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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 오통의 생라자르 대성당은 중세 로마네스크 건축양식의 귀중한 보고다. 문맹인이었던 대다수의 신자들에게 보다 효율적으로 성서의 내용을 전달하기 위해 소박하고 단순하게 표현된 것이 오늘의 시각으로 보면 더할 수 없이 감동적이다. 이런 독특한 이미지 중에서도 유달리 시선을 고정시키는 형상이 있다. 전혀 압도적이지도, 스펙터클하지도 않지만 은근히 미소를 자아내게 하는 이 작품은 천사가 동방박사에게 예수 탄생을 알리는 장면이다.

동방박사는 예수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팔레스타인 동쪽에서부터 온 현인 혹은 점성가이다. 이 장면은 동방박사들의 꿈속에 천사가 나타나 “저 별을 따라가라. 왕이 나셨다”고 계시하는 모습이다. 세 명의 동방박사가 마치 한 몸처럼 한 이불을 덮고 있는 모습이 이채롭다. 삼위일체의 메타포라도 되듯 말이다. 그때 한 천사가 와서 양손으로 무엇인가를 가리키며 세 사람을 깨운다. 두 사람은 깊은 잠에 빠져 있고, 한 사람은 천사가 깨워서인지 이제 막 눈을 뜬 품새다.

심상찮게 다가오는 것은, 천사의 두 손끝이다. 한 손끝은 불꽃처럼 생긴 별을 가리키고 있다. 다른 한손 검지 손끝은 동방박사의 새끼손가락 끝을 찌르고 있다. 특히 손가락은 천사의 전체적인 모습과는 달라도 한참 다르다.



동방박사의 꿈, 1120~1130, Cathedral of Saint-Lazare, Autun, 프랑스



후광을 두른 고졸한 천사의 모습은 귀엽고 순진해 보인다. 앙다문 입과 손끝은 사태의 긴박함을 나타내기에는 다소 미흡해 보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름 세계를 구원하려는 미션의 수행자로서의 절박함을 표현한 것 같다. 그래서 천사의 손끝은 더 이상 손이 아닌 송곳이 되어 살갗을 찌르고, 급기야 동방박사의 부릅뜬 눈과 연결되는 것이다.

중세시대 이 조각을 만든 사람은 누구였을까? 남자였을까? 여자였을까? 아이였을까? 늙은이였을까? 여느 중세 조각가나 화가처럼 단순히 도안책과 공동체의 정해진 작업순서에 따랐던 단순한 장인이었을까?

그가 누구였든지 아마도 아주 소박한, 동시에 유머러스하고 대범한 인물이었을 것만 같다.



유경희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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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데곤(bodegon)’은 스페인의 정물화를 일컫는 말이다. 영어와 프랑스에서는 정물화를 각각 ‘스틸 라이프(still-life)’, 즉 움직이지 않는 생명 혹은 ‘나튀르 모르트(nature morte)’, 즉 죽은 자연이라고 부른다. 하지만 스페인에서는 선술집을 의미하는 보데가(bodega)에서 비롯된 ‘보데곤’이라는 용어를 쓴다. 그러니까 보데곤은 단순한 정물화가 아니다. 원래 그것은 술집이나 요릿집을 묘사하거나, 즐비하게 놓인 음식을 배경으로 서민의 모습을 보여주는 그림이었다.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가 그렇듯이 외면상 일상적인 소재이지만, 종종 도덕적이거나 종교적인 의미가 숨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이 장르는 펠리페 3세(재위 1598~1621) 치정하의 세비야 사람들이 특별히 좋아했다. 세비야화파는 17세기 전반기 스페인에서 가장 유력한 화가 집단이었다.

벨라스케스, 계란을 부치는 노파, 캔버스에 유채, 100.5×119.5㎝, 1618년, 스코틀랜드 국립미술관



세비야의 귀족으로 태어난 돈 디에고 로드리게스 데 실바 이 벨라스케스는 화가 초년 시절 보데곤의 훌륭한 선례를 남겼다. 놀라운 사실은 이 그림이 19세의 어린 나이에 그려졌다는 것! 캄캄한 부엌, 왼쪽으로부터 들어온 빛이 화면 앞쪽에 집중적으로 쏟아져 있다. 노파는 숯불 위에 얹힌 작은 질그릇에 계란을 부치고 있다. 야위고 초라한 노파는 소년에게 무언가를 말하는 듯 쳐다보고 있고, 멜론과 포도주병을 들고 있는 소년은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화면 밖을 째려보고 있다. 비천한 계급의 두 존재 모두 위엄과 품격이 예사롭지 않다. 또한 젊음과 늙음의 대비는 삶의 덧없음을 암시하며, 노파의 손에 들린 달걀은 죽음 너머에 또 다른 삶, 즉 부활이 있음을 의미한다.

벨라스케스는 인물 묘사는 물론 질그릇, 도자기, 금속절구와 그릇, 나무수저, 노끈, 바구니, 유리병, 칼, 양파, 고추 등의 세부를 일찍부터 마스터한 숙련된 기법으로 기막히게 묘사해내고 있다. 젊디젊은 화가의 냉혹할 만큼 섬세한 시선은 그로 하여금 미술사의 가장 위대한 작품 중 하나인 ‘시녀들’을 탄생시키게 했다.



유경희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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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딜롱 르동, 키클롭스, 캔버스에 유채, 1900년



키클롭스(Cyclops)는 외눈박이 거인족이다. 키클롭스는 ‘둥근 눈’을 의미하는 그리스어에서 유래했다. 키클롭스는 하늘의 신 우라노스와 그의 어머니이자 아내인 대지의 신 가이아 사이에서 태어났다. 우라노스는 눈이 하나밖에 없는 추한 모습의 거인 아들이 역겨워 오랫동안 지하세계의 가장 깊은 곳 타르타로스에 가두었다.

뛰어난 대장장이이기도 했던 그들은 훗날 가장 강력한 무기인 번개를 만들어 제우스에게 바치고 풀려난다. 이 키클롭스 중 하나인 폴리페모스(Polyphemus)는 오디세이의 모험 중 세이렌과 더불어 시각적 스펙터클을 보여주는 스토리의 주인공으로 유명하다. 오디세이 일행을 잡아먹고, 결국 오디세이의 지략에 의해 눈이 멀게 되는 스토리의 주인공 말이다.

그 외눈박이 거인이 어느 날 바다의 님프인 갈라테이아의 아름다운 모습을 보고는 지독한 사랑에 빠졌다. 갈라테이아는 이 거인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다. 어느 날 폴리페모스는 해변에서 갈라테이아가 그의 연인 아키스와 시시덕거리며 사랑하는 모습을 발견하고는 분노를 이기지 못해 커다란 바위를 던졌다. 갈라테이아는 바다로 몸을 피했지만, 아키스는 바위에 깔려 죽고 말았다.

로댕과 같은 해에 태어난 르동은 신비롭고 상징적인 화면을 구사하는 아주 독특한 화가다. 그가 그린 폴리페모스는 그 어떤 키클롭스보다 섬뜩하고 애처롭다. 르동은 유년시절 외숙부의 수양아들로 보내진다. 그는 형에게 애정을 듬뿍 쏟는 어머니를 보면서 스스로 버려진 존재라고 생각했다.

이런 외로움과 방치, 편애는 르동의 무의식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그래서인지 그림 속 갈라테이아를 훔쳐보는 키클롭스는 마치 르동처럼 어머니의 사랑을 갈구하듯 처연하게 훔쳐보고 있다. 눈 하나가 얼굴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키클롭스의 커다란 눈에서는 금방이라도 왈칵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다. 근원적 사랑의 결핍은 인간을 외눈박이로 만든다. 게다가 덩치만 큰 어른 아이로 말이다. 세상과 인간을 입체적으로 볼 수 없는 것이다.


유경희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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윌리엄 홀먼 헌트, 깨어나는 양심, 1853년, 캔버스에 유채, 테이트 갤러리


빅토리아왕조시대는 성에 관한 문제를 다루는 것을 엄격하게 제한하거나 금지했다. 당대는 여성을 두 부류로 나누었다. 순결하고, 모성적, 순종적인 결혼한 여성과 창녀와 더불어 결혼하지 않은 여성으로 말이다.

특히 후자는 비정상적인 쾌락으로 가정을 파멸시키고 질병을 퍼뜨리는 존재로 간주됐다. 사회가 비난한 것은 창녀를 찾는 남성들이 아니라 창녀들이었다. 여성에게만 도덕성을 강요하던 왜곡된 성윤리의 사회였던 것이다. 이처럼 빅토리아시대는 겉으로 보면 상당히 경건하고 규범적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엽기적이고 난잡한 스캔들이 난무하던 시기였다. 라파엘전파는 빅토리아시대의 이런 정조에 대한 비판적인 생각을 집요하게 그림으로 표현했다.

윌리엄 홀먼 헌트는 라파엘전파의 어떤 화가보다도 꼼꼼한 세부 묘사와 선명한 색채, 알레고리적인 도상을 잘 묘사하는 화가로 유명하다.

당대는 상류층 지식인 유부남들이 애인을 위해 집을 마련해주고 갖가지 진귀한 물건을 선물하는 게 유행이던 시대였다. 바로 이 그림 속 남녀가 그런 사이다. 머리를 풀어헤친 정부가 남자 무릎 위에서 갑자기 일어나고 있고, 남자는 예기치 못한 행동에 놀랐는지 난감한 표정과 손짓을 하고 있다.

먼저 피아노 위 악보에는 순수했던 지난날을 회고하며 슬퍼하는 내용의 노래인 ‘고요한 밤에는 자주’가 펼쳐져 있고, 바닥에는 라파엘전파가 애송하던 ‘눈물이여, 헛된 눈물이여’의 악보가 보자기에 싸여있다. 피아노 아래 흩어진 실타래는 타락과 혼돈을 드러낸다. 피아노 위의 꽃병은 바니타스, 즉 헛된 삶을 나타낸다. 정지된 시계를 안고 있는 여자는 순결을 잃고 타락한 여자를 의미하는 듯하다. 이렇게 타락한 여자의 삶은 테이블 밑에서 고양이가 희롱하고 있는 죽은 새의 운명과 같다는 의미다.

그러나 이 여자는 불끈 일어섰다. 거울에 비치는 창밖의 세계, 즉 그녀는 상쾌한 공기와 풍요로운 빛, 자유가 넘치는 세계가 있다는 것을 깨닫는 중이다.



유경희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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헨리 푸셀리, ‘악몽’, 1781년, 캔버스에 유채, 101×127㎝, 미국 디트로이트미술관


한밤중의 침실, 한 젊은 여성이 침대에 나른하게 누워 잠을 자고 있다. 상반신은 침대 아래로 크게 젖혀져 있고, 목은 활처럼 굽었으며, 입술은 살짝 벌어져 있고, 볼은 어렴풋한 홍조를 띠고 있다. 게다가 실루엣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잠옷으로 보태진 몸의 굴곡이 커튼과 휘장 그리고 분홍, 노랑, 붉은색 등의 겹겹이 늘어진 시트와 중첩되면서 우아미가 더욱 고조되고 있다.

헨리 푸셀리는 스위스 출신 화가로 영국에서 활동했다. 런던의 왕립아카데미 교수로 명성이 높았지만 사후 잊혀졌고, 현대에 와서 재평가되었다. 아직 정신분석학과 같은 무의식과 욕망이라는 개념에 천착한 학문적 연구가 부재한 시절, 푸셀리는 셰익스피어와 밀턴 같은 영국의 대문호에 영감을 받아 ‘꿈과 악몽’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1781년 ‘악몽’을 전시했을 때, 영국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작가는 꿈속에서 악마한테 시달리는 여인을 묘사한 것이라고 했지만, 두 기이한 괴물은 성적 쾌락을 탐닉하는 퇴폐적인 장면으로 간주되었다.

붉은 커튼 사이로 머리를 내민 백마는 섬뜩한 눈과 흥분한 듯한 콧구멍과 입, 발딱 선 귀, 불길이 타오르는 듯한 갈기를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잠든 여성의 야성 혹은 마성을 의미한다. 더욱 무시무시한 대상은 여성의 배 위에 묵직하게 올라탄 괴물이다. 뿔이 난 머리, 툭 튀어나온 눈, 울퉁불퉁한 미간, 억센 입술, 두둑한 턱은 물론 손톱이 긴 굵은 손가락, 뱀처럼 생긴 귀 등은 추와 악의 표상이다. 유럽 설화에는 잠든 여성을 꿈속에서 강간한다는 남자 몽마(夢魔)가 있는데, ‘위에 올라탄다’는 뜻에서 ‘인큐버스(incubus)’라고 부른다. 이처럼 공포와 쾌락을 주는 몽마가 여성에게 음란한 꿈을 꾸게 만드는 괴물이라는 것. 사실 이 그림은 푸셀리가 연모했으나 결혼을 거절당한 안나 란돌트에 대한 복수의 환상이라고도 한다. 당시 이 그림은 판화로 복제돼 수많은 사람들이 소장했다. 가장 인상적인 소장처는 프로이트의 상담대기실이었다.



유경희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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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네, 앵무새와 함께 있는 여인(빅토린 뫼랑), 1866년, 뉴욕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마네가 가장 사랑했던 모델 중 모델은 빅토린 뫼랑이었다. 서양미술사의 패러다임을 바꾸었다고 할 수 있을 만큼 중요한 작품인 ‘풀밭 위의 식사’와 ‘올랭피아’의 모델이 바로 그녀다. 마네는 1860년대 쿠튀르 화실에서 그림을 배우던 시절, 모델을 서던 그녀를 만났다. 1862년부터 1874년까지 그녀는 마네가 가장 아끼고 좋아하는 모델이었다. 마네는 어떤 여인에게 모델을 서 달라고 부탁했다가 그 여인이 주저하자 “싫으면 관두라지. 나에게는 빅토린이 있으니까”라고 했다고 한다.

붉은색에 가까운 갈색 머리카락을 단정히 넘긴 빅토린 뫼랑이 헐렁한 분홍색 실내복을 입고 서 있다. 오른쪽 옆의 앵무새는 17세기 네덜란드 정물화에서 사치와 퇴폐 혹은 성모를 상징하기도 한다. 사실 이 그림은 인물화인지 정물화인지 모호할 정도로 정물화에서 곧잘 보여주는 오감을 드러낸다. 보랏빛 바이올렛은 후각, 레몬은 미각, 헝겊 목걸이는 촉각, 외눈돋보기는 시각, 앵무새는 청각을 상징한다. 사실 이런 알레고리에는 훨씬 깊은 뜻이 있다.

이 그림은 ‘올랭피아’의 서 있는 버전이라고 한다. 그뿐만 아니라, 당대 남성 중심의 아카데미즘에 입각한 전형적인 누드들, 예컨대 알렉상드르 카바넬의 비너스의 누드 혹은 쿠르베의 레즈비언적 누드 혹은 동방 취미가 가득한 누드들에 대한 반기라고도 한다. 마네는 어떤 방식으로든 당대의 모든 속물 취미를 은근히 조롱하고 저항하는 개념적 미술을 선보였던 이단아였음이 틀림없다.

이 그림처럼 마네의 오감을 자극했을 것으로 보이는 빅토린 뫼랑이라는 여자가 궁금해진다. 사실 당대 모델이라는 비천한 계급인 그녀는 단순히 모델만 선 것이 아니다. 여성들을 위한 아틀리에에서 그림을 배웠고, 줄리앙 아카데미의 이브닝 클래스를 다니기도 했다. 그녀는 당대의 아방가르드 예술가들과 어울리면서 시대를 비웃을 줄 알았고, 결국 화가가 되었다. 혹 그녀는 카미유 클로델과 마찬가지로 시대를 잘못 타고난 파괴적인 지성의 소유자가 아니었을까?!


유경희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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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센트 반 고흐, ‘협죽도가 있는 정물’, 캔버스에 오일, 73×60㎝, 1888년, 메트로폴리탄 미술관


빈센트 반 고흐는 1886년 프랑스 파리로 옮긴 이후 꽃병 연작을 그렸다. 1886년부터 1888년까지 꽃 그림은 40점이 넘을 정도다. 아마 모델을 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었으리라. 이후 남프랑스 아를에서 ‘해바라기’보다 더 아름답고 드라마틱한 정물을 그렸다. ‘협죽도가 있는 정물’이다.

남프랑스의 눈부신 햇빛에서 사물이 얼마나 밝고 화사하게 보이는지를 몸소 깨달은 반 고흐는 이 그림에 노란색, 붉은색, 밝은 녹색, 푸른색을 사용해 보색 대비효과를 나타내려 했다. 화면 중앙의 녹색 잎과 주황색 꽃은 서로 색채대비를 이루고, 꽃병의 푸른색은 배경과 탁자의 책에 쓰인 노란색과 상생하며 더욱 도드라져 보인다. 구도적으로 반 고흐는 테이블과 꽃병을 화면의 오른쪽에 약간 치우치도록 배치했다.

그렇지만 이파리를 왼쪽으로 뻗치게 배치함으로써 균형과 율동감을 동시에 부여했다. 이렇게 한쪽으로 쏠리는 구성과 이를 보완하는 긴장과 균형은 아를 시기의 정물화에 주로 나타난다. 아마도 반 고흐의 파토스(pathos), 즉 비애에 대한 열정과 감정적인 기복을 잘 드러내는 것이리라.

테이블에 놓인 책은 반 고흐가 아껴 읽었던 에밀 졸라의 <생의 기쁨>이다. 흥미로운 것은 이 책이 탁자 위 모서리에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다는 것. 상당한 독서가로 그림만큼 꽤나 글을 잘 썼던 반 고흐는 특별히 이 책에 매료되었던 것 같다. 그러나 목사였던 아버지는 이 책을 읽는 아들을 못마땅해했다. 아들이 교회에 나가지 않는 등 타락한 가장 큰 이유가 프랑스 소설을 지나치게 많이 읽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특히 <생의 기쁨>이 신의 존재를 부인한다며 격분했다. 그러니 이 그림은 부자 사이의 반목과 갈등을 암시하기도 한다. 어쨌거나 반 고흐는 아버지를 거부할 수밖에 없었다. 꽃이 책을 향해 뭉게뭉게 피어나고 있는 것을 보면 말이다. 사실, 여름이야말로 책읽기에 아주 좋은 계절이다. 이번 휴가에 반 고흐의 편지들을 동반해야겠다.



유경희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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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미술가 데이비드 호크니는 사물이 살아남는 두 가지 조건에 대해 말했다. 사물이 단단한 물질로 만들어져서 시간의 영향을 견디거나, 누군가가 그것을 사랑하는 것! 어느 편이 더 예술작품을 온전히 살아남게 만들겠는가.

1966년 르네상스의 보고인 피렌체에서 큰 홍수가 났다. 아르노강이 범람해 도심의 성당과 미술관의 작품들이 진흙 더미로 뒤덮여버렸다. 그중에서도 도나텔로의 ‘막달라 마리아’(1457년경)는 구제되어야 할 최상위급 작품이었다. 브루넬레스키의 건축, 마사초의 회화와 더불어 조각에서 르네상스 양식의 창시자였던 도나텔로는 한 세례당을 위해 막달라 마리아를 조각한다. 예수의 여제자이자 성녀인 막달라 마리아는 초기 기독교 미술에서 예수의 발에 향유를 바르는 장면이나 예수가 매장되는 장면 등 예수와 함께 등장하는 경우가 많다.

특이하게도 실물 크기의 독립적인 이 조각상은 이전의 젊고 아름다운 막달라 마리아가 아니다. 도나텔로는 그를 참회하는 고행자의 모습으로 표현했다. 모든 것이 덧없고 의미 없음을 깨닫게 된 후 회개하기 위해 사막으로 들어가 고행하는 모습 말이다. 나무로 만들어진 이 조각품은 유연한 재질의 재료를 표면에 덧붙이고, 그 표면에 붓질로 색을 입혀 한층 사실적으로 보이도록 제작되었다. 좀 드물게 도나텔로가 견고한 대리석 대신에 부패하기 쉬운 나무를 사용한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아마 부패하기 쉬운 물질성을 가진 육체에 대한 메타포가 아니었을까? 오히려 쇠잔한 육체 속에 깃든 인간 영혼의 불멸성을 더욱 상기시키기 위해서 말이다.

도나텔로는 절제와 금욕으로 늙고 쇠약해진 막달라 마리아의 모습을 완벽하게 묘사해냈지만, 한 군데 의심스러운 세부가 금세 눈에 띈다. 바로 기도하는 듯한 손의 형상이다. 손은 막달라 마리아의 것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젊고 아름답고 섬세하다. 이 손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름다웠던 육체는 피폐해졌으나 내면은 한층 고결해졌다는 의미가 아닐까.


유경희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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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스타브 카유보트, 비 오는 날-파리의 거리, 1877년, 캔버스에 유채, 시카고아트뮤지엄



인상파 작품의 컬렉터였던 귀스타브 카유보트는 부르주아의 독특한 시선으로 파리 풍경과 파리인을 그린 화가이다. 그의 대표작 ‘비 오는 날-파리의 거리’는 파리 생라자르 역 근처의 더블린 광장을 묘사한 것이다. 우산을 쓰고 거리를 걷는 성장한 남녀들은 스스로를 볼거리, 즉 스펙터클의 대상으로 가시화하기를 좋아하는 근대의 부르주아들이다. 보들레르는 보는 동시에 보여지는 도시의 이런 구경꾼들을 ‘플라뇌르(Flanuer)’, 즉 산책자라고 명명했다.

19세기 중반 파리는 오스망 남작에 의해 도시개발 사업이 진행되면서 중세의 낡은 건물이 사라지고, 3, 4층의 적당히 높고 세련된 건물이 들어서는 한편 좁고 복잡한 중세의 길들이 넓고 반듯한 포장도로로 바뀌었다. 게다가 하수시설이 개선되니 오물로 질척거리는 더러운 거리가 아니어서 비 오는 날도 거리를 활보하게 된 것이다. 그러니까 포장된 도로는 매끈하고 질척거리지 않아서 비오는 날의 산책을 가능하게 했던 것이다.

특별히 사진에 관심이 많았던 카유보트는 사진의 도움으로 이 그림의 구도를 설정했다. 사진의 스냅샷 기법으로 주요 인물을 오른쪽으로 배치, 크게 확대한다. 왼편을 바라보는 그들의 시선은 도시풍경에 매혹된 시선이다. 남녀에게 시선을 빼앗기는 순간, 오른쪽 끝 몸의 3분의 1만 보이는 우산 쓴 남자가 눈에 들어온다. 화면의 정중앙에 최신식 디자인처럼 보이는 초록색 가로등을 배치해 역동적인 구도를 만들고, 밤의 도시가 얼마나 활기가 넘쳤는지를 가늠하게 한다. 그 뒤로 거리를 가로지르는 남자는 고개를 숙이고 상념에 젖어있는 듯하다. 마치 근대인의 고독한 내면을 보여주는 듯하다. 먼 배경의 인물들은 마치 대기원근법처럼 흐리게 묘사되어 있는데, 앞의 인물들에게 초점을 맞추다 보니 마치 아웃포커싱된 사진처럼 보이기도 한다. 카유보트의 비오는 풍경은 우중충하거나 우울한 기분을 느끼게 하기보다는 명징한 대기를 흠향하게 만든다. 차도의 블록과 인도의 표면이 물기로 코팅되어 상큼하게 느껴질 정도다.


유경희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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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시안 프로이트, 잠자는 사회복지감독관, 1995년


“나는 작품이 모델들에게서 비롯되기를 바란다.”

루시안 프로이트는 작품이 자신에게서 나오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가 가능한 한 모델들의 느낌과 감정에 동감하기를 바랐다는 말이다.

정신분석학자 지그문트 프로이트의 손자인 루시안 프로이트는 프랜시스 베이컨과 더불어 영국 구상회화의 독보적인 존재다. 베를린 태생으로 나치하의 오스트리아 유태인 가정에서 자란 그는 1933년 영국으로 이민을 오게 되었고, 런던은 그의 예술적 욕망을 위한 최적의 장소가 되었다. 전쟁의 참상을 목도한 후 예민하고 불안한 심리와 더불어 철학적 사유와 생명에 관심을 가지게 된 프로이트는 주로 인물초상을 그렸다. 누드가 아닌 벌거벗은 몸, 공허한 얼굴, 살찐 여자의 몸, 임신한 몸, 상처가 적나라한 조폭의 얼굴 등 그가 그려낸 얼굴과 몸은 그 누구의 것과도 흡사하지 않으며, 미술사의 그 어떤 초상보다도 존재감 있게 다가온다.

프로이트는 어떻게 기묘한 전율을 일으키는 강력하면서도 은밀한 인물들을 그려낼 수 있었을까? 사실 그는 뛰어난 관찰자이며 유머와 위트를 지닌 매력적인 이야기꾼이다. 어쩌면 그는 인물화를 환상적인 시보다는 비루한 일상에 근간한 소설로 그려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기에 그의 그림은 우울, 불신과 같은 감정의 레이어는 물론 피로와 권태, 노화와 죽음 같은 피할 수 없는 삶의 진실과 대면하게 한다.

여기 소파 위에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는 인간을 보라.

현상학자 메를로퐁티는 몸을 체화된 의식이라고 했다. 한 여자가 살아온 인생 여정이 파노라마처럼 스쳐가는 이 그림은 배제되고 소외된 존재로서의 현대인의 자화상이 아닐까?

프로이트는 여든이 넘어서도 매일 그림을 그렸다. 그것은 그만의 엄격한 자기비판과 과대망상적 야망의 조합으로 인해 가능한 것이었다. <내가 그림이 되다>는 루시안 프로이트의 생생한 육성을 경청하게 만드는 귀한 평전이다.


유경희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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케테 콜비츠, ‘독일 어린이들이 굶고 있다’, 석판화, 1924년


케테 콜비츠의 드로잉은 ‘살아 있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전쟁의 상흔을 그만큼 미학적으로 묘사한 화가가 또 있을까. 여자를 성적인 매력이나 여성다움으로 치부하던 시대에 ‘여류’라는 사실을 잊게 만든, 예술을 넘어선 경지의 예술을 보여준 이가 콜비츠다.

독일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콜비츠는 전쟁으로 아들을 잃은 세상 모든 어머니들을 대변한 여성이자 화가였다. 그는 평생 병든 사람들을 무료 진료한 의사인 남편과 동지로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런 콜비츠에게 닥쳐온 비극은 시대적인 것이었다. “아기의 탯줄을 또 한번 끊는 심정이다. 살라고 널 낳았는데, 이제는 죽으러 가는구나!” 1차 세계대전 때 열여덟 살밖에 안된 둘째아들을 잃고, 2차 세계대전에서는 손자를 잃었다. 그에게 이보다 더 큰 고통과 슬픔은 없었다. 이때부터 콜비츠의 판화는 전쟁으로 아들을 잃은 모든 어머니들을 대변하며 젊은이들을 더 이상 전쟁터로 끌고 가지 못하도록 하는 방편이 되었다. 그렇게 전쟁의 참혹함과 잔인함을 알리기 위한 일을 지속했다.

콜비츠의 그림이 절실하게 몸으로 파고들 듯이 각인되는 것은 그것이 드로잉에 근간한 작품(판화일 경우가 많다)이기 때문이다. 흑백이라는 절제된 목탄 드로잉의 특유한 파토스적 붓터치는 그대로 숭고한 생명력의 극치를 부여해 준다. 한국에서는 드로잉이라는 장르 자체가 회화로 불리지 못하고, 그저 습작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폄하되곤 한다. 콜비츠의 작품같이 견고한 드로잉 회화를 목도하는 날이 오길 기다리며, 또한 그것이 제대로 대접받는 풍토가 형성되기를 바란다.

지금으로부터 65년 전에 존재했던 저 퀭한 눈동자의 ‘우리의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초로가 되었을 그들의 눈동자는 또 어떻게 변해 있을까? 그들은 자기 눈동자를 잘 지켜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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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당이야, 하지만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신성한 기운이 느껴져. 한마디로 신의 예술이야!” 독설가로 유명한 드가가 고갱을 두고 했던 말이다. 주식중개인 출신의 고갱은 여느 화가들과는 다른 대범하고 마초적이며 로맨틱한 남자였다. 일요화가회를 전전하다가 늦은 나이에 미술을 시작한 만큼 그는 자기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분명히 알고 있었다.

시간을 허비할 수 없었던 고갱이 자주 찾았던 곳은 시골과 오지였다. 그가 남태평양 타히티로 떠나기 전 발견한 곳이 퐁타벤이었다. 사실 수년 전 메트로폴리탄뮤지엄에서 고갱의 타히티 그림을 보고 좀 실망했었다. 생각보다 훨씬 어둡고 탁한 화면, 아주 볼품없이 납작한 평면적인 화면 때문이었다. 그러나 퐁타벤에서 그린 고갱의 초기 그림은 달랐다. 아마도 인상주의적인 세심한 붓 터치와 풍부한 색채가 감각적으로 훨씬 더 매혹적이라고나 할까.

폴 고갱, 첫 꽃, 캔버스에 오일, 1888년


퐁타벤은 ‘브르타뉴의 베니스’라고 불릴 만큼 아름다운 항구도시다. 가난과 도시생활에서 구역질을 느낀 고갱은 1886년 퐁타벤에 도착한다. 그는 글로아넥 하숙집에 여장을 풀며 젊은 화가이자 평론가인 에밀 베르나르를 만나 퐁타벤파를 탄생시킨다. 울창한 떡갈나무와 너도밤나무 숲 사이로 고요히 흐르는 강물, 그 맑은 강물에 반사된 햇살, 구름, 나무 등은 화가들로 하여금 색채의 한계를 벗어나도록 고무했다. 고갱은 1888년 반 고흐의 초대로 아를로 떠나기 전까지 이곳에 머문다. 그리고 그는 자주 퐁타벤으로 돌아오곤 했다.

특히 퐁타벤에서의 고갱의 색채는 아직 도래하지 않은 세계에 대한 기대와 환상으로 가득 차 있다. 요즘 고갱의 색채가 다시 눈에 들어온다. 사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는 것이 별것 아닌 아주 사소한 것임을 깨닫게 된다. 한 자락의 흐린 연둣빛 색채, 가느다랗고 어설픈 인간적 붓질 하나에도 매료된다.

로스코의 색채보다 고갱의 색채가 필요한 나이가 된 건가?! 나이 들수록 섬세함에 대한 취향이 점점 유치하고 병적이 되어간다. 괜찮다.


유경희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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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야,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의 생애, 캔버스에 오일, 80×65㎝, 1808~1812

의사가 편도선을 들여다보듯이 한 남자가 아이의 목구멍을 들여다보고 있다. 언뜻 그렇게 보이는 이 그림의 실상은 황당하다. 프란시스코 데 고야가 그린 이 그림의 제목은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의 생애(El Lazarillo de Tormes)’(1808~1812)다. 이 주제는 16세기에서 17세기 스페인에서 유행한 문학양식의 하나인 피카레스크 소설(picaresque novel)에서 유래했다. 이는 ‘피카로’라는 이름으로 불리던 당대의 많은 무직자·불량배 등을 주인공으로 등장시킨 자전적 형식의 소설이다. 이집 저집에서 숙식을 해결하며 자신은 물론 주인을 풍자 대상으로 삼는 이 소설은 악한 소설 혹은 건달 소설이라고도 불린다.

‘라사리요 데 토르메스의 생애’ 속 화자 라사리요는 앞을 보지 못하는 사기꾼의 하인이 되었다. 어느 날 주인의 저녁식사를 만들기 위해 소시지를 굽던 라사리요는 식탐을 이기지 못하고 먹어치운다. 대신 그는 맹인인 주인에게 빵 두 조각 사이에 순무를 끼워주지만 속임수는 금방 탄로나고 만다. 주인은 자신의 후각을 사용해 사라진 소시지의 행방을 추적하다가 소년의 입을 잡아당겨 벌린 다음 길고도 날카롭게 생긴 코를 입안에 밀어넣고 자신의 저녁식사 냄새를 맡는다. 그 때문에 소년은 속이 메스꺼워져 반쯤 소화되었던 소시지를 주인을 향해 게워낸다.

이 그림은 바로 그 일이 일어나기 직전의 순간을 보여준다. 아이는 주인의 허벅지 사이에 꽉 끼어 오도 가도 못하는 처지에서 목구멍을 내주고 있다. 아이의 턱은 벌어져 있고, 맹인은 손가락을 안으로 집어넣어 소시지를 찾아 더듬거린다. 맹인의 탐욕은 붉고 긴 코의 모양새를 통해서도 느낄 수 있다. 이 무시무시하고 흥미로운 그림을 통해 인간 세상의 부조리와 어리석음을 고발한 고야야말로 어두운 유머를 기막히게 그려낼 줄 아는 풍자의 대가였다. 이 그림은 귀머거리가 된 만년의 그림이다. 몸이 약해져야 감각이 예민해진다. 세상을 보는 그의 섬뜩한 시선은 성찰의 힘을 갖게 한다.


유경희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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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라크루아, 야곱과 천사의 결투(부분), 1854~1861년경, 프레스코화, 생 쉴피스 교회

창세기 32장에는 천사가 야곱에게 결투를 신청하는 이야기가 나온다. 아브라함의 손자 야곱은 엄마의 명에 따라 외숙부의 집에서 14년의 종살이를 마치고 돌아가던 중이었다. 앞으로는 팥죽 한 그릇에 장자권을 빼앗긴 형 에서가 자기를 죽이러 오고 있었고, 뒤로는 딸들을 빼앗긴 외숙부에게 쫓기는 진퇴양난의 기로에 처했을 때였다. 가족들을 먼저 고향으로 보내고 홀로 있던 야곱에게 누군가 다짜고짜 결투신청을 해왔다.

야곱은 자기에게 싸움을 건 자가 형과 숙부의 첩자가 아닌 하나님이 보낸 천사였음을 깨닫고 천사(곧 하나님)에게 매달린다. “나를 축복하여 주소서. 그렇지 않으면 당신이 갈 수 없나이다.” 위기에 처한 자신의 처지를 깊이 깨달은 야곱은 새벽이 지나도록 간청하고 또 애원했던 것. 이에 지칠 대로 지친 천사는 야곱의 환도뼈를 쳐 탈골시켜 주저앉힌다. 그때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로 고쳐 부르라고 명한다. 그 뜻은 바로 ‘하나님과 싸워서 이겼다’는 것. 기독교에서는 이 내용을 인간의 힘으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즉 교만을 떨어내고 신께 매달리라는 의미로, 신앙의 기본 덕목을 강조할 때 자주 인용하곤 한다.

야곱과 천사가 어깨나 허리를 마주 잡고 씨름을 벌이는 장면은 바로크 미술에서 드물지 않게 다루어졌다.

신성과 인성의 낯선 대결이 보여주는 역동성이 화가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이다. 바로크와 연동되는 낭만주의의 대표적 화가 외젠 들라크루아의 작품 역시 드라마틱하다. 야곱과 천사는 비슷한 체구를 지니고 있으며 균형을 이루고 있다.

야곱은 천사에게 온 힘을 다해 대항하고 있다. 이미 그의 몸은 천사가 포기할 정도로 기울어져 있다.

나는 세상일이 시들해질 때, 직업상 심기일전이 필요할 때, 간절히 사랑하고자 하나 힘을 잃었을 때, 이 그림에서 용기를 얻는다. 오늘의 행복을 내일로 유보하길 원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오늘 이런 결투를 신청하거나, 결투에 기꺼이 응하라!


유경희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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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돈나, 캔버스에 오일, 90×68.5㎝, 1894~1895년

서울 인사동에서 우연히 유명가수 C씨의 그림전시를 관람한 적이 있다. 평소 유명인의 전시에 대해 곱지 않은 시선을 보냈던 탓에 그저 그런 아마추어의 전시려니 생각했다. 그런데 이 가수의 작품은 그냥 스쳐 지나가기에는 분명한 그 무엇인가가 있었다. 바로 ‘감정’이었다. 좀 진부한 방식이긴 해도 그는 페이소스가 있는 자신의 대중가요처럼 자신의 감정을 드러낼 줄 알았다. 사실, 감정을 잘 드러내는 것만으로도 예술작품은 꽤 근사해진다. 화가들조차 자기감정을 드러내는 일에 미숙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아마 미술사에서 뭉크만큼 처음부터 끝까지 감정을 적극적으로 노출한 화가는 없다. 뭉크는 자신의 슬픔과 고통과 절망과 우울을 고스란히 작업에 투사했다. 사실 뭉크만큼 가족의 죽음을 가까이서 목도한 화가도 드물다. 유년시절부터 폐결핵으로 엄마와 누이를 잃고, 이어 정신병에 걸린 여동생, 아버지, 남동생의 죽음까지 고스란히 감당해야 했다. 죽음에서 비롯된 트라우마는 평생 불안과 공포로 떨게 했고, 그는 살아남기 위해 자신에게 일어나는 모든 감정을 그대로 솔직히 표현하는 방법으로 죽음의 공포와 맞섰다.

특별히 그의 죽음에 대한 공포는 여성에 대한 혐오로 드러난다. 여자를 매료시킬 만한 출중한 외모를 가졌던 그는 만나는 여자마다 자주 싫증을 내고, 먼저 결별을 선언했다. 뭉크에게는 “내가 사랑하면 죽는다”라는 무의식의 메커니즘이 작동했던 것. 더불어 그는 여자는 두 종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성모 마리아 혹은 살로메 같은 팜므파탈! 그리고 이 두 여성상이 한 이미지에 투영된 작품이 ‘마돈나’ 삼부작이다. 이 작품은 뭉크를 배신한 고향 친구 다그니 유을을 모델로 했지만, 그의 곁을 스쳐 간 어머니, 누이, 첫사랑, 다그니 등 뭉크의 잠재의식 속에 자리 잡은 여성에 대한 트라우마가 버무려져 있는 듯하다. 뭉크에게 여성이란 어떤 존재인가를 생각해보게 하는 그림이다.


유경희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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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렉상드르 카바넬, 비너스의 탄생, 1863년, 캔버스에 유채, 130×225㎝, 오르세미술관

내 인생의 첫 그림은 공중목욕탕 탈의실에 걸린 그림이었다. 숲 속에 아름다운 여자가 가로 길게 누워있고 여러 명의 아기 천사가 그 주변을 날아다니고 장난치는 모습이 담긴 복제화였다. 유년 시절 목욕을 끝내고 나른해진 심신의 상태는 그 그림을 더욱 환상적으로 보이게 했다. 그야말로 오랫동안 그 그림을 보는 재미에 홀딱 빠져있었다. 미술사를 공부하고 난 다음에 그 그림이 비너스와 큐피드들인 것을 알았지만, 그 감동은 유년만 못하다.

비너스 그림 중 가장 흥미로운 주제는 ‘비너스의 탄생’일 것이다. 하늘의 신 우라노스의 성기가 바다에 떨어지고 거품이 일어나면서 그 속에서 비너스가 태어난다는 내용은 언제나 대중의 시선을 사로잡는다. 특히 알렉상드르 카바넬이 그린 ‘비너스의 탄생’만큼 호의와 비판의 경계에 있는 그림도 드물다. 이 그림은 1863년에 프랑스 살롱전에서 심사위원과 대중에게 압도적인 찬사를 얻으며 커다란 성공을 거머쥔다. 반면 같은 살롱전에서 마네의 ‘올랭피아’와 ‘풀밭 위의 점심식사’는 저속하고 필치가 거칠다는 이유로 비난의 대상이 되었다. 카바넬의 비너스는 당시 황제였던 나폴레옹 3세가 구입했다. “타인의 욕망을 욕망한다”는 욕망의 메커니즘으로 보면, 아마 당대 부르주아 남성들도 앞다투어 비슷한 그림을 주문했을 것이다.

반면 에밀 졸라와 같은 지식인들은 이 그림을 혹평했다. 당대 남성들의 성적 취향과 욕망을 그대로 보여주는 외설스럽고 저속한 그림이라는 것! 예컨대 졸라는 “젖의 강에 빠진 이 여신은 맛있어 보이는 고급 창녀와 닮았다. 그녀는 살과 뼈로 만들어지지 않고(만일 그랬다면 보기에 안 좋았을 것이다) 주로 분홍색과 흰색으로 되어있으며 케이크 위에 부드러운 장식으로 사용되는 마르지판(marzipan) 종류로 만들어진 듯하다”고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신화적 이상미의 극치를 보여주는 그림이 갖는 매혹을 거부하기는 다소 어려워 보인다. 아마 졸라도 악평은 했지만, 관능의 시선으로 어루만지며 누구보다 이 그림을 즐겼을지 누가 알겠는가!


유경희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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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빙 펜(Irving Penn)이 찍은 마르셀 뒤샹, 1948년.

현대작가들이 가장 존경하는 작가 1위, 20세기 미술 중 가장 중요한 작품 1위의 가장 강력한 후보는 뒤샹과 그의 변기 작품인 <샘(1917년)>이다. “뒤샹 이후의 현대미술은 개념미술이다!”라는 선언이 나올 정도로 그가 현대미술에 끼친 영향은 지대하다. 앤디 워홀은 물론 데미언 허스트를 비롯한 수많은 현대미술가들의 멘토가 바로 뒤샹인 것.

뒤샹은 1년에 회화 한 점만 그려주면 1만달러를 주겠다는 요청을 받는 등 뉴욕에서 더할 수 없는 명성을 얻게 되지만 1923년 겨우 36세의 나이에 일체의 예술 활동을 중단한다. 체스를 두기 위해서다. 그는 도서관 사서와 불어교사 알바로 최소한의 생활비를 충당하면서 체스에 창조적 에너지를 소비했다. 그렇다고 예술작품을 제작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다만 보여주기 위해서나 먹고살기 위해서 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의 작품은 친구들에게 선물로 준 것이 대부분이었다. 훗날 전시를 위해 이 작품들을 다시 빌려와야만 했다.

이처럼 뒤샹은 일생 동안 자신의 예술에 대한 모든 해설이나 논평 같은 것에는 전적으로 무관심했다. 앙드레 브르통처럼 경외심을 표명한 예술가도 많았지만, 다수의 미술인들은 그를 사기꾼으로 취급했다. 뒤샹은 자신의 개인전에도 불참했다. 개막식의 작가는 완전히 뜨내기 배우에 지나지 않는다고 생각하여 자신의 첫 개인전이 열렸던 시카고의 아트클럽에도 가지 않았고, 그 이후의 회고전 형식의 전시에도 참여하기를 꺼렸다. 그러다가 나이가 들면서 해탈의 미소를 머금은 관용 있는 노대가가 되어갔다. 그는 일종의 예의를 지키듯이 자신의 전시회에 참여했다.

칩거하듯 살며 반(反)예술인을 자처하던 뒤샹이 사람들 앞에 타협적으로 나설 때가 있었다. 그것은 우정과 관련되어 있을 경우였다. 동료 화가들의 위상을 높이기 위해 남다른 노력을 기울여왔던 뒤샹은 후배작가들이 선배인 자신과 함께 전시하길 원할 때, 그 전시의 수준과 상관없이 기꺼이 작품을 내주었던 것이다. 진정한 경계인 뒤샹의 최고의 작품은 바로 ‘우정’이었다.


유경희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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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벨리니, ‘성모자상’, 목판에 유화, 1487년

서구 미술관에 가면 성모자상이 넘쳐난다. 그래서인지 모자관계의 가장 이상적인 패러다임을 보여주는 이 도상은 더 이상 눈길을 사로잡지 못한다. 성스러운 모자관계,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헌신적인 사랑 등등의 레토릭이 일종의 클리셰(Cliche·진부하고 상투적인 표현)로 전락한 것이다. 그런데 아주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 모자상에 흥미로운 가치를 부여할 수 있다. 어머니·아이 관계의 이면에 대한 새로운 생각을 해볼 수 있다는 것. 다시 말해 어떤 사람에겐 엄마가 불안한 존재이고, 알 수 없는 여자이며, 자식을 돌보지 않는 파렴치한 인간일 수도 있다는 사실 말이다.

베네치아 르네상스 최성기의 화가 조반니 벨리니는 성모자상을 많이 그린 화가 중 하나다. 그는 왜 그렇게 성모자상에 집착했던 것일까?

먼저 벨리니의 성모자상은 피렌체 르네상스의 날카로운 감수성과 딱딱한 형태감과는 달리 베네치아화파만이 가진 빛에 대한 부드럽고 섬세한 색채 감각이 돋보인다. 마돈나는 더욱 유려하고 아름다워진 느낌인데, 그게 다가 아니다. 어딘지 베일에 가려진 듯 훨씬 신비스럽고 몽환적인 분위기다.

벨리니의 전기를 보면, 그는 가족과 떨어져 지냈으며 어머니의 유언에도 자기 이름이 빠져 있었다고 한다. 이는 정신분석학자들로 하여금 벨리니의 어머니가 생모가 아닌 계모였을 가능성을 추측하게 한다. 그래서 벨리니가 그린 성모자상에서는 아기 중심의 어머니가 아닌, 자신의 욕망에 충실하며 주이상스(Jouissance·열락)를 즐기는 어머니임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 이 그림 속 예수는 처연한 표정으로 자기에게 관심 없는 마리아에게 간청하고 있다. 자기를 좀 봐달라고, 사랑해달라고.

어쩌면 벨리니를 포함해 끊임없이 이런 그림을 그리는 ‘아기로서의 화가’들은 때로는 실존적인 어머니를 보여주고 때론 이상적인 어머니를 보여준다. 미술관에 그토록 수많은 성모자상이 시도 때도 없이 출몰하는 것을 보면,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근원적 노스탤지어에 인간이 얼마나 목을 매는지 알게 된다.


유경희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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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련 연못(The Water-Lily Pond), 1899년, 캔버스에 유채, 88.3×93.1㎝, 런던 내셔널 갤러리

절경은 시가 되지 않는다고 어느 시인은 말했다. 절경에 인간 냄새가 배어 있지 않기 때문이란다. 모네 역시 그렇게 생각했던 것 같다. 정원을 몹시 사랑해 부인의 안부는 묻지 않고 꽃들의 안녕을 먼저 물었던 모네야말로 평생 아름다운 풍경을 가꾸고 사랑했던 사람이다. 그리고 자기가 만든 정원을 자신의 눈과 손과 그림 속에 영원히 각인시켰다. 시간과 계절의 추이에 따라 시시각각 변화하는 정원의 모습을 담았는데, 인상주의자답게 사물이 빛에 따라 어떻게 변하는지를 탐색했던 것이다.

사실 모네는 쉰이 될 때까지 가난하게 살았다. 그렇지만 남들이 부러워할 호사취미를 포기하지 않았는데, 그것이 바로 여행, 요리, 정원이었다. 그리고 결국 1883년 파리에서 70㎞ 떨어진 시골 지베르니로 이사한 몇 년 후 집을 구입하면서 그렇게 소망하던 정원 가꾸기에 돌입했다.

당시 자포니즘(Japonism·19세기 중반 이후 20세기 초까지 서양 미술 전반에 나타난 일본 미술의 영향과 일본적인 취향 및 일본풍을 즐기고 선호하는 현상을 이르는 말)에 매료되었던 그는 연못 중앙에 아치형의 일본식 다리를 놓아 연못을 건널 수 있게 만들고, 특별히 파리의 일본인 예술품 중개상으로부터 수련을 구해 심었다.

이곳에서 모네는 스스로 “나의 가장 아름다운 걸작”이라 칭했던 ‘수련 연작’을 그리게 된다. 눈이 멀어 거의 볼 수 없는 지경이 되었을 때조차도 수련들은 그의 시선에서 벗어나본 적이 없으며, 거친 붓질 속에서 여전히 은은한 향기와 건강한 삶을 노래하는 것만 같다.

지난해 새집으로 이사하면서 지인의 도움으로 작은 정원을 꾸밀 수 있었다. 작약, 옥잠화, 조팝나무, 둥굴레, 석류, 작살나무는 물론 블루베리도 심었다. 돌확으로 된 연못에는 수련도 심었다. 매일 아침 맨발로 뛰어나가 다물어진 연꽃 봉오리를 보았고, 이른 오후에는 활짝 핀 연꽃을 보기 위해 콩닥거리는 가슴을 안고 귀가를 서둘렀다. 자연이 주는 경이로움에 눈뜨는 나이가 되었다. 조금은 아프고, 아련하고, 아름다운 이 계절이 참 좋다.


유경희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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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란츠 자비에 메세르슈미트, ‘개성 있는 얼굴’, 18세기

미술사는 웃는 얼굴을 기록하지 않았다. 웃음은 경박하고 천한 것이며, 영원한 것과는 거리가 멀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이는 마치 움베르토 에코의 소설 <장미의 이름>에서 금서가 된 희극(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 제2권이 희극일 것이라는 가정)에 관한 이야기를 떠올리게 한다.

늙은 수도사 호르헤는 웃음을 싫어했는데, 웃음이 두려움을 없애기 때문이다. 두려움을 없애면 악마의 존재를 무시하게 되고, 그러면 신앙도 존재할 수 없다는 논리다. 그렇게 금서에 묻힌 독 때문에 수도사들이 죽어나가는 장면은 신앙이 공포에 의해 유지된다는 사실을 알려준다.

미소가 아닌 깔깔 웃는 두상을 만든 작가가 있다. 그뿐 아니다. 하품하는 얼굴, 찡그린 얼굴, 아이처럼 울고 있는 얼굴, 엄청 화가 난 얼굴 등 온갖 우스꽝스러운 얼굴표정이 조각 작품으로 등장했다. 18세기 로코코 시대에 이 범상치 않은 조각을 만든 작가는 오스트리아의 프란츠 자비에 메세르슈미트(1736~1783)이다.

‘개성 있는 얼굴’로 불리는 두상 연작은 다양한 표정을 지을 때 근육이 일그러지는 것을 아주 가까이서 관찰, 세심하게 포착해 만든 것이다. 그는 이런 표정을 연구하기 위해 마치 마임이스트처럼 거울 앞에서 스스로 몸을 꼬집거나 찌르면서 표정이 변화하는 것을 관찰했다. 총 69점에 달했지만 19세기 말에 분산, 행방이 묘연한 작품들이 많다.

빈미술아카데미에서 수학한 그는 빈 궁정 소속으로 일하면서 마리아 테레지아 여왕을 비롯해 엘리트들의 초상조작을 제작했다. 아카데미 부교수로 재임했으나 까다로운 성격 때문에 동료들에게 배척당해 교수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울분에 찬 그는 빈을 떠나 다른 도시에 칩거했다. 이 조각들은 한 세기 반이나 잊혀졌다가 20세기에야 비로소 주목받기 시작했다. 유별난 성격으로 정신병자 취급을 받으며 크게 인정받지 못했던 이단아 메세르슈미트의 이런 두상들은 당대 사회의 부조리와 부패에 대한 조롱과 비판은 아니었을까.


유경희 | 미술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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