고개를 돌리고 참담한 표정을 지었다. 그들은 헤이워드의 고통을 구경하지 않았다. 어떤 선수는 눈을 감고 기도했다. 그 광경을 보며 두 손가락으로 고통을 벌려 구경한 기억을 부러뜨리고 싶었다. 

 

다리가 부러져 휠체어를 탄 채 망원 렌즈로 이웃집을 훔쳐보던 영화 속 주인공이 떠올라 한없이 부끄러웠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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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아크릴(27×36㎝)


온몸에서 열이 나고, 식은땀은 줄줄 흐르고, 말은 점점 꼬여 가고, 목은 조여 오고, 머릿속은 텅 비어 버렸습니다. 시간은 멈춰 버렸고 어떻게 할지를 모르겠습니다. 준비를 잘했는데도 돌발 상황에 모든 것이 꼬여 버렸습니다. 이 상황을 피할 수 없으니 다시 마음을 가다듬고 크게 숨을 쉬어 봅니다.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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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코 몬티엘 소토, 목적지 없는 히치하이킹, 2002-2009, 사운드, 포스터, 지도, 사진, 가변설치


“길을 잃어버린 것 같다. 계획 없이 암스테르담에 도착했다. 잠을 잘 수 있는 곳을 찾고 있다. 새벽 2시다. 잠이 오지는 않지만 어깨에 멘 배낭이 너무 무겁다. 이 도시는 나의 발걸음을 붙잡고, 구름 속에 나를 가둔다. 비는 쏟아지고 하루하루 날짜는 지나가고 해는 사라지지 않는다. 나는 아무 방향을 정하지 않은 채 나무에서 떨어진 나뭇잎들을 밟았다.”

 

사람마다 다른 인생의 버킷 리스트를 가지고 살 테지만, 꽤 많은 이들이 그 안에 ‘세계일주’나 ‘여행’을 담고 있지 않을까.

 

전세금을 빼서 몇 년간 세계 곳곳을 다녔다는 가족의 이야기나, 직장을 그만두고 퇴직금을 털어 여행을 떠났다는 이야기는 꾸준히 사람들의 관심과 부러움을 산다.

일상의 쳇바퀴에서 과감히 벗어나 길을 떠난다는 것은 뭔가 매력적이지만, 큰 용기가 필요한 선택이기 때문이다. 안정적인 일상을 벗어던지는 것이 두려운 대다수의 사람들은 아쉬운 대로, 짧은 휴가 기간 선택한 여행지에서의 시간에 만족할 수밖에 없다.

어린 시절, 여행자가 되고 싶었다는 작가 마르코 몬티엘 소토는 2002년 여름, 파리를 시작으로 그해 말, 바르셀로나에서 여행을 마쳤다.

 

그는 여행길에 마주한 경험의 기억을 사운드와 이미지에 담아 설치했다. 그 기억 속에는 낯선 풍경을 바라보는 낭만적 시선, 여행자의 고독감, 지루함, 방황, 불쑥 솟아오르는 삶에 대한 열정, 착각, 환각이 깃들어 있다. 전시장에 떠도는 작가의 상념은 여행에 대한 관객의 판타지와 만난다.

 

“나는 프랑크푸르트에 있다. 여기서 나는 무엇을 하는지 모른 채 맥주를 마신다. 나는 베를린을 향해 이동을 하는 중이다. 차들은 멈추지 않고 지나간다. 나를 태워주지 않는다. 나의 희망은 사라진다. 나는 사거리에 서서 베를린으로 갈지 파리로 갈지 암스테르담으로 갈지 바르셀로나로 갈지 결정을 못한다. 나는 고속도로 한복판에 서 있다. 나는 나 자신을 내려놓는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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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된 사진들

기륭전자 옛 사옥 앞, 2010년 ⓒ조재무


어지러운 전깃줄에 걸린 현수막 구호가 더없이 어지럽다. 검은 실루엣으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내는 뜨거운 태양을 피할 수 없어 어지럽다. 어지러운 구호는 ‘비정규직 없는 세상’, 어지러운 사내는 송경동 시인이다.

 

포클레인 위에서 어지러운 구호를 외치던 시인은 땅으로 어지럽게 곤두박질친다. 그는 기륭전자 옛 사옥 앞에서 해고노동자의 단식농성장을 부수려 했던 포클레인을 막고 12일 동안 밤샘 농성을 했다. 2010년의 일이다. 그해 11월, “내일부터 나오지 마시오” 문자 한 통으로 해고됐던 기륭의 노동자들은 1895일간의 복직투쟁 끝에 사측과 정규직 고용에 합의했다. 그에 따라 노동자 10명은 2013년 5월부터 출근했다. 그러나 회사는 그들에게 일감을 주지 않았고, 같은 해 12월 아무런 예고도 없이 사무실을 옮겼다. 야반도주나 다름없었고, 당연히 임금이 지불되지 않았다. 이후, 노동자 10명의 임금 2억여원을 체불한 혐의로 기소된 기륭전자 최동열 회장은 징역 1년을 선고받고 법정구속됐다. 불과 이틀 전의 일이다.

 

2005년부터 2017년까지 기륭의 해고노동자들은 고공농성 3회, 국회 점거투쟁 2회, 집단 단식 94일, 오체투지 등 그들의 표현대로 ‘죽는 것 빼고는 다해 본 투쟁’을 거쳐 왔다. 부질없는 짓이지만, 해고 노동자들의 세월과 최 회장의 1년을 견주니 현기증이 난다. 사람이 사람답게 일할 수 없는 현실에 공모하는 세상은 뒤엉킨 전깃줄과 읽을 수 없는 구호, 알 수 없는 사내보다 더없이 어지럽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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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에 아크릴(10×8㎝)


아무리 말을 해도 못 알아듣는 사람이 있고, 말 안 해도 눈빛만 봐도 알 수 있는 사람이 있습니다. 말이 안 통해 말하기 싫은 사람도 있고, 말이 잘 통해 말이 필요 없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렇게 너무나 편해서, 너무나 잘 알고 있다 생각해서 말을 잘 안 하다 보니 점점 할 말이 없어집니다. 틀에 박힌 인사라도 건네며 다시 대화를 시도해 보아야겠습니다.

 

<김상민 기자 yellow@kyunghyang.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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