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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술작품에서 미완성작은 완성작이 아니기 때문에 그 자체로 더 아름답게 느껴지는 경우가 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과 슈베르트의 교향곡 8번이 그 대표적인 예다. 두 작품은 모두 작곡가 생전에 완성을 보지 못했지만 그 어떤 완성곡보다 음악애호가들에게 깊은 감동을 주고 있다. 하지만 두 작품이 유명해지기까지 큰 차이가 있다.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남편 사후 생활고에 찌든 아내의 부탁으로 제자 쥐스마이어가 완성해 의뢰인에게 완성품처럼 건네졌다. 반면 건망증이 심했던 슈베르트의 교향곡 8번은 2개 악장이 빠진 채 사후 37년 만에 발견돼 미완성곡 그 자체로 사랑을 받기 시작했다.

‘미완성’이라는 표제가 붙은 슈베르트의 교향곡 8번과 달리 모차르트의 레퀴엠은 제자의 도움으로 미완성의 굴레에서 벗어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레퀴엠은 오히려 그로 인해 끊임없는 논란이 되고 있다. 쥐스마이어의 가필은 모차르트의 천재성에 터무니없이 모자라 작품에서 배제해야 한다는 비판과 함께 가필 자체도 작품으로 평가해야 한다는 반론이 200년 넘게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반면 슈베르트 교향곡 8번은 브람스로부터 “이 곡은 양식적으로 미완성이지만 내용적으로는 결코 미완성이 아니다”라는 찬사와 함께 미완성 그 자체로 평가를 받고 있다.

미완성작의 작품성을 놓고 논란이 벌어진 것은 비단 음악뿐만이 아니다. <성> <변신> 등 수많은 작품을 남긴 카프카는 미완성 원고는 모두 불사르길 원했지만 친구 브로트는 유언을 따르지 않았다. 심지어 작품의 표현을 수정하기도 했다. 브로트에 대해 독창적 표현을 훼손했다는 비판이 있지만 난해한 카프카를 이해시키기 위해 불가피했다는 옹호론도 있다.




지난 2일 SK텔레콤이 가수 고 김광석의 미완성 악보를 19년 만에 공개하고 ‘연결의 신곡발표’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후배 뮤지션과 대중의 참여로 미완성곡을 완성시켜 신곡을 발표한다는 것이다. ‘독자는 저자의 죽음을 통해 탄생한다’고 했던 바르트에 따르자면 저자의 주검과 함께 굳어가던 악보에 새 생명을 불어넣는 의미있는 실천이 시작된 셈이다. 하지만 브람스 방식대로 악보를 미완 그 자체로 평가하고 기리는 방법은 없는지도 고민해 볼 일이다.


강진구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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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획재정부가 발표한 2015년 세법개정안에 따르면 공연예술분야 지원을 위해 창작 공연에 대한 부가가치세 면제를 검토한다고 한다. 어려운 공연계 현실에서 이러한 세제 혜택은 가뭄에 단비가 될 것이다. 아직 구체적인 시행령이 발표된 것은 아니지만, 창작 공연의 범위를 정하는 것이 쉬워 보이지 않는다. 근래 무대에 올려지고 있는 창작 공연을 보면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국산’의 이미지와는 사뭇 다르기 때문이다.

‘국산’ 창작 공연이라고 하면 국내 제작자와 국내 작가진(작곡가를 포함한)이 만들고 그 소재는 국내의 이야기 소재여야 한다고 생각되었다. 하지만 지금의 창작 공연들을 보면 이러한 범주를 벗어난 작품도 많다. 한국의 원작을 가지고 해외 작가진이 만든 공연도 있고, 해외 원작을 토대로 국내 작가들이 만든 작품도 있다. 또한 해외 연출 등이 참여하여 국내 스태프와 해외 스태프가 함께 만들고 있는 작품도 많이 있다.

글로벌 시대에 인적 물적 교류가 활발한 것을 감안한다면 ‘국산’ 창작 공연이라고 범위를 한정하는 것이 앞으로는 더 어려워질 것이다. 국산 제품에도 핵심 기술에 대한 로열티를 외국에 송금하거나 핵심부품을 수입하여 제조하는 제품이 많은 것으로 알고 있다.




주형환 기획재정부 1차관(가운데)이 2014년 세법개정안을 설명하고 있다._경향DB



이런 제품을 ‘국산’이 아니라고 하기 어렵듯이 공연 또한 ‘국산’이라고 분류하는 것이 점차 의미가 없어질 것이다. 이런 측면에서 이번 개정안을 통한 부가가치세 면제의 범위를 정하는 데 있어서 ‘국산’ 창작 공연에 얽매이지 말고 정책 취지대로 공연계 지원에 초점을 맞추었으면 좋겠다.

부가가치세 면제가 공연계의 이득을 10% 올려주는 정책이 아니라 공연계의 손실을 조금이나마 줄여주는 정책이 될 것이라는 목소리에 주목해주기 바란다. 그만큼 전체 공연계가 어려운 형편이다. 라이선스이든 창작공연이든 국내 제작진과 출연진이 참석하는 공연이라면 모두 부가세 면제 혜택을 주어 공연계가 안정화될 때까지 공연계 전체가 혜택을 볼 수 있게 하면 좋겠다.

창작 공연 활성화라는 명분이 희석된다는 지적도 있을 수 있다. 국내 공연계가 안정적으로 운영돼야 창작 공연도 활성화될 수 있다. 이런 측면에서 보면 부가세 면제 혜택이 전체 공연계에 돌아가는 것은 용인될 만하다. 창작 공연의 활성화 정책은 이미 다른 정책적 수단이 있다. 이번 세제 정책은 전체 공연계 활성화를 위한 정책으로 만들어 주었으면 한다.

전체 공연예술 분야에 대한 부가가치세 면제가 조세형평에 어긋나는 혜택이란 지적도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정부가 추진하고 있는 ‘콘텐츠 산업’ 활성화 측면에서 이런 혜택은 고려할 만하다.

공연예술분야 부가세 면제 혜택이 전체 공연계의 활성화에 도움이 되도록 세제 혜택의 범위를 과감하게 넓혀주었으면 한다.


정재엽 예원예술대 미디어예술학과 조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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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고로 인한 예술인의 죽음이 잇따르고 있다. 지난 19일 연극배우 김운하씨가 성북구 한 고시원에서 숨진 지 5일 만에 발견되었다. 영화배우 판영진씨는 차 안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은 채 발견되었다. 생활고와 지병으로 목숨을 잃거나 자살을 한 예술인의 비극적 이야기는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시나리오 작가 최고은(2011년), 인디뮤지션 이진원(2010년), 배우 정아율(2012년)과 김수진(2013년), 우봉식(2014년), 가수 김지훈(2013년) 등. 최고은씨가 전기와 가스가 끊긴 월세 방에서 며칠을 굶다 세상을 떠난 지 4년이다. 그 후 ‘최고은법’이라 불리는 예술인복지법이 제정되었지만, 예술인의 연이은 죽음을 막아내기에는 역부족인 듯하다.

문화예술인 실태조사(2012년)에 따르면, 예술인의 창작활동 관련 월평균 수입은 100만원 이하가 67%, 50만원 이하가 51%나 된다. 장르별 편차도 심한 편으로, 문학인의 92%가 수입 100만원 이하다. 조사 시점의 1인 가구 기준 최저생계비가 57만원인 점을 고려하면, 예술인의 절반이 기초생활수급자인 셈이다.

이렇듯 예술인의 3분의 2가 사회보장의 사각지대에 있다. 건강보험 가입률은 98% 정도지만, 국민연금은 67%, 산재보험 28%, 고용보험 31%이다. 산재보험과 고용보험 가입률이 낮은 이유는 정규 고용직 비율이 18%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예술인 대다수가 자영 예술인이거나 프리랜서 또는 비정규직이다. 그러나 이들의 고용방식을 고려한 노동 및 사회보장 제도는 제대로 마련되지 못하고 있다. 그나마 예술인복지법을 통해 산재보험을 보장해줄 수 있는 근거가 마련된 것은 다행이었다. 그러나 보험가입이 선택사항이고 예술활동상 산업재해로 인정받을 수 있는 경우가 한정되어 있어 실효성이 높지 않다는 평가다. 오히려 예술인에게는 계약과 계약 간 단기 실업에 적합한 실업급여가 더 필요하나 이에 대한 사회적 합의는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서울 지하철 4호선 혜화역에 게시되었던 예술인복지재단의 광고 (출처 : 경향DB)


이처럼 문화예술계가 제대로 된 소득과 사회보장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돌아가고 있는 것은 열정 노동 때문이다. 2014년 문화향수실태조사에 따르면, 국민 전체의 문화향유율은 71.4%이지만, 영화를 제외한 문학(6.2%), 미술(10.6%), 음악(4.9%), 연극(12.6%) 등 순수예술은 10% 전후에 불과하다. 순수예술 분야는 근본적으로 수요 부족에 원인이 있다. 좁은 시장에서 많은 예술인들이 활동하다보니 출혈경쟁이 이루어지고 낮은 단가에도 활동할 수밖에 없다. 대중문화 분야는 시장은 크지만 스타 시스템에 기반한 분배 구조 때문에 빈익빈 부익부가 가속화되고 무명의 신인과 스텝들은 가난을 면하기 어렵다. 여기에 구두 계약 관행과 경력 및 활동경력에 따르는 표준인건비 기준 부재 등 제도적 한계가 결합되면서 문화예술 생태계의 구조적 악순환이 계속되는 것이다.

그나마 공공 지원은 예술활동을 영위할 수 있는 최소한의 장치가 되고 있다. 예술인의 공공지원 수혜율은 약 28%이다. 하지만 예술가가 하고자 하는 프로젝트를 지원하는 사업은 줄고, 시민을 위해 예술가를 동원하는 사업은 늘어나는 추세이다. 공익사업의 경우 재능기부를 요청하는 경우가 많은데,‘재능밖에 없는 예술가에게 재능마저 기부’하라는 형국이다. 공공 일자리 사업도 꾸준히 늘어나고 있지만 양질의 일자리는 거의 없다. 그나마 예술인복지재단이 긴급생활자금이나 긴급의료비 지원 등을 늘리면서 지원하고 있지만, 지원수요에 비해 부족한 재원과 선정과정의 어려움으로 인해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올해의 경우 창작지원금 110억원이 배정되지 못한 상태에서 예술인의 죽음을 직면하게 되어 안타까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결국 예술인 복지 문제는 예술인의 창작활동을 노동으로 보고 자영예술가나 프리랜서, 비정규직도 정당한 대우를 받을 수 있도록 문화예술 생태계의 지속가능성을 제고하는 정책-표준계약서의 의무 적용과 표준사례비(artist fee) 기준 확산 등-과 함께 실업급여의 보장을 통해 사회복지의 사각지대를 줄이고자 하는 제도적, 정책적 노력이 함께 결합되어야 해결의 실마리를 얻을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양현미 | 상명대 교수·문화예술경영학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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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 저작자·발명가·과학기술자와 예술가의 권리는 법률로써 보호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22조는 예술의 자유 및 예술가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예술의 특권적 지위를 위해서나 예술가가 우월하기 때문이 아니다. 어느 시대든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가치가 지배권력으로부터 억압받지 않고 작동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예술가의 권리를 법률로써 보호해야 하는 것은 예술가들이 가난하고 힘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예술이 창조경제를 이끌고, 문화융성을 위해 애쓰기 때문은 더욱 아니다. 예술가들은 세상을 조금 더 감각적으로 마주하는 역할을 해왔으며, 타인의 고통과 사회적 모순에 좀 더 민감하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늘 국가권력의 폭력에 예민하며, 지배계급의 모순을 비웃고, 사회적 약자들의 삶에 공감하며, 새로운 세계를 향한 불온한 상상을 즐겨 한다. 예술의 감수성과 창조성은 자주 국가권력과 지배계급을 불편하게 만들지만, 이처럼 불온하고 위험한 예술일수록 우리 사회에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예술은 법률로써 보호받을 가치가 있다. 헌법 제22조는 국가권력과 지배계급이 불쾌하더라도 예술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문이자 안전장치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문화융성’을 강조한 이후 오히려 대한민국 곳곳에서 예술이 구속되거나 처벌받는 괴이한 일이 늘어나고 있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요구했기 때문에, 밀양 할머니들의 땅을 함께 지켰기 때문에, 제주 강정 앞바다의 군사기지 공사를 반대했기 때문에, 부당하게 해고당한 노동자들의 고통과 함께했기 때문에, 대통령과 정부를 노골적으로 비판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예술가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법률의 보호를 받는 것이 아니라 법률의 처벌을 받고 있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예술이 불편한 지배권력은 예술에 대한 구속을 강화하고, 법리적 가치나 민주주의 원리보다는 권력관계에 익숙해진 법원은 앵무새처럼 ‘실정법’을 반복하며 예술을 처벌하는 법률자판기로 전락했다.

희망버스 유성기업 고공농성장으로 (출처 : 경향DB)


이런 예술 탄압에 저항하기 위해 11일 오전 8시 서울 대한문 앞에서 부산고등법원을 향해 버스가 출발한다. ‘법보다 예술 버스’라 불리는 이 버스에는 ‘희망버스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서게 된 박래군, 송경동, 정진우의 재판에 함께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탑승한다. 사회적 기획으로서 예술의 역할과 가치를 널리 알려준 희망버스운동에 대한 존중과 법률적 판단을 지켜보기 위해 예술가들 역시 이 버스에 탑승할 것이다.

우리는 희망버스운동이 법률적으로는 위험한 경계에 서 있을지 몰라도, 예술적으로는 거대한 자본의 모순을 고발하며 사회적 죽음을 강요당하던 한 노동자와 다수의 시민들이 함께 교감하고 연대했던 사회적 사건이라 확신한다. 희망버스운동은 현대 예술의 관점에서 본다면 놀라운 ‘관계의 미학’이자 파격적인 ‘공공예술’이다.

우리는 기대한다. 오늘 부산고등법원이 대한민국 헌법 제22조를 기억하기를, 지배권력의 폭력을 고발해온 불온하고 용기 있는 예술들을 법률적 가치로 보호하기를. 물론 그 결과와 무관하게 예술들은 결국 청와대, 국회, 법원 그리고 교도소 위를 거닐 것이다. 늘 그랬듯이. 그것이 예술이 해야 할 중요한 사회적 역할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원재 | 문화연대 문화정책센터 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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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나 자신을 위해 연주한다. 청중에 대해선 아무런 관심도 없다.” 피아니스트 스비아토슬라프 리히터가 남긴 말입니다. 일견 오만하고도 독단적인 이 발언은 특정 경지에 이른 어느 음악가의 독특한 예술관과 확신을 동시에 보여줍니다. 그는 현실과의 타협을 거부하며 음악의 이상적 완성만을 고집했고, 이것은 예술가의 정당한 소신으로써 인정받았습니다.

교향악단은 이에 필적할 정도로 확고한 성향과 신념들로 충만한 예술가들이 모인 집단지성체입니다. 1842년에 창단된 빈 필하모닉 오케스트라가 1997년까지 여성 연주자의 채용을 거부했고, 원전악기의 사용을 고집하며, 상임지휘자 제도를 배제한 채 단원들이 직접 객원지휘자들을 임명하는 관행은, 그러한 행동양식에 담긴 당위성의 존부를 차치하더라도, 세계 최고의 교향악단을 추구하는 예술관에 대한 그들만의 지독한 확신을 투영합니다.

이와 같은 음악가들의 독립적 가치관의 개진은 테뉴어, 즉 종신재직권이 뒷받침되기에 가능한 일입니다. 세계 유수의 교향악단들은 예외 없이 소속 단원들의 종신재직권을 보장합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뉴욕, 보스턴, 시카고, 클리블랜드, 필라델피아 오케스트라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그들이 추구하고자 하는 예술적 자유와 소신을 보호할 필요가 있다는 사회적 공감대가 형성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이로써 자신들의 이상을 관철시킬 수 있는 (설령 그것이 대중이나 비평세력 또는 윗선의 입맛에 반하는 것일지라도) 동력을 확보할 디딤돌이 마련되는 것입니다.

KBS교향악단 음악감독 요엘 레비 (출처 : 경향DB)


한동안 이슈가 됐던 KBS 교향악단과 함신익 지휘자 사이의 불협화음은 우선 예술적 소신의 개진이라는 관점에서 접근할 필요가 있습니다. 단원들은 지휘자의 비전이 자신들이 지향하는 음악관에 부합하지 않는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이것이 예술적으로 적확한 판단이었는지 여부는 우리가 섣불리 평가할 수도, 해서도 안될 사안인지 모릅니다. 교향악단이라는 고도의 집단지성이 스스로 결론내릴 수 있는 고유 권한임을 양해할 필요가 있기 때문입니다. 단원들의 완강한 거부에도 불구하고 특정 지휘자의 임명을 강행한 KBS 사측과의 사이에 일부 불미스러운 일이 벌어졌다고 하여서, 문제의 본질을 “꼰대들의 억지” 또는 “밥그릇 싸움” 정도로 단정 짓는 것은 타당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악단의 60년 역사에서 전례가 없는 초유의 저항이자, 단원들의 결집에서 비롯된 진정한 의미의 투쟁이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강조돼야 할 부분이 있습니다. KBS 교향악단 사태는 테뉴어라는 안전장치가 없었더라면 위축될 수밖에 없었던 예술적 신념의 발현이었다는 사실입니다. 단원들이 연주수준을 타협해야 할 정도의 위험을 인지한 상태에서조차 아무런 저항 없이 굴복했다면, 그것은 오히려 예술가의 혼을 팔아먹은 비겁행위로 지탄받아야 마땅할 일입니다. 일부 언론보도와 달리 아직도 내홍 중인 KBS 교향악단 사태의 본질은 바로 이것입니다. 교향악단을 법인화함으로써 사실상 단원들에 대한 테뉴어의 보장을 철회한 사측과, 이를 복구하기 위해 사법적 쟁송까지 불사한 단원들 사이의 충돌이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은, 예술가의 정당한 소신이란 무엇이고, 우리 사회가 이를 보호할 의지가 있는지에 대한 진지한 성찰에 다름없습니다.


정우람 | 미국 변호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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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년 새해가 밝았다. 2014년의 어두운 그림자가 마음에서 채 씻겨나가기도 전에 2015년의 뜨거운 해를 다시 마음으로 받았다. 마음에서 마음으로. 우리의 마음은 그렇게 걸러내지 못한 것들이 계속 쌓이면서 두꺼운 퇴적층을 형성한다. 분노를 용서로 바꾸지 못하면 더 깊은 분노가 쌓이고, 절망을 희망으로 대체하지 못하면 희망의 싹은 없어진다. 우리는 2014년의 분노와 절망을 깨끗히 씻어내고 2015년을 맞이했는가? 풍성했던 잎을 떨궈야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는 나무처럼 지난 감정의 묵은 때를 벗겨야만 옹골찬 미래를 열 수 있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2014년의 감정을 걸러내고 정화해야 한다. 그렇게 감정의 응어리를 푸는 데 예술만 한 것이 없다.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영혼을 울리는 예술이다.

영혼을 울린다는 것은 무엇인가? 바로 기쁨과 행복, 사랑 등 영혼의 본성을 깊이 느낀다는 것이다. 예술을 통해 우리는 경이로운 고요와 평화, 짜릿한 전율과 희열, 지극한 기쁨과 행복, 무한한 사랑과 초월적 에너지 등 내면의 다양한 느낌을 체험하게 되는데 이런 느낌을 절정으로 경험할 때가 바로 자신의 영혼과 만나는 순간이다. 느낌은 영혼의 언어이고 영혼은 느낌을 통해 우리에게 말을 걸어온다. 우리가 예술을 통해 영혼을 충만하게 느끼고 그 충만함을 일상으로 끌어들여 어지러운 내면을 덧칠할 때 우리는 지난 과거를 온전히 정화할 수 있다.


예 술을 통해 맛보는 찬란한 기쁨은 해묵은 감정의 찌꺼기들은 눈녹듯 녹게 하고, 뜨거운 희열은 아물지 않은 아픔과 상처에 새살을 돋게 한다. 영혼의 느낌 안에서 내면에서 분출하는 밝은 빛을 발견할 때 우리는 과거를 잊고 새롭게 나아갈 수 있다. 우 리는 오직 영혼을 통해서 과거의 ‘나’가 아닌 전혀 새로운 ‘나’, 자신의 삶을 자신이 원하는 방향으로 의식적으로 창조할 수 있는 무한한 에너지를 가진 ‘나’로 다시 태어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예술은 영혼을 깨우는 신성한 도구이다.

이제 새로운 시작이다. 깊은 울림과 진한 감동, 오랜 여운을 주는 영혼을 울리는 예술을 즐겨보자! 클래식도 좋고, 국악도 대중음악도 좋다. 오래된 음악일수록 영혼의 향기가 강하다. 그런 예술을 통해 고요한 기쁨과 희열을 맛보며 지난 과거를 떠나보내자! 이왕이면 구체적으로 상상하는 것이 더 좋다. 영혼의 느낌이 아침의 햇살처럼 피어오를 때 마음의 찌꺼기들이 발바닥을 통해 빠져나간다고 상상하는 것이다. 지난해 힘들게 했던 모든 것들이 사라진다고 이미지로 그리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은 한결 가벼워지고 내면에는 기쁨이 차오를 것이다. 비워야 채울 수 있는 삶에서 예술은 우리에게 빛나는 보석이다. 지금 우리에겐 영혼을 울리는 예술이 필요하다.


이장민 | 문화영성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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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인 서바이벌 오디션’이라 불리는 케이블채널 스토리온의 프로그램 <아트 스타 코리아>가 이달 말 방영을 앞두고 있다. 미술인을 대상으로 한 첫 서바이벌 오디션 프로그램을 둘러싸고, 미술계의 의견은 크게 엇갈리고 있다. 긍정적 영향을 강조하는 미술인들은 <아트 스타 코리아>가 일반인들의 미술에 대한 관심을 높여 미술의 대중화를 이룰 것이라고 본다. 또 선정된 작가에 대한 갖가지 파격적인 지원이 있는 만큼 새로운 미술가의 발굴과 양성에도 이바지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부정적 파장을 우려하는 미술인들은 상업성으로 인해 미술, 미술인이 지닌 문화적·예술적 가치를 크게 훼손한다고 말한다. 나아가 미술에 대한 대중화는 이룰지 몰라도 현대미술에 대한 갖가지 오해를 더하고, 한국 현대미술의 하향평준화 등 부작용이 더 크다고 주장한다.

■ 작가들 소통 통로이자 대중엔 미술 이해도 높여

<아트 스타 코리아>에 대해 많은 이들이 궁금증을 갖고 있다. 필자는 직접 심사위원을 맡고 있기 때문에 이 프로그램에 대해 객관적인 관점을 피력하는 것이 어려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시청자나 관객들이 관점을 취하는 데 다소 도움이 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여 글을 쓴다. 이 프로그램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2010년 6월 미국에서 방송돼 두 시즌이 제작된 나 2009년 11월 영국에서 4부로 방송된 의 한국판 프로그램일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그리고 미술을 상업화한 예능 프로그램에 불과한 것이라는 등 주로 부정적인 우려가 주를 이뤄왔다.

이 프로그램에 대한 부정적 시각의 핵심은 ‘상업적 예능’이라는 것이다. ‘상업적’이라는 표현의 의미는 대기업이 운영하는 오락 연예 채널에서 예술가들을 이용한 흥행이나 돈벌이를 한다는 것이고, ‘예능’이라는 표현의 의미는 결국 대중들의 흥미를 충족시켜 주기 위해 예술가들을 동원한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이와 더불어 젊은 예술가들에게 단기간에 작품을 만들도록 강요함으로써 예술창작에 요구되는 최소한의 여건(창작에 소요되는 시간)조차 박탈해 버린다는 문제도 제기되고 있다.

이런 프로그램에 미술계의 내로라하는 전문가들이 참여한 것이 더 큰 문제라는 의견도 나온다. 실제로 필자 역시 이 프로그램에 참여하는 게 타당한지에 대해 많은 고민을 할 수밖에 없었다. 미술이 패션이나 디자인과 다른 점은 예술가들의 창작이 일차적으로 영리를 목적으로 하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물론 그것이 추후에 상업적 매매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다).

또한 현대미술은 다른 어떤 분야보다 당대의 철학과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 자본으로부터의 독립성과 철학적 비평은 동시대 미술의 두 축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럴진대 동시대 미술을 방송에서 게임 형식의 서바이벌로 다룬다는 것은 큰 문제라고 느낄 수 있다. 그러나 과연 이런 문제들이 있다고 비난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많은 문제제기에도 불구하고 필자는 두 가지 점에서 이 프로그램을 긍정적으로 보고 참여하기로 했다. 첫째는 이 프로그램이 폭넓은 시청자들에게 동시대 미술의 창작과 비평적 전개과정을 보여주고 이해시키는 매우 흥미로운 형식이 될 수 있다는 점이다. 동시대 미술을 자신의 업으로 삼고 있는 많은 젊은 미술가들에게 가장 커다란 어려움은 대중들의 무관심과 몰이해다.

그렇다고 작가들이 대중에게 자신의 창작에 대해 알릴 수 있는 통로가 있는 것도 아니다. 텅 빈 전시장, 버려지는 도록이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게 현실이다. 사회 전체가 시각예술을 별세계의 일로 치부하는 현실에서 창작과정을 적나라하게 보여줄 수 있는 방송 프로그램은 당연히 중요한 계기가 될 수 있다. 물론 게임과 같은 포맷보다 작가들을 한 사람씩 자세하게 다루는 방송을 만들면 더 진지하게 느껴질 테지만 현실적으로 그런 일은 일어나기 어렵다. 우리나라는 문화 관련 방송 프로그램이 거의 고사하다시피 한 예능천국이지 않은가.

두 번째는 개인적으로 이 프로그램을 예능으로만 보고 있지 않다. 시청자들의 흥미를 위한 장치들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많은 지식 기반 리얼리티 쇼들이 그러하듯 동시대 미술에 대한 이해와 평가에 많은 부분을 할애한다. 게임의 형식을 띠고 있으면서도 시청자들의 이해를 높이고 예술에 대한 관심을 증진시키는 방향으로 많은 이들이 노력하고 있으며 무엇보다 참여 작가들의 열정이 가장 중요한 내용을 이루고 있다. 차제에 더 많은 ‘탁월한’ 미술 관련 프로그램들이 공중파와 케이블에서 다루어지길 바란다. 하지만 현재로선 이 프로그램이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말하고 싶다.

<유진상 | 계원예술대 교수>

미술대학 실기시험 (출처: 경향DB)


■ ‘대중성’ 잡겠다고 ‘예술성’ 놓치는 우 범해선 안돼

서바이벌 프로그램 바람이 열풍을 넘어 가히 태풍 수준이다. 방송사들마다 앞다투어 가수, 디자이너, 요리사 등의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속속 등장시키더니 급기야 미술 분야에서도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방영을 앞두고 있다. 이 프로그램도 장단점을 갖고 있겠지만 장점보다는 단점이 마음에 자꾸 걸리는 이유는 왜일까. 우선 서바이벌 프로그램이라는 특성 때문에 많은 시청자들을 끌어모아 방송사가 말하는 것처럼 미술에 대한 관심을 제고할 수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미술이라는 문화적·예술적 가치를 폄훼하지나 않을까 두려운 것이 사실이다. 한국 사회를 지탱해온 전통이라든가, 사람의 됨됨이를 결정하는 지혜, 앎, 그리고 예술과 정신에 대한 태도나 이해는 심각할 만큼 가볍고 하찮은 것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는 예전에 비해 좀 살 만해졌다고 으스대는 사람들의 오만함 때문이다. 또 어떤 가치보다 우선하는 배금주의나 황금만능주의로부터 기인한다. 인문학에 대한 열풍이 인문학을 발전시키기보다는 인문교양 수준으로 전락하고, 미술은 기호와 취미에 봉사하는 수준에서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있다. 천만 관객이 든 영화는 모두 명화일까. 예술영화 한 편 변변하게 상영하는 영화관을 찾아보기 힘든 현실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요즘 전시장에서 만나는 그림들을 보면 과일 가게나 디저트 가게에 온 것 같다. 울긋불긋하고 고만고만한 장식용 그림이 그 의미도 불분명한 ‘코리안 팝아트’라는 이름을 달고 버젓이 존재한다. 이태원이나 삼각지 매장 또는 신규 입주하는 아파트 정문 옆 노점에 있어야 할 기호와 취미에 봉사하는 그림들이 화랑 벽면을 차지하고 있다. 그래서 때로는 앞으로 50년, 100년 뒤 우리 시대를 증거할 미술품의 수준을 상상해보면서 가위눌릴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이렇게 절박한 한국 미술의 처지에 대중화란 토끼를 잡겠다고 예술성이라는 토끼를 놓치는 우를 범해서야 될까.

경제적 성공과 실패가 예술적 성취, 아니 성공과 비례한다고 믿는 현실에서 과연 이에 편승한 서바이벌 프로그램이 지니는 의미는 무엇일까. 세상에는 장식용 그림도 필요하지만 고민과 진지한 자기성찰 끝에 나온 미술품도 필요하다. 당대의 미술이 현상을 넘어 역사가 되려면 후자여야 한다. 하지만 ‘악화가 양화를 구축하는 것’이 인지상정인지라 한국 미술도 이 프로그램으로 인해 얻는 것보다는 잃을 것이 더 많아 결국 하향평준화하고 말 것이라는 우려가 앞선다. 하향평준화를 통해 얻는 미술의 대중화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아모레퍼시픽 ‘현대미술에 마음을 열다 강형구 작가전’을 관람하고 있는 직원들. (출처 :경향DB)


미술이라는 예술적 속성, 특히 현대미술이라는 특성을 외면하고 일주일 만에 새로운 과제를 받아 오직 생존하기 위해 작품을 만들어내야 한다면 이는 마치 양계장의 산란용 닭의 처지와 무엇이 다른가. 미술은 많은 시간 숙성시켜야 맛을 내는 간장이나 된장 같은 존재다. 물론 반짝하는 아이디어로 순간적으로 좋은 작품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하지만 시간에 쫓기듯 만든 작품을 작품이라 할 수 있을까. 차라리 진기명기에 가깝다. 따라서 이 프로그램은 대중화에는 성공할지 모르겠지만 현대미술에 대한 오해만 더하는 꼴이 될 것이 자명하다.

사실 십수년 이상을 신진 작가 발굴을 위해 존재해온 공모전들이 있다. 하지만 그 공모전의 대상을 수상했던 작가들 중 역량 있는 작가로 성장한 경우는 1%에도 미치지 않는다. 서바이벌 프로그램을 통해 배출될 작가들의 미래도 이로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세상에는 지켜야 할 원칙들이 있다. 그 원칙이 무너진 사회의 미래를 과연 상상할 수 있을까. 베스트셀러도 좋지만 묵묵하게 세상을 지켜나가는 스테디셀러는 더욱더 필요하고 중요하다. 이 시간에 차라리 제대로 된 문화예술 프로그램을 하나 신설하면 안될까. 대중화와 문화복지를 위해서 말이다.

<정준모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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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화가 잭슨 폴록의 ‘넘버 5’가 그림 거래 최고가인 1억4000만달러(약 1313억원)에 팔렸다. 사람들은 비현실적인 가격에 놀란다. 그리고 가격 책정의 근거와 구매 동기에 미심쩍은 시선을 보낸다. ‘도대체 그 그림이 뭐 길래 그 액수를 주고 샀지?’ 마치 어떤 예술가의 정신적 가치도 그 액수로 평가되어선 안 되고, 어떤 수집가의 그림 사랑도 그 액수로 표현되어선 안 된다는 듯이. 그림 하나가 온 가족이 평생 번 돈을 다 합해도 살 수 없다는데, 누군들 짜증나지 않겠는가. 그 누군가가 마침 그림을 사랑하는 이라면 더욱 화가 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림에 대한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가격과 무관하게 편한 마음으로 미술을 즐길 수 있다.


잭슨 플록의 ‘넘버 22’ (경향DB)



그림 시장은 ‘예술적 가치∈미술사적 가치∈경제적 가치’의 세 가치의 조합으로 가격을 결정한다. 예술적 가치는 미술사적 가치에 반영되고, 미술사적 가치는 경제적 가치에 반영되는 논리적 구조라고 보면 된다. 예술적 가치부터 보자. 예술작품은 삶을 획일화하는 외부에 맞서 고유한 개인의 내면을 드러내 온전한 소통을 열망하는 행위의 산물이다. 여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깊이 공감해, 자기 자신의 고유한 개별성을 발견하는가에 따라 예술적 가치는 결정된다. 화가와 관객의 행복한 내면적 만남의 순간이 가치발생의 지점이며, 행복의 정도는 관객의 주관이 절반을 결정한다. 이런 까닭에 예술적 가치를 그림이라는 대상의 보편적 교환가치인 가격으로 표현하는 것은 근원적으로 불합리하다. 예술적 가치가 평가가 용이한 미술사적 가치로 대체되는 이유다.

 


미술사적 가치는 얼마나 새로운 사조의 대표적인 작품인가로 평가된다. ‘넘버 5’는 잭슨 폴록이 창시한 액션 페인팅의 대표작이다. 액션 페인팅은 물감을 캔버스에 뿌리거나 튀겨 무정형의 추상화를 그리는 작법이다. 조형미보다 화가의 내면을 직접 반영하는, 그리는 행위 자체를 강조한다. 한마디로 화가의 내면을 사물의 매개 없이 직접 화폭에 전하려는 시도이자, 관객이 캔버스 너머를 보라는 요구이기도 하다. ‘넘버 5’의 미술사적 가치는 대단히 높다. 액션페인팅이 아방가르드 미술의 중심을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 놓은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미술사적 가치를 교환가치로 환산하는 기준은 없다. 결국 미술사적 가치 또한 그림 구매의 다양한 동기, 즉 경제적 가치의 한 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예술적 가치, 미술사적 가치와 무관한 경제적 가치는 어떤 것들인가? 부자들이 그림을 구매하는 동기는 복합적이다. 그림을 사고팔아 차익을 남길 수도 있고, 상속과 증여의 과세를 피하기 위한 돈세탁의 도구로 이용하기도 하며, 더러는 ‘행복한 눈물’처럼 로비 수단으로 삼기도 한다. 또 그림의 구매를 통해 문화적 소양을 뽐내면서 자본축적 과정에서 구겨진 이미지를 만회하려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그림은 탈세와 부정부패를 덮기 위한 고액권이며 위선적 가면에 불과하다.


리히텐슈타인의 원화를 패러디한 박순찬의 ‘행복한 눈물’ (경향DB)



물론 모든 고가의 그림 구매를 이런 경제적 동기로 일반화할 수는 없다. 예술적 가치에 대한 인정비용으로 수백억원을 썼다는 이도 있을 것이다. 1313억원을 주고 ‘넘버 5’를 구매한 멕시코 금융재벌 데이비드 마르티네스도 폴록의 내면과 만나는 것이 그렇게 행복했을까? 화가였던 폴록의 아내에 따르면 “폴록이 물감을 뿌리는 행위는 신음소리 같았다”고 한다. 액션페인팅을 통해 평생 알코올중독과 우울증에 시달렸던 고통스러운 내면을 표현하고자 했던 폴록과 성공한 금융재벌 마르티네스의 행복한 내면적 만남이 상상되는가? 폴록이 살아 있다면, 그림의 예술적 가치가 경제적 교환가치로 환산되는 이 광경에 대해 뭐라고 했을까?



예술적 가치는 가격과 무관하다. 문제는 그림 가격이 아니라 예술적 가치를 돈으로 계산하는 태도다. 진본 소유가 그림을 즐기는 유일한 방법도 아니다. 중요한 건 캔버스를 통해 화가의 내면과 접속하고자 하는 열망이다. 그게 있다면 복사본을 거실에 걸어 놓아도 화가 사후에 진본에 1000억원을 쓰는 것보다 더 정중하게 예의를 표하는 것이리라.




[정동칼럼] 남재일 |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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