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나는 건축가가 본업인데도 여러 권의 책을 펴낸 저자가 되었다. 뜻한 바도 없었고 모두 어쭙잖은 글로 채운 책들이지만 그중 몇몇은 해외에서 번역 출판되는 민망함을 겪기도 했는데, 급기야 나의 첫 책인 <빈자의 미학>도 중국에서 지난달 출간되었다. 국내에서 나온 지 20년도 지난 이 작은 책을 중국에 소개하겠다는 출판사에 그 이유를 물었더니, 지금의 중국에 필요한 글이라고 했다. <빈자의 미학>. 서로 모순되는 듯한 두 단어의 나열로 반감까지 가끔 불러일으키곤 하는 이 제목은, 1992년 가을에 개최된 한 건축전시회에서 선언하듯 뱉은 말이다.

나는 한때 신학을 전공하려 했다. 나는 왜 기독교도인가에 대한 의문이 어릴 적 내내 따라다녔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독실한 신자임에도 장남이 성직자 되는 것을 반대하시는 부모님에게 걸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방황하던 나를 누님이 다독여 건축과로 진학하게 했으나 대학생활은 파행이었다. 유신독재에 맹렬히 저항하는 학생운동으로 학교는 휴교와 휴업이 일상이었고 간간이 듣는 강의는 건축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하는 내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학교를 겉돌기만 하다가 1974년 말 한국 건축계에 독보적 존재였던 김수근 선생의 문하에 들어가서야 건축을 접할 수 있었다. 군사독재의 강압이 절망처럼 느껴지던 때, 김수근 선생의 건축은 내게 구원의 빛이었다. 나는 그 속으로 도피하듯 몰두했다. 거의 매일 밤을 미친 듯이 새우며 세상과 절연한 것이다.

그러나 선생은 건축가로는 너무도 아쉽게 55세의 일기로 1986년 세상을 떠나고 만다. 그리고 곧 깨닫게 되었다. 내가 그렇게 몰두하던 것은 어쩌면 건축이 아니라 김수근건축이었고, 선생께서 계시지 않는 이상 그 건축은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1989년, 내 건축을 하겠다고 세상으로 나왔을 때, 나는 내 건축이 무엇인지 알지 못할 뿐 아니라 내가 누구인지조차 몰랐다. 15년을 김수근건축 속에서만 파묻혀 산 까닭이었으니 마치 방향을 잃고 헤매는 선원과 같았다. 방황을 거듭하다 우연히 금호동 달동네를 가게 된다. 깜짝 놀랐다. 내가 의문하던 건축과 도시의 모든 지혜와 해결책이 그곳에 있는 것이었다.

가난한 이들이 사는 달동네는 각자 가진 게 적어 많은 부분을 서로 나누며 살 수밖에 없다. 그 나누는 삶이 집 밖의 길에서 이뤄진다. 여기 길은 통행만을 위한 공간이 아니다. 만나고 헤어지며 모이고 즐긴다. 특히 산비탈 지형에 따라 이뤄진 길은 그 형태가 절묘하여 넓다가 좁다가 휘어지고 끊임없이 이어진다. 내 어릴 적 살던 곳이 생각났다. 내 부모님은 해방 후 이북에서 월남하여 전쟁 때 부산으로 피란하신 까닭에 나는 피란민 마을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우물 하나, 화장실 하나를 가운데 둔 마당에서 북새통을 이루며 모여 살던 풍경, 많은 것을 나누며 살던 내 어릴 적 정겨운 모습들이 현재화된 것이었다. 삶에 대한 진정성 가득한 이 절묘한 공간들은 어떤 현대건축에서도 본 적이 없었다.

달동네는 인프라가 부족하고 위험하기도 해서 재개발되어야 한다. 그러나 건축이 우리 삶을 지속시키는 기억의 저장소인 한, 이런 아름다운 공간은 재개발 속에서도 유지되어야 했다. 이것이라면 내가 건축하는 이유일 수 있었고 누구보다도 잘할 수 있다고 여겼다. 그래서 서울의 달동네라는 곳을 모두 가보고 확인하며 내 건축 속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1992년 가을, 새로운 건축에 뜻을 같이하며 논쟁하곤 했던 젊은 건축가들의 모임인 ‘4.3그룹’이 건축전을 가지면서 서로의 주장을 내어놓자고 했을 때, 나는 서슴없이 ‘빈자의 미학’이라고 이름하며 이 방향으로 내 건축을 하겠노라 선언하였다. 더러는 이 말의 뜻을 높이 사며 격려도 했지만 일부는 너무 종교적이라며 비아냥거리기도 했고 내 건축을 미리 한정하는 데 대한 질책과 염려도 했다. 그러나, 나는 이 말이 갖는 아름다운 가치를 이미 감지했으므로 실천만이 내가 안아야 할 과제였다.



충남 온양 `신도리코 기숙사'. 건축가 민현식 작품_경향DB



‘빈자의 미학’은, 가난한 이가 아니라 가난하고자 하는 이들을 위한 건축 방법론이다. 공동체의 지속을 위해 도시와 건축은 서로에게 열려 있어야 한다 했으며, 20세기 초 서양에서 주장되었던 기능주의를 비판하였고 그들의 목적적 건축공간보다는 비어 있는 우리의 옛 공간이 훨씬 우리 삶을 윤택하게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이 소란한 시대에 침묵의 건축이 더 가치 있다고 그 책에 썼다. 졸렬한 책이며 거친 글이라 해도, 20년이 지난 지금에도 나는 그 내용을 고칠 수 없다. 그사이 시대는 21세기로 변하고 물질적으로 더 풍요롭고 기술이 더욱 발달했지만 우리 사회와 우리 삶은 나아졌을까? 하루에도 마흔명이 가난 때문에 혹은 고독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이 절망의 사회, 3백명이 넘는 아이들이 수장되는 것을 생중계로 지켜보아야만 했던 이 야만의 시대…. 헬조선이며 혼용무도라고 했다. 결단코 우리는 20여년 전보다 나은 사회에 있지 않다. 그러니, 가짐보다 쓰임, 더함보다 나눔, 채움보다 비움이 더 중요하다고 한 다짐을 나는 아직 버릴 수 없다.


그러나, 나를 가둔 이 빈자의 미학은 때로는 위험한 무기가 되었다. 그 책에 발문을 쓴 건축가 민현식 선배는 내게 근본주의자라고 낙인하며 그렇게 살라고 일렀다. 타협하지 않아야 했으며, 내 영역이 아니면 얼씬거리지 않아야 했고 나를 더욱 달구기 위해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에게 등을 돌려야 했다. 세월이 한참 지난 지금 남은 게 무엇일까? 수많은 적들? 비아냥과 욕설들? 가난한 내 주변들? 아니다. 이런 결과는 오히려 스스로를 다듬게 하는 동기가 되니 감당할 몫이다. 요즘 들어 내가 못 견뎌 하는 것은, 내가 쏟은 말과 글이 누구에게는 상처로 남은 일이다. 특히 지난 2년 동안 이 칼럼을 독점하면서 뱉어놓은 글들을 들추어보며 부끄러움과 미안함을 어쩌지 못한다. 횔덜린의 글이 생각났다. “그리하여 모든 것 중에서 가장 뛰어나고도 위험한 존재인 언어가 인간에게 주어졌다.”

혹시 내 글로 상처 입었을 이들에게 사죄한다. 이 마지막 칼럼마저 변명으로 맺지만, 그 누추함에도 독자들과 데스크에 감사할 뿐이다. 새해, 평화하시라.



승효상 | 건축가·이로재 대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Kh-art

오래된 서양 도시들, 예컨대 런던이나 파리, 빈, 프랑크푸르트의 원도심은 2000년 전 로마의 군단 주둔지였다. 이 도시들의 중심지역인 시티지역, 시테섬, 그라벤, 뢰머광장 등이 카스트라라고 불렸던 로마군단 캠프가 설치되었던 곳이며, 군단 주둔이 장기화하면서 그곳을 중심으로 도시가 확장되어 오늘날에 이르렀다. 그 캠프의 중심 공간이었던 포로나 중심 도로인 카르도, 데쿠마누스 같은 공간은 이름이 바뀌었지만 지금도 그 흔적이 남아 장구한 역사를 전하고 있다.

캠프라는 시설은 필요에 따라 쉽게 설치하고 해체해야 하므로 평활한 땅을 고르는 게 우선이다. 오늘날 대도시로 변모한 이 캠프가 설치되었던 평지라는 지형은 결국 서양인들의 도시에 대한 관념에 전제되어야 하는 조건으로 발전되었다. 특히 르네상스 시대에 봇물처럼 쏟아진 이상도시 건설을 위한 각종 계획도를 보면 이 추측이 틀리지 않는다. 원형의 도상으로 된 르네상스 시대의 도시계획도는 그 모양이 조금씩 다르지만 모두가 한 가지 개념을 공유한다.

즉 주변의 환경을 적으로 간주해서 도시 둘레에 해자를 파고 외곽을 높은 성벽으로 두른 다음, 내부는 방사형이나 격자형의 가로망으로 정밀하게 조직해 한가운데에는 그 도시의 영주가 사는 궁전을 둔 형태, 그렇게 이루어진 단일 중심의 계급적 봉건도시가 그네들이 건설하기를 열망한 유토피아였다. 물론 이들 모두는 평면으로 된 기하학적 도형이라 이를 실현하는 일은 지형이 복잡한 산지에서는 불가능하다.

그래서 르네상스 시대에 지어진 계획도시는 군사 방어를 목적으로 하는 도시 외에는 모두 평지에 세워졌다. 이런 기하 도형은 인간의 이성에서 먼저 창안되는 형상이어서 르네상스인들은 땅을 보기 전에 먼저 도시의 형상에 대한 구상을 마쳤으며 이를 실현하기 위한 땅은 백지 같은 지형이어야 했다.

현대에 들어와서도 평지도시의 건설은 변하지 않는 전통이었다. 20세기의 시대정신으로 나타난 모더니즘의 건축가들은 도시를 노동과 교통, 주거와 휴식이라는 큰 분류로 나누고, 전체 땅을 주거지역, 상업지역, 공업지역 등의 용도로 평면 분할하는 마스터플랜이라는 도시계획도를 그렸다. 산업과 경제가 정치와 종교를 대체하는 권력으로 떠오른 이 계획은 20세기 모든 신도시들의 교본이 됐다. 기능과 효율이 최고의 가치였으니 빠른 동선, 빈틈 없는 공간 활용이 계획 기준이었고 평지를 신도시의 대상지로 선택하는 일은 당연한 우선 순위였다. 도시 인구의 폭발적 증가와 함께 수없이 많은 신도시들이 이렇게 만들어졌다.

이 도시들이 만들어진 후 환경 파괴, 도시 오염, 빈부격차, 도시 범죄 등이 폭증하자 많은 도시사회학자들이 앞다퉈 이 계급적이고 계량적 신도시들을 비판했다. 미국 세인트루이스시에 미래세계의 완벽한 주거환경이라는 찬사를 받으며 건립되었던 프루이트 아이고라는 주거단지가 지어진 지 17년 만인 1972년, 도시 범죄의 온상이라는 오명을 쓰고 다이너마이트로 전체가 폭파되고서야 마스터플랜으로 신도시 만드는 일은 서양에서 폐기되었고 모더니즘도 종말을 고하고 말았다.

그럼에도 땅과 무관한 도시 만들기의 꿈을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20세기 말까지 서양인들이 제시한 미래도시는 때로는 하늘을 배경으로 나타나며, 가끔은 황폐한 땅 위에 거대구조의 인공환경으로 만든 도시에서 살기를 제안한다. 아키그램이라는 집단이 제안한 도시를 보면 인간의 삶은 거대한 기계나 공장처럼 땅의 조건과는 관련 없는 완벽한 인공구조물 속에 이루어져 있다.

물론 이런 유의 도시들은 도면으로만 남고 실현되지 않았지만 부분적으로 실현된 곳이 있으니, 내 생각으로는 두바이다. 두바이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 대통령과 지방자치단체장들이 앞다퉈 벤치마킹했던 도시다. 야자수 모양의 인공섬을 만들고 구름 문양의 환상적 도시구조를 가진 두바이의 땅은 본래 사막이었다. 바람 불면 어떤 흔적도 남기지 않는 이 불모의 땅에서는 어떤 그림을 그린들 아무 상관이 없다. 언젠가 도시의 수명을 마치면 다시 그런 사막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이런 곳은 우리가 본받을 수 있는 땅이 아니다.



대동여지도(규장각 소장지도)_경향DB



김정호가 그린 대동여지도를 보시라. 그 지도 속 우리의 땅은 산과 계곡이 분명하며 물길과 양지바른 터들이 아름다운 무늬처럼 새겨져 있는 곳이다. 이 터에 새겨진 무늬가 바로 터무니이니 이 단어는 우리의 존재와 이유가 모두 터에 있다고 믿은 우리 선조들의 관념어였다.

그러나 지난 시대 우리는 서양화가 근대화인 줄 착각하며 서양식 도시를 흉내 내고자 서양에서 폐기된 마스터플랜을 가져와 우리 땅에 앉혔다. 국토의 70%가 산지인 우리 땅에 평지는 귀한 경작지이므로 산으로 갈 수밖에 없는 신도시를 위한 마스터플랜을 실현하기 위해서 산이 있으면 깎고 계곡은 메워야 하며 물길은 돌려야 했다. 엄청난 토목공사를 일으키며 신기루 같은 신도시가 이곳 저곳에 나타났다. 모두가 터에 새겨진 무늬를 깡그리 지운 결과여서 이른바 터무니없는 도시였다. 특히 아파트가 그러했다. 지형을 바꾸면서 지은 집들이니 터무니없는 집이며 아파트에 사시는 분들은 그래서 터무니없는 삶을 살 수밖에 없다는 게 말장난일 뿐일까?

모든 땅은 고유하다. 적어도 위도와 경도가 다르다. 땅마다 자연이 새긴 무늬가 다르고 그 위에 우리 삶이 영위되면서 새긴 무늬도 달라 모든 땅은 다 다른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어쩌면 땅은 그 스스로 어떤 건축이 되고 싶어 하고 어떤 도시가 되어야 하는지 이야기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내가 믿기로는 모름지기 좋은 건축가, 좋은 도시계획가는 땅이 하는 이야기를 들을 수 있는 이며, 좋은 건축이란 그 터가 가진 무늬에 새로운 무늬를 덧대어 지난 시절의 무늬와 함께 그 결이 더욱 깊어 가는 건축일 게다. 그게 터무니 있는 건축이며 그러함으로써 터무니 있는 삶이 생겨난다.

요즘, 우리 사회에서 왜 이토록 터무니없는 일이 도처에서 벌어질까? 사회가 도시를 만들지만 그 도시가 또한 사회를 만든다는 명제에 동의한다면, 우리의 잘못은 지난 시대 잘못 만든 터무니없는 도시 때문 아닐까?



승효상 | 건축가·이로재 대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Kh-art

히틀러의 동역자였던 건축가 알베르트 슈페어, 오래전 이 칼럼에서 언급한 적이 있었지만 요즘 역사교과서 문제와 다시 오버랩되었다. 건축을 통해 히틀러를 신격화하는 일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그는 종전 후 열린 뉘른베르크 전범재판에서, 그의 지위에 비하면 비교적 낮은 형량인 20년을 선고받는다. 재판과정 중에 스스로 죄를 뉘우쳤으며 히틀러와 나치의 잔학성을 밝히는 데 기여한 점을 감안한 것이다.

본래 그는 대단히 유능한 건축가의 자질을 가졌었다. 그의 스승인 테세노프는 20세기 초 독일 현대건축의 선봉에 있던 건축가이자 학자였으며 슈페어는 그의 후계자였다. 그러나 히틀러의 연설에 감동받아 스스로 나치당원이 된 그는 나치의 뇌라고 불렸던 괴벨스의 눈에 띄어 잘못된 길에 들어서고 만다. 그렇지 않았으면,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망명하여 건축가로서 만개한 미스 반 데어 로에나 발터 그로피우스 같은 20세기 거장처럼 인류의 진보와 행복에 대단한 족적을 남겼을 수도 있었다.

그가 한 일은, 로마제국을 잇겠다는 히틀러의 환영을 좇아 고대로마의 건축형식을 재현하는 것이었다. 이미 시대는 20세기 기술문명으로 진입한 지 오래며, 인간의 이성과 합리에 바탕을 둔 모더니즘이 시대정신으로서 활활 타오르고 있던 시점이었다. 특히 슈페어가 괴벨스를 처음 만나던 1932년, 미국 뉴욕의 현대미술관에서는 ‘국제주의 양식’이라는 새로운 단어를 타이틀로 내걸고 새로운 시대 새로운 건축의 형식이 도래했음을 선언하며 미스와 그로피우스를 포함한 건축가들의 전시회를 개최하고 있었지만, 그들은 그들의 도착적 이념을 달성하기 위해 흘러간 옛 시대의 건축양식에 파묻히고 만다.



아돌프 히틀러가 기획한 세계 수도 게르마니아의 모형._경향DB



베를린을 ‘제3제국’의 수도로 개조하려던 ‘게르마니아’라는 이름의 도시계획은 그 모든 시대착오의 집합이었다. 고대로마의 신전과 궁전들을 모방한 외관과 엄청난 크기의 돔 지붕, 이를 지지하는 거대한 열주들…. 시대는 철과 유리의 투명한 건축과 하늘로 치솟는 마천루로 테크놀로지 미학의 경쟁에 열광하고 있는데 그들은 전시대적 미망에 몰두하며 퇴행한 것이었다. 물론, 시대가치와 동떨어진 그들의 ‘제3제국’ 건축은 그들의 멸망과 더불어 역사에서 사라지고 만다.

우리나라에도 그와 유사한 시대가 있었다. 예를 들어, 1966년에 정부에서 중앙박물관을 현상 공모하며 내건 지침은 이러했다. “건물 자체가 어떤 문화재의 외형을 모방함으로써 콤포지션 및 질감이 그대로 나타나게 할 것” 그리고 “여러 동이 조화된 문화재 건축을 모방해도 좋음”. 건축계를 비롯한 문화계에서 이 어처구니없는 조건에 대해 대대적인 성토가 있었고 거의 모든 건축단체와 건축가가 공모에 불참하겠다는 성명과 의견을 나타내었지만 정부는 요지부동이었다.

결국 강행된 공모에 한 나라의 중앙박물관 건축인데도 겨우 10개 작품이 응모하는 초라한 결과를 낳았으며 그나마 일곱은 자격 미달이어서 3개의 안을 놓고 상을 나누게 된다. 당선작은 기괴했다. 법주사의 팔상전과 화엄사의 각황전, 금산사 미륵전에 불국사 기단 등을 파편적으로 이리저리 조합한 치졸의 극치였다. 모두가 비난했지만 정부는 강행하여 완성하고 만다.

장소성과 시대성에 적합해야 하며 건축의 기능에 합목적적이어야 한다는 건축의 근본을 철저히 욕되게 하였지만 그럼에도 이 건축은 50년이 넘는 세월을 버티며 여전히 한국건축의 수치로 남아 있다.


그러나 이 건축은 시작일 뿐이었다. 1970년대에 들어서 유신독재 체제를 갖춘 군사정부가 내세운 ‘한국적 민주주의’라는 특별한 구호, 다른 나라에는 없는 민주주의라는 말이니 보편적 가치와는 애초에 동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존경받던 학자들이 훼절하여 궤변들을 늘어놓고 예술에서 문화에서 ‘한국적’을 위한 표현들이 강제되었다. 그 가운데서도 건축은 이 광풍을 표현하기 위한 중요한 도구로 간주되었을 게다. 정부나 관공서에서 발주하는 모든 공공건축물의 설계지침에 ‘한국성의 표현’이 첫 번째 조건으로 들어갔다.

한국성, 이 문제는 대단히 중요한 과제여서 시대를 거듭하며 수없이 많은 연구와 논쟁이 있어왔고 숱한 논문들이 발표된 바 있다. 지금도 논쟁 중이며 어쩌면 우리 후대에서도 늘 논쟁되어야 할 중요한 문화적 이슈이다. 그러나 다급한 1970년대 정부 관계자들에게 이런 논쟁이 쓸모 있을 리 없었다. 그래서 나타난 게, 목조 흉내를 낸 콘크리트 건물에 ‘계란색’을 칠하고 그 위에 개량 기와를 얹은 밑도 끝도 없는 건물이었다. 사생아였지만 유신독재 정부의 사랑을 대단히 받아 공공청사를 비롯한 거의 모든 공공건축들이 이 껍질을 뒤집어쓰며 태어났으니 대표적인 게 광주박물관, 국기원, 어린이회관 등이었다. 나의 스승인 김수근 선생은 이들을 일컬어 ‘박조(朴朝)건축’이라 부르며 냉소하였다. 정권의 홍보와 상징에 동원된 그 건축과 그 건축가의 이름은 결국 수치로 남는다.

나치의 도시 ‘게르마니아’는 그 일부가 지어졌지만 폭격으로 파괴되어 모두 사라지고 만다. 그 비뚤어진 도시의 축과 맞닿은 운터덴린덴 가로변에 베벨광장이라는 곳이 있다. 꽤 넓은데도 그 흔한 동상이나 조각 하나 없이 모두 비워져 있는 이곳의 한쪽에 사방 1m 남짓한 유리가 바닥에 놓여져 있고 그 안으로 백색의 비어 있는 서가가 설치된 것을 볼 수 있다. 이는, 1933년 괴벨스의 충동을 받은 소년나치대원들이 유태계 지식인들의 책 2만권을 이 장소에서 불태운 것을 기념하는 설치물이었다. 지그문트 프로이트, 레마르크, 하인리히 하이네, 카를 마르크스, 아인슈타인의 저서들이 ‘더러운 정신’의 소산으로 지목당하며 화형에 처해졌던 것이다. 형체도 없어 소박하기 짝이 없지만 대단히 큰 울림을 주는 이 기념비 앞에는 하인리히 하이네의 글 하나가 동판 위에 새겨져 바닥에 놓여 있다. “이것은 서주일 뿐이다. 책을 태우는 자들은 결국 인간까지 불태우게 된다.”

지금 쓰는 역사교과서들이 문제가 있다 치자. 그렇다고 이를 죄다 없애고 하나의 지식만 주입하겠다는 정부와 그 학자들, 시대를 거스른 이 발상이 후대에 어떻게 기록될지 너무도 명확한데 그래도 강행한다니 내 과문을 탓할 뿐이다.



승효상 | 건축가·이로재 대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Kh-art

지난달 말 베이징 디자인위크라는 행사의 개막식에 기조강연을 요청받아 가게 되었다. 6회를 기록하는 행사지만 그 수준을 몇 해 전에 경험한 적이 있어 올해의 행사도 만만히 보고 있었던 게 사실이다. 그래서 기조강연인데도 다른 일을 핑계로 처음부터 참석하지 않고 내 순서가 닥쳐서야 강연장에 입장하는 오만을 부렸다. 게다가 중국 땅에서 건축설계 작업도 15년째 하고 있으니 중국의 건축과 도시에 대해서는 아주 잘 알고 있는 것처럼 행세했다. 솔직히 말하면 낮춰본 게다. 근데 이 모든 게 오산이었으며 이 행사로 끝내 적잖은 충격을 받고 말았다.

예컨대 중국의 건축가 100인을 불러모아 펼쳐놓은 전시회는 모두가 대단한 질적 수준을 지니고 있었다. 소위 건축계의 노벨상이라는 프리츠커상을 받은 왕슈만큼 혹은 그보다 더 단단한 내공의 건축들이 즐비했으니 서양의 현대건축을 흉내 내는 단계는 이미 벗어나 있는 것이었다.

이 행사는 베이징 시내 곳곳으로 확산되어 있는데, 톈안먼광장 앞 전통적 주거풍경이 보존되어 있는 지역에서는 옛 건축들을 빌려 전시장을 만들고 그 속에 도시와 건축에 대한 강렬한 제안들을 쏟아내었다. 더러는 중국의 젊은 건축가들끼리, 더러는 외국의 건축가들과 연대하며 만든 환상적 내용이었다. 여기뿐 아니라 예술특구인 798에서도, 공항 인근의 시설에서, 각급 학교에서, 또 공공기관 곳곳에서 펼쳐진 건축향연의 기획과 내용이 여태껏 내가 아는 중국이 아니었다. 결국 나는 우리의 현대건축보다 훨씬 앞서 있는 현장을 본 것이다.

내가 중국에서 건축작업을 시작한 2000년만 해도 베이징 시내에는 자동차보다는 우마차와 자전거가 훨씬 많아 마치 우리의 1960년대 도시풍경을 보는 듯했다. 게다가 석탄연료가 내뱉는 매연과 열악한 위생시설이 뿌리는 악취 등은 전형적 미개발 도시의 모습이었다. 그러나 이 모습을 바꾸는 데 10년이 채 걸리지 않았다. 베이징올림픽 때 천지개벽한 도시가 나타난 것이다. 나는 그때만 해도 그럴 수 있으려니 여겼다. 정부 주도력이 강한 사회이니 기념비적 거대 건축으로 한 도시의 풍경을 바꾸는 일이 그리 어렵지 않다는 것을 알며, 또한 이런 기념비적 건축의 도시가 가지는 생명력이 그리 오래가지 않는다는 것도 알고 있어 한편으로는 냉소적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내 판단은 또 오류였다. 중국은 우리와 다른 궤도에 있었던 것이다.



(주)SG개발 강남 파라곤_경향DB




우리나라 건축시장은 정부의 엄청난 지원을 받는 건설회사가 이끌어왔다. 서울 도시개발의 기폭제가 된 강남개발은 정치권력과 건설자본이 그 이익을 공유하기 위해 기획된 것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정도로 그 유착은 공고하였다. 공사만 아니라 기획도 하고 분양도 같이하게 된 건설회사는 선분양이라는 특혜적 제도까지 받아 그림만으로도 아파트를 분양하며 이득을 챙겼다. 한번 만든 집의 도면은 파일로 저장하여 다음번에 똑같이 써도 아무 탈이 없었으니 건축설계를 연구할 이유가 없었다. 심지어는 아파트단지를 회사 이름으로 썼다. 삼성아파트, 현대아파트, 우성아파트…. 수천명이 모여 사는 마을의 이름이 건설회사인데도 우리는 이를 항의하기는커녕 선망하기까지 했다. 건설회사 전성시대의 거침돌이던 분양가 제한마저 풀리자 넉넉해진 공사비를 확보하게 된 그들은 닭장 같은 건축공간을 해소하기보다는 기존 것과 똑같은 공간에 비싼 재료로 치장하며 래미안, 힐스테이트 등의 요상한 이름으로 바꾸고 더욱 비싼 값으로 선분양하였다. 건축설계? 있으나마나 한 그 절차는 건축허가를 받기 위한 요식행위일 뿐이다. 그래서 요즘, 아예 설계까지 자체적으로 할 수 있게 해달라고 법령개정까지 요구하고 있다.

중국의 행보는 전혀 달랐다. 건설시장은 건설회사가 아니라 민간 디벨로퍼가 주도한다. 이들이 정부로부터 땅을 취득하게 되면 우선 건축가부터 찾을 수밖에 없다. 성공적인 분양을 위해서는 이름 있는 건축가나 아주 좋은 설계가 필요한 것이다. 설계가 끝나면 당연히 건축가와 설계를 홍보해야 한다. 건설과정에서도 우리처럼 종합건설회사가 일반적으로 있는 게 아니어서 분야별로 발주를 하는 까닭에 각 부문을 지휘하고 조정할 수 있는 건축가의 도움이 절실하다. 건축가의 권위가 보장되니 설계 또한 발전하지 않을 수 없다.

중국에 근래 지어진 아파트 단지들을 가 보시라. 이미 우리의 판에 박은 듯한 아파트와 비교되지 않는 양질의 주거풍경을 구축해 놓고 있다. 상업적 이득의 차원을 넘어 새로운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특별한 주거단지들도 속속 등장한다. 하나만 예를 들면, 항저우 북서쪽 량져(良渚)라는 곳 250만평의 땅에 최근 지어진 ‘량져문화촌’은 거의 완전한 공유사회이다. 전체 주민이 함께 식사를 하는 촌민식당, 주민 스스로가 재배하고 만든 농산물과 생활품을 나누는 장터, 공유하는 교통수단 등 현대사회에서 꿈꾸는 공유의 삶을 이미 실천하고 있었다. 여기에 문화와 여가시설, 다양한 주거형태까지…. 중국의 건축과 사회를 얕잡아본 게 너무도 부끄러웠다.

우리 건축법에 규정된 건축의 정의는 ‘건축이란 건축물을 신축 증축 개축 재축하거나 건축물을 이전하는 것을 말한다’이다. 이렇게 허무한 표현이라니…. 그러나, 건축을 건설과 분리시켜, 국토교통부 같은 곳이 아니라 문화부 산하 문화유산부로 소속하게 한 프랑스는 1977년에 제정한 건축법에 건축을 이렇게 정의한다. ‘건축은 문화의 표현이다. 건축적 창조성, 건물의 품격, 주변환경과의 조화, 자연적 도시적 경관 및 건축유산의 존중은 공공적 관심사이다.’ 프랑스에 건축은 문화지만 우리에게는 부동산이라고 법에도 규정했으니 우리네 건축이 어느 나라엔들 앞서겠는가? 나는 자괴감을 가득 안고 베이징에서 돌아올 뿐이었다.

그럼에도, 오늘 서울에서 건축문화제가 개막된다. 이 땅 곳곳에서 건축가들이 악전고투 끝에 이룬 건축들을 문화의 이름으로 펼쳐 시민들을 초청하는 이 행사를 외면하지 마시라. 열악한 관행과 제도 속에서도 건축은 우리를 지속하게 하는 유일무이한 문화형태라는 말을 믿고 부조리와 유혹을 뿌리치며 허연 밤을 새우곤 하는 우리의 건축가들이 피땀 흘려 이룩한 성과이니, 여기서라도 건축이 부동산이 아니라 문화라는 희망을 얻어야 한다.



승효상 | 건축가·이로재 대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Kh-art

18세기 중엽, 프러시아 출신으로 러시아의 절대군주가 된 예카테리나 2세는 남편인 표도르 3세를 축출하면서 제위에 오를 만큼 권력지향적 인물이었다. 그녀의 러시아는 폴란드 분할과 크림반도의 합병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내부로는 행정개혁과 문예부흥을 성공적으로 이뤄 절정의 시대를 구가한다. 이방의 여인임에도 러시아의 전통과 풍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러시아 국민들의 사랑을 얻은 그녀는 예카테리나 대제로도 불렸으니 성공한 통치자였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당나라의 측천무후와도 곧잘 비교되는데, 특히 남성편력에서 둘은 막상막하였다. 그녀의 많은 정부 중에 크림반도 총독으로 임명된 그레고리 포촘킨이라는 인물이 있다. 1787년 여제가 크림반도를 시찰하겠다고 하자, 조잡하고 낙후된 마을 풍경이 마음에 걸렸던 포촘킨은 잘 정돈된 시가지 풍경을 그린 대형 가리개를 강변에 급히 줄지어 세운다. 그리고 주민들을 그 앞에 정렬시켜 여제가 배를 타고 지나갈 때 환호하게 하여 흡족하게 된 그녀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하였다.

이 총독의 이름에 건물의 정면을 뜻하는 ‘파사드’를 붙인 ‘포촘킨파사드’라는 단어는 그런 전시적 도시 풍경을 설명할 때 쓰는 건축용어로 남는다. 에이젠슈타인 감독이 만든 영화 <전함 포촘킨>을 기억하시는지. 다른 풍경을 빌려 합성시키는 몽타주 기법을 최초로 사용했다는 이 영화의 이름이 내겐 그래서 더 의미 있다.

전시용으로 급조한 거리 풍경, 이 ‘포촘킨파사드’의 경험을 사실 우리는 무지하게 많이 가지고 있다. 예컨대 1970년대에 남북회담이 성사되어 북측 인사들이 서울로 오게 되자, 이들이 지나가는 거리 뒤편의 거친 도시 풍경을 가리기 위해 합판을 세우고 페인트로 그림과 구호들을 집어넣었다. 그들이 물러가면 어김없이 가림판들은 쓰레기가 된다. 외국 정상들이 방문할 때도 가로변은 또 새 가리개와 현수막으로 뒤덮였고 우리들은 줄로 격리된 가리개 앞에서 국기를 흔들고 있었으니, 포촘킨의 도시와 다를 바가 전혀 없었다.

우리가 못살던 시절, 국빈급 손님들이 오면 대개 워커힐로 숙소를 잡게 했다. 1962년에 지은 워커힐은,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들이 휴가 때면 일본에 가서 쓰는 유흥비를 아깝게 여긴 군사정부가 워커나 맥아더 등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국 장성의 이름까지 붙이면서 미군들을 붙들기 위해 급히 지은 위락시설이었다. 현실의 낙후된 시가지 풍경과 완전히 격리되었으니 고위인사들의 일탈과 방종이 보장된 환상의 세계였다. 외국에서 오는 손님들이 김포공항에 내려 이곳을 가려면 시가지를 통과할 수밖에 없는데 이 접근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삼일(청계)고가도로를 만들기까지 한다. 근데, 고가도로가 지나는 청계천변의 가난한 풍경이 문제가 되자 고가 주변의 땅에 선형의 고층 아파트를 지어 그 바깥의 풍경을 가리게 했다. 이게 현재의 삼일아파트이며 실체화된 포촘킨의 도시였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포촘킨파사드가 우리가 사는 현대 도시의 전형적 모습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강남의 대로들을 가보시라. 대로변에 즐비한 고층 건물의 화려한 파사드, 그 위에 명멸하는 네온사인과 불빛들…. 욕망의 풍경이 만드는 환상으로 우리는 그 꺼풀 뒤의 실제 풍경을 쉽게 잊고 만다. 그러나 그 뒷길에만 들어가면 그 앞의 소란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질박한 풍경이 전개된다. 집장사들이 만든 주택들과 거친 입면의 소형 건물들, 그 사이의 좁은 길…. 사실은 이런 속살의 풍경이 이 도시의 진실인데도 이 질박함이 싫다 하여, 주요 가로변은 죄다 근린상업지구로 지정하여 고층의 상업빌딩으로 가렸다. 우리가 살고 걷는 거의 모든 대로들이 그러하니 우리는 어쩌면 완벽한 포촘킨 도시에서 살고 있는 게다. 겉살과 속살이 다른 도시, 우리는 그래서 늘 떠도는 삶을 사는가?



지난주, 세종대로변 서울시의회 건물과 덕수궁 사이에 새로운 풍경이 나타났다. 남대문세무서 별관으로 쓰이던 건물 하나를 허문 결과이다. 이 땅은 원래 덕수궁의 일부로서 영친왕의 생모인 귀비 엄씨의 사당 ‘덕안당’이 있었던 곳이다. 일제는 1937년 이 자리에 덕수궁의 전각들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4층 높이의 조선체신사업회관을 짓는다. 그 11년 전인 1926년, 바로 그 뒤편에는 성공회성당이 지어진 바 있었다. 영국성공회가 서울의 한복판에 짓는 건축인 만큼 주변의 도시 풍경을 고려하여 기품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세웠지만, 일제는 이 아름다운 건축마저 가리고 만다. 사실 이 성당은 예산 문제로 인한 미완성의 건축이었다. 1996년 이 성당의 증축이 논의되었을 때 마침 이 성당의 전체 설계도가 영국에서 발견되었다. 건축가 김원 선생은 이미 증축설계를 의뢰받은 바 있었지만, 주저 없이 원설계대로 지을 것을 제안하여 전체를 완성하게 한다. 로마네스크적 힘과 절제의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나타난 이 건축은 가로변의 건물들에 가려져 안타깝게도 일반에게는 미지의 풍경이었다.



건축가 김원 광장 대표_경향DB



조선체신사업회관은 1930년대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모더니즘에 입각한 건축으로 내부 공간이나 외관의 구성이 준수하였다. 그러나 해방 후, 내부 개조와 증축을 거치면서 원형이 막대하게 훼손되었으며, 1980년에는 전면도로인 태평로의 확장으로 급기야 정면부가 뜯겨나고 막된 입면을 가진 가로변 건물로 남았다. 그러다 최근 국세청의 통합 이전으로 이 건물이 비게 되면서 서울시는 논의 끝에 허물기로 결단을 내린다. 그러자, 흔하지 않은 풍경이 펼쳐진 것이다.

로마네스크라는 서양식 건물이지만 오랫동안 이 땅에서 비바람 맞은 탓에 주변과 대단히 조화된 모습으로 성당이 나타났다. 지나는 이들이 발걸음을 멈췄다. 언제 이런 아름다운 풍경이 있었던가? 성소의 풍경이어서 그런지 번잡함에 지친 삶이 위안까지 받는다고 했다. 성당만 보이는 게 아니었다. 덕수궁 돌담길도 보이고 옛길도 나타나고 그 너머의 풍경도 보였다. 서울의 속살이었다.

사실 서울의 속살은 대단히 아름답다. 대로변을 벗어나 골목길로 들어서 보시라. 로마네스크 성당이 없다 해도, 한옥이 많아 보전지구로 지정된 곳이 아니라도, 그저 흔해 빠지고 남루하며 보잘것없는 동네의 길들을 걸으면서도 느껴지는 행복과 평화가 있다.

드디어 우리 도시의 진실이 여기에 있음을 알게 된 외국 관광객들도 요즘은 가로변을 떠나 속으로 스며들고, 골목길에는 예쁜 가게가 하나둘씩 자리하기 시작했다. 도시의 속살이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게 다름이 아니다. 포촘킨파사드의 허망에 지친 우리가 도시에서 보고자 하는 게, 이제는 건축이 아니라 우리의 삶인 까닭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승효상 건축가·이로재 대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Kh-art

오만과 편견의 아베도 이 건은 어쩔 수 없었던 모양이다. 착공을 앞두고 있던 2020년 도쿄올림픽 주경기장의 설계를 원천적으로 바꾸라는 시민들의 요구에 굴복하고 말았다. 공사비가 당초 계획보다 훨씬 많이 든다는 이유를 받아들였다지만 사실은 더 미묘한 문제가 있었다. 국제현상공모를 통해 당선된 이 경기장은 그 크기나 모양이 주변의 풍경과 어울리지 않았다. 더구나 일본이 자랑하는 건축가 단게 겐조가 설계한 기존의 경기장들을 지배하는 압도적인 모습에, 건축계를 중심으로 건립 반대운동이 일었던 차였다. 점잖은 인품을 지닌 노건축가 마키 후미히코까지 그 선봉에 있었다. 남의 일에 참견하기를 싫어하는 일본의 지식인과 건축가가, 남이 설계한 작품 그것도 공모형식을 통해 당선된 세계적 외국 건축가의 건축을 두고 안된다고 하는 것은 지극히 드문 일이며 어쩌면 금도를 벗어나는 태도였지만, 도쿄의 전통적 풍경을 해칠 것을 확신한 그들에게는 그만큼 절박했던 것이다. 우주선을 닮은 그 경기장의 당선자는 자하 하디드며 이라크 태생의 영국 건축가인 이 여성은 현재 세계에서 가장 각광받는 건축가다.

재작년의 일이다. 베이징에 하디드가 설계하여 지은 갤럭시소호라는 이름의 주상복합 건축에 대해 영국왕립건축협회에서 국제건축상을 수여하려 하자 ‘베이징 문화유산보호회’에서 항의서한을 보내는 일이 발생했다. “33만평방미터 규모의 이 거대 건축은 베이징의 고유 풍경에 대한 전형적 파괴행위였으며 유산보호법규마저 수없이 위반한 바 있다”라는 힐난으로 그 서한은 시작한다. “이 건축이 베이징의 옛 거리 풍경과 역사적인 도시구조, 전통적 주거단지의 보존에 엄청난 손실을 입혔는데도, 이를 시상하는 행위는 힘 있는 또 다른 이들에게 문화유산의 파괴를 더욱 부추기는 일”이라고 적시하면서 “영국왕립건축협회가 이런 분별없는 개발로 중국인들이 겪어야 하는 고통을 이해해줄 것”을 촉구하고 항의하였다.

그런데 그들이 우려한 베이징의 문화유산 파괴행위는 하디드가 처음이 아니다. 예컨대 톈안먼 광장 인근에 세운 오페라극장은 베이징 전통가옥인 사합원 수백채를 멸실하고 얻은, ‘달걀을 반으로 쪼개어 뒤집어 놓은’ 거대 구조물이었다. 또한 베이징의 현대적 상징이 된 듯한 CCTV 사옥은 상식의 허를 찌르는 거대 건축으로, 엄격한 질서를 가지고 있었던 역사도시에 충격을 준 바 있다. 베이징올림픽을 앞두고 국가 이미지를 갱신하기 위해 수없이 많은 후퉁과 오래된 건축들이 속속 파괴되었고, 그 역사적 기억이 누적된 땅 위에 짓는 건축에 대한 경험이 부족한 시정부와 디벨로퍼들은 외국 건축가들을 대거 초청하여 마음껏 설계하도록 부추겼다.

물론 이런 반달리즘적 현상을 비판하는 지식인층이 등장하기도 했다. 어떤 문화평론가는 “서양 자본주의 광기가 베이징의 하늘을 뒤덮고 있다”는 글을 쓰며 비판했다. 그러나 이미, 베이징은 서양 건축가들이 자국에서 할 수 없었던 건축을 마치 분풀이하듯 쏟아낸 각축장이었으니, 이 2000년 역사도시의 땅은 현대도시의 꿈을 잉태하기 위해 고통스럽게 그들 욕망을 받아내었다. 갤럭시소호는 그런 문화제국주의에 중국의 지성들이 집단으로 분노하여 항의한 첫 번째 사건이 된 것이다.


하디드의 우주선 같은 건축이 급기야 서울에도 등장했다. 동대문 옆, 디디피(DDP)로 불리는 이 건축도 국제현상공모를 통해 탄생했다. 이 땅은 서울의 옛 성곽이 지나간 중요한 지점이며 조선시대 훈련도감이 있던 곳이었다. 또한 낙산과 남산을 이어주는 구릉이 있어 수십년 동안 서울시민들의 격정과 환호를 뿜어내게 한 경기장이 위치했으니 수백년 역사적 기억이 누적된 중요한 장소였다. 그러나 영어를 유일한 공용어로 정한 심사위원회에서 선택한 당선안은 이 모두와 어떤 관계도 가지지 못하는 생경한 모습이었다. 착공을 앞두고 지표조사를 시행하던 중 당연히 옛 성곽의 유구가 나타났고 땅속에 묻혀 있던 이간수문 같은 중요한 역사유적이 드디어 발굴되었다. 그러나, 약간의 설계변경으로(그러나 이로 인한 추가 비용은 막대하였다) 이 역사적 사실을 초현대식 건축 뒤에 숨게 하고 만다. 발굴된 조선시대 주거지는 불청객의 모습으로 뭉뚱그려 초라하게 전시되었으니, 능멸이었다.



동대문디자인플라자를 설계한 건축가 자하 하디드_경향DB



한 일간신문과 건축잡지가 공동으로 건축전문가들을 상대로 조사한 설문에서 (속절없는 기획이었지만) 이 건축은 완공되기 전인데도 서울에 있는 최악의 현대건축 중 하나로 선정되었다. 문제가 하나 더 있었다. 예정했던 공사비를 몇 배 초과한 이 비싼 건축이 용도조차 애초에 불분명하여 그 용처를 찾느라 애먹어야 했다. 그러나, 이 우여곡절의 건축이 완공되고 일반에게 공개되자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유려하게 이어지는 건물의 곡선과 현란한 공간의 형상은 여태껏 경험하지 못한 세계였다. 하루에도 수천명이 찾아들 정도이니 대단한 성공으로 여겨졌다. 그 틈에 이를 기획했던 전임 시장까지 은근히 나서 본인의 업적이 후임 시장의 잘못된 정책으로 오도되었다고 말했다.

물론, 이 우주선 같은 건축이 역사적 사실을 파괴했다고 해서, 장소에 대한 기억을 상실시켰다고 해서, 주변과 생뚱맞다고 해서, 그 많은 노력과 비용이 든 건축을 없앨 수 없다. 오히려 이 건축은 하디드의 다른 건축들과 마찬가지로 그 자체로는 대단히 아름답고 기념비적이다. 이미 시민에게 대단히 사랑받기 시작한 이 건축을 더욱 세심하게 관리하여 이 시대가 만든 위대한 업적의 하나로 만들어야 할 책무도 우리에게 있다. 그렇게 될 것이다. 그렇다 해도, 또 하나의 일이 있다.

19세기 말 에펠탑이 파리에 세워졌을 때, 도시미관을 해친다며 파리의 지식인들이 대거 항의하는 일이 일어났다. 이 반대의 선봉에 있던 모파상은 이 흉물을 보지 않을 수 있는 장소가 이 탑의 식당밖에 없어 그곳에 간다고 할 정도였다. 그러나 지금, 에펠탑 없는 파리를 생각할 수 있는가? 또한 파리의 화려한 풍경을 만드는 대로들도 19세기에 빈번했던 군중 소요사태를 쉽게 진압하기 위해 미로처럼 얽힌 가로망을 불도저로 밀며 만든 결과라고 한다. 서민들의 삶을 짓밟고 만든 샹젤리제나 오페라거리지만 이 거리 없는 파리의 모습을 이제는 상상할 수 없다.

그러니 이 디디피도 서울의 풍경을 그릴 때 빼놓을 수 없는 상징물이 될 것이다. 그렇게 시간은 건축을 만든다. 그러나 그게, 우리의 역사적 기억을 희생시켜 얻은 것임을 아는 나는 너무도 뼈아프다. 다시는 이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이런 글로라도 사라진 기억을 전하는 일이 남은 것이다. 너무 무력한가?


승효상 | 건축가·이로재 대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Kh-art

갑자기 미테랑 대통령이 생각났다. 내가 아는 한, 금세기에서 가장 문화적인 대통령이었다. 우파 정권을 누르고 대통령에 당선된 직후 그는 도시 재생과 관련한 ‘그랑프로제’라는 정책을 바로 추진한다. 그런데 그 과정을 보면 그냥 지시만 하는 게 아니었다. 예컨대 루브르박물관의 신관 설계를 중국계 미국 건축가 이오 밍 페이에게 맡겨 놀라게 하더니, 이 동양인이 바로크 형식의 기존 박물관과 대비되는 유리 피라미드의 설계안을 내놓아 많은 이들이 주저하자 대통령은 그 파격적 디자인을 적극 옹호하고 짓게 했다. 물론 그 결과로 루브르박물관은 현대적 아름다움도 같이 가지게 된다.

이뿐만인가. 가운데를 텅 비운 ‘그랑아르세’를 쇠락해가던 라데팡스 지역 끝에 지어 파리의 도시 중심축을 한껏 넓히게도 했고, 파리 외곽의 소시장을 특별한 공원으로 바꾸며 해체주의라는 새로운 건축 개념도 실현케 했다.

또 프랑스혁명의 역사적 장소였던 바스티유 감옥을 정명훈이 활약한 오페라극장으로 바꾸어 세계적 명성을 얻게 했다. 한때 문학도여서 그랬을까, 지적 감수성이 풍부한 그를 통한 프랑스 건축과 문화는 눈부시도록 빛났다.

1989년, 그랑프로제의 하나인 프랑스 국립도서관의 현상공모에서 심사위원단이 두 개의 안을 뽑아 그 최종 결정을 대통령에게 미루는 유례없는 일이 발생했다. 퐁피두센터를 설계한 렌조 피아노도 포함된 심사단이었지만 대통령의 식견을 더욱 신뢰하고 경외해 위임한 것이다. 과연, 그는 특별한 형태를 가진 설계안보다는 정제되고 내면적인 안을 택함으로써 자신의 지적 취향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이 도서관의 준공식에서 미테랑은 설계자 도미니크 페로를 옆에 세우고 다음과 같이 말한다.

“그의 디자인은 대칭 속에서 명료하며 선들은 절제되고 그 속의 공간들은 참으로 기능적입니다. 마치 침묵과 평화의 요구인 것처럼 이 건축은 지면 속으로 파고들었으며 네 개의 타워는 이 도시의 심장부인 광장을 만들었습니다. 땅과 하늘 사이에 생겨난 이 도서관의 산책길은 모두에게 열려 있어, 현대도시의 새로운 거처인 이 넓은 공공의 공간에서 우리는 만나고 섞이게 됩니다. 페로의 이 작업은 일개 건축이 아니라 미래를 예시하는 하나의 도시계획입니다. 바로 그는 인류가 갈망하는 지식과 아름다움을 위한 위대한 성취를 이룩한 것입니다.”

어떤 건축평론가가 이보다도 더 명료하고 지적이며 감동적인 말을 할 수 있을 것인가?

대통령으로 인해 위로받고 행복했던 프랑스는 이 도서관을 급기야 미테랑도서관이라고 이름 지으며 그를 영구히 기리기로 한다.


前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_경향DB


그가 대통령직을 마친 후, 예전에 저지른 불륜으로 인한 혼외자식 문제가 드러났을 때, 그 사건은 불륜이 아니라 아름다운 사랑의 이야기로 회자되었을 정도로 프랑스는 그를 보호하고 사랑했다. 그가 1996년 병환으로 세상을 떠나자 온 세계가 연민의 정을 쏟았으며 정적인 시라크마저 눈물로 그를 추모했다.

1997년 미테랑의 문화적 업적을 이은 프랑스 정부는 2000년까지 무려 3년 동안 ‘2000년 포럼’을 운영하며 21세기를 어떻게 맞이할 것인지 논의한다고 했다. 아마도 내 기억이 틀리지 않다면, 우리 한국은 2000년을 6개월인가 앞두고 ‘새천년준비위원회’를 만들었다. 오랜 기간 준비한 프랑스는 2000년이 시작되기 전 21세기 맞이 행사계획을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발표한다.

“2000년 1월1일부터 12월31일까지 ‘모든 지식의 대학’이라는 주제로 어떻게 우리가 사는 게 좋은지를 매일 토론한다. 과학기술을 주제로 200여회, 인문과학 100여회 그리고 21세기의 장점에 대해 60여회로 구성되는 이 토론회는 미테랑도서관과 퐁피두센터, 과학의 집에서 개최되며 매일 TV로 생중계되고 기록되어 모든 일정을 마치면 책으로 발간되어 보존될 것이다.”

나는 이 계획을 듣는 순간 망치로 머리를 맞은 듯 멍해졌다.

그 당시 우리나라는 무엇을 준비하고 있었는지 기억하시는가? 한국의 대표적 지성이며 문화부 장관을 지낸 분이 당시 준비위원장이었다.

그런데, 우리는 21세기 맞이 행사로 비무장지대(DMZ)에서 레이저를 쏘아대며 불꽃놀이쇼를 진행한다고 했다. 모멸이었다. 국가 간 품위와 문화의 격차를 확연히 보여주는 순간이었고, 그 어쩔 수 없는 간극의 크기에 나는 절망했다.

그러나 이를 한동안 잊고 있었다. 하도 한류 붐이 인다고 하고 정보기술(IT) 강국이라고 하며 세계 10위권의 경제대국이 되었으며 심지어 한국의 표준이 세계의 표준이 된다고 하는 터라, 이 나라 국격의 실체를 잊고 있었다. 심지어 나도 밖에 나가 거들먹거리기까지 했으니….

생각해보면 미국 가서 성추행을 저질러 공인의식 부재를 증명한 청와대 대변인의 행태가 신호였다. 온갖 잡음과 물의가 끊이지 않더니 마침내 세월호 앞에 국가의 최고 직무인 국민 안전과 행복이 실종되고 말았다. 그때라도 그 실종의 진실을 철저히 밝힐 수 있었으면 이 나라는 다시 새롭게 될 수도 있었을 게다.

러나 진실을 은폐하기 위한 수상한 조치들이 연이어지면서 국가가 조폭과 다름없다는 말을 다시 상기하고 만다. 급기야는 중동호흡기증후군(메르스)에 이르러 국가가 민간병원을 비호하느라 공공의 이익을 배반해 위험을 증폭시킨 현장을 똑똑히 본 것이다.

노부부가 죽고 직무에 충실하던 의사가 위험에 처했다. 이웃 나라 중국은 환자를 관리 못한 우리 국가의 조치를 비난하고 거리를 채우던 중국인들은 떠났다. 회의에 참석하기로 한 외국 건축가는 약속을 미뤘고 해외의 친지들은 연일 안부를 물어왔다.

헬싱키에 간 동료 건축가는 호텔 숙박을 거절당했다고 알려왔다. 안 그래도 가난해서 죽고 외로워서 죽는 일이 일상이다. 의기소침해지고 자격지심으로 울컥한 우리 국민에게 위로와 격려가 절실한데, 공공의 안전과 행복을 지켜줘야 할 정치권은 그저 그들 조폭적 이익에만 관심이 있고 이도 저도 못마땅한 대통령은 저의, 배신, 심판 같은 언어로 상처 입은 국민들의 가슴을 또 후비고 판다. 이게 나란가?

지금 정부의 관심은 경제살리기라는 것인데, 어느 경제학자는 지금은 불황이 아니라 저성장의 시대라고 했다. 호황은 앞으로는 오지 않는다는 것이니, 그의 말이 맞는다면 이 정부 정책은 빗나간 것이다. 무엇보다, 경제 이야기는 지난 수십년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듣고 따르며 살았지만 우리 삶이 지난 시대보다 행복한가? 우리보다 못사는 나라의 행복지수가 월등히 높은 걸 보면 경제는 행복과 동의어가 아니다.

그렇다면 경제가 아니라 행복을 이야기해야 하지 않을까? 돈 문제는 말할수록 공허하지만 행복은 나눌수록 더욱 커진다고 했다. 1년 365일 내내가 아니더라도, 며칠만이라도 오로지 행복에 대해서만 이야기하면 안될까? 우리는 정말 위로받고 싶다.


승효상 | 건축가·이로재 대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Kh-art

지난주 10년 만에 헬싱키를 찾았다. 이 도시가 야심 차게 추진하는 도시디자인 전략을 알아보는 공식적인 일 외에, 나는 핀란디아 홀 바로 옆에 최근 새로 지은 ‘뮤직센터’라는 콘서트 홀을 보는 일에 관심이 있었다. 1971년에 개관한 핀란디아 홀은 작곡가 시벨리우스를 기념하여 이 나라가 자랑하는 건축가 알바 알토가 지은 걸작이다.

그런데 아무리 잘산다고 해도 인구 60만명에 불과한 도시에 또 새로운 음악당이라니…. 이 의문은 현지의 설명을 듣고 풀렸으나, 그 내용은 충격적이었다.

핀란디아 홀은 핀란드의 토속적 아름다움을 건축의 형태와 공간으로 치환하여 세계적 보편성을 획득했다고 일컫는 현대건축의 보물이다. 근데 이 아름다운 건축이 음향에서 문제가 줄곧 제기되었다. 내부의 천장 형태가 건축가 고유의 디자인 패턴 때문에 흡음 위주로 되어 적정 잔향시간을 확보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천장 디자인을 다소 바꿔서 보강할 수도 있을 게다. 그러나 그들은 그런 변경이 알바 알토의 허락을 받을 수 없는 지금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결론지었으며, 이 건축의 원형을 지키는 일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는 것에 일치를 본다. 대신, 완벽한 음향을 가질 수 있는 새로운 음악당을 바로 옆에 짓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알토의 홀은 음향 조건에 문제없는 전자음악 등 가벼운 음악을 위한 공연장으로 쓰기로 결정하였다. 우리라면? 천장이 아니라 건물도 고치고 말았을 게다.

건너편 나라 스웨덴의 스톡홀름에는 스웨덴이 자랑하는 건축가 군라드 아스플룬드(그는 1940년 55세에 운명했다.)가 설계한 시립도서관이 있다. 책으로 둘러싸인 원형의 홀 가운데 서게 되면 마치 지혜 속에 파묻힌 듯, 책의 공간을 조우하는 감격에 싸이게 된다. 인간과 책을 만나게 하는 곳이 도서관의 본질이라는 그의 주장이 정확히 건축화된 것이다. 1928년 개관 때 20만권의 책을 소장하도록 하였으나 세월이 지나면서 증축해야 할 필요가 꾸준히 대두되었고 마침내 이를 위한 국제설계공모 절차까지 최근에 거쳤다. 그러나, 그들이 사랑하는 건축가의 작품이 훼손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던 시민들의 간청으로 이 증축 계획은 결국 취소되고 만다.

이번에 연이어 알게 된 이 두 가지 사실이 나에겐 자괴가 되어 여행 내내 내 몸을 감싸고 죄었다. 우리의 초라한 문화풍경이 그 사실에 오버랩된 것이다.

우리에게도 자랑스러운 건축가들이 있었다. 김중업과 김수근. 암울한 시대 불모의 땅에서 세계와 겨루며 한국의 건축을 알렸던 거장이었고 시대의 선각자였다. 특히 나의 스승 김수근 선생은 건축에서만이 아니라 전쟁과 빈곤으로 빈사 상태에 있던 한국문화를 다시 일으키기 위해 고군분투하였다. 척박한 문화환경 속에서 문화예술지를 표방한 잡지 ‘공간’을 창간하여 수많은 문화적 성취와 담론을 만들었으며, 최순우 백남준 같은 시대를 풍미하던 문사들을 모아 한국의 시대와 문화를 논했다. 조그만 공간사옥 내에 소극장을 만들어 김덕수 사물놀이패를 최초로 소개했고, ‘병신춤’을 추던 지방의 예인 공옥진을 중앙무대에 서게 하는 등 사라져가던 한국의 전통문화를 적극적으로 발굴하며 지평을 넓혀나갔다. 1975년 10월 공간지 100호 발행을 자축하기 위해 사재로 명동극장의 무대에 홍신자 황병기를 올려 ‘미궁(迷宮)’을 공연했을 때, 모두들 한국 현대문화의 발아라고 말했다. 그런 그를 1977년 미국의 ‘타임’은 ‘한국의 로렌초’라고 부르며 한국문화의 중흥을 이끄는 강력한 후원자로 전 세계에 알린 바 있다.

그러나 1986년 6월14일 그는, 지금의 나보다 훨씬 젊은 55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고 만다. 세계적 걸작을 남긴 건축가들이 기록하는 생애가 보통 90세 이상인 것을 상기하면 요절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그가 건축가로서 활동한 25년 동안 이룬 업적은 마치 100세를 산 듯 엄청난 것이었다.

그의 공간사옥은 어떤 조사를 해도 최고의 한국 현대건축 리스트에서 선두의 위치를 놓친 적이 없어 나를 부끄럽게 한다. 그가 불과 35세에 설계한 KIST 본관은 1966년 당시 해외 선진도시에 지어졌던 어떤 건축보다도 선진적이며, 비슷한 시기에 미완의 설계로 지어진 세운상가는 그 당시 세계 유수의 건축가들이 실현을 열망했지만 거의 유일하게 서울에서만 완성된 메가스트럭처(Mega Structure)였다. 지금도 이를 목격하는 외국 건축가들은 열광하며 이 건축들이 해외에 왜 알려지지 않았는지 의아해한다. 마산성당과 경동교회, 청주박물관 그리고 주옥같은 주택들, 어느 하나 빠질 것 없이 한국의 현대건축에 남긴 보석이었고 모더니즘의 족적이 희미한 우리가 반드시 보존해야 할 현대의 유적이 되었다.

믿기로는, 한국문화의 토양 형성에 대한 김수근의 공헌은 이보다 훨씬 더 크고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그를 너무 쉽게 잊었다. 자유센터와 타워호텔은 분탕질과 서툰 변형으로 건축의 진정성을 잃게 했고 우석대학병원은 아예 없애버렸다. 별빛 내리던 경동교회의 옥상은 덮었으며, 청주박물관은 몰지각한 증축으로 공간을 변질시켰다. 그리고는 그의 분신이며 한국현대문화 발아의 현장이던 공간사옥은 상업화랑에 팔아넘기고 만다.

공개매각이 유찰된 종로구 원서동 '공간' 사옥 모습. 한편 문화재청은 대지면적 1천18㎡, 건물면적 1천577㎡의 공간사옥 중 고 김수근 선생이 1971년 설계한 옛사옥(224.56㎡)에 대한 문화재 등록을 검토 중이다. _ 연합뉴스


김수근이 병환으로 세상을 뜨며 남긴 30억원의 빚, 우리 고유의 가치를 찾자며 외치던 ‘한국학파’의 완성을 위해 그 암울한 시대와 거친 땅을 온몸으로 껴안으며 사랑하고 사랑한 대가였다. 그러나, 그에게 측량할 수 없이 많은 문화의 빚을 진 한국사회는 그를 위해 어떤 무엇도 하지 않았다. 후배들이 푼돈을 모아 만든 가난한 문화재단 하나가 겨우 김수근 건축상의 행사로 그를 기억시키려 안간힘을 쓰고 있을 뿐이다.

그런데 지난달, 강남의 라마다 르네상스호텔을 헐고 그 자리에 더욱 큰 호텔과 상업시설이 들어서기로 했다는 기사를 보게 되었다. 신문에 보도된 새로 들어설 건물은 30년 동안 그 자리를 지키던 건축을 깡그리 지우는 깡패 같은 모습이었다. 말이 거친가?

그 르네상스호텔은 바로 김수근이 병상에서 그렸던 그의 마지막 유작이었다. 우리가 그렇게 반문화적이며 이 시대가 이렇게까지 몰염치한가?


승효상 | 건축가·이로재 대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Kh-art
TAG 김수근

요즘 세계에서 가장 ‘핫’한 도시가 서울? 적어도 내 주변 건축가들 사이에서는 그렇다. 근래 들어 하루가 멀다 하고 내가 아는 외국의 건축가들이 서울을 찾는다. 특별한 목적이 아니면 오기 힘든 동북아 끝에 위치해 있건만 도쿄나 베이징, 홍콩 온 길에 일부러 들렀다고 하니 예삿일이 아니다. 또한 밖에 나가 그곳 건축가들과 만나 나누는 대화의 주제가 서울에 관한 게 대단히 많아졌다. 전시회나 심포지엄을 해외에서 개최해 보면 전례 없이 많은 현지인들이 모여 서울을 논한다. 전과 확연히 다르다. 한류의 영향? 없는 것은 아니겠지만 현실에 냉소적이기 쉬운 건축가들이 그런 것으로 영향받지 않는다. 서울의 재발견이라고 해야 옳다. 사실 서울은 그동안 너무도 저평가되어왔다.

건축가들이지만 도시에서 정작 그들이 좋아하는 것은 건축이 아니라 그곳의 생생한 삶이다. 그들은 현대의 첨단건축이 즐비한 강남을 피해 강북의 골목길 풍경에 탐닉한다. 통행 기능만 있는 직선이 아니라 지형과 경사를 따라 불규칙하게 조직된 서울의 골목길에서 그들은 건축의 지혜와 영감을 얻는 것이다. 많은 길들이 지난날 재개발의 광풍으로 사라지고 말았지만 그래도 서울에는 여전히 많은 골목길들이 있다. 대략 2, 3미터 폭, 우리 신체 크기에 딱 적합한 이 길들은 미로의 도시라는 페즈의 답답한 길보다 훨씬 편안하고 밝다. 공간 변화가 무쌍한 서울의 골목길을 걷는 것은 한편의 드라마를 보는 것과 같다고 했다. 좁다가 넓다가 곧게 가다가 휘어지는 이 드라마틱한 공간에는 요즘 상권도 살아나서 예쁜 가게와 깜찍한 카페, 작은 갤러리들도 들어서는 바람에 이야기가 더욱 풍성해졌다. 1000만의 인구가 사는 대도시에 이런 디테일이 있다니… 대단히 특별하다는 것이다.

"북촌 개방의 날" 행사 때 서울 북촌 한옥마을을 찾은 관광객들이 한옥 골목길을 걷고 있다. (출처 : 경향DB)


역사적 정취가 있는 도시는 건축가에게 중요한 학습현장이어서 늘 경외의 대상이 된다. 물론 서울보다 훨씬 오래된 역사를 가진 서양도시들이 즐비하며 그 흔적이란 게 간혹 지겨우리만큼 전역에 퍼져 있는 곳도 있다. 그에 비해 서울은 흘깃 보면 저급하고 부조화한 현대적 건물들로 급조된 도시 같다. 그러나 도시 한복판에 종묘 같은 엄청난 문화유산이 자리 잡고 있는 것에 망연자실한다. 게다가 종묘가 얼마나 근사한 건축인가. 동양의 파르테논이라며 건축가들의 방문 목록 첫 번째 줄에 있는 곳이다. 재작년에 빌바오미술관을 설계한 프랑크 게리가 서울을 방문하며 슬쩍 청을 넣은 게, 가능하면 종묘를 아무도 없을 때 혼자 방문하게 해 달라는 것이었다고 하니, 저열하고 소란스러운 도시풍경이라며 서울을 폄하하던 이들에게 종묘가 가진 침묵의 아름다움은 충격이다. 종묘와 이어진 창덕궁을 찾게 하여 오래된 건축과 후원의 조경을 보게 하면, 이 번잡한 대도시 한가운데 존재하는 이토록 특별한 아름다운 풍광, 그들에게는 너무도 비현실적 사건이다. 이게 다가 아니다. 한양도성은 어떤가? 18킬로미터가 넘는 이 성곽은 세계에 유례 없는 역사유적이다. 평지와 산의 등성을 연결하며 도시를 둘러싸고 이루는 서울성곽 같은 압권적 풍경을 유럽에서는 결단코 보지 못한다.

삶을 즐기는 방법을 잘 알고 있는 건축가들에게 서울의 문화는 대단히 자극적이다. 홍대 앞에 즐비한 재즈카페들은 내로라하는 세계의 뮤지션들과 유명한 셀리브리티들이 소문 없이 찾아와 얼굴을 내미는 곳이며, 길거리마다 세계에서 가장 쿨한 차림의 젊은이들이 모여들어 365일 내내 파티를 즐기는 축제의 장이다. 대학로의 문화와 어우러진 젊은 풍경, 청담동의 최첨단 패션모드와 혹은 저커버그도 통째로 빌려서 밤새워 놀고 간다는 클럽들… 하다못해 골목길에도 있는 노래방, 그 안에서 목청 돋우며 마이크 잡는 풍경… 세계 어디를 여행해도 이런 다이내미즘은 없다. 그런 첨단의 유행만 있는 게 아니다. 세계인들이 새로운 세계라며 눈뜨는 판소리 같은 우리 고유의 소리나 춤사위를 경험하면 한국인이 가지고 있는 신명과 한을 알게 되어 경외하지 않을 수 없다. 게다가 서울의 음식은 얼마나 맛있는가?

더 큰 게 있다. 서양의 큰 도시에서 온 건축가들을 매료시키는 것은 서울의 산이다. 시내 어느 곳에서도 불과 10, 20분 이내에 산에 도착할 수 있다는 것이 환상적이라고 했다. 그럴 만도 한 게 그들 관념으로 도시는 평지여야 한다. 2000년의 역사를 가진 파리나 런던, 빈, 프랑크푸르트 등 모두가 로마군단의 캠프였던 카스트라라는 조직을 원도심으로 가지며, 평지에 설치할 수밖에 없었던 그 캠프시설이 시대를 거듭하며 확대된 게 오늘날의 모습이다. 중세유럽에 유행처럼 번진 이상도시 건설도 기하적 도형을 실현한 결과여서 바탕은 평지여야 했으며, 20세기에 등장한 마스터플랜의 도시들도 평지를 전제로 한다. 녹지의 공원? 물론 평지가 전제다.

그러니 산은 일부러 시간을 내어 떠난 여행에서 만나는 풍경인 것이다. 1000만 인구가 사는 세계의 메가시티 25개 중에서 산을 도시 내부에 품고 있는 곳은 서울이 거의 유일한데, 그게 서울의 정체성이다. 알다시피 서울이 조선의 수도로 정해진 까닭은 산 때문이다. 네 개의 산(북악산·낙산·남산·인왕산)과 이를 둘러싸는 또 다른 네 산(북한산·용마산·관악산·덕양산), 그 사이를 흘러나가는 물줄기들이 이루는 풍경이 서울의 고유한 지리여서, 산은 말 그대로 랜드마크이며 도시는 그 속에 작은 건축들이 모인 집합체였다. 인공의 랜드마크가 없어지면 정체성도 사라지는 평지 도시의 운명과 다르다. 지난 시절, 우리가 미숙하여 서양 도시를 흉내 내느라 억지 랜드마크를 세워 자연과 역사와 부조화한 풍경을 만들긴 했어도, 산이 존재하는 서울은 그 고유 풍경을 회복할 원점이 있으므로 아직도 희망적이다.

부디 북악산에 올라 서울을 내려다보시라. 잘생긴 산들이 겹쳐진 풍경과 곳곳에 모여 있는 삶터들, 그 사이로 흘러드는 한강이 이루는 서울의 모습은 내가 아는 한 세계 최고다. 특히 봄꽃이 지천으로 흐드러지게 피어 오른 지금, 서울의 성곽과 골목길들을 걸어보시라. 무릉도원이 따로 있는 게 아니다. 어쩌면 요즘의 희한한 나라꼴로 인해 우리 속에 가득 찬 우울과 분노를 맑게 씻을 수도 있을 게다.


승효상 | 건축가·이로재 대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Kh-art

건축에 시간의 때가 묻어 윤기가 날 때, 그때의 건축이 가장 아름답다고 나는 즐겨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남루했어도 거주인의 삶이 덧대어져 인문의 향기가 배어나는 건축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경이롭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건축은 건축가가 아니라 거주인이 시간과 더불어 완성해 가는 것이라고 말해왔다. 물론, 건축이 거주인에 의해 완성된다고 해서 건축가의 책임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건축가는 모름지기 그 건축이 담아야 하는 시간을 재는 지혜를 가져 그 풍경의 변화를 짐작하는 통찰력을 지녀야 한다. 그런 건축가가 만드는 건축이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빛나기 마련이며, 그렇지 못하면 시간을 견디지 못해 소멸되거나 아니면 우리 환경의 일부가 되기 위한 비용이 만만찮게 들게 된다. 그래서 애초에 건강한 건축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건축은 건축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건축주가 있어야 하고 구조나 설비 등 다른 분야 엔지니어들의 협력이 있어야 하며, 시공이라는 대장정을 거쳐야 비로소 우리 삶을 담을 건축이 만들어진다. 이 험난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건축가가 가진 처음의 생각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다면 그는 위대하다. 수도 없이 많은 장애와 불가측의 요소들이 온 과정을 통해 즐비해 있어, 으레 상처투성이의 결과를 보고야 만다. 그 상처투성이의 건축이 그래도 감동을 준다면 애초의 모습은 대단히 숭고한 아름다움을 가졌을 것이다. 사회 구조가 후진적일수록 협업과 프로세스는 모순과 비상식으로 얽혀서 그 결과는 참담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건축이 시대의 거울이라고 하는 오래된 말은 그 사회가 가진 시스템의 산물이 건축이라는 것을 일컫는 말과 같다.

건축의 시작은 의뢰인의 등장에서 비롯한다. 의사나 변호사도 마찬가지인데, 건축가와 더불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 세 가지 직업은 유사점이 많다. 개인의 건강을 지키며 사회의 정의를 지키고 가족의 단란을 보장하는, 많은 사람들의 생명에 대한 일인 만큼 그 직무에 대한 자격이 공인되어야 해서 라이선스가 필요하다는 것도 그 하나다. (건축가 중에서 자격증을 취득한 이를 건축사라고 한다.)

이 직업들은 의뢰인의 종류 때문에 그 성격도 바뀐다. 의사를 찾는 이들은 주로 몸이 불편한 환자들이며 변호사는 마음이 불편한 소송인들이 찾는 데 비해 건축가에게는 꿈을 꾸는 이들이 건축주로서 찾아온다.

그러므로 건축주의 꿈을 실현해주는 일이 건축가라는 직능의 목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다일까?

건축가는 건축주를 위해 일을 하지만 동시에 사회와 시민을 위해서도 일해야 하는 게 바른 직능이다. 왜냐면, 건축주가 자기 재산으로 개인의 집을 짓는다 해도 길가는 행인이나 옆집 사람도 그 집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은 건축은 집주인뿐 아니라 일반시민들의 이익도 지켜줄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건축주는 그 건축의 사용권만 가질 뿐, 소유권은 사회가 갖는 게 맞다. 건축이 목표하는 바는 단순한 부동산의 가치를 뛰어넘는 공공성의 가치라는 것인데 이는 바로 건축이 지녀야 할 윤리를 뜻한다.

서울 명동에 위치한 명동예술극장 (출처 : 경향DB)


그런 선한 건축 하나를 소개하면, 오래전부터 우리들에게 일상의 행복을 전하는 ‘샘터’라는 잡지의 사옥은 서울 대학로 대로변 가장 번화한 곳에 있다. 1970년대 말에 지어진 이 건축의 1층 가운데 부분은 비워져 있어 앞의 큰길과 뒤편 작은 길을 이어준다. 마치 도시의 로비처럼 바로 앞의 지하철역을 빠져나온 이들이 서로 약속하여 만나는 장소이며, 비 오는 날이면 길 가다 비 그치기를 기다리는 행인들로 북적이는 공간이다. 이 지역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곳이니 막아서 카페 같은 공간으로 쓰면 큰 수익을 올리련만 이 건축의 주인은 지난 수십년간 이 공간을 그냥 공공에 내주어 이제는 모두를 위한 공공의 장소가 되었다. 난삽한 상업적 풍경이 득세하는 대학로에서, 오랜 시간의 윤기가 맑게 배인 벽돌벽과 그 위를 덮은 담쟁이는 이 건축의 도시에 대한 헌신을 상징하며 그래서 넘보지 못할 기품이 늘 있다.

이 건축이 40년 가까운 세월을 한 장소에서 변함없이 건축의 윤리적 사명을 지키고 있는 것은 건축가 김수근 선생과 건축주 김재순 전 국회의장이 건축의 공공적 가치에 대해 완벽한 일치를 이룬 결과임을, 두 분을 익히 알고 있는 나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행복한 결합만 있는 게 아니다. 건축주의 이익과 공공의 이익이 상충하는 경우가 있을 때, 그때 건축가는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까? 먼저 공공의 편에서 건축주를 설득해야 하는 게 직능의 의무이지만 그 설득이 유효하지 못하게 되면? 바른 건축가가 되기 위해서는, 아무리 그 일의 금전적 보상이 크다 해도 유혹에서 벗어나 마땅히 그 일에서 떠나야 한다.

오래전에 한 건축주가 제법 규모가 큰 건물의 설계를 내게 맡겼다. 땅은 대로변에 위치하였는데 다른 건물들이 죄다 도로경계에 바짝 붙어있어 나는 도시마당을 만들기 위해 건물을 뒤로 밀어 설계를 마쳤다. 내 설계안을 본 건축주는 임대효과를 높이기 위해 다른 건물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당겨줄 것을 요구했으나 풍요로운 도시의 풍경을 이유로 물려야 한다는 의견을 내가 굽히지 않자 서로 심각하게 대립되는 지경이 되었다.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나는 급기야 해서는 안될 말을 하고 만다. “이 집은 당신의 집이 아닙니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떠나고 말았다. 그 당시 나는 건축가로 독립한 직후라 일이 궁하기 짝이 없었고, 규모도 꽤 되는 그 일은 사무실 운영에 참으로 요긴하였지만 실수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한참 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읽게 되었다. 당나라 시인 유종원이 쓴 ‘재인전(梓人傳)’인데, 내용을 보면 오늘날의 건축가에 해당하는 재인의 직능과 태도에 대해 단호히 기술하고 있다. “부유아칙비(不由我則비) 유이이거(悠爾而去) 불굴오도(不屈吾道) 시성량재인이(是誠良梓人耳)”. 만약 집주인이 자기 주장을 내세워 직능을 방해하면, 유유히 떠나야 하며, 자신의 법도를 굽히지 말아야, 진실로 뛰어난 재인이라고 했다. 무려 1200년 전에도 이랬었는데…. 오래전 그 일은 실수가 아니었다. 나는 큰 위로를 받았다.


승효상 | 건축가·이로재 대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Kh-art

오래전의 일인데, 외국유학을 갓 다녀온 한 조각가의 푸념을 듣게 되었다. 청계천 철물상에 가서 직각으로 된 자를 만들어 달랬더니 어느 한 곳도 90도 정각을 만들지 못했다는 것이다. 슬며시 외국과 비교하며 직각도 만들지 못하는 한국의 장인정신 부재를 트집했다.

그렇게 비난할 수 있다. 우리의 전통가구들을 보면 자로 잰 듯한 정확함이 없는 게 사실이다. 어딘가 틀어지고 어딘가 모자라는 불완전한 상태를 두고 한국인이 가진 해학이며 미학이라고 학술적으로 논문을 쓰며 해석까지 해왔다. 건축에서는 더욱 그렇다. 우리의 옛 건축에서 궁궐이나 사찰의 주된 건물을 얼핏 보면 좌우대칭의 당당한 입면을 가지고 있는 듯하다.

그러나 실측으로 따지면 실제는 정확한 대칭이 아닌 게 대부분이다. 이를 두고, 한 치의 틀림도 없는 일본의 건축이나 엄정한 비례를 자랑하는 서양에 비해 한국 전통건축의 수준이 낮다고 말할 것인가?

안동 하회마을 남쪽 병풍처럼 펼친 산과 마주한 병산서원은 서양의 건축가들도 찬탄을 금치 못하는 보물 같은 건축이다. 마당을 중심으로 네 채의 건물이 둘러싸는 형식인데, 전면의 누각 만대루를 통해 들어오는 병산의 아름다운 풍경과 이를 뒷산과 이어지게 하는 공간연결의 수법은, 건축 문외한에게도 탄성을 부르게 한다. 사실 병산서원 건물 자체는 특별히 아름답다고 말할 수 없다. 만대루는 비정상으로 길어 보여서 비례감이 오히려 좋지 않다.

그런데 여기서는 건물들로 형성된 공간이 충분히 아름다워 모두들 넋 잃고 그 공간이 만든 풍경을 음미하고 만다. 건축에서 가장 중요한 공간의 실체를 가르칠 필요가 있는 건축학 선생들에게는, 공간이 갖는 아름다움을 설명하기에 딱 좋은 보기이다.

내가 참 좋아하는 어느 건축역사학자가 이를 분석하며 설명했다. “이 건축공간을 보면 직각이 없습니다. 건물을 의도적으로 슬쩍 틀어서 미묘한 사선을 만들어 시선을 확장시키고, 뒤편의 공간으로 연장시킵니다.” 실제로 병산서원은 건물의 배치가 미묘하게 틀어져 있다. 근데, 이 건축을 만든 우리의 선조들이 그렇게 교묘했을까? 직각으로 엄정한 조직을 만들 수 있었는데도, 우연을 만들기 위해 의도적으로 그렇게 고난도의 묘기를 부릴 만큼 작위적이었을까…. 나는 여기까지에는 동의하지 못한다.

예컨대 창덕궁을 그린 동궐도를 보시라. 모든 전각을 공간구조적으로 상세하게 그린 이 스펙터클한 그림에 나오는 공간은 하나도 빠짐없이 직각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러나 창덕궁의 실제 공간은 그렇지 않다. 구릉이 많은 땅이라 전각들은 언덕을 피하고 물길을 지르면서 지형의 논리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서양 사람들 같으면, 언덕도 깎고 계곡도 메우고 물길도 펴서 목적하는 직선과 직각을 얻으려 할 게다. 그러나 자연은 거스를 대상이 아니라 경외하고 수용하며 공존해야 하는 대상이므로, 사선으로 꺾기도 하고 둔각도 만들며 결국 대단히 자연과 일체화된 구성을 갖게 된 것이다. 그러면서도 모든 건축은 직각으로 인식되었으니, 우리에게 직각은 하나만 있는 게 아니라 91도나 89도도 직각이어서 직각이 무수하다.

창덕궁만이 아니다. 지금에도 전해오는 옛집들을 그린 평면도들을 보면 죄다 직각의 그림이지만, 그 평면도로 지어지는 집들은 자연과 만나면서 땅의 논리를 따라 순종하며 적절히 변형됐다. 그게 우리 옛집들의 실체다. 자연을 지배하려는 오만이나 희롱하려 드는 모자람도 결코 없으니 시시때때로 경우에 따라 자연을 수동적으로 또는 소극적으로 대한 여유인 까닭이었다. 그러니 우리의 옛 건축은 건축물 자체로는 별 의미가 없다. 주어진 조건과의 관계, 주변과 자연 속에서 그 관계를 알아야 그 건축을 이해하게 된다.

그런즉 그런 건축이 모인 우리의 마을과 도시에서는 자연스러운 공간의 조직이 중요함은 말할 나위가 없다.

기본적으로 우리 땅의 대부분은 산지여서, 쌀을 주식으로 하는 우리에게 평평한 땅은 벼농사를 위해 내놓아야 하니 삶터는 산 밑의 양지바른 구릉에 만들 수밖에 없다. 평지에 도시를 만들어온 서양과는 도시 형성의 근본이 다른 것이다. 그들은 머리에서 구상된 기하학적 도형을 실현하기 위해서 평지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평지의 도형인 까닭에 우선 면을 분할하고 이를 효율적으로 연결하기 위해 직선을 그어 길로 삼는다. 모이는 공간도 있어야 하니 면을 만들어 광장이라 하고 이 선과 면을 서양 도시의 가장 핵심적인 구조로 삼았다.

그러나 구릉이 많은 우리의 땅에서는 직선의 길을 만들기가 애초에 불가능하다. 노새와 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가장 완만한 곳을 확보하면, 주거지의 영역들이 양지바른 터에 자리잡는다. 그 개인의 영역들 사이에 적당히 비워진 곳이 길이 되었다. 그러니 그 길은 직선일 수 없으며 폭이 일정하지도 않아 넓어진 곳은 우물터나 놀이터, 시장 같은 동네의 중요한 공공영역이 된다. 그래서 동(洞)이라는 조직은 본래 같은 물을 쓴다는 뜻이니 우물이나 개천을 공유하며 생긴 기초적 공동체를 의미하는 단위였다. 이는 우리의 마을 조직은 공간에 기초한 것이라는 뜻이며, 직선의 길에 배열되어 숫자로 분류되는 집합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에게 고향마을의 기억은 늘 풍경이며 공간이지 숫자로 된 주소가 아니다.

2014년부터 도로명주소의 사용을 알리는 게시물 (출처 : 경향DB)


사실은 우리 땅의 지명들도 가만히 보면 죄다 그 장소의 특징을 설명하는 이름 아닌가? 생각해보면, 내가 사는 종로며 동숭동이며 인근의 삼선동이며 원남동, 연지동…. 모두가 그 이름만으로도 동네의 성격을 알 수 있어 정체성이 분명하니 찾기도 쉬웠다. 사람 이름 갖다 붙인 서구의 도로와는 품위부터 다르다.

근데 최근 들어 정부에서 전국의 주소명을 길 중심으로 바꾸었다. 서양 도시를 흉내 낸 신도시에는 효율적일 수 있다 쳐도, 골목 많은 오래된 동네에서는 그 공간형식과 새로운 주소가 도무지 맞지 않는다. 강제된 주소니 민초들이야 어쩔 수 없이 노력하여 익숙해지겠지만, 명심하시라. 새 주소가 우리의 전통적 공간개념을 망각시키며 동네를 잃게 하여 결국 땅과 밀착된 우리의 정체성을 훼손하는 심각한 문제를 야기시킬 수 있다는 것을…. 그게 두려운 나는 아직도 옛 주소를 쓴다.


승효상 | 건축가·이로재 대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Kh-art

1955년 미국 세인트루이스에 세워진 ‘프루이트이고’라는 2870가구수의 주거단지는 세워지기 이전부터 건축매체로부터 최고의 아파트로 칭송받았다. 이 단지는 일본계 미국인 건축가 미노루 야마자키(그는 2001년 테러로 무너진 뉴욕 무역센터도 설계했다)의 설계로, 그 당시 세계 건축계를 이끈 르 코르뷔제와 국제건축가회의(CIAM)가 주창한 신도시에 대한 마스터플랜 강령을 충실히 추종하여 ‘미래 도시의 모범’으로도 불렸다. 합리와 이성을 절대가치로 믿는 모더니즘을 시대정신으로 가진 그 강령은, 7만여평의 땅 위에 11층의 33개동의 아파트를 균일하게 배치시키며 흑인과 백인 가구로 나눈 후 모든 공간을 기능과 효율로 재단하여 분류하고 계급화시켰다. 보랏빛 꿈을 약속한 마스터플랜은 마치 전지전능이었다.

우리의 미묘한 삶을 그렇게 쉽게 예측하는 일이 가능한 것이었을까? 얼마 되지 않아 문제가 생겼다. 예컨대, 세탁이나 육아 같은 공동의 공간은 환기와 채광이 제대로 되지 않아 공동(空洞)의 공간이 되더니, 급기야 마약과 강간, 살인이 연이어 일어나고 말았다. 계급적 분류는 계층별 갈등을 부르고 결국은 단지 전체가 인종분규와 도시범죄의 소굴이 되고 만다. 움직일 수 있는 엘리베이터가 2대밖에 안될 정도로 절망의 땅이 된 이 ‘미래 도시’를 보다 못한 시 정부는 1972년 다이너마이트로 전체를 폭발시켰다. 1972년 7월15일 15시32분. 이 단지가 폭파된 순간을 적시한 포스트모더니즘의 건축가 찰스 젱크스는 이를 모더니즘이 종말을 고한 순간이라고 했으며 그로써 마스터플랜이라는 도시 만드는 방법은 서구에서 폐기된다.

그러나, 이 폐기된 마스터플랜이 우리 땅에 전가의 보도처럼 등장했으니, 1970년대 경제개발이 광풍처럼 몰아치면서 ○○종합계획도, ○○개발구상도 같은 이름의 지도들이 이 땅에 난무한 것이다. 모두 마스터플랜의 다른 말인 이 지도들에는 공통된 특징이 있다. 우선 각종 색으로 칠해져 있는데 이 색채에는 중요한 권위가 있어, 붉은색이면 상업지구를 나타내며 노란색은 주거지구, 보라색은 공업지구 등으로 색채마다 건폐율과 용적률이 달라 땅값의 차이로 등급을 갖게 된다. 도로에도 계급이 생겨, 고속도로, 간선도로, 분산도로, 집적도로 등 도로별로 속도제한을 두고 도로폭을 정하며, 도로변에 짓는 건물의 종류와 높이와 모양까지 규제하고 등급을 둔다. 공간구조도 위계적이다. 도심이 있고 부도심이 있으며 변두리도 있어, 변두리 근린생활시설에 사는 이들은 도심 중심상업시설에 오면 괜한 주눅이 들게 되었다.

그런데 그 마스터플랜이 기적을 이뤘다. 50만명이 사는 분당이 5년 만에 만들어진 것, 이는 세계의 도시역사에 유례없는 일이었지만, 유감스럽게도 도시학자들은 분당을 교과서에 기록하지 않는다. 그러면 이 도시가 실패했을까? 아니다. 분당은 성공하였다. 도시가 성공했을까? 아니다. 도시가 아니라 부동산이 성공한 것이다. 주뼛거리며 산 아파트 가격이 오르자 주민들이 행복해했다. 이 행복해하는 모습을 정치가가 지나칠 리 없다. 몇 만호를 짓겠다고 공약하면 건설자본이 붙어서 마스터플랜을 찍어댔다.

바야흐로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이 야합하여 만든 마스터플랜의 도시들이 경쟁적으로 나타나, 수도권의 땅들을 도륙 내더니 영남으로 호남으로 심지어는 제주에까지 신기루처럼 연일 솟아났다. 이런 도시에서의 삶이 행복해졌을까?

이들의 원본이던 프루이트이고 같은 도시에 대해 프랑스 철학자 앙리 르페브르는 “이렇게 철저히 프로그램화된 거주기계에서는 모험도 낭만도 없으며, 우리 모두를 구획하고 분리하여 서로에게 멀어지게 한다”며 질타했다. 나는 건축가임에도 이런 도시들에 서면 어디가 어딘지 구분하지 못한다. 모두가 다른 땅이며 다른 삶이었는데 표준적 모형, 표준적 지침을 강제하여 천편일률의 풍경으로 만든 까닭이니 지역의 정체성이 소멸된 것이다.

이게 다가 아니었다. 전가의 보도 마스터플랜을 도시에만 휘두르지 않았다. 국토개조라는 시대착오적 용어를 내세우며 4대강을 절단하고 만다. 우리 땅은 곳곳이 다르며 부분마다 독특하고 고유하여 금수강산이라 했다. 특히나 강은 물길마다 구비마다 유별한데 이를 표준적 단면을 갖는 마스터플랜으로 일관하며 뒤집고 파헤쳤다. 양식 있는 많은 학자들이 대자연의 복수를 경고하며 말렸지만, 마스터플랜에 경험이 많다며 그 효능을 과신한 그분에게는 다소 불편한 잡음으로 들렸다. 잃어버린 풍경에 대한 그리움은 언감생심이라, 생태학자들이 예언하는 미증유의 불행이 닥쳐오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지만, 녹조라떼와 큰빗이끼벌레라니…. 불안과 공포가 이제 강마다 내재한다. 마스터플랜의 망령을 빠져나오는 게 이토록 힘든 일인가.

정부가 4대강 살리기 마스터플랜에서 국내에 적용 가능한 보로 제시한 모델. (출처 : 경향DB)


마스터플랜의 허망함을 아는 해외 선진 도시는 이미 다른 방법으로 진화하고 있었다. 전체를 한꺼번에 하는 게 아니라, 주민과 함께 필요한 작은 부분을 개선하고 기다리며 변화하여 다음 단계로 나아가는 형식, 시간이 걸리지만 시행착오 없는 이 지혜로운 방식을 침술적 방법이라고 이름했다.

도시는 완성되는 게 아니라 생물체처럼 늘 변하고 진화한다는 이치를 터득한 이 도시침술은 예산도 많이 들지 않지만 무엇보다 과정이 민주적이고 흥미진진하다. 특히 개발이 아니라 재생이라는 지금 시대의 가치와 부합한다. 급기야는 우리도 도시개발에 대한 의식이 서서히 변하여 마스터플랜 시대가 이 땅에서도 저물어가는 것을 목격하고 있다.

그런데, 얼마 전부터 정부에서 비무장지대(DMZ) 개발을 추진하는 듯하더니 최근에는 대규모의 마스터플랜들을 발표하였다. 모두들 아는 바와 같이 비무장지대는 독특한 생태계를 유지할 수밖에 없었던 땅이며, 3국의 국경이 만나는 핫산의 아름다운 풍경은 혹독한 역사를 바탕으로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발표된 그림은 예전처럼 천지개벽이었다.

새로운 비전이 필요한 때에 그런 큰 그림을 품을 수 있다 하자. 그러함에도 진심으로 당부하고자 하는 것은, 부디 조금씩, 하나씩, 천천히 하시라. 우리가 살고 있는 땅은 우리 것이 아니라 우리 후손의 것이며, 우리는 이를 잠시 빌려 쓰고 있을 뿐인 까닭임에….


승효상 | 건축가·이로재 대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Kh-art

내가 운영하는 건축사무소의 이름은 ‘이로재(履露齋)’이다. 뜻으로는 ‘이슬을 밟는 집’인데 <소학(小學)>에 연유한다. 어느 옛날 노부를 모시고 사는 한 선비가 부친이 아침에 일어나시기 전에 겉옷을 걸치고 부친 처소에 가서 기다리고 있다가, 밖으로 나오시면 따뜻해진 겉옷을 건네드렸다는 이야기다. 새벽녘에 이슬 앉은 마당을 밟아야 하는 집 ‘이로재’를 의역하면, 효성이 지극한 가난한 선비가 사는 집이라는 뜻이다.

이 아름다운 이름을 가지게 된 데는 사연이 있다. 1990년대 초,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저자인 유홍준 교수가 내게 집 설계를 의뢰했을 때는 그 밀리언셀러의 책이 나오기 전이어서 학자 신분에 집 지을 돈이 넉넉할 수 없었다. 내게 준 설계비도 충분치 않다고 여겼는지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던 200년 된 현판을 답례로 주었는데, 내가 평소 탐을 내던 터라 두말하지 않고 들고 와서 그전까지 쓰던 사무실 이름을 그 현판의 ‘이로재’로 바꾸었다. 새벽에 이슬을 밟는 이가 도둑이나 설계사무소 직원밖에 없다는 농도 동료들로부터 듣기도 했지만, 이 이름을 얻은 후부터 은근한 변화가 사무실에 일기 시작한 것을 안다. 우선 이 이름을 걸고 사무소를 운영하는 내 사유의 방향이 그 당시 내 건축의 주제로 걸었던 ‘빈자의 미학’과 함께 절제와 검박으로 향하고, ‘이로재’의 뜻을 듣고 난 건축주들의 태도도 자못 진중해졌다.

유 교수는 내가 설계한 집의 이름을 <도덕경>의 대교약졸(大巧若拙)에서 연유하여 ‘수졸당(守拙堂)’이라 했다. 큰 기교는 서툰 것만 못하다는 뜻이다. ‘빈자의 미학’이라는 화두를 내걸며 처음 설계한 건축이라 내가 얼마만큼 와 있는지 알기 위해서 늘 기억해야 하는 이 집은, 우리 문화에 대해 근본적 성찰을 부르며 큰 바람을 일으킨 <나의 문화유산 답사기>의 산실이 되었다. 건축개념을 대변한 집 이름이 거주인에게 그런 삶의 태도를 암묵적으로 지시하지 않았을까?

비슷한 시기에 선배 건축가 민현식은 사무실 이름을 ‘기오헌(寄傲軒)’이라 지었다. 기오헌은 19세기 초 22세로 생애를 마친 효명세자가 사색과 독서를 위해 창덕궁의 후원에 지은 불과 4칸짜리 작은 집이다. 영민한 그가 번잡한 궁궐을 멀리하고 군주의 기품을 스스로 닦은 이 집 이름은 도연명의 귀거래사에서 땄다. “倚南窓以寄傲 審容膝之易安(남창에 기대어 마음을 다잡아 보니 좁은 방 안일망정 편안함을 알았노라)”이니 기오헌은, 비록 작은 집이지만 선비의 기품을 잃지 않고 한껏 오기를 부리는 곳이다. 실제로 민현식 선배가 그렇게 산다.

조선의 인물 중에서 나를 유독 끄는 이가 정도전인데, 한양도성의 설계자여서 그렇기도 하지만 도성 안 전각들의 이름들을 다 지어낸 것에 경탄한다. 경복궁, 근정전, 강녕전, 사정전 등 말하자면 마치 죽은 사물에 혼령을 불어넣어 생명체로 만들 듯, 이름으로 그 전각들을 한갓 부동산이 아니라 의미체로 변하게 한 것이다. <인간과 말>을 쓴 영성적 철학자 막스 피카르트는 책의 말미에 이렇게 적었다. “하나의 말을 들으면 하나의 빛을 보는 것이다.… 그리하여 인간은 말로 인하여 불멸이 된다.”

이름을 갖는 것은 그로 인한 세계를 갖는 것이며 그 이름이 존재하거나 기억되는 한 그 세계는 불멸이라는 것, 그래서 이름은 존재의 가장 중요한 방식이다. 그래서 그런가, 집이나 이름은 같이 ‘짓다’라는 단어를 쓴다.

물론 정도전뿐 아니다. 우리의 선조들은 자기가 거처하는 곳이면 어디든 이름을 붙이고 그 이름이 목적하는 바대로 자신의 삶을 몰았다. 회재 이언적의 집 ‘독락당(獨樂堂)’, 마음이 홀로 서야 이(理)가 생긴다는 성리학자 회재의 삶을 이보다 더 좋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게다. 벼슬을 마친 선비들이 낙향하여 마련한 거처의 이름들 중에 ‘만취(晩翠)’라는 글자가 꽤 많이 등장하는데, 늦게까지 푸르겠다는 뜻이니 늙어서도 자기의 뜻을 지킬 것을 스스로 맹세하는 것이다. 혹은, 이제는 세속을 멀리해 스스로 삼가고 자연을 벗삼아 마음을 곧게 닦으며 맑은 날의 바람처럼, 비 갠 뒤 떠오른 달처럼 살겠다는 ‘광풍각(光風閣)’ ‘제월당(霽月堂)’에 이르면, 비록 집은 초라해도 마음은 더없이 크다. 그야말로 집은 우리 선조들에게는 인문정신 그 자체였으니 당호는 자신의 정체성을 찾고 삶의 방향을 다듬기 위해 대단히 중요한 자기선언이었던 것이다.

근데 요즘의 우리들 집 이름은 어떤가? 한동안은 아파트를 지은 건설회사 이름으로 된 집단적 당호로 자조하더니, 뒤를 이어 졸부 취향을 부추기는 맨션이니 빌라가 그 영어의 본래 뜻과 관계없이 붙어 집을 희화화하였다. 최근에는 영어에도 없는 단어들을 조합하여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몇 동 몇 호라는 숫자의 집 이름에 무슨 인문정신이며 정체성이 찾아질 것인가? 거주방식이 분별없으니 우리네 삶도 이토록 척박한 것 아닐까?

승효상 이로재 대표 (출처 : 경향DB)


지금이라고 당호를 가지지 말라는 법이 없다. 나는 내가 설계한 집에 이름을 붙여주며 건축의 성격을 한 단어로 압축하여 설명하곤 한다. 소박한 삶을 사는 부부를 위한 백색의 주택을 ‘수백당(守白堂)’이라 지었으며, 교단에 서는 분의 집은 어눌한 게 달변보다 낫다는 뜻으로 ‘수눌당(守訥堂)’이라 했다. 울창한 억새풀 숲 옆에 지은 간결한 집은 ‘노헌(蘆軒)’이라고 했고, 스스로 드러나지 않기를 원하는 어떤 분의 집은 집 자체도 모양이 드러나지 않게 지었지만 이름도 ‘모헌(某軒)’으로 했다. 어떤 경우는 건축주와 같이 짓기도 한다. 최근 판교에 지은 집의 이름은 건축주가 ‘고(古)’를 먼저 정하고 내가 덧붙여 ‘청고당(晴古堂)’이라고 했다. 오래된 것에 시간이 배어 맑은 윤기를 가지게 된 집이라는 뜻이다.

어떠신가? 각자 자기의 집 이름을 짓는 게. 오늘 새해 첫날, 비록 아파트에 살아도, 단칸방이라고 해도, 혹은 찌든 월셋방에 산다 해도 각자의 존재방식이며 세계를 향한 출발점이 거처이니 그 희망하는 삶의 방식에 대한 이름을 스스로 짓고, 그 이름의 뜻대로 삶을 다독거리며 한 해를 출발하는 게….

언어가 빛이라고 했으며 이름이 존재라고 하였다. 간곡히 바라건대, 올 한 해, 지은 이름대로 미생일망정 우리 모두의 존재가 빛을 발하길….


승효상 | 건축가·이로재 대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Kh-art

건축역사에서 주거의 변천양식을 일반 건축처럼 구분하는 일은 쉽지가 않다. 옛날이나 요즘이나 집은 마찬가지라는 것인데, 냉난방이나 자동화 시스템 등 현대기술의 덕택으로 주택의 편리함이 옛날과 비교할 수 없이 좋아졌다고 해도 건축의 본질인 공간의 구조에는 변화가 없다는 이야기다. 특히 지역의 특수한 조건을 받아들여 지을 수밖에 없는 민간주택인 경우는 더욱 그렇다. 예컨대 대략 9000년 전 터키 아나톨리아 고원에 있었던 차탈휘위크의 집단 취락지 풍경은 지금의 터키 민간주거와도 비슷한 모습인 데다가, 놀랍게도 중국 허난지방에도 그 비슷한 형태의 주거가 있어 건강한 삶을 지금도 산다. 또한 5000년 전 메소포타미아의 고대도시 우르에서는 부자와 빈자가 서로 섞여 산 것이 분명하다. 큰 집과 작은 집들이 흙벽들을 공유하며 치밀하게 조직된 모습은, 요즘의 사회과제 중의 하나인 소셜믹스가 이미 실현된 풍경이다. 심지어 로마시대에 지은 군인아파트는 현대의 연립주택이나 원룸아파트 평면형식과도 그리 다르지 않다.

이렇듯 주거형식은 왜 시대를 초월해 존재할까? 아마도 우리 삶이 보수적일 수밖에 없어 그럴 게다. 가족이라는 기초적 공동체와 낮에는 일하고 밤에는 자야 하는 하루 24시간의 생활패턴이 변하지 않는 한 그 삶을 담는 주택 또한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 땅의 주거도 마찬가지였다. 온돌을 사용하는 북방식과 마루생활을 즐기는 남방식 등 지역의 기후와 습관에 따른 공간들로 구성된 우리들 고유의 집들은 짧게는 수백년, 길게는 수천년의 역사를 거듭해 내려온 양식이다. 서양미학의 양식적 구분에 의하면 기와집과 초가집밖에 없으니 우리의 전통가옥을 고전, 고딕, 바로크 같은 큰 건축양식으로 구분하지 못한다. 더구나 우리 선조들에게 건축은 윤리적 사유의 결과물이지 미학적 대상이 아니었다. 자연과 인간, 나와 가족, 가족과 이웃 사이에서 취하는 태도에 따른 공간의 구성과 연결이 주된 과제였으며, 집의 모양이나 장식은 늘 부차적이었던 까닭에 시각적으로 주택의 양식을 구분하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다.

그런데 장구한 세월 동안 유지해온 우리의 이 주거형태가 혁명적으로 변한 때가 있었으니 바로 1960년대 말이었다. 양옥이라는 형식의 주택이 생기면서 종래의 주택을 한옥이라고 뭉뚱그려 분류하며 나타난 것이다. 혁명의 시작은 공간개념의 완벽한 변환이었다.

치악산 아래의 원주 황골. 1974년 황량했던 밭에는 번듯한 양옥집들이 들어섰고 자갈길은 신작로로 변했다. (출처 : 경향DB)


우선 우리 고유한 한옥에서는 방의 이름을 위치에 따라 불렀음을 상기하시라. 안에 있다고 안방, 건너편에 있으므로 건넛방이요, 문간에는 문간방이다. 심지어 화장실도 뒤에 있어 뒷간으로 불렀다. 그러나 양옥에서는 목적에 따라 방의 이름이 정해진다. 거실, 침실, 식당, 화장실 등이 그러한데 그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방에는 소파나 침대, 식탁 등이 늘 그 공간들을 채우고 있다. 거주인은 정해진 목적에 따라 거실에서는 소파에 앉고 침실에서는 잠을 자며 식당에서는 식사를 한다. 목적을 가진 방이 우리 삶의 형태를 미리 규정해 놓은 것이다. 그런데 한옥의 방들은 위치에 따른 이름일 뿐 목적이 없으니 방안에 가구가 있지 않다. 그저 밥을 먹고 싶으면 밥상을 가져와 식당으로 쓰면 되고, 탁자를 놓으면 공부방이 되며 요를 깔면 침실이요, 담요를 깔면 화투방으로 변한다. 거주인이 원하는 대로 방은 그 목적을 달리하도록 평상시에는 비어져 있는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곳이 마당이다. 중정이나 마당을 가진 주택이 세계 곳곳에 있지만 우리의 마당은 그중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공간이었다. 같은 아시아라고 해도 일본의 마당은 쳐다보기만을 위한 것이며 중국 사합원의 마당은 위계적 질서를 강조하는 공간이다.

그러나 우리의 마당에서는 어린이들이 놀면 놀이터요, 노동을 하면 일터며, 제사와 축제를 행해도 그 목적이 충실히 수행되는 공간으로 완벽히 변한다. 그리고 그 일들이 끝나면 고요로 돌아와 거주인을 사유의 세계로 인도하는 신비한 공간이며 바로 비움의 실체였다. 비움. 이를 이루도록 마사토만 깔린 이 공간에는 아무것도 두지 않는다. 그러니 예쁜 풍경도, 질서도 없는 이 모호한 공간이 양옥에서 용납되지 않을 게 당연하다.

집은 “저 푸른 초원 위에 그림 같은 집”이어야 했다. 1970년대 남진이 부른 이 노래, 경제개발의 기적을 믿으며 땀 흘리는 서민들에게 인생의 목표가 된 듯,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며 거리에 흘러나왔다. 이발소 달력 그림에서 보았을까, ‘불란서 미니 2층집’이라는, 프랑스에는 있지도 않은 전대미문의 집이 방방곡곡에 지어졌다. 각도가 다른 박공의 지붕을 전면에 놓고 지면에 떠서 발코니와 테라스를 가진 이 집은 당연히 침실, 거실 등 목적적 방들을 가졌다. 초원을 만들기 위해 집 앞은 푸른 잔디로 덮고, “사랑하는 님과 함께 한평생 살고 싶어” 담장을 높이 둘러 그 위에는 병조각과 쇳조각을 박았다. 그 결과 동네의 풍경은 더 이상 모여 사는 모습이 아니라 붙어 살 뿐인 주택단지로 변하여 전통적 공동체가 붕괴되고 만 것이다. 물론 마당은 목적이 없으니 사라지거나 그 위를 덮어 실내로 만들어 고깃집의 홀로 변해야 했다. 비어진 공간은 있는 공간이 아닌 까닭이었다.

개인과 가족 그리고 사회와의 관계 속에 투영된 시대적 모순과 우울을 그린 김원일의 자전적 소설 <마당 깊은 집>은 이렇게 쓰여지면서 끝을 맺는다. “……4월 하순 어느 날, 나는 마당 깊은 집의 그 깊은 안마당을 화물 트럭에 싣고 온 새 흙으로 채우는 공사 현장을 목격했다. 내 대구생활의 첫 일년이 저렇게 묻히고 마는구나 하고 나는 슬픔 가득 찬 마음으로 그 광경을 지켜보았다. 굶주림과 설움이 그렇게 묻혀 내 눈에 자취를 남기지 않게 된 게 달가웠으나, 곧 이층 양옥집이 초라한 내 생활의 발자취를 딛듯 그 땅에 우뚝 서게 될 것이다.”

그 이층 양옥집이 바로 ‘불란서 미니 2층집’인 바, 이 정체불명의 주거양식이 우리의 오랜 기억을 지우고 아름다운 풍경을 무너뜨린 주범이었다. 그로써 윤리는 버려지고 미학의 시대가 도래하여 작금, 물신의 망령이 우리 사회 곳곳을 배회하며 극단의 갈등을 양산하고 있는 것일 게다. 비움을 버린 톡톡한 대가다.


승효상 | 건축가·이로재 대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Kh-art

이상향으로 번역하는 유토피아(Utopia)라는 단어는 토머스 모어가 1516년에 지은 소설책의 제목이었다. 그는 그리스어 두 단어를 합성해서 이를 만들었는데, 그 뜻이 이중적이다. Topia는 장소, 땅이라는 분명한 뜻을 갖지만 U는 뜻이 모호하다. 그리스어 eu, ou는 다 같이 ‘유’로 발음되는데, eu는 좋다라고 하는 뜻이며 ou는 아니라고 하는 뜻이라 e와 o를 빼고 그냥 ‘u-topia’라고 하면, 좋기는 좋은데 이 세상에 없는 곳이 된다고 한다. 즉 상상할 수는 있지만 현실세계에서 존재할 수 없는 도시가 유토피아인 셈이다.

그 책 속에는 유토피아를 그린 그림이 있다. 그림 속 유토피아는 위쪽에 그려진 육지로부터 떨어진 섬이어서 이곳을 가려면 배를 타고 하나의 입구에 도달해야 한다. 모든 출입을 감시하는 망루가 섬의 입구에 솟아 있고, 이를 통과하면 다시 전체를 두르는 해자가 있어 내부로 접근하기 쉽지 않다. 곳곳에 설치된 감시탑을 피해 들어간 섬의 가운데에는 이 땅을 다스리는 영주의 성채가 있다. 한 사람의 지배와 감시를 거쳐 안전을 담보 받는 세계, 그게 유토피아의 모습이었다.

르네상스 시대 유행처럼 번진 이상도시 건설의 열망을 비판하기 위해 쓴 책이었지만 이 책은 오히려 도시건설의 시대적 이론이 되어, 유토피아를 구현하기 위한 신도시들이 북부 아프리카에서 스칸디나비아에 이르기까지 유럽 전역에 세워졌다. 그 도시들은 하나같이 단일중심의 구조로, 둘레에는 높은 성벽을 쌓고 그 밖으로 해자를 깊게 파서 철저히 외부를 차단한 통제적 모습이었다. 근대화 과정에서 견고한 성벽은 허물어졌지만 단일 중심의 도시구조는 지금도 남아 독존의 세계를 꿈꾼 것을 증거하고 있다.

르네상스 이후에도 이 유토피아의 꿈은 변하지 않는다. 시대마다 새로운 삶을 꿈꾸며 등장한 신도시 모두가 이상세계를 동경한 것이었고, 현대의 마스터플랜이라는 도시계획의 수법도 유토피아의 실현을 목표로 한 것이다. 실현된 유토피아의 사회가 그야말로 이상향이었을까? 유감스럽게도 그런 적이 한번도 없었다. 범죄는 잘 계획된 도시에서 오히려 더욱 많아졌고 갈등과 대립은 전형적인 도시의 문제가 되었다.

유토피아에 반대되는 말이 있다. 지옥향 혹은 암흑향으로 번역하는 디스토피아(Dystopia)라는 단어다. 1932년 올더스 헉슬리가 쓴 <멋진 신세계>라는 소설이나,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에 그려진, 비극적 종말을 맞이할 수밖에 없도록 철저히 통제된 사회가 디스토피아였다. 외부와 소통되지 않는 이 디스토피아의 세계 역시 애초에는 유토피아를 꿈꾼 사회였으니, 결국 디스토피아는 유토피아와 같은 뜻이라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똑같이 폐쇄적 공동체인 까닭이다.

디스토피아를 묘사한 일러스트 (출처 : 경향DB)


실현될 수 없는 유토피아의 개념을 현실에 끌어들인 이가 있었다. 프랑스의 철학자 미셸 푸코다. 그는 헤테로토피아(Heterotopia)라는 특별한 단어를 소개하면서 도시공간에 대한 인식을 넓히며 새롭게 했다. 예를 들어 어린이들이 부모 몰래 숨고 싶어하는 이층 다락방 같은 공간, 신혼의 달콤한 꿈을 꾸는 여행지, 혹은 일상으로부터 탈출한 듯한 카니발의 세계나 놀이공원 같은 공간이 실제화된 유토피아인데 이를 헤테로토피아라고 이름하였다.

그러고 보면 우리 주변에 푸코의 헤테로토피아적 공간과 시설이 대단히 많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일상의 피로를 보상하는 듯한 노래방이나 디스코텍, 혹은 공연장이나 전시장 심지어 박물관이나 공원도 그런 범주에 들어갈 게다. 이런 공간은 도시에 활력을 부르는 시설인데, 공통되는 특징은 그 속에서의 활동이 늘 일시적이라는 것이다. 상상해 보시라. 그런 공간에서 평생을 보내는 이가 있다면 결코 그 공간은 그에게 유토피아가 되지 못한다. 그러니 헤테로토피아는 한시적으로 유효한 유토피아이며 그러므로 일상의 도시공간에서 유용한 존재가치를 가진다.

문제는 이 한시적이어야 할 헤테로토피아가 영구적 유토피아를 꿈꾸면 비극이 된다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우리 도시의 한가운데 있는 아파트다. 고층의 집합주택은 로마시대에도 있었을 정도로 아파트의 역사는 오래며 이제는 어느 도시에서나 볼 수 있는 세계 공통의 주거형식이 되었다. 그러나 우리 땅에 세워진 아파트는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특별한 형식을 띠는데 바로 ‘단지’라는 개념 때문이다. 이 땅의 아파트는 그 가구 수가 얼마이든지 들어서기만 하면 그 둘레에 울타리를 치고 주변과의 관계를 단절시키는 단지가 되었다. 이 단지 속에는 그네들만을 위한 놀이터와 공원과 상가, 유치원과 학교, 마을회관과 행정조직까지 두어 자치적 공동체를 염원한다.

환상적인 조감도 위에 영어단어를 조작한 이름을 붙이고 몽환을 꾸게 하는 이 독존적 조직, 불과 몇 개의 출입구로 출입을 통제하는 이 낙원을 도시의 일반 도로는 가로질러 통과할 수 없다. 그냥 둘러서 지나야 하니 이 아파트 단지는 도시 속의 섬이 되고야 만다. 이런 섬이 하나만 있는 게 아니다. 마치 군도처럼 도시 곳곳에 둥둥 떠 있게 된 이 섬들끼리는 부동산 가치를 놓고 늘 대립하는 적대적 공동체였다.

더구나 지난 시대 우리가 지어온 아파트는 사실상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이 야합한 결과 아닌가? 정치가가 몇 채를 짓겠다고 공약하고 건설자본은 이를 뒷받침하여 그 임기 내에 졸속으로 지어댔으니 어디에도 우리들 공동체의 삶을 위한 담론이 없었고 건축의 시대적 정신도 없었다. 오로지 고립된 부동산공동체로 나타난 이 아파트단지는 분별없는 헤테로토피아였던 것이다.

얼마 전 한 아파트단지에서 경비원으로 일하던 우리의 한 이웃이, 그 주민으로부터 먹다 남은 음식물을 던져 받는 모멸감을 끝내 참지 못하고 목숨을 끊었다. 그곳에서는 그런 식의 비인간적 행위가 거듭되어 왔다고 했다. 낙원의 삶을 만끽하는 단지의 거주자에게 경비원은 이웃이 아니었으니 폐쇄적 낙원에 소속될 수 없는 그의 인간적 존엄은 웃기는 단어였다. 이 일이 하나의 극단적 사건이라고? 아니다. 단지라는 울타리를 가지고 있는 한 늘 잠재되어 있는 비극이며, 따라서 그 단지는 역사에서 보듯 늘 디스토피아의 결말을 가진다. 단지를 해체하라.


승효상 | 건축가·이로재 대표

저작자 표시 비영리 변경 금지
신고
크리에이티브 커먼즈 라이선스
Creative Commons License
Posted by Kh-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