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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주도. 어찌나 모든 것이 아름다운 지, 갈대마저도 비단같아보였습니다.


4월부터 지역 생협에 가입해서 그곳에서 장을 보기 시작했습니다. 우리 집 주변 지역에서 생산된 농산물, 생산자가 명시된 과일과 육류, 유해 성분이 가급적 들어가지 않은 가공식품들이 일주일에 한번씩 집을 찾아옵니다. 가격도 크게 부담 없고 믿을 수 있는 시스템으로 운영되는 것 같아 장을 볼 때마다 기분이 좋아집니다.


늘 만족스러운 것은 아닙니다. 지난번에 감자를 1킬로그램 주문했는데, 생각보다 알이 작고 흠도 있지만 가격이 비싸서 고민했었답니다. 생산자를 찾아보니 제주도 대정읍 상모리 농가의 주소가 적혀 있습니다. 맛있다는 제주 햇감자로구나, 생각한 것과 동시에 상모리라는 지명에서 다른 기억이 불쑥 떠올랐습니다. 상모리는 작년 2월 매서운 바람을 해치며 다녀온 제주 근대문화유산 답사의 주 무대였습니다.

              뒷편 평평한 들판이 알뜨르 비행장 활주로입니다. 들어가지 말라고 해서 멀리서 보았습니다.쩝.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가 보이나요? 감자밭에는 둥그런 콘크리트 더미가 19개나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의 흔적이지요.



책에 들어갈 마지막 원고의 퇴고를 마치고 약간의 휴식을 누리기 위해 떠난 제주 여행. 하지만 옛 흔적을 찾아 다니던 일년간의 습관을 잠재울 수 없었습니다. 검고 아름다운 비자나무 숲의 풍경과 섭지코지의 거친 바다에 감탄하면서도 남쪽과 서쪽 곳곳에 남아있는 근대문화유산을 찾아 자동차를 몰아대곤 했지요. 답사 후에 작은 지면으로나마 책의 말미에 제주의 흔적을 담을 수 있었습니다.


제주도, 그곳의 근대의 흔적은, 말로 다 표현하기가 어려웠습니다. 내가 겪어보지 못한 전쟁, 그것이 눈앞에 펼쳐지는 것 같은 두려움과 막막함을 느꼈습니다.


근대문화유산을 찾아보기 전, 제주도는 이국적인 풍경, 신기한 문화, 싱싱한 자연의 현장으로만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제주의 역사를 다시 더듬어보았던 그 날 이후 제주도는 이전의 제주도와 다른 모습으로 다가왔습니다.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의 중심에 있었던 섬, 2차대전의 말기 패망 위기의 일본 본토를 수호하기 위해 최후의 방어선으로 제공된 섬, 깊은 땅굴과 매끈한 절벽을 쑹쑹 뚫어놓은 동굴처럼 전쟁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섬.


역사에서 가정이란 없지만 만약 조금만 전쟁이 길어졌다면 우리나라 국토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손꼽는 섬나라는 사라졌을 수도 있다는 사실에, 가슴을 쓸어 내리게 됩니다.
 

제주의 동백. 저는 동백이 제주를 상징하는 꽃인 것만 같습니다. 피처럼 붉고 자존심강한 사람들처럼 고고한 꽃.

 


아름다운 것 뒤에는 왜 이렇듯 큰 상처가 숨겨져 있을까요?


역설적인 상황으로 인해 역사의 비극성은 더 커지는 것 같습니다. 어쩌면 그 숲, 그 바다, 그 바람은 수많은 피와 눈물과 땀, 그리고 죽음을 담보로 하여 그토록 아름답게 승화한 것일까요?


제주는 1920년대 후반부터 일제가 대륙침략을 본격화하기 위한 병참기지의 주요 지역이었습니다. 특히 전투기들이 중국의 상하이와 난징을 향해 최단거리로 날아갈 수 있도록 해군과 육군의 비행장 시설이 형성되었습니다. 제주도에는 일제강점기에 모두 네 개의 비행장이 건설되었습니다. 관광객이 오가는 비행장이 아니라 모두 군사용 비행장입니다.


알뜨르, 정뜨르, 진뜨르라는 향토적인 이름의 비행장이 있었고 1945년 전쟁 말기에 교래리라는 지역에 비밀 비행장이 세워졌습니다.
정뜨르 비행장은 현재 제주국제공항으로 확장되었고, 진뜨르는 활주로를 건설하던 중 연합군에 알려지자 건설을 중단한 후 지금은 밭으로 변했습니다. 교래리 비행장은 현재 비행훈련원이 들어와있습니다.


비행장뿐입니까? 제주 오름의 지하 곳곳에는 개미굴처럼 구불구불한 땅굴이 지금도 가득합니다. 이들 장소는 일제의 참호와 동굴진지로 사용되었습니다.
찾을수록 계속 발견된다는 동굴진지들은 700여 개가 넘는다고 합니다. 가장 긴 것은 1킬로미터가 넘으며 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수많은 시설물들이 땅속에 오롯이 숨겨 놓았습니다.

셋알오름 동굴진지, 일출봉 해안 동굴진지, 가마오름 동굴진지, 서우봉 동굴진지, 어승생악 동굴진지, 사라봉 동굴진지를 비롯해서 알뜨르 비행장 지하벙커, 송악산 해안 동굴진지 등 20개 이상의 일제 시대 군사시설이 당시를 증언하는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송악산 해안 절벽에는 높이가 2~3미터에 달하는 동굴이 열 다섯개가 뚫려있습니다. 일제 강점기 자살폭격 어뢰정을 숨겨두던 곳이라고 합니다.
감탄할 만한 절경 앞에서도 전쟁의 상흔이 느껴지는, 그래서 생명 하나하나가 더 소중한 곳이 바로 제주도랍니다.

 


또한 태평양 전쟁 말기에는 일제가 미군으로부터 본토를 사수하기 위해 홋카이도와 제주도를 최후의 방어선으로 삼아 전투력을 총 결집하는 결호 작전을 수행하게 되는데, 이때는 7만 명에 달하는 군인들이 제주 전역에 집결하였고 앞서 설명한 수많은 전쟁시설물들이 미친듯이 세워졌습니다.
다행히, 제주도에서 큰 전쟁이 일어나기 전 나가사키와 히로시마에 원폭이 떨어졌고 일제는 패망했습니다.


하지만 ‘다행’이라고 하기에 우리는 그 다음에 벌어진 동족상잔의 역사를 너무나 잘 알고 있지요. 한국전쟁과 제주에서 벌어진 4,3사건, 그리고 수많은 아픔의 역사들……..


잔인한 시기는 지금 우리의 삶과는 비껴갔지만, 우리가 살아가는 곳곳에서 과거의 역사와 만나게 됩니다. 그 시기를 온몸으로 부딪힌 사람들에게 우리는 큰 빚을 지고 있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후손에게 역사를 제대로 알려줄 의무가 있는 것이지요.


                   제주도 남동쪽 해안가에 밀집되어 있는 일제강점기의 전쟁 유적들.

 


우리가 찾아가 볼 곳은 알뜨르 비행장입니다. 알뜨르는 ‘아랫쪽에 있는 너른 뜰’이라는 뜻입니다. 알뜨르 비행장이 있는 대정읍 상모리 부근 지역은 일본의 후쿠오카와 중국 난징이 일직선으로 이어지는 지점에 있습니다. 일제는 제주도민을 총동원하여 1926년부터 비행장 건설에 들어가 10년만에 20만 평 규모의 알뜨르 비행장을 완공합니다. 그리하여 알뜨르 비행장에는 지하 군사 벙커를 비롯, 의료시설, 탄약고, 연료고, 정비공장, 어뢰 조정고, 통신실, 발전소 등의 시설이 들어서 전쟁에 대비하게 됩니다.


일본 나가사키에 주둔하던 오오무라 해군 항공 기지에서 출격한 전투기들이 중국을 공격하고 일본으로 귀환할 때 중간 기착점으로 알뜨르 비행장을 활용했습니다. 상하이를 점령한 후에는 그곳에 비행장을 확보했고 알뜨르에는 연습항공대가 주둔하게 되었습니다. 현재는 지하벙커와 활주로, 비행기 격납고가 남아있습니다.
 

                   비행기 격납고는 근대문화유산 등록문화재 제 39호로 지정되어 있습니다.



어찌된 일인지 이 부근을 아무리 둘러보아도 활주로가 어디인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넓은 벌판에는 ‘공군에서 보유한 군사지역이므로 출입을 금한다’라는 푯말만 세워져 있습니다. 구글 어스로 이 일대를 찾아보는 순간, 우리가 서 있는 그곳이 활주로란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람이 길게 불어오는 평평한 땅, 거칠 것 없는 넓은 터. 폭격을 받으면 복구가 어려운 콘크리트는 생략한 활주로에 푸릇푸릇 풀들이 한 가득 돋아나있었습니다. 알뜨르 비행장은 지금까지 활주로가 그대로 남아있는 비행장이었습니다.
 

                   구글 어스로 찾아보니 활주로를 확연히 구분할 수 있었습니다. 보이시는지?

좀더 가까이 가볼까요? 경지 구획이 되지 않은 활주로 터는 국방부에서 소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여전히 알뜨르 활주로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것이지요.
 
이왕 구글 어스를 실행시킨 김에 하나더! 후쿠오카와 난징을 연결하는 직선을 그어보았습니다. 정말이지 알뜨르 비행장을 지나가는군요.

 


활주로 주변에는 콘크리트로 단단하게 만든 비행기 격납고가 군데군데 들어와있습니다. 모두 20개의 격납고가 있었는데, 현재 남아있는 것은 19개. 널찍한 밭두렁 사이에 둥근 봉분처럼 불쑥불쑥 솟아나 있습니다. 격납고를 처음 보았을 때, 당혹스런 감정이 들었습니다. 콘크리트로 단단하게 지어진 격납고는 정면의 길이가 20미터, 높이는 4미터, 내부는 10,5미터 정도의 규모입니다.

         

             너른 밭에 툭툭 떨어진 듯한 격납고들. 카메라 앵글에 모두 들어오지 않는 것이 아쉬울 뿐입니다.

                    형태와 규모를 자세히 살펴보자면 이렇습니다.

                    내부로 좀더 들어가보았습니다. 아직도 형태가 그대로 남아있지요.

              내부에 들어와서 바깥 풍경을 보았습니다. 여름에는 시원하니 햇빛을 피하기에 좋을 듯합니다.



대형 여객기를 생각했다면 턱없이 자그마한 격납고에 실망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곳에 보관되었던-혹은 숨겨두었던- 비행기는 아카톰보(빨간잠자리, 고추잠자리)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일본해군의 중급 비행 훈련기였습니다. 아카톰보가 대체 어떤 비행기인가 궁금하여 찾아보니, 정식 명칭은 Yokosuka K5Y이며 1939년부터 45년까지 생산되었다는 내용을 발견했습니다. 자료사진은 흑백이기 때문에 컬러감을 확인하기 어렵지만 주황빛과 빨강이 섞인 몸체와 날개를 가진 이 비행기가 파란 하늘을 날면 빨간 잠자리처럼 느껴졌을 것 같습니다. 알뜨르의 활주로를 따라 아카톰보가 날아갔겠지요.

                            요것이 아카톰보(빨간잠자리, 고추잠자리)라 불렸던 연습비행기랍니다.

                    격납고에는 요렇게 들어갔답니다. 이 자료 이미지는 뉴스 기사에서 캡쳐했습니다.

 


비행기가 사라진 격납고에는 농사꾼의 흔적이 가득합니다. 농기구도 보관하고 수확물도 쌓아두는 그런 곳으로 말입니다. 때로 지친 농사꾼이 해를 피해 잠시 쉬어가는 곳으로, 비를 피해 잠시 숨는 곳으로 말이지요.

 
지금 알뜨르에는 감자 수확이 한창입니다. 지금 내 손에 들려진 감자는 그날 가슴을 쓸쓸하게 만들던 알뜨르의 바람 속에서 자란 것일까요? 감자를 갈아서 감자전을 부치면서 잠자리 비행기 격납고가 옆에 있건 말건 땅 고르기에 여념이 없던 농사꾼의 둥그런 등을 떠올렸습니다. 격납고의 둥근 지붕 모양처럼 그들의 등도 땅과 가깝게 둥글게 숙여져 있었습니다.

 

다음은 제주 대정읍 언저리에서 찾아낸 근대건축물들입니다. 제주에는 이런 건물들도 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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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

       KTX 매거진 팀과 함께 한 김제, 정읍 근대문화유산답사기입니다. 오랜만에 일행이 많아서 즐거웠습니다.



전북의 평야를 무조건 호남평야라고 하는 줄 알았더니 평야에도 이름이 다 붙어있습니다. 동진강 하류에 있는 넓은 평야가 김제평야이며 만경강 하루에 있는 것이 만경평야라고 합니다. 이 둘을 합쳐서 김만경평야, 혹은 호남평야라고 합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넓은 평야지대이며, 가장 중요한 곡창지대이기도 하지요.


그러니까 일제강점기에 오사카의 상인집단들이 바로 이 곡창지대에 눈독을 들여 땅을 매입하고 소작을 부치고 대농장을 일궜으며 그곳에서 나온 미곡들을 바리바리 일본으로 챙겨갔다는 것이지요.

 
정읍시 신태인읍 신태인 도정공장 창고

신태인 도정 공장은 2007년 갑작스럽게 철거되고 지금은 빈터만 남아있습니다. 하지만 도정 공장 창고는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그 흔적을 엿볼 수 있습니다.

창고 건물 답게 견고할 뿐더러 그 규모에 압도당할 만 합니다. 지금도 상업물품들의 창고로서 역할을 다하고 있습니다.

              창이 많지 않지만 통풍을 위해 환기창이 있습니다. 지붕 중앙에도 환기구가 만들어져있습니다.

                         건물의 모양새가 비례감이 좋습니다. 잘 만들어진 건물입니다.


 정읍시 신태인읍에는 거대한 도정공장 창고가 남아있습니다. 어마어마한 부지의 도정공장은 몇 해전인 2007년 무슨 이유에서인지 헐리고 그 빈터만 허허롭게 남아있습니다. 빈터만 봐도 그 규모가 어느 정도인지 짐작할 수 있지요. 창고는 근대건축물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는데, 붉은 벽돌로 단단하게 지어진 건물 안에 얼마나 많은 곡식들이 채워진 것인지 대단하게 여겨집니다.

신태인이라는 소읍은 마을이 생기기도 전에 철도역부터 생겼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쌀 도정과 쌀 운반 때문에 생겨난 마을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화호리 일대의 너른 평야에서 수확한 쌀은 이곳에서 모두 도정했고 기차를 타고 군산으로 가서 다시 함선으로 옮겨져 일본으로 건너갔지요.



김제 죽산면 하시모토 농장 사무실

김제시 죽산면에 있는 하시모토 농장 사무실을 찾아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김제로 갑니다. 이 마을 역시 쌀농사를 주로 하는 곳인데 화호리나 다른 마을들과 확연히 분위기가 다릅니다. 상가 건물이 지어졌고 도로가 널찍한 것이 꽤나 번창했던 마을인가 봅니다. 마을 초입에 하시모토라는 대농장주가 운영하던 농장 사무실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하시모토 농장사무실이 재미있는 이유는 유럽식 건축 스타일을 따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간 둘러본 농장 사무실은 일본식 가옥이거나 양옥으로 개량한 일식 주택의 형태, 혹은 창고 등의 형태였는데, 하시모토의 경우는 프랑스식 망사르드 지붕(Mansard)을 얹고 벽면에 석재로 장식한 전형적인 유럽식 건축 형태입니다. 하시모토는 자신의 남다른 취향을 과시하고 싶었던 것은 아닐까요?
 

                         하시모토라는 대농장주의 사무실로 사용된 건물입니다.
 

                         망사르드 지붕을 구경해보세요. 이중경사지붕의 의미를 아시겠지요?

                   아무리 예쁘게 찍으려고 해도 사진빨 안받습니다. 건물의 특징만 보고 지나갈까 합니다.


 
건물은 약간 높은 지대에 있는 데다 보통의 건물보다 층고가 높다보니 멀리서도 잘 보입니다. 당시에도 마을의 랜드마크가 아니었을까 짐작해봅니다.

‘망사르드 지붕(맨사드 지붕이라고도 하지요.)’이란 이중경사지붕을 말하는데요. 아랫쪽 지붕은 경사가 급하고 윗쪽 지붕은 경사가 완만하게 연결되어 두 개 층의 지붕으로 이루어진 형태입니다. 프랑스 파리 중심가의 건물들을 보면 죄다 망사르드 지붕을 취하고 있는데요. 고전주의 건축가인 프랑수아 망사르(Francois Mansard)가 발전시킨 양식이라고 합니다. 이러한 망사르드 지붕을 하시모토 농장사무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지요.


독특한 형태에도 불구하고 소위 ‘사진빨’이 잘 받지 않아 건물의 특징을 잡아내기 어려운 건물입니다. 건물 몸체의 둔중한 비례감과 현관의 장식이 하다만듯한 느낌을 주기도 하고요. 뭔가 근사한 것을 만들어보려다가 제대로 되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건축주와 건축가가 서로 마음이 맞지 않았던 것은 아닐까? 이런 저런 상상을 해봅니다.

            농장 사무실 옆에 목조가옥도 한채 남아있습니다. 창고 겸 관리자의 숙소 정도 되지 않았을까요?

                         이전 답사 때는 낡은 건물이었는데 일년 사이에 손을 봐서 깨끗해졌네요.


하시모토는 죽산면 일대의 황무지와 갯벌을 개간하여 농토를 넓혔던 인물입니다. 1906년 군산에 발을 디딘 하시모토는 동진강 일대를 개간하면서 농장을 경영하다가 1916년 죽산으로 입성하여 죽산면의 땅을 절반 이상이나 차지하게 됩니다. 1931년에는 법인주식회사 하시모토 농장을 설립하는데, 당시 농장은 350정보의 논과 90정보의 밭을 소유하고 있었고 550여명의 소작인을 두었다고 합니다. 농장 사무실은 1926년에 지어졌으니 법인을 설립하기 전부터 하시모토의 농장경영은 이미 가속화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김제시 백구면 백구금융조합


백구금융조합을 보려면 다시 북쪽으로 거슬러올라가야 합니다. 처음 백구금융조합을 찾아 나섰을 때 다른 근대도시에서 보았던 은행 건물을 기대했었습니다. 하지만, 내비게이션은 자꾸 시골길로 향하고 있었고 온통 논과 밭으로 가득한 소읍의 좁을 도로를 겨우겨우 찾아들어가자 아담한 양식 건물이 눈에 띄었습니다.

이런 동네에 금융조합이 있었다니 놀라울 따름이었습니다. 그만큼 김제군에 두루 펼쳐진 평야에서 거두어들인 미곡이 어마어마했었다는 뜻이겠지요. 미곡은 곧 돈이었으니 당시 금융조합은 힘깨나 썼던 조직이었을 겁니다. 금융조합은 쌀 수탈에 용이하도록 일제가 만든 기구인데, 농민들에게 돈을 융통해주던 곳이라고 합니다. 되로 주고 말로 받았다는 뜻이겠지요.

 

                   한겨울이라 담쟁이 잎사귀가 몽땅 말라버린 바람에 건물의 윤곽이 뚜렷이 드러났습니다.

                         천장에도 벽에도 온통 낡은 바람이 스멀스멀 흐르고 있습니다.

                      건물 안은 참으로 고요합니다. 저녁무렵의 햇살이 여행자의 발걸음을 재촉하는군요.

         안쪽으로 공간이 형성되어 있습니다. 다른쪽 벽에는 철재 금고도 부서지긴 했지만 형태가 남아있어요.



만물이 무르익은 가을녘에는 찾아왔을 때 이 건물은 온통 푸르른 담쟁이로 둘러싸여 마치 자연에 송두리째 먹혀버린 것처럼 보였습니다. 한겨울에 찾아오니 잎사귀가 몽땅 말라버리고 떨어져 버렸기에 오히려 건물의 형태가 더욱 잘 보였습니다. 건물은 건재했습니다. 아마 앞으로도 오랫동안 존재의 이유를 망각한 채 계절에 따라 모습을 감췄다가 드러내길 반복하겠지요. 마치 술래잡기를 하듯이.


내부로 들어가보았습니다. 담쟁이는 지독한 생명력을 보이며 벽과 천장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내부는 넓고 깊고 높습니다. 육중한 철문으로 된 금고와 창문 틈 사이로 오래된 바람이 냄새가 흘러나옵니다.


백구금융조합이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2005년의 일입니다. 6년이 흘렀지만 건물은 허허벌판에 방치되고 있습니다. 입구를 채워둔 자물쇠조차 없이 자칫 범죄의 현장이 되지는 않을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너무나 도시인다운 발상인가요?


모든 근대건축물을 깨끗하게 관리하고 아름답게 활용할 수는 없습니다. 백구금융조합처럼 조용히 세월의 흐름대로 바스러지는 것도 건물의 운명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김제시 백구면 월봉도정공장

                         도정공장의 내부입니다. 아마도 앞쪽에 또다른 공간이 있으리라 여겨집니다.

                         2000년대까지 공장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백구금융조합 바로 맞은 편에도 심상치 않은 건물이 있습니다. 거대한 창고처럼 보이는 이 건물은 도정공장이었다고 합니다. 규모로 보건대 이곳을 오고가던 쌀의 규모가 어마어마했으리라 짐작됩니다. 월봉도정공장(오오쓰미 도정공장이라고도 합니다.)은 연간 7만 가마의 쌀을 도정하던 곳이라고 합니다.

건물 내부는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습니다. 깨끗하게 치워져 있는 것을 보면 관리가 잘되고 있는 것 같기도 한데, 건물로 오고간 발걸음은 하얀 눈밭에 남은 들짐승의 것뿐이군요. 벌써 날이 저물어가니 가로등 하나 없는 건물들이 더욱 말이 없어집니다.



호남선 부용역


                         폐역이 된 부용역. 열차는 그냥 지치나고 화물차만 하루에 두번정도 선다고 합니다.

                         고즈넉한 마을에 부용, 연꽃 바람이 붑니다.


김제 근대문화유산 기행을 마무리하고 돌아오는데 저편에 부용역이 보입니다. 부용(芙蓉). 연꽃이라는 뜻이군요. 이름이 예쁘죠? 월봉도정공장의 쌀들이 군산으로 가기 위해 거쳤던 곳이 부용역입니다. 익산역과 김제역 중간에 위치한 부용역은 1914년에 문을 열었습니다. 그러고 보면 일제강점기는 쌀의 이동을 위해 철도가 놓이고 역이 번창하던 시절이었나 봅니다.

번영하던 시절을 기억이나 하는지 지금 부용역은 2008년부터 역무원도 없이 열차가 정차하지 않는 폐역이 되었습니다. 부용역 주변도 조용하기 그지 없습니다. 이제 우리 앞에는 그저 사람들이 농사를 지으며 조용히 살아가는 소읍의 풍경이 펼쳐질 뿐입니다.
어둠이 내리는 마을에 연꽃 같은 잔잔한 향기가 감돕니다.


more information>>----------------------------------------------------------------------

1. 신태인 도정공장 창고 (등록문화재 제175호)
주소- 전라북도 정읍시 신태인읍 신태인리 230-1 번지

2. 하시모토 농장 사무실 (등록문화재 제61호)
주소- 전라북도 김제시 죽산면 죽산리 570-6

3. 백구 금융 조합(등록문화재 제186호)
주소-전라북도 김제시 백구면 월봉리 624-2

4. 월봉도정공장
주소-전라북도 김제시 백구면 월봉리 백구 금융 조합 맞은편

5. 부용역
주소-전라북도 김제시 백구면 부용리 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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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

         구마모토 화호 농장 미곡창고. 세월에 몸을 맡긴 채 숨을 거둘 날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청춘남녀, 백년 전 세상을 만나다>라는 책을 펴낸 후, 근대문화유산 기행은 우리 부부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 후 다시 가본 곳도 있고 새로이 가보게 된 곳도 여럿 있었어요. 그 중에서 화호리는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곳으로 첫손에 꼽히던 곳입니다.

화호리라는 지명을 들어보셨나요? 전라북도 여러 소읍 중 하나인 이곳은 번듯한 건물도 화려한 거리도 없는 고요한 마을입니다. 사전 정보 없이 문화재청에 소개된 일제강점기 가옥의 주소만 달랑 들고 찾아갔던 화호리. 이곳에 도착했을 때, 묘한 예감을 솔솔 밀려오더군요. 문화재로 등록된 것도 아니고 귀에 익숙한 지명도 아니지만 마을 입구에 서있는 거대한 건물이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그것은 거대한 창고 건물이었습니다. 이곳에는 어떤 사연이 있길래, 콘크리트도 튼튼하게 지어진 창고가, 그것도 이렇게 큰 창고가 있었던 것일까요? 이 지역의 너른 평야를 보면 쌀가마니를 쟁여두던 창고였겠지만, 부서진 출입구하며 잡초가 가득한 주변을 보면 오랫동안 방치된 듯한 모습이었지요.

전북에 펼쳐진 거대한 황금 들녘에 적잖이 감동을 받고 올라온 후 자료를 찾아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알고 봤더니 화호리는 일제강점기 전북 지역에 대농장을 일구던 구마모토 리헤이의 소유지였으며 농장의 흔적이 지금도 많이 남아있는 지역이었던 것이지요. 구마모토의 농장은 군산을 중심으로 개정면 일대 외에도 화호리 역시 그의 농장이 거대 화호 농장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우리가 호기심을 갖고 보았던 거대한 창고는 구마모토 농장에서 수확한 엄청난 미곡을 보관하던 미곡창고이자 농장사무실이었던 것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시간을 들여서 꼼꼼히 들여다보았을 텐데, 놓치고 온 것들이 무척 아쉬웠습니다.

                  오랜만에 답사 동행자가 생겼습니다. 잡지사 취재팀과 함께 답사를 떠났습니다.


2011년 1월 중순, KTX 매거진 촬영팀과 함께 근대건축답사를 다녀왔습니다. 매거진 팀에서 살펴보고자 했던 장소가 때마침 김제와 정읍 일대였습니다. 큰 눈과 추위에 구제역까지 발생하여 쉬운 답사가 될 리 만무했지만 이때다 싶어서 화호리를 첫 답사지로 추천했지요. 화호리에 비중을 두고 살펴보면서 신태인읍 도정공장 창고, 하시모토 농장사무소, 백구금융조합, 부용역까지 살펴보았습니다.

그 때 다녀온 답사지를 두번으로 나누어 소개할까 합니다. 김제, 정읍이라고 해도 군산과 맞닿아있는데다 서로 밀접하게 관련된 지역이라 하나로 묶어서 답사 여행을 계획해도 좋겠습니다. 아침 일찍 서두른다면 하루에 모두 다 볼 수 있답니다.

군산 일대를 여행하다 보면 구마모토 리헤이에 대해 자주 듣게 됩니다. 그는 군산, 김제, 정읍 일대의 3,200정보의 토지를 소유하여 ‘전북 지주왕’으로 불렸던 인물입니다. 1정보는 1천 평을 말하는데, 일제강점기 말엽에 그가 소유한 토지는 여의도의 10배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는 만경강, 동진강 일대의 비옥한 땅을 소유하고 너른 평야를 샘솟는 곡식들을 모두 일본으로 반출하여 갑부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지요.

일제 강점기 초기 군산 일대에서 농장경영을 하던 인물들을 살펴보면 농장 경영의 선구자로 꼽히는 미야자키 가타로가 있고, 2,300정보의 농장을 세운 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토지를 판 오쿠라 이하치로, 오사카 출신의 미곡상 후지이 간타로가 세운 후지모토 합자회사(이후 불이흥업주식회사로 개칭합니다), 미쓰비시 재벌의 이와사키 히사야, 그리고 종교를 통해 지주로서 탄탄하게 자리잡은 마스토미 야스자에몬 등이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전북에 진출한 지주들은 오사카 출신이 많으며(오사카는 예부터 상업이 발달했지요. 돈의 흐름을 아는 사람들이 많았던가 봅니다.) 메이지 유신으로 세력이 약화된 지역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일본 내에서 얻을 수 없는 부귀를 위해 조선땅으로 건너온 것이지요.

구마모토 리헤이는 일본에서 건너온 정치인, 경제인들과 비교하면 크게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습니다만, 전북 지역에는 그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젊은 시절, 조선으로 눈을 돌린 구마모토는 청일 전쟁 이후 조선을 시찰한 후 전북의 땅을 낙점했습니다. 그 후 오사카 유지들을 독려해서 투자를 받아 전라북도의 땅을 사들이고 이 땅을 관리하며 조선과 일본을 오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일본 내 경제가 악화되면서 투자자들이 헐값에 조선의 토지를 내놓게 되는데, 구마모토는 이때 이 토지들을 사들여 거대지주로 등극합니다. 시대가 그의 편이었나 봅니다.

농장은 중간 관리자인 마름을 두어 조선인 소작농을 부렸는데, 구마모토 농장의 소작료는 다른 곳보다 높았습니다. 개량 농법을 사용하여 생산량이 높았기 때문이지요. 높은 소작료를 내지 못하면 소작인을 내쫓고 땅을 몰수했지요. 이렇게 구마모토 농장은 땅과 부를 축적해갑니다.

다시 찾아온 화호리. 황금들녘 대신 흰 눈이 덮인 들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난번 방문과 마찬가지로 햇살이 짱짱하군요. 화호리 마을 초입에 세워진 거대한 신전을 다시 찾아갑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부서져 있고 문도 막혀있지만 계단 아래로 내부로 들어가보았습니다. 아!

          오늘 답사자들은 허허벌판 폐허에 탐닉하는 존재들입니다. 미곡창고의 내부를 들여다볼까요?


1,2층을 나눴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어요. 한문만 보면 까막눈이 되네요. 블라블라... 글자도 쓰여져있고.
 

          문 안에 작은 공간 안에는 우물이 있습니다.


만국기가 펼럭이고 고장난 앰프도 널브러져 있지만 내부를 더듬어볼 만한 구조물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천장을 떠받치고 있는 목조 트러스와 견고한 콘크리트로 마감한 벽체, 그리고 문과 창문의 흔적까지 고스란히 보입니다. 구조적으로 보면 2층으로 사용된 건물인데, 1,2층이 언제부터 이렇게 뚫려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꽤 오래 된 것 같습니다. 외부에서 느껴지듯 창고 안은 거대했습니다.

동네 할머니께 여쭤보니 5년 전쯤 약장수가 와서 마을 어르신들을 모셔놓고 창고 안에서 시끌벅적 요란을 피웠던가 봅니다. 휘날리는 만국기와 앰프는 그날의 흔적이라고 합니다. 이 창고보다는 좀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창고가 네 개가 더 있었다는 말씀도 해주셨어요. 화호 농장의 쌀가마니가 창고에 모여있다가 신태인으로 집결한 후 군산으로 옮겨졌고 이어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만국기와 앰프까지.... 스토리가 많은 건물이군요.

 

                                  미곡창고는 광복 후 화호중앙병원으로 바뀌었습니다.


                                  입구가 위풍당당하군요. 펄럭이는 적십자기하며.


                                  잠시 화호여고로 사용되었다고 해요.


화호 미곡 창고는 광복 후 마을의 건강을 책임지는 중앙병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정부의 농촌 지원이 끊어지자 병원은 운영이 어려워져 1972년 문을 닫았습니다. 그 후 잠시 화호 여고 교사로 이용되기도 했지요. 미곡창고는 참 다양한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 동안 없던 창문이 생겼다가 다시 막혔고 정문이 생겼다가 막혔으며 2층 계단이 놓였다가 무너졌지요. 세월이 길었던 탓일까요? 마을 사람들은 건물에 대한 어떤 애증도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우에 가족이 살았던 가옥 겸 사무실. 한때 화호우체국으로 사용된 적도 있다고 합니다.

 
화호리는 구마모토 농장도 있었지만 다우에 타로, 오사와 신조와 같은 일본인들이 토지를 보유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일본에 살면서 농장을 원격조종했던 구마모토와 달리 이들은 화호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사람들이지요. 화호는 일본인 거류지로서 일본 어린이를 위한 학교와 상점, 여관 등이 길을 따라 밀집되어 있었습니다. 조선인촌과 학교는 일본인촌과 떨어져 있었습니다.

다우에 가족이 살았던 목조 가옥은 형체만 겨우 남아 세월의 흐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광복 후 우체국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전력에 비하면 참 초라한 모습입니다. 지붕이 내려앉았고, 집을 이루던 기와며 흙과 나무가 모두 지난 세월처럼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좁은 복도를 중앙에 두고 양쪽으로 방이 놓여있고 안쪽에 큰 규모의 부엌이 있습니다. 좁은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니 널찍한 방이 나옵니다. 동쪽과 남쪽을 향한 창이 많아 바깥의 바람과 햇살이 그대로 들어옵니다. 좀 일찍 문화재로 지정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와중에 튼튼하게 남아있는 지붕지지 장치.


          다우에 가옥의 측면 2층. 창문 안은 작은 방이 있습니다.
 

          아슬아슬한 계단을 올라 2층 방을 구경합니다. 마을 아이들의 낙서가 가득합니다.


일본인들이 묵었던 여관 건물도 그 모습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여관은 광복 후 양조장 주인의 살림집으로 바뀌어 따뜻한 보금자리로 오랫동안 구실을 다해왔고 양조장으로 쓰였던 외부 건물은 농사도구를 쟁여두는 창고로 바뀌었습니다. 사람의 온기가 집을 살린 것 같습니다.

 

일본인들이 머물던 옛 여관은 마을 사람들의 살림집이 되었습니다. 살림살이에 맞게 많이 개조했지만 어렴풋이 옛 모습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화호 농장의 병원으로 사용되었던 일본식 목조가옥. 역시 살림집으로 사용되고 있지요.


                                  위 가옥의 옛 모습입니다. 의사들이 환자를 돌보던 농장 부설 병원이었지요.


화호 마을에는 옛 가옥들이 많이 남아있지만 마을 주민들의 살림집으로 바뀌면서 보통의 농촌가옥인지 옛 건물인지 구분이 모호하게 보입니다. 소개해드린 건물 외에도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농촌가옥도 있고 화호 농장의 진료소로 사용했던 일본식 가옥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고요한 소읍의 건물들은 그저 사람들의 보금자리가 되어 지금껏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담으며 남아있습니다. 이런 건물들을 일제강점기의 분노 혹은 치욕이라는 이름으로 단죄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은 마을 사람들에게 기꺼이 몸을 내맡기는 그저 착한 집들이며 세월의 흐름에 조용히 숨을 거둘 시간을 기다리는 순응의 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너르고 풍요로운 평야의 움트는 생명력에 비하면 인간이 지은 건물이란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요.

 
* 자료사진은 <20세기 화호리의 경관과 기억>에서 재촬영한 것입니다.

 

more infromation>>---------------------------------------------------------------

구마모토 화호 농장 미곡 창고

- 주소가 나와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화호리 마을 초입에 있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다우에 농장 사무실 겸 살림집
주소- 전라북도 정읍시 화호리 335번지

화호 농장 진료소
주소- 전라북도 정읍시 화호리 766-9번지

소화여관
주소- 전라북도 정읍시 화호리 454-1번지

더 읽어볼 책----











20세기 화호리의 경관과 기억
(20세기 민중생활사 연구단/ 눈빛)

화호리 마을 역사를 주민들의 구술을 통해 살펴본 자료입니다. 꼼꼼한 사진자료와 주민들이 갖고 있던 옛 자료를 보는 재미도 있지요. 이런 책이 많이 나와주면 좋겠습니다.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다카사키 소지/ 역사비평사)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조선을 찾아왔을까요? 그들은 이땅을 어떻게 생각했고 이나라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그게 궁금해서 찾아보니 이런 책이 있더군요.











식민지 조선과 일본, 일본인 (이규수/ 다할미디어)

위 책의 역자가 호남지역의 주요 일본인들 및 사건을 추려서 정리한 책입니다. 구마모토 리헤이에 대한 내용은 단 한줄 뿐이더군요.구마모토 외에도 더 무시무시한 농장주들이 많았다는 뜻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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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옛 군산해관. 군산을 대표하는 근대문화유산입니다.

 

 
1920년대의 군산 내항과 그 주변 풍경. 빼곡히 들어찬 가옥과 건물들이 지금보다 더 활기차보입니다



근대건축에 관심을 갖게 된 후 우리나라 곳곳의 크고 작은 도시들
, 소읍을 찾아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한번도 발걸음 하지 않았던 도시들도 찾아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 도시만의 독특한 풍경을 발견하고 감탄한 적도 많았습니다. 군산도 그런 곳이었습니다.

 

군산은 볼거리가 참 많은 곳입니다. 사대천왕이 있다 할 정도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맛있는 짬뽕집이 많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이 있다고도 합니다. 설경이 지나치게 아름다운 거대한 호수도 있고요. 그리고 구도심의 오래된 가옥들을 어슬렁거리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입니다. 소위 일제시대의 가옥들이 즐비한 신흥동, 월명동의 거리는 말 그대로 수십 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분위기를 풍기죠. 목조가옥, 독특한 지붕과 창문, 한옥도 양옥도 아닌 건물이 주는 독특한 느낌들. 아스라한 옛 풍경처럼 향수 어린 느낌과 알 수 없는 이질감이 한데 섞여 여행 온 자들의 마음에 야릇한 바람을 불어넣는 그런 곳입니다.


짬뽕도 유명하지만 일해옥 콩나물 국밥도 군산별미라지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 단팥빵, 야채빵이 끝내줍니다.


작정하고 군산을 방문한 것은 2009년 1월 1 아침이었습니다. 그날도 흰 눈이 소복하게 쌓인 도시는 외지인에게 무심한 찬바람을 뿜고 있었습니다. 도시는 고요했고 우리는 그 고요함을 뚫고 옛 항구를 찾아갔습니다. 찾아갈 것도 없이 도로를 따라 쭉 들어오다 보면 느낌으로 알게 됩니다. 이곳이 그곳이구나. 그 때 찬 눈발 사이에 반듯하게 서있는 붉은 벽돌 건물들이 얼마나 무심하게 반짝이던지.

옛 군산해관은 흰 눈 속에서 진홍빛 존재감을 드러내며 기묘한 아름다움을 풍겼고 허물어질 듯 서있는 옛 조선은행은 그 규모만으로도 어찌나 육중한 지 현기증을 느낄 정도였죠
. 드문드문 서 있는 오래된 건물 뒤로는 바닷물이 미동도 없이 스며들었습니다. 파도도 없이 고요한 바다는 마치 호수 같았지요. 이곳을 내항이라고 부릅니다. 항구의 기능은 모두 신항만에 내어준 채 오래된 건물들과 함께 고요히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 듯했어요.


2011 1 1에도 우리 부부는 군산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해맞이 지역과 리조트를 피해 한적한 곳을 찾다 보니 또 군산입니다. 며칠간 내린 눈이 얼음이 되어버린 군산을 거닐었습니다. 싸늘한 바람을 맞으며 어느새 눅눅해진 운동화를 끌고서 군산의 내항을 자박자박 걸어보았습니다. "이런 날 누가 군산 내항에 구경을 오겠어?" 라고 자문하면서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카메라 들고 내항을 기웃거리는 청년들이 몇몇 보이더군요. 대단들하십니다.

 


군산 내항 부잔교. 모두 네 개가 설치되었는데, 지금은 세 개만 남아있습니다.

멀리 조선은행이 보이네요.


군산은 개화기 일본인들이 이주해오면서 발전한 도시입니다. 일본은 넓은 평야와 인접한 군산을 개항하도록 계속 요구했고 바야흐로 1899년에 군산항이 외국인에게 문을 열었습니다. 군산은 외국인이 눈치 보지 않고 자리잡고 먹고 살 수 있는 조계지가 형성되었고 행정기관들이 등장하여 도시의 면모를 갖추어갔지요. 군산 구도심의 격자형 구조가 이 시기에 이미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은 이곳에 본정통, 전주통, 대화정, 욱정, 명치정 등의 이름을 붙였지요.

1911년 각국조계지도. 옛날 지도 보자니 난감하지요? 격자형으로 구획된 것만 확인하고 넘어갑시다.


1905년부터 1925년까지는 바닷가에 항구를 만드는 공사가 시작되었고, 철도와 도로가 건설되면서 군산 시가지가 점차 정돈되고 확장되었지요. 1925년부터 1945년까지 항만공사는 계속 확장되었고 부잔교(뜬다리 부두)가 지어지면서 거대한 항구로 변모해갑니다. 군산은 썰물 때에도 2천 톤급 기선 3척이 댈 수 있는 항만시설이 완료되었고 25만개의 쌀가마니를 보관할 수 있는 창고가 세워졌습니다. 철도선도 늘어나 하루 150량의 화차가 군산을 드나들게 되었지요.



1920년대의 본정통. 소실점 근처 왼편에 뾰족한 지붕 보이는 건물이 조선은행이야요.



1923년 군산지도. 철도와 도로가 확장되었다는 것만 알면 되겠죠?



1936년에 군산은 부산 다음으로 일본에 쌀을 많이 실어 보내는 제2의 미곡수출항이 되었습니다. 군산항에서 출항하는 쌀가마니의 양은 전국 수출량의 25%나 되었다고 합니다. 전북의 드넓은 평원에서 수확한 누런 곡식들이 이곳에 군산항에 모여들었지요. 항구의 넓은 터에 쌀가마니가 산처럼 쌓였습니다.

산처럼 쌓인 쌀가마니가 대체 어느 정도인지 구경해보려면 군산해관에 가보면 됩니다. 군산항을 드나들던 배는 무조건 거쳐야 하는 군산해관(해관은 세관의 옛 이름입니다.). '호남세관자료관'이라는 이름을 조촐하게 내걸고 손님맞이를 하고 있습니다. 당시 군산항의 모습을 자료사진으로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참 예쁜 벽돌건물이죠? 옛 군산해관입니다.


군산해관은
1908년에 지어졌습니다. '꽃처럼 빨간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 만든' 이 건물은 뾰족한 지붕이 무척 이국적입니다. 러시아 미녀처럼 고전적이고 날카로운 매력이 있는 이 건물은 지금도 예쁘게 잘 관리되고 있습니다. 군산을 대표하는 근대문화유산이지요.

옛날에는 왼편에 있는 현관으로 들어왔겠지만 지금은 뒷문으로 출입합니다.


층고가 높은 중앙홀. 햇살이 차분하게 들어옵니다.


볕이 잘 들어오는 현관 홀 안쪽에 층고가 높은 실내 홀이 펼쳐집니다. 양쪽으로 복도가 이어지고 복도는 방으로 연결되지요. 실내 홀은 항구를 드나드는 사람들이 대기하면서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던 곳이겠지요. 지금은 자료사진들이 쭉 전시되어 있을 뿐 앉을 만한 좌석은 없습니다. 옛 군산항 풍경이 이랬구나, 진짜 쌀가마니가 쌓였었구나. 싶습니다. 어리숙한 얼굴의 사람들이 쌀가마니를 바라보는 사진도 있습니다.


 

군산 내항의 축항공사 모습


군함이 정박할 정도로 큰 항구가 되었지요.



쌀가마니가 쌓여있는 창고. 쌀가마니가 조그만 주먹밥처럼 보이네요.


그땐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요? 알기가 어렵습니다. 쌀이 가마니째 실려나가는 것을 수십 년간 보아온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항구는 시끌벅적했을 겁니다. 뿌우, 뿌우, 큰 배가 내뿜는 우렁찬 소리가 배경음악으로 깔리면 짐을 실어 나르는 일꾼들이 발걸음이 다급해졌겠지요. 농장주들은 쌀과 돈을 맞바꾸며 흐뭇하게 미소를 흘렸을 테지요. 그리고 그들은 은행에서 돈놀이를 하거나 미두취인소에 들러 잠시 노름을 즐겼을 테지요.


그들의 돈주머니를 챙겨주었던 은행들이며 무늬만 선물거래소지 노름터나 다름 없었던 미두취인소도 내항과 바짝 붙어있습니다. 조금 건너에 조선은행이 보입니다
.
복원공사를 하느라 온통 비계로 가려놓았군요. 건물의 규모가 거대합니다. 마치 노쇠한 장군을 보는 것처럼 허허로운 느낌이 듭니다. 한때 위용이 대단했던 조선은행은 100여 년의 시간을 건너오면서 뱃속을 모두 털어내고 허허롭게 서있습니다. 어떻게 복원할지 자못 궁금해집니다.

원래는 단층건물이었다죠. 층고가 높고 단단하며 위용이 대단한 건물입니다.


한창 잘나가던 시기의 조선은행. 출입구가 독특합니다.
앞에 서있는 사람과 비교하면 건물 높이를 대략 짐작할 수 있지요.


1920년대말의 군산내항 풍경. 조선은행이 떡하니 있지요.


이 건물을 수리하면서 상량문 현판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1920 12월경에 공사를 시작하며 당시 은행의 지점장은 니시야마 기쿠헤이, 시공자는 시미즈 구미, 공사감독은 미우라 기치, 설계자는 나카무라 요시헤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나카무라는 조선은행 본점(현 한국은행 본점-서울)과 부산지점을 설계했던 인물이지요. 한국전쟁 후 한국상공은행(한일은행)에서 인수하여 은행으로 사용하다가 1981년에 개인 소유로 바뀌어 예식장, 나이트클럽으로도 이용되었습니다. 1990년에 화재가 난 후 보수하지 않고 그대로 20여 년을 방치되어 있었던 뼈아픈 기억도 있지요. 2008년에 군산시가 매입하여 등록문화재로 지정했습니다.

나이트클럽의 이름이 플레이보이였던 것인가요
? 창문에는 못다 지운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원래 단층 건물이었다가 예식장이 되면서 1,2층으로 나뉘고 계단도 생겨났던 것이지요. 조선은행 중 경성을 제외하고 가장 규모가 큰 곳이 바로 이곳이었답니다.


 

일본제18은행 군산지점의 옛 모습.


나가사키에 본사를 두었던 일본제18은행은 건물만 남아있을 뿐, 내부는 벽장 몰딩 외에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부속건물이 옛날 모습 그대로입니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빈집은 비바람, 눈바람에 시달린 듯 점점 폐허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번 방문에는 살짝 열린 대문으로 슬쩍 들어가보았습니다. 두 개의 건물은 사무실 겸 주택과 창고로 사용되었습니다. 창고에는 커다란 금고가 비스듬히 세워져 있고 사무실 내부는 뭐가 뭔지 분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황폐합니다.

외관은 손본 흔적이 역력하죠.

 

내부 몰딩장식. 다락으로 올라가는 계단 등이 남아있습니다만, 원형을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은행 건물 뒤에 부속건물이 좀더 일본식 가옥 느낌이 들죠.


내부는 폐허더미가 되었습니다. 창고 건물 벽을 보는데 이렇게 세월의 흔적이 남아있떠군요.
벽돌 위에 덧바르고 덧입힌 것들.


내항의 동 이름은 장미동입니다. 꽃처럼 아름답다는 뜻이 아니라, 쌀을 쌓아둔다는 의미랍니다. 장미동 군산내항에서 느낀 오롯한 무상감은 김제, 정읍의 널따란 평야를 보면서 점점 비장해졌습니다. 다음 번에는 보수공사를 끝내고 개방한 히로쓰 저택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More information>>-------------------------------------------------------------------------


옛 군산해관

전북 군산시 장미동 49-38번지
전북기념물 제 87호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

전북 군산시 장미동 23-1, 12 번지
등록문화재 제374호
 

옛 일본제18은행 군산지점

전북 군산시 장미동 32번지
등록문화재 제372호 

 

 

좀더 읽어볼 책
 

채만식 / 탁류

단편적으로 흩어진 역사의 장면장면과 도저히 이어 붙이기 힘든 감성적 부분을 결합하는 것은 문학의 역할이 아닐런지요. 그래서 역사를 담고 있는 문학 작품에 많은 의미를 부여합니다. 채만식의 <탁류>는 1930년대의 군산을 가장 충실하게 표현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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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군산해관. 군산을 대표하는 근대문화유산입니다.


 

1920년대의 군산 내항과 그 주변 풍경. 빼곡히 들어찬 가옥과 건물들이 지금보다 더 활기차보입니다.





근대건축에 관심을 갖게 된 후 우리나라 곳곳의 크고 작은 도시들
, 소읍을 찾아 다니게 되었습니다. 이전에는 한번도 발걸음 하지 않았던 도시들도 찾아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그 도시만의 독특한 풍경을 발견하고 감탄한 적도 많았습니다. 군산도 그런 곳이었습니다.

 

군산은 볼거리가 참 많은 곳입니다. 사대천왕이 있다 할 정도로 우열을 가리기 어려운 맛있는 짬뽕집이 많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이 있다고도 합니다. 설경이 지나치게 아름다운 거대한 호수도 있고요. 그리고 구도심의 오래된 가옥들을 어슬렁거리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매력입니다. 소위 일제시대의 가옥들이 즐비한 신흥동, 월명동의 거리는 말 그대로 수십 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분위기를 풍기죠. 목조가옥, 독특한 지붕과 창문, 한옥도 양옥도 아닌 건물이 주는 독특한 느낌들. 아스라한 옛 풍경처럼 향수 어린 느낌과 알 수 없는 이질감이 한데 섞여 여행 온 자들의 마음에 야릇한 바람을 불어넣는 그런 곳입니다.


짬뽕도 유명하지만 일해옥 콩나물 국밥도 군산별미라지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빵집. 단팥빵, 야채빵이 끝내줍니다.



 

작정하고 군산을 방문한 것은 2009년 1월 1 아침이었습니다. 그날도 흰 눈이 소복하게 쌓인 도시는 외지인에게 무심한 찬바람을 뿜고 있었습니다. 도시는 고요했고 우리는 그 고요함을 뚫고 옛 항구를 찾아갔습니다. 찾아갈 것도 없이 도로를 따라 쭉 들어오다 보면 느낌으로 알게 됩니다. 이곳이 그곳이구나. 그 때 찬 눈발 사이에 반듯하게 서있는 붉은 벽돌 건물들이 얼마나 무심하게 반짝이던지.

 


옛 군산해관은 흰 눈 속에서 진홍빛 존재감을 드러내며 기묘한 아름다움을 풍겼고 허물어질 듯 서있는 옛 조선은행은 그 규모만으로도 어찌나 육중한 지 현기증을 느낄 정도였죠
. 드문드문 서 있는 오래된 건물 뒤로는 바닷물이 미동도 없이 스며들었습니다. 파도도 없이 고요한 바다는 마치 호수 같았지요. 이곳을 내항이라고 부릅니다. 항구의 기능은 모두 신항만에 내어준 채 오래된 건물들과 함께 고요히 시간을 흘려보내고 있는 듯했어요.


 

2011 1 1에도 우리 부부는 군산에 있었습니다.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해맞이 지역과 리조트를 피해 한적한 곳을 찾다 보니 또 군산입니다. 며칠간 내린 눈이 얼음이 되어버린 군산을 거닐었습니다. 싸늘한 바람을 맞으며 어느새 눅눅해진 운동화를 끌고서 군산의 내항을 자박자박 걸어보았습니다. "이런 날 누가 군산 내항에 구경을 오겠어?" 라고 자문하면서요.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카메라 들고 내항을 기웃거리는 청년들이 몇몇 보이더군요. 대단들하십니다.

 


군산 내항 부잔교. 모두 네 개가 설치되었는데, 지금은 세 개만 남아있습니다.



멀리 조선은행이 보이네요.






군산은 개화기 일본인들이 이주해오면서 발전한 도시입니다. 일본은 넓은 평야와 인접한 군산을 개항하도록 계속 요구했고 바야흐로 1899년에 군산항이 외국인에게 문을 열었습니다. 군산은 외국인이 눈치 보지 않고 자리잡고 먹고 살 수 있는 조계지가 형성되었고 행정기관들이 등장하여 도시의 면모를 갖추어갔지요. 군산 구도심의 격자형 구조가 이 시기에 이미 완성되었다고 합니다. 일본인들은 이곳에 본정통, 전주통, 대화정, 욱정, 명치정 등의 이름을 붙였지요.


1911년 각국조계지도. 옛날 지도 보자니 난감하지요? 격자형으로 구획된 것만 확인하고 넘어갑시다.





1905
년부터 1925년까지는 바닷가에 항구를 만드는 공사가 시작되었고, 철도와 도로가 건설되면서 군산 시가지가 점차 정돈되고 확장되었지요. 1925년부터 1945년까지 항만공사는 계속 확장되었고 부잔교(뜬다리 부두)가 지어지면서 거대한 항구로 변모해갑니다. 군산은 썰물 때에도 2천 톤급 기선 3척이 댈 수 있는 항만시설이 완료되었고 25만개의 쌀가마니를 보관할 수 있는 창고가 세워졌습니다. 철도선도 늘어나 하루 150량의 화차가 군산을 드나들게 되었지요.



1920년대의 본정통. 소실점 근처 왼편에 뾰족한 지붕 보이는 건물이 조선은행이야요.



1923년 군산지도. 철도와 도로가 확장되었다는 것만 알면 되겠죠?




1936년에 군산은 부산 다음으로 일본에 쌀을 많이 실어 보내는 제2의 미곡수출항이 되었습니다. 군산항에서 출항하는 쌀가마니의 양은 전국 수출량의 25%나 되었다고 합니다. 전북의 드넓은 평원에서 수확한 누런 곡식들이 이곳에 군산항에 모여들었지요. 항구의 넓은 터에 쌀가마니가 산처럼 쌓였습니다.

산처럼 쌓인 쌀가마니가 대체 어느 정도인지 구경해보려면 군산해관에 가보면 됩니다. 군산항을 드나들던 배는 무조건 거쳐야 하는 군산해관(해관은 세관의 옛 이름입니다.). '호남세관자료관'이라는 이름을 조촐하게 내걸고 손님맞이를 하고 있습니다. 당시 군산항의 모습을 자료사진으로 만나 볼 수 있습니다.


 

참 예쁜 벽돌건물이죠? 옛 군산해관입니다.



군산해관은
1908년에 지어졌습니다. '꽃처럼 빨간 벽돌을 한 장 한 장 쌓아 만든' 이 건물은 뾰족한 지붕이 무척 이국적입니다. 러시아 미녀처럼 고전적이고 날카로운 매력이 있는 이 건물은 지금도 예쁘게 잘 관리되고 있습니다. 군산을 대표하는 근대문화유산이지요.



옛날에는 왼편에 있는 현관으로 들어왔겠지만 지금은 뒷문으로 출입합니다.


층고가 높은 중앙홀. 햇살이 차분하게 들어옵니다.



볕이 잘 들어오는 현관 홀 안쪽에 층고가 높은 실내 홀이 펼쳐집니다. 양쪽으로 복도가 이어지고 복도는 방으로 연결되지요. 실내 홀은 항구를 드나드는 사람들이 대기하면서 두런두런 담소를 나누던 곳이겠지요. 지금은 자료사진들이 쭉 전시되어 있을 뿐 앉을 만한 좌석은 없습니다. 옛 군산항 풍경이 이랬구나, 진짜 쌀가마니가 쌓였었구나. 싶습니다. 어리숙한 얼굴의 사람들이 쌀가마니를 바라보는 사진도 있습니다.


 

군산 내항의 축항공사 모습



군함이 정박할 정도로 큰 항구가 되었지요.




쌀가마니가 쌓여있는 창고. 쌀가마니가 조그만 주먹밥처럼 보이네요.



그땐 과연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어떤 감정을 느끼고 어떤 대화를 나누었을까요? 알기가 어렵습니다. 쌀이 가마니째 실려나가는 것을 수십 년간 보아온 사람들은 도대체 어떤 생각을 했을까요? 항구는 시끌벅적했을 겁니다. 뿌우, 뿌우, 큰 배가 내뿜는 우렁찬 소리가 배경음악으로 깔리면 짐을 실어 나르는 일꾼들이 발걸음이 다급해졌겠지요. 농장주들은 쌀과 돈을 맞바꾸며 흐뭇하게 미소를 흘렸을 테지요. 그리고 그들은 은행에서 돈놀이를 하거나 미두취인소에 들러 잠시 노름을 즐겼을 테지요.



그들의 돈주머니를 챙겨주었던 은행들이며 무늬만 선물거래소지 노름터나 다름 없었던 미두취인소도 내항과 바짝 붙어있습니다. 조금 건너에 조선은행이 보입니다
.
복원공사를 하느라 온통 비계로 가려놓았군요. 건물의 규모가 거대합니다. 마치 노쇠한 장군을 보는 것처럼 허허로운 느낌이 듭니다. 한때 위용이 대단했던 조선은행은 100여 년의 시간을 건너오면서 뱃속을 모두 털어내고 허허롭게 서있습니다. 어떻게 복원할지 자못 궁금해집니다.


원래는 단층건물이었다죠. 층고가 높고 단단하며 위용이 대단한 건물입니다.



한창 잘나가던 시기의 조선은행. 출입구가 독특합니다. 앞에 서있는 사람과 비교하면 건물 높이를 대략 짐작할 수 있지요.


1920년대말의 군산내항 풍경. 조선은행이 떡하니 있지요.



이 건물을 수리하면서 상량문 현판을 발견했다고 합니다. 1920 12월경에 공사를 시작하며 당시 은행의 지점장은 니시야마 기쿠헤이, 시공자는 시미즈 구미, 공사감독은 미우라 기치, 설계자는 나카무라 요시헤이라고 명시되어 있습니다. 나카무라는 조선은행 본점(현 한국은행 본점-서울)과 부산지점을 설계했던 인물이지요. 한국전쟁 후 한국상공은행(한일은행)에서 인수하여 은행으로 사용하다가 1981년에 개인 소유로 바뀌어 예식장, 나이트클럽으로도 이용되었습니다. 1990년에 화재가 난 후 보수하지 않고 그대로 20여 년을 방치되어 있었던 뼈아픈 기억도 있지요. 2008년에 군산시가 매입하여 등록문화재로 지정했습니다.
나이트클럽의 이름이 플레이보이였던 것인가요? 창문에는 못다 지운 흔적이 남아있습니다. 원래 단층 건물이었다가 예식장이 되면서 1,2층으로 나뉘고 계단도 생겨났던 것이지요. 조선은행 중 경성을 제외하고 가장 규모가 큰 곳이 바로 이곳이었답니다.


 

일본제18은행 군산지점의 옛 모습.


나가사키에 본사를 두었던 일본제18은행은 건물만 남아있을 뿐, 내부는 벽장 몰딩 외에는 흔적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그런데, 부속건물이 옛날 모습 그대로입니다. 오랫동안 사람이 살지 않은 빈집은 비바람, 눈바람에 시달린 듯 점점 폐허로 변해가고 있습니다. 이번 방문에는 살짝 열린 대문으로 슬쩍 들어가보았습니다. 두 개의 건물은 사무실 겸 주택과 창고로 사용되었습니다. 창고에는 커다란 금고가 비스듬히 세워져 있고 사무실 내부는 뭐가 뭔지 분간하기가 어려울 정도로 황폐합니다.

외관은 손본 흔적이 역력하죠.

 

내부 몰딩장식. 다락으로 올라가는 계단 등이 남아있습니다만, 원형을 알아보기 어렵습니다.

 

은행 건물 뒤에 부속건물이 좀더 일본식 가옥 느낌이 들죠.


내부는 폐허더미가 되었습니다. 창고 건물 벽을 보는데 이렇게 세월의 흔적이 남아있떠군요. 벽돌 위에 덧바르고 덧입힌 것들.




내항의 동 이름은 장미동입니다. 꽃처럼 아름답다는 뜻이 아니라, 쌀을 쌓아둔다는 의미랍니다. 장미동 군산내항에서 느낀 오롯한 무상감은 김제, 정읍의 널따란 평야를 보면서 점점 비장해졌습니다. 다음 번에는 보수공사를 끝내고 개방한 히로쓰 저택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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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 군산해관

전북 군산시 장미동 49-38번지
전북기념물 제 87호 


옛 조선은행 군산지점

전북 군산시 장미동 23-1, 12 번지
등록문화재 제374호
 

옛 일본제18은행 군산지점

전북 군산시 장미동 32번지
등록문화재 제372호 

 

 

좀더 읽어볼 책


 

채만식 / 탁류

단편적으로 흩어진 역사의 장면장면과 도저히 이어 붙이기 힘든 감성적 부분을 결합하는 것은 문학의 역할이 아닐런지요. 그래서 역사를 담고 있는 문학 작품에 많은 의미를 부여합니다. 채만식의 <탁류>는 1930년대의 군산을 가장 충실하게 표현하고 있는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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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층 홀은 높은 천장에 샹들리에가 매달려 있어 고급스러워 보입니다. 고급 상점에 들어온 것처럼 느껴집니다. 짙은 목재 바닥과 어울리게 전시대도 유리와 목재로 꾸몄습니다. 붉은 커튼이 내려져 있어 내부는 어둡지만 전시대에는 스팟 조명이 있어 관람에는 무리가 없습니다. 전시물은 인천이 개항한 시기인 1883년 인천을 통해 처음 소개된 근대 문물들을 보여줍니다.
 


두 개의 이미지가 겹쳐져 입체적으로 보이는 사진기랍니다 



전신 업무를 볼 때 사용한 기구들이지요.
 


전보에 썼던 내용입니다.

 


경인선 기관차와 기차표

갑문식 도크에 대한 영상이 흘러나옵니다. 인천바다는 수심이 얕고 뻘이 많아 큰 배가 드나들지 못했지요. 일제강점기에 갑문식 도크를 세워 물을 가둬서 배가 드나드는 항구를 만든 것이 지금에 이르고 있습니다. 인천에서 가장 먼저 시작된 것 중 하나가 철도입니다. 1897년에 공사가 시작되어 제물포와 노량진을 잇는 경인선이 완성됩니다. 1900년에 한강철교가 세워진 후에야 서울 시내에서 인천까지 철도로 연결되게 되지요.




우편엽서. 손바닥만한 엽서가 처음 등장했을 때는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고 합니다.

 


중앙홀에서 가장 흥미로운 전시물은 우표입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들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습니다. 우표에 대해서도 재미있는 이야기가 전해지지요. 근대우편업무를 도입하여 우정총국이 문을 연 것은 1884년입니다. 우정총국은 5문, 10문, 50문, 100문짜리 등 네 종류의 우표를 만들었는데, 총 250만 장의 우표는 모두 일본에서 인쇄했습니다. 우정총국이 문을 열 당시에는 5문짜리와 10문짜리 2만장만 들어왔고 나머지는 순차적으로 들어올 예정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우정총국이 문을 연지 20일 만에 갑신정변이 일어나 우정총국이 폐쇄되는 사태가 발생합니다. 근대 우편업무는 중단되고 10년 후에야 우편업무가 정상적으로 제개되지요.


남은 우표들은 서너달 후 서울에 도착했지만 모두 쓸모없는 물건이 되고 말았습니다. 일본에서는 인쇄대금을 달라고 보챕니다. 이것을 중간에서 해결한 것이 독일계 무역회사인 세창양행이었습니다. 세창양행은 우표를 잘 포장해서 동양의 풍물에 관심이 많은 유럽 사람들에게 기념품으로 팔았습니다. 덕분에(?) 지금도 우리나라 최초의 우표들을 어렵지 않게 구경할 수 있습니다.

이곳에서는 최초의 우표인 문위우표를 비롯해서 1900년대에 등장한 다양한 우표들과 이른바 독수리우표도 전시되어 있습니다. 독수리 무늬가 그려진 독수리 우표는 프랑스에서 인쇄했는데, 문의우표와 비교해보면 인쇄나 디자인이 더 섬세합니다. 짙은 파랑색으로 인쇄된 우편엽서도 구경할 수 있습니다. 예스러운 글자가 박힌 우표직인이 섬세하기 짝이 없습니다.

요즘은 편지도 거의 보내지 않을뿐더러 우체국에서 우편업무를 본다고 해도 찌지직하고 인쇄된 우편용 스티커에 의존하는 경우가 많지요
. 우표는 철 지난 물건이 되고 말았습니다만, 진짜 옛날 우표에는 뭔가 고급스럽고 조심스러운 점이 있습니다. 우표 스스로가 이야기를 쏟아내고 있는 느낌이 듭니다. 우표 하나만 붙이면 바다 건너 외국말을 하는 사람들에게도 , 지구 반대편에 있는 사람에게도 소식을 전할 수 있으니 얼마나 사연이 많겠습니까?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의 모형입니다.

옛 금고는 시커먼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습니다. 금고로 들어가면 널찍하고 높은 전시장이 있습니다. 이곳에서 인천에서 제작된 동전을 볼 수 있습니다. 조선 왕실을 상징하는 오얏꽃 무늬가 선연한 동전들입니다. 오얏꽃 무늬는 자주 벚꽃와 혼동되곤 합니다만, 화폐에서 일본을 상징하는 무늬로는 오동나무꽃이 있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사용된 화폐에는 오얏꽃 무늬가 등장한 적도 있고 오동나무꽃 무늬가 등장한 적도 있습니다.

 화폐는 자주 바뀌었고 돈의 가치도 무척 오락가락했습니다. 그 틈에서 세상 물정에 어두웠던 사람들이 스스로를 지킬 방법은 많지 않았을 것입니다. 은행이 번 돈은 모두 이 땅의 사람들이 잃은 돈이었을 겁니다. 돈은 보여지는 그 이상을 담고 있습니다.


제게도 일제 강점기 직후에 발행된 지폐가 몇 장 있습니다
. 시골에서 농부의 아내로 살던 외할머니가 꽁꽁 숨겨두셨던 것들입니다. 당시에는 꽤 가치가 높았겠지요. 지폐 몇 장은 60여 년이 지난 후 나달나달한 채로 제게 전해졌습니다. 그 낡은 지폐 속에 할머니의 삶이 있겠지요. 그 당시의 풍경이 담겨있고 당시 사람들의 생각이 흐르고 있겠지요.

 

인천 개항 박물관에서 본 것 중 가장 인상적인 것들은 우표와 동전입니다. 자세히 보려면 돋보기를 들이대야 하는 이 작은 물건들이 담고 있는 이야기는 온 세상, 그리고 수대를 걸친 역사입니다. 길지 않은 시간이었지만 숨가쁜 여행을 한 것처럼 흥미진진했습니다. 그 흥분이 좀 오래갈 것 같습니다.


존스턴 별장의 모습이 담긴 사진도 전시되어 있어요.


More information

인천 개항 박물관
(옛 일본제일은행 인천지점)

주소-인천시 중구 중앙동 1가 9-2번지
문의- 032-760-75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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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가 가기 전에 내셔널 트러스트의 후원 회원으로 가입했습니다. 한 달에 만원씩 후원합니다. 큰 돈도 아닌데, 여태 망설이고 있었던 것은 무슨 이유일까요? 이런 단체의 중요성이야 두 말할 것도 없고, 그 운동에 동참해야 한다고 늘 생각해왔는데 행동이 생각을 따라가려면 시간이 필요한 것 같습니다.


내셔널 트러스트는 자연과 문화를 지켜나가고자 하는 단체입니다
. 훼손 위기에 있는 자연물이나 문화 현장을 회원들이 후원금으로 매입하여 자산으로 만들고 그것을 직접 관리하는 단체입니다. 올 봄에 근대 건축 기행에 대한 책을 쓰면서 내셔널 트러스트를 알게 되었습니다. 내친 김에 책 수익금의 일부를 근대문화재를 지키는 일에 써달라고 내셔널 트러스트에 기부하게 되었지요. 그러다가 12월이 되자, 불현듯, 내 이름으로 지속적으로 좋은 일을 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작지만 지속적인 관심.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해서죠.

 
올해 한 해를 돌아보니
, 무척 고단하고 속상한 일들이 많았고 뒤늦은 시행착오를 수습하느라 몸과 마음이 많이 지쳤습니다. 그 뿐인가요? 실업 불안, 교육 불안, 먹거리 불안, 건강 불안, 사회 불안, 정치 불안, 안보 불안으로 사회가 뒤숭숭하여 그 스트레스도 만만치 않았지요. 많은 사람들에게 올해는 잊어버리고 싶은 한 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불안하고 피로한
2010. 그냥 보내기가 안타깝더군요. 착한 일 한가지는 해야 나의 2010년이 떳떳하지 않을까? 그래서 문화유산을 보전하는 기금에 후원하기로 한 것입니다. 쇼핑하는 것보다 기분이 더 좋아지더군요. 조금씩 모여서 큰 힘이 되는 것을 보는 것, 좋은 일을 하는 사람들과 조금이라도 연결되는 것. 그런 일들을 참 잊고 살았던 듯해요. 사람들이 물심양면 서로 도우며 진심에서 우러난 웃음을 보는 것, 참 훈훈하지요. 그런 웃음 찾기가 참 어려웠던 2010, 지금이라도 훈훈하게 웃어보려고 합니다.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입니다. 흰색부분은 후에 덧붙여진 부속건물입니다.


지난 번에 다녀온 개항 박물관 이야기를 해보겠습니다. 개항 박물관은 인천 개항장 근대 건축 전시관에서 길 하나 건너면 바로 찾을 수 있습니다. 일본제1은행 인천지점이라는 문화재 건물을 활용했습니다. 이 은행 건물은 1900년대 초에 지어졌고 일제 강점기의 중앙은행인 조선은행으로도 오랫동안 사용되었습니다. 지금도 정문 위에 朝鮮銀行이라는 글자를 발견할 수 있지요.


박물관은 오픈한지 채 석달도 되지 않은 따끈따끈한 장소입니다
. 건물은 복원 공사가 끝나고도 전시물이 채워지지 않아 오랫동안 문이 닫혀있었습니다. 외관에서부터 오래된 역사가 느껴지는 건물을 보면서 도대체 내부는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하게 여겼을 사람들도 많을 겁니다. 이제 문을 열고 들어가 건물 내부 구경도 하고 전시물도 찬찬히 보면서 인천의 옛 풍경을 상상해볼 수 있습니다. 유물은 많지 않고 전시물이 일관성 없이 나열되어 있기는 하지만, 역사의 파편을 통해서 조금씩 그 시대의 흔적을 읽어보고 더듬어볼 수는 있습니다. 1은행이 문을 열고 기다리고 있다는 것만으로 가슴이 쿵쿵거립니다. 부족한 것들은 지속적으로 채우면 되고 필요한 것들은 추가로 설치하면 되지요. 문을 여는 게 중요합니다.

 

일제 강점기의 은행 모습입니다. 부속건물은 아직 없을 때네요.


개항 박물관에서 개항의 흔적만 살펴본다면 많은 것을 놓치는 셈입니다
. 먼저 이 건물의 역사를 살펴볼까 합니다. 일본제1은행은 우리나라에 근대 금융의 시작을 알린 은행입니다. 1873년 부산에 가장 먼저 상륙해서 금융에 눈이 어두웠던 조선인들을 현혹했지요. 인천이 개항하자마자 지점을 설치해서 영업에 들어갔고 1899년에 본정통 2정목이었던 현재 자리에 신사옥을 짓고 황금어장을 개척하기 시작했습니다.

인천은 전 세계 사람들이 모여드는 국제도시였고 외국에서 들어오는 물품들
, 외국으로 나가는 물품들이 모여드는 곳이었습니다. 자연스럽게 돈과 쌀과 금이 쌓여갔지요. 그 중심에 서 있던 은행이 바로 일본제1은행입니다. 일본제1은행은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중앙은행인 조선은행으로 승격되어 화폐를 생산하는 기관이 됩니다. 쭉 은행으로 사용된 건물은 광복 후에 조달청 청사가 되었다가 임대건물이 되었다가 합니다
 


조선은행이라는 글씨가 선명합니다.

 

건물은 화강석으로 육중하게 지어졌습니다. 검푸른 돔이 올려진 석조건물 뒤에는 돈과 물건들이 차곡차곡 쌓여있던 금고 건물이 따로 붙어있습니다. 이 건물은 일본인 건축가인 니이노미 다카마사가 설계하고 역시 일본 회사가 공사를 진행했습니다. 모래, 자갈 등을 제외한 모든 재료들, 즉 벽돌, 목재, 석재 등을 모두 일본에서 가져와 지었습니다. 오리지널리 메이드 인 재팬인 셈이죠.


은행 건물은 규모가 크고 워낙 튼튼하게 지어서인지
, 백여 년의 세월이 지나도 그대로 남아있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근대문화유산으로 지정된 문화재 중에도 은행이 꽤 있습니다. 어떤 은행이 있냐 하면, 중앙은행인 조선은행(서울, 인천, 군산) 조선식산은행 (대구, 강경), 일본제18은행(인천, 군산)이 있습니다. 그리고 호남은행, 호서은행, 한일은행 등 지방은행들도 몇몇 찾아볼 수 있습니다.

 


금고는 2층 높이로 지어졌습니다. 전시실은 윗층이고 아랫층은 공개되지 않는 곳입니다. 무엇이 있을까요? 수장고쯤 되려나요.


은행은 건물도 단단하게 지었지만 내부에 철옹성 같은 금고가 남아있어 더 흥미롭지요
. 금고는 건물의 안쪽에 깊고 높게 지었습니다. 두꺼운 검은 철문은 쉽사리 열리지 않을 것처럼 육중합니다. 포격에도 끄덕 없을 만큼 보완성을 자랑하지요. 건물 옆에는 흰색으로 덧칠한 2층짜리 부속 건물이 있습니다. 지금은 부속건물과 뒤쪽 금고까지 길을 연결하여 전시장으로 꾸몄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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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0년에 세워진 일본제18은행 인천지점. 나가사키에 근거를 둔 은행이지요.
 


인천이 개항할 무렵, 이곳에 있었던 독특한 건축물들을 모형과 자료로 전시하고 있습니다.

18은행까지 가면 이 여행의 절반은 둘러본 셈이 되지요. 18은행은 인천개항장 건축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습니다. 인천이 개항하던 시절, 청국인, 일본인, 서양인이 한 군데서 각각의 터를 잡고 살던 모습이나, 당시에 지어진 건축물을 모형과 사진으로 만나볼 수 있죠.

지금 남아있는 건물 중에서 눈 여겨 볼 것은
, 제물포 구락부, 일본 제일은행 인천지점, 인천 답동 성당, 인천우체국 등입니다. 지금까지 살아남은 건축물도 있어요. 그래서 인천 중구를 거닐면 백 년 전으로 여행을 떠나는 것 같지요. 전시장을 둘러보면 자료가 풍부한 것은 아니지만 당시 분위기가 어땠는 지 좀 감이 옵니다. 자그마한 단층 건물을 잘 다듬어서 특징 있는 전시물을 보여주는 것으로 이 건물은 해야 할 일을 다 한 것 아닐까요?


 

홍예문. 남아있습니다. 자동차 한대 겨우 통과하는 언덕길이죠. 한번 지나가 보세요.
 


제임스 존스턴이라는 재벌의 별장이지요. 일제 강점기에 인천각이라는 요정으로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만국공원(자유공원)의 랜드마크였죠.

 


인천해관입니다. 모형으로 보니 색다른 모양새가 더 잘 느껴지네요.
 


영국공사관입니다. 사라지고 없지요. 

 


18은행 옆에 서있던 제58은행의 모형입니다. 에쁜 건물이지요. 지금도 남아있습니다.

 


제18은행에서 도로 하나 건너편에 있는 일본 제1은행. 잘 생긴 건물입니다.


전시물을 보다 보면, 무척 독특한 건물들도 만나게 됩니다.
응봉산 산자락에 떡 하니 세워진 두 채의 대저택이 눈에 띕니다. 존스턴이라는 사람이 살았던 별장과 세창양행에서 소유했던 저택입니다. 지금은 사라졌으니 괜히 응봉산을 올라갈 필요는 없습니다.

존스턴 별장을 보면 스위스 어디쯤 있어야 할 건물 같습니다
. 영국인 제임스 존스턴은 상하이에서 무역업으로 큰 돈을 벌어들인 인물이었다고 합니다. 상하이에도 규모가 큰 별장을 지어 부를 과시했지요. 그는 미지의 금광 같았던 조선으로 눈을 돌렸지요. 존스턴은 상하이처럼 인천에도 큰 별장을 세웠습니다.

인천 별장을 보세요. 화려합니다. 게다가 응봉산 꼭대기, 지금의 한미수교100주년 기념탑이 서있는 자리에 대규모 저택이 있었으니 눈에 띄지 않을 수 없겠지요. 어디에서나 눈에 띄는 건물을 랜드마크라 부르는데, 이 건물이 그 시절에는 딱 그랬습니다. 한국전쟁의 전세를 뒤집은 유명한 인천상륙작전 때 이 건물이 목표가 되었다고 합니다. 포탄으로 너덜너덜해진 별장은 앙상하게 뼈대만 남아있다가 곧 사라졌습니다.


존스턴 별장이 꼭대기에 있네요. 독일인 건축가 로트케젤이 설계했어요.


존스턴 별장. 1905년에 완공되었습니다. 좀 자세히 볼까요?
탑신이 있고 세밀한 조각상에, 유리 온실까지 있었던 고급 저택이에요.


1951년의 모습입니다. 배가 뻥 뚫렸네요.그래도 형태는 남아있습니다.


1950년대 모습. 귀신 나오는 집이라 불리기도 했다는군요. 많이 허물어진 존스턴 별장.


청나라 역관이었던 오례당이 살았던 오례당 주택은 서양 중세의 성처럼 원뿔형태의 지붕이 있었습니다. 이 건물은 전쟁 때도 살아남았지만 후에 철거되고 다세대 주택이 들어왔습니다.

우리나라 근대사의 중요한 인물인 호레이스 앨런의 별장도 인천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앨런의 별장은 서양인들이 모여 살던 조계지가 아니라, 배다리라는 지역에 있었습니다. 배다리 지역은 인천 개항장과는 또다른 이야기를 담고 있는 동네이므로 다음에 둘러보면서 이야기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 모양새와 취향이 제각각이듯, 살던 집도 국적에 따라 취향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전 그것이 재미있습니다. 집이 남들과 똑같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건축 활동이 훨씬 자유롭고 취향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요즘이 과연 건축의 형태에 얼마만큼 관대한지 모르겠습니다. 2010년 주거형태로 가장 선호하는 것이 아파트니까요. 그것도 초고층 대단지 말입니다. 똑같은 그릇에 담긴 삶이 어찌 서로 다를 수가 있을까요? 상상력을 펼치기에 우리 사는 모습이 너무 비슷하지 않은가요? 그런 생각을 또 해봅니다.

 

중국인 역관 오례당이 짓고 살던 집.
오례당은 스페인 출신 아내 아말리아와의 행복을 꿈꾸며 이 집을 지었지만 몇 해 살지 못하고 사망했어요.


둥근 철모 모양이 유난히 눈에 띄는 건물이죠.

남아있냐고요? 모두 사라지고 없습니다. 우리나라에 닥친 전쟁의 소용돌이, 그리고 개발시대를 맞아서 오래된 것들이 많이 사라졌습니다. 남은 것은 정부 소유 건물이거나 종교시설물, 학교 건물 등 이권이 개입될 여지가 적은 것들이지요.


그러하기에 건축전시관과 같은 장소도 생겨나는 것이겠지요
. 옛 모습을 기억하고 현재 모습을 비춰보는 거울로서 말이죠. 참, 전시장 안쪽에 있는 엽서 전시장을 꼭 돌아보세요. 옛날 엽서 사본을 전시하고 있는데, 전시자료보다 더 흥미로운 장면이 많습니다. 인천의 풍경을 찍은 엽서들이라고 해도 인천의 모습만은 아니겠지요. 그 시절, 부산, 대전, 목포, 평양, 원산 등지도 이와 비슷한 모습이었으리라 생각해봅니다.

왜 이 엽서들을 기념품으로 팔지 않는 지 저는 그게 궁금합니다. 독일 뮌헨을 여행할 때 이차대전 후 폭격으로 폐허가 된 도시 풍경도 기념엽서로 팔길래 몇 장 사온 적이 있거든요. 뮌헨 뿐입니까? 파리, 베를린, 로마...다른 유명짜한 관광 도시들도 옛 풍경을 팔아서 먹고 살잖아요. 엽서 기념품. 내년에는 기대해보겠습니다.

짬뽕 한 그릇(탕수육 포함)과 시간을 거스르는 오래된 풍경
. 그리고 그 속에 잠시 어슬렁거리는 우리들.

오늘은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합니다
. , 얼마 전에 출간된 책에 따르면 짬뽕도 재미있는 역사를 담고 있더군요. 인천처럼 중국인들이 살던 개항도시에는 어김없이 나타나는 음식이라나요.



다음 번에는 최근에 문을 연 인천개항박물관으로 가보겠습니다
.

 

 

More information

인천 개항장 근대건축 전시장(옛 일본제18은행 인천지점)
위치-인천시 중구 중앙동 2가 24-1번지
인천시 유형문화재 제50호


 

더 읽어볼 책

 

만국공원의 기억/ 인천문화재단

인천 자유공원과 개항장의 역사를 보여주는 책. 자료사진이 많아서 쉽게 접근할 수 있어요.

         



차폰 잔폰 짬뽕/ 주영하 지음/ 사계절
우리가 좋아하는 짬뽕에도 역사와 문화가 있다. 알고 먹으면 더 좋을 듯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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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

그날은 기분이 울적해서 짬뽕이나 먹어볼까 하여 차를 움직였습니다.

인천 차이나타운에는 꽤나 맛있는 짜장면집이 있지만 사람이란 자고로 가던 곳만 꼭 고집하는 버릇이 있기 마련이라
, 늘 가던 향원으로 향했지요. 향원은 차이나타운과는 조금 떨어진 신포시장 입구에 있습니다.

일요일 오후
, 신포동에는 거대한 나이트클럽이 어젯밤 과음을 호소하는 듯 거무스레한 몸집을 뒤틀고 있더군요. 거긴 늘 그렇지요. 항구 근처의 어수선한 분위기, 뱃사람들이나 뱃사람의 후예들이 하룻밤 놀다 갈 목적으로 들어가는 대형 클럽, 그리고 낡아서 손만 대면 먼지가 주룩 흐를 것 같은 오래된 건물들.


 


1924년에 지어진 인천우체국입니다. 이제 이런 건물을 보는 게 새롭게 느껴지는 거죠.


짬뽕과 탕수육을 기다리며 창 밖을 보니 오, 인천우체국이 보입니다. 인천이 본격적으로 항구로 개발되던 1920년대에 지어진 건물입니다. 우체국은 배에서 내린 물건이나 배로 떠날 물건들이 쉽게 움직일 수 있도록 항구와 맞닿은 도로에 세워졌어요. 그리고 그 옆에는 인천세관과 해운상사들과 상업은행들이 군데군데 자리잡았었지요.

세관은 당시에는 '해관'으로 불렸어요. 인천해관은 검은 나무 격자와 뾰족한 탑 모양의 지붕을 가진 서양식 건물이었어요. 마치 독일이나 프랑스 노르망디 지역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분위기의 건물이 세워졌던 거지요. 90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 독일풍 인천세관이나 은행은 사라지고 그 자리에 다른 건물들이 들어섰지만 우체국은 그때 모습을 유지한 채 남아있습니다
 


인천세관의 모습입니다. 우리나라가 아니라 독일 어디쯤인 것 같기도 하고요.

 


뒤쪽엔 인천해관이 앞에는 오사카 상선회사가 있어요.
인천 우체국은 항구에 면해 있고 주변에 세관, 상선회사, 해운창고가 즐비한 곳이었죠.


걸쭉한 짬뽕 국물보다 지금까지 남아있는 우체국이 더 진하게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래요. 그래서, 이곳에 자주 올 수밖에 없습니다. 오래된 건물을 보러, 오래된 국물 맛을 보러, 오래된 이야기를 들으러, 오래된 길을 걸으러, 오래된 마음을 곱씹으러요.

거리에 온통 묻어있는 알쏭달쏭한 노스탤지어
. 이건 뭘까요? 인천은 그런 빛깔입니다.

 

 

잔뜩 부푼 위장을 쉬게 할 요량으로 차이나타운까지 어슬렁거려봅니다. 곧 눈발이 날릴 것 같은 흐린 날씨지만 다행히 찬 바람이 없어 걸을 만했지요.
길도 걷고 카메라로 툭툭 사진도 찍으면서
예전에 본 1930년대 지도를 떠올려 보았습니다. 잘 다듬어진 격자 무늬의 거리가 개항장을 잘 나누고 있고, 해안에는 이미 항구시설이 다 정비가 되어 있었지요. 인천은 수심이 얕아서 큰 배가 드나들기 어려운 곳이었지요. 이곳에 갑문식 도크를 세워 물을 채운 후 배가 드나들 수 있도록 뱃길을 만든 것이지요. 해안길에는 큼직큼직한 창고들이 가득합니다
.

 


갑문식 도크가 세워진 인천 항의 모습

 


지겟군이 거대한 상선을 바라보고 있군요.


 


해안동 일대의 모습입니다. 이런 목조 건물 뿐만 아니라, 콘크리트와 벽돌로 지어진 창고들도 많았죠.


인천 개항장 풍경. 집과 사람들로 바글바글합니다.


이 거리는 지금도 예전과 변함이 없습니다. 옛날 길 모양 그대로 지번이 형성되었고 해안로 창고 건물도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많아요. 낡고 우중충한 창고 건물은 나이트클럽이나 정비시설로 바뀌긴 했지만 그 분위기가 여전합니다.

눈에 띄는 대로 몇 컷 찍어보았습니다. 오래된 동네라는 느낌이 옵니다.


중구청을 향해 가는 길은 인천이 개항한 이래 일본인을 위한 구역이었고, 일본이 우리나라를 점령한 이후에는 본정통으로 개발한 곳입니다. 본정(혼마치)는 일제강점기에 성장한 도시라면 한번씩 등장하는 도심의 이름이지요. 본정의 대부분이 중앙로라는 이름으로 바뀌었습니다.

꼬불거림 없이 쭉쭉 뻗는 길 양쪽으로 묵은 흔적이 역력한 건물들이 줄을 잇습니다
. 안쪽 골목은 주택가와 상가, 해안과 가까운 쪽은 대형 창고들이 있죠
.


인천항 부근을 지도로 본다면 이랬어요.1930년대가 아닐까 싶은데요. 기억이 가물거립니다.


옛 본정통, 일본인들이 목조주택을 짓고 살았던 길을 따라 걸어 올라가봅니다. 중구청 근처까지 가면 백 년 된 은행건물들이 여전한 자태를 보여줍니다. 일본 제1은행, 일본 제18은행, 일본 제58은행으로 불렸던 건물 세 채가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둔 채 서있습니다.

당시 일본은 은행 인가 번호가 바로 그 은행의 이름이 되곤 했는데, 1은행은 일본 중앙은행이며, 18은행은 나가사키 은행, 58은행은 오사카은행의 다른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인천에 세워진 은행 건물들입니다. 중앙에 세워진 것은 일본제일은행, 왼쪽에 단층건물이 일본 제18은행,
그 왼쪽에 희미하게 보이는 2층 건물이 제58은행입니다. 이 세 채의 은행은 지금까지도 그 모습을 유지하고 있어요.

 

개항장 풍경. 멀리 산 등성이에 있는 건물이 존스턴 별장입니다. 눈에 딱 띄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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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끔 성당에 간다
. 기도를 드린다기 보다는 성당 주변을 어슬렁거리기 위해서다
.
성당 주변에는 작고 소박하더라도 나무 그늘이 있고 걸터앉을 만한 자리도 있다. 마음을 한없이 가라앉혀주는 성모상, 넉넉한 품이 느껴지는 아름드리 나무도 만나게 된다. 마음 속에서 아우성치는 소리도 잦아든다.

사람의 소리는 모두 묵음이 되고 자연의 소리만 남아있는 곳
. 성당을 거닐 때면 평범하지 않은 소리가 들려온다. 내 발 아래에서 마른 흙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머리카락을 헝클고 도망가는 바람 소리, 나뭇잎에 살짝 얹힌 풀벌레의 가냘픈 움직임. 그런 소리들
.



날 좋은 가을날 풍수원 성당에 갔다
.
강릉에 12일 여행을 떠나던 날, 자동차를 달려 여정을 중간쯤 되는 곳에 풍수원 성당이 있었다. 점심식사도 할 겸 잠시 쉬어간다고 횡성에 들어섰는데, 그만 이곳에서 한참 시간을 보냈다. 일요일 오전에서 오후로 넘어가는 시간쯤이었다.




붉은 벽돌로 촘촘하게 다진 아담한 성당이 눈앞에 등장했다
.
첨탑이 있고 등뼈가 솟은 것처럼 지붕 위가 뾰족한 박공 지붕이다. 붉은 벽돌이 만들어내는 자연스러운 켜 때문인지 작은 규모가 아닌데도 아담해 보인다. 성당 안에도 성당 밖에도 이미 사람이 많다. 서울이며 곳곳에서 피정 온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니 성지순례를 올만한 유서 깊은 성당인가 보다.




건물을 보면 그런 느낌이 전해진다
. 단순하고 단단한 형태, 더할 것도 뺄 것도 없이 간결하다.

정오를 넘어가니 햇살이 더욱 진해진다. 햇살이 진할수록 건물은 더 투명하게 보인다. 형태를 이루고 있는 실루엣이 느슨해지는 대신, 그림자는 짙어진다. 건물 속에 몸을 담그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적당히 서늘하고 적당히 포근한 햇살을 맞으며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몸을 굽혀본다. 성당 안에서 미사가 아직 끝나지 않았는지 신부님의 목소리가 나긋나긋하게 흘러나온다. 오늘 꽤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왔나 보다.

 

포근한 산골짜기 안에 자리잡은 작은 마을 풍수원, 바람이 불고 시내도 흘렀다 하여 불린 이름이다. 첩첩 산중 작은 마을에 이토록 아름다운 성당이 자리잡은 이유는 무엇일까? 그리고 전국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찾아오는 이유는 또 무엇일까?

풍수원 성당의 역사를 조금 살펴보자.


 

풍수원 성당은 1909년 낙성식을 올렸으니 벌써 백 년이나 되었다. 그런데 성당이 생겨나기 전에도 천주교인들이 신앙촌 마을을 형성하며 모여 살았다고 한다. 그 역사가 1801년부터인데, 천주교를 허락하지 않았던 조선 왕실이 천주교인을 모질게 죽이기 시작했던 신유박해가 있었던 해다.

그 때 도성을 버리고 도망 온 교인들이 산 넘고 물 건너 이곳까지 흘러 들었던 모양이다. 1866년 병인박해 때 수천 명의 목숨이 종교의 이름으로 사라졌을 때에도 도망 온 무리가 또 풍수원에 숨어들었다.
풍수원은 이렇게 성직자 한명도 없이 교인들이 모여서 만든 자생적인 신앙촌마을이다.

병인박해가 일어난 지 20년 후인 1886년 프랑스와 조선이 통상수호조약을 맺었고 이때부터 천주교의 포교와 교육이 자유로워진다. 강원도 산골에서 숨죽이고 살아온 이들이 점차 신앙촌으로 자리를 굳히자 1888년에 프랑스인 르메르신부가 부임하여 초가집에서 미사를 드리며 초기 교회의 모습을 갖추어 갔다.  
 


         
         
사진설명-성당 유물관에는 풍수원 성당의 역사를 보여주는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1900년대초반에 인쇄된 성경, 성직자와 평신도들이 돌려보던 성서와 기도서, 
         그리고 성당 안에 두던 다양한 성물들이 오래된 세월을 보여준다.

                                                                             

르메르 신부에 이어 부임한 한국인 정규하 신부에 이르러 제대로 된 성당을 축조하기로 하고 신도들과 힘을 합했다. 중국인 기술자와 신도들이 벽돌도 굽고 나무도 해오면서 이를 바탕으로 건물이 완공되었다.

1905
년에 기공식을 시작한 후 4년 만에 성당이 문을 열었다. 우리나라에서 오래된 성당을 꼽으라면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유서 깊은 장소다. 한국인 신부가 앞장서서 지은 성당으로는 최초의 것이라고 알려져 있다.


사진 설명- 좌측 아래에서 세번째 인물이 정규하 신부다.


멀지 않은 곳에 있는 감곡 매괴 성당, 용소막 성당과 닮은꼴이라 이들 성당을 설계한 시잘레(chizallet, 한국명 지사원) 신부가 건축설계를 담당하지 않았을까 하는 의견도 있는데, 설계자가 밝혀지지 않았다. 당시 프랑스에서 부임온 신부들 중에서 명동성당을 지은 코스트 신부처럼 성당 건축만 전문으로 담당한 신부가 있었다. 
정규하 신부의 노력으로 성당이 지어진 것은 자명한 사실이지만 고딕식 외관을 지닌 건물이 한국인의 손으로 설계되었을까 하는데는 좀 의구심이 들기는 한다. 게다가 다섯 손가락 안에 들 정도로 오래된 성당이지 않은가.


한국교회사연구소에서 펴낸 <뮈텔 주교 일기 4>에는 1910년 11월에 주교가 풍수원 성당을 방문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성당 건물을 본 주교 일행은 계곡 앞에 우뚝 솟아있는 성당을 보고 약현 성당의 모방이라고 단정하여 말했다.(김종기, 박희용, 최종철, 홍대형, 가시체계로 본 강원도 성당건축의 평면구성 변천 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제24권 제7호 2008년 7월)
최초의 벽돌성당으로 알려진 약현성당은 1892년에 완공되었으며 코스트 신부가 설계하고 역시 프랑스인인 두세 신부가 감독하여 완공했다.


얼른 성당 내부를 구경하고 싶은데 한 시간이 넘도록 미사가 끝나지 않는다
. 피정을 위한 특별미사라서 신부님이 할 이야기가 많으신가 보다. 성당 뒤쪽에 있는 사제관을 먼저 구경했다. 1912년에 지어진 사제관은 성당의 오래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는 박물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성당은 강원도에서 지정한 유형문화재이고, 사제관은 근대건축물 등록문화재다.

사진 설명- 1912년에 지어진 사제관 모습.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사제관이라고 한다. 근대건축물 등록문화재로 제163호로 지정되었다. 성당유물 전시관으로 사용되고 있다.

본당을 이끈
정규하 신부의 업적이 패널로 전시되어 있다. 가무잡잡한 얼굴의 정규하 신부를 사진으로 보니, 깐깐한 성직자이자 넘치지 않고 소박하게 성당일을 이뤄 나갔던 분이 아닐까 싶다.

언제나 그 자리에서 신도들을 맞이해온 한결 같은 큰 나무 같았으리라 생각해본다
. 라틴어 기도서에도, 재단의 불을 밝히던 촛대와 미사를 집전하던 신부님의 성복도 세월의 흔적이 역력하다.



나는 1800년대 말에 필사된 기도서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궁서체로 쓰인 필사본 기도서는 여성들이 썼던 것이라고 한다. 천주교가 전래되어 올 무렵(당시는 천주학이라는 이름의 학문이었다) 기도서는 양반가의 여인들이나 궁 안의 여인들이 돌려보기도 했다고 한다.
말씀에 가까이 간다는 마음으로 한 글자씩 써내려 가다가
, 그 말씀 때문에 죽음을 당할 지 모른다는 두려움에 사로잡혔을 사람들. 그들을 구원한 것은 신의 목소리가 아니라 스스로의 신념이 아니었을까? 여인의 글씨처럼 가늘게 흐르는 필사 기도서에 귀를 기울여보았다. 마음이 어지러운 나에게는 쉽게 말씀을 들려주지 않는가 보다.

 

이윽고 한 시간 반에 걸친 미사가 끝이 날 무렵이다. 살짝 열린 문 안으로 들여다보니 교인들이 마룻바닥을 빼곡히 채우고 있다.
서양 중세의 교회가 그러하듯 길게 나열된 두 줄의 기둥이 공간을 세 개로 나누고 있다. 재단으로 향하는 중앙 천장이 높고 양쪽은 낮다. 재단은 정성스러운 장식으로 채워져 있다. 베풀어주시는 사랑, 그리고 보답하는 사랑이 이곳에 있다.

신부님의 말씀이 끝나고 신도들이 모두 바깥으로 나간 후 잠깐의 공백기에 성당 내부를 둘러보았다.

검은 벽돌로 단단하게 쌓아 만든 기둥인 줄 알았는데
, 알고 보니 목재 기둥에 페인트로 벽돌처럼 색칠하고 줄눈을 그려 넣었다. 멀리서 보니 그럴싸하다.

서양식 구조로 만들었지만 아무리 봐도 서양식 돌 성당에서 느껴지는 서늘함은 없다
. 나무로 바닥을 만들고 기둥을 세우면서 경건한 성당에 소박한 따스함을 더했다. 장식도 없고 화려한 그림도 없지만 종교의 신념으로 하나하나 쌓아올린 행복감이 가득 피어난다.


 


         사진설명- (위 좌+우) 성당 내부의 기둥은 검은벽돌처럼 보이지만 가까이가면 목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회색페인트를 칠하고 줄눈까지 그려넣어 멀리서보면 감빡 속을 정도다.

         (아래 좌+우) 성당 외벽을 이룬 벽돌을 자세히 살펴보면 회색 벽돌에는 하늘색에 가까운 회색이, 
         붉은 벽돌 위에는 더 진한 붉은 색이 덧칠해져 있다. 붉은 색 페인트를 긁어낸 듯 벽돌 표면이 거칠다.


나무도 풍수원에서 구한 것이며, 외벽을 쌓아 올린 벽돌도 풍수원에서 구워냈다. 이 시대의 붉은 벽돌은 요즘보다 크다. 붉은 벽돌을 자세히 들여다보니 표면이 거칠거칠하고 색깔이 차이가 나는 곳이 눈에 띈다. 색이 칠해진 표면을 긁어낸 것이다. 오래되어 낡은 건물을 보수하느라 벽돌 위에 붉은 페인트를 칠하고 흰색 줄 눈까지 그렸던 모양이다. 세월의 더께가 내려 앉은 건물에 페인트로 색을 내다니! 싶지만 한때 이 방법이 적극적으로 사용되어 지금도 수많은 붉은 벽돌 건물은 페인트를 뒤집어 쓰고 있는 경우가 많다. 인위적인 붉은 색이 과히 좋지 않았던지 이 부분을 긁어낸 흔적이 성당에 남아있다.

성당 건물에 눈이 어두워 십자가의 길을 초입에만 겨우 발을 디뎠다. 이철수 판화가의 소박한 그림체를 보며 아쉬운 발걸음을 돌렸다. 아쉬운 것도 남겨둬야 다음 번에 또 오게 되는 것이니까.  행복 한 줌 얻어가면서 가늘게 성호를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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풍수원 성당과 사제관
성당-강원도 지정 유형문화재 69호
사제관-근대건축물 등록문화재 163호

주소-강원도 횡성군 서원면 유현2리 1097번지
문의-033-343-4597
홈페이지-
www.pungsuwon.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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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에 본 다큐멘터리 영화
<비주얼 어쿠스틱스>가 아직도 머릿속에 생생하다.

 

건축사협회에서 주최한 제2회 서울국제건축영화제가 11월 11일부터 17일까지 아트하우스 모모에서 열렸다.
<비주얼 어쿠스틱스>는 그 개막작으로 선택된 작품이다. 건축영화제라는 제목을 달고는 있지만, 건축물이나 건축가를 주제로 하지만 건물 하나하나, 건축가 한 명 한 명을 스터디하듯이 보여주는 영화는 없었다. 건물을 매개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표정, 건물이 있기에 존재하는 수많은 풍경들을 가감 없이 담으면서 그 속에서 건물의 역할, 건축가의 역할을 더듬어보는 작품들이 리스트에 가득했다.


예를 들면
, 난해한 현대예술품처럼 생긴 건물을 배경으로 익스트림 스포츠를 즐기는 스포츠맨이나, 혹은 벽에 창문을 내겠다며 소음을 일으켜 나의 평온한 일상을 방해하는 이웃의 이야기처럼. 건축이 중심이 아니라 그 매개가 되는 영화들이 주를 이뤘다. 그러고 보면 건축적 상황이란 반드시 건축가와 건축주의 문제는 아니며, 언제 어디에서나 흔히 발생하는 아주 보편적인 현상이다. 건축이란, 우리 삶의 배경이 되는 그런 곳이니까.

 

<비주얼 어쿠스틱스(2008)>는 건축물을 찍어온 미국의 사진작가 쥴리어스 슐만(Julius Shulman(1910~2009))에 대한 이야기다. 그의 이름은 낯설기 짝이 없지만, 건축가 프랭크 로이드 라이트의 대표적인 건물인 낙수장과 구겐하임 뮤지엄이 찍힌 사진은 건축을 배운 사람이거나 건축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보았을 것이다. 세계 여러 곳의 건축물을 직접 보는 일이란 쉽지 않기에 우리 중 대부분은 건물을 사진으로 접할 수밖에 없는데, 그러하기에 건축 사진가의 역할이 중요할 수밖에 없다.


줄리어스 슐만은
1930년대부터 캘리포니아를 중심으로 이 지역의 모더니즘 건축가의 작품을 뷰파인더에 담았다. 리처드 노이트라의 카우프만 하우스, 루돌프 쉰들러의 쉰들러 하우스, 프랭크 게리의 디즈니 홀 등 그의 작업실을 빼곡히 채운, 감히 세어볼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많은 필름들은 그의 삶 그 자체다.





Julius Shulman, John Lautner, Malin Residence
캘리포니아의 지대를 내려다보는 이 독특한 주택은 말 그대로 상상력이 넘친다.
영화촬영지로 자주 사용될 정도로 인기가 많은 곳인데, 실내 홀은 기하학과 입체감으로
심오한 분위기까지 연출한다.




슐만의 사진은 건물만을 오브제로 담지 않고 건물과 외부 환경,

생활하는 사람과의 연결고리를 보여준다. 건축이 문화의 한부분,
자연의 한부분으로 어떻게 링크되어 있는지를 자연스럽게 드러낸다.
이점은 건축이 왜 필요한가, 건축적 환경이 우리 생활에 왜 중요한가,를
탁월하게 보여준다.



캘리포니아의 척박한 땅을 아름답게 만들어주는 건축물이 있다면
, 재능 있는 젊은 건축가가 있다면, 캘리포니아의 자연을 더없이 근사하게 해주면서 상상력이 풍부한 집이 있다면 슐만은 달려가서 사진을 찍었다.


슐만의 사진은 건물만을 돋보이게 찍는 단순한 작업이 아니었다
. 위태로운 지형이건 풍요로운 자연이건 그 지역의 풍토 속에 잘 어울려 있는 건물을 좋아했고, 건물과 자연이 어울려 더 넓은 컨텍스트에서 바라보는 사진을 찍었다. 그리고 집 속에 건강한 문화를 만들어가는 사람의 흔적을 녹여 넣었다. 건축물은 자연 속에 있고, 건축 속에는 사람이 있다. 그 단순한 해답이 그의 사진 속에 있는 것이다. 그곳의 자연은 거칠 것 없이 평화롭고 아름다웠으며 그곳의 사람들은 여유롭고 아름다웠다. 보이는 것이 전부는 아니겠지만 적어도 그들의 문화는 충실해보였다. 자연과 사람의 매개체는 바로 건축이었다.


 

에릭 브리커 감독의 2008년작 다큐멘터리 <비주얼 어쿠스틱스> 속에서 슐만은 거대한 몸집의 92세의 할아버지였다. 이 할아버지는 시종일관 유머러스하면서 진지함을 잃지 않았다. 영화는 슐만의 모습, 정확히 말하면 건축에 대한 슐만의 태도를 담고 있다. 다큐멘터리를 찍는 동안 슐만에게 좋은 일이 많이 생겼다. 타셴 출판사에서 작품집이 출간되었고 대학에서 명예건축학 학위를 받았다. 미국의 최대 아트센터 중의 하나인 게티 센터에서 슐만의 필름을 관리하게 되면서 그의 사진이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발판도 마련되었다.

 


카우프만 데저트 하우스가 완공되었을 떄의 사진.
슐만이 찍은 사진은 수십년 후 원형을 잃은
건물을 새롭게 복원하는 데 사용되었다.
건물이 사라지기 직전 이 건물을 구입한 집주인은
슐만에게 연락을 취했고, 수많은 사진 덕분에
원래의 모습으로 복원할 수 있었다.

왜 우리나라에서는 이런 아름다운 사례가 생겨날 수 없을까?



우리는 왜 줄리어스 슐만을 알아야만 하는 것일까
?


건축을 직관적으로 읽어내는 슐만 할아버지의 탁월한 능력 때문도 아니고
, 유명한 건축가의 작품들을 일반 대중에게 널리 소개해온 업적 때문도 아니다.

 

슐만의 미덕은 자신이 살고 있는 아름다운 땅과 땅 위의 건축물에 대한 애정이다. 슐만 할아버지는 개발이라는 명목으로 사막마저 파헤쳐지는 상황을 질타하며 줄곳 자연을 보호하는 운동을 펼쳐왔다. 또 자연과 교류하고 융합하던 건축물들이 좋아서 건축가를 쫒으며 험한 곳이라도 사진을 찍어온 근성을 보여준다. 그리고 하나 둘씩 사라진 건축을 사진으로라도 되살려볼 수 있도록 7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도시의 풍경과 건축과 사람의 모습을 사진으로 담았다. 자신만의 뚜렷한 시각이 있기 때문에 수많은 사진은 하나도 버릴 것 없는 자료로서 그 지역 건축의 역사를 보여주는, 나아가 미국 건축의 한 시대를 보여주는 중요한 기록물이 되었다.

 

그리고, 그의 사진은 사라진 건물을 복원하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사라지기 직전 카우프만 데저트 하우스를 사들인 집주인과의 인터뷰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1947년에 완공된 카우프만 데저트 하우스는 '리처드 노이트라'라는 건축가의 최고의 걸작으로 알려져 있다. 하지만 이 건물은 수십 년 동안 여러 주인을 거치면서 여기저기 덧붙여지고 부분부분 사라져 반쪽 짜리 걸작으로 남게 되었다.

건물을 헐고 그 땅 위에 새 집을 지으라는 부동산업자의 권유로 집을 구경하던 어느 부부는 이 건물이 한 때 걸작으로 불리던 건물임을 알아보았다. 그리고 헐기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 원래 모습으로 바꾸기 위해 이 집을 사들였다. 캘리포니아 지역의 모더니즘의 대표적인 걸작이라 불리던 카우프만 데저트 하우스는 이렇게 살아남게 되었다.
 집주인은 슐만에게 연락을 취했고 슐만은 한걸음에 달려왔다. 건물의 곳곳이 찍힌 수십 장의 사진을 갖고서 말이다. 사진으로 많은 것들이 해결되었다. 건물의 형태뿐만 아니라 건물이 지향하던 분위기, 공간의 아름다움까지 재탄생하는 결과를 얻게 된 것이다.

 

사진은 이토록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도 신념이 담긴 사진이라면 더더욱. 사진이 있다면 건물이 사라졌다고 하더라도 복원하는 일이 가능하며 이미 오래 전에 바뀐 도시의 풍경이라도 되살릴 수 있다는 것이다. 사라지지 않았더라면 시간의 먼지가 쌓여 묵은 광이 나는 근사한 풍경이 되었겠지만 아쉽더라도 새롭게 되살릴 수도 있는 것이다. 사진으로 복원하는 것에도 오류가 있기는 하지만 오류를 넘어서는 분명한 정보들이 담겨있기 때문이다. 사진 한 장에서 덕수궁 중명전의 복원이 시작되었고 단 한장이기 때문에 더 이상 완벽한 복원이 불가능했듯이.


 


끝까지 건축 사진을 찍는 사람으로 남은 줄리어스 슐만



슐만 할아버지는 말한다
.
복잡하고 귀찮은 일은 건축가에게 맡겨두고 우리는 사진을 찍자. 모더니즘 건축은 지금보다 기술적인 한계가 분명히 있었지만 기술의 끝까지 밀어 부치는 힘이 있었다. 그리고 요즘 사람들은 건축물에 상상력을 부여하지 않는다고도 말한다. 그리고 건축가에게도 이런 말을 한다. 너무 대단한 것을 만들려고 하지 말게. 그것은 역사가 판단해줄 것이야.

 
슐만 할아버지의 일대기를 보면서 나는 과거 건축가들의 고뇌와 드라마틱한 건축 현장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었다. 우리의 건축 상황과 우리의 건축 '자료' 상황도 대입해보았고, 바스라지고 사라져 남아있는 것이 많지 않은 우리 근대건축의 현장도 다시 한번 생각해보았다.

우리나라에 이런 사진 작가가 없음을 안타까워하지 말자
.
남아있는 것들이라도 찾아 다니고 끝까지 파헤쳐보는 아마추어 사진가들이 주변에 많이 있으니까. 오래된 것들을 찾아 여행을 떠나는 수많은 블로거들이 조금씩 발걸음을 넓히고 있으니까. 바스라진 건축의 현장에서 온갖 상념에 빠져드는 사람들도, 어떻게 되살려볼까 스스로 고민하는 사람들도 많으니까,

 

근대건축물을 이해하고 보존하는 일은 문화재청만 하는 일도 아니고 건축협회나 시 공무원들이 해결해야 하는 문제도 아니다. 제도를 만들고 집행하는 일은 그들의 몫이겠지만 더 중요한 것은 제도와 법의 틈새에서 진정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늘어나는 일이다.

나는 우리 것을 아끼고 오래된 것을 찾아가는 사람들의 역할이 더 크다고 생각한다
. 작지만 단단한 그들의 걸음을 믿는다. 그들의 뷰파인더에 잡힌 것들이 하늘의 별처럼 반짝이리라는 것도 믿는다. 그것이 내가 똑딱이 카메라를 들고서 이 오래된 여행을 계속하는 이유이다.

슐만은 2009년 7월 15일에 98세로 타계했다. 슐만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 같다.
"계속 하라고. 대단한 일을 하려 할지 말고 그저 하던 일을 계속하는 거야.!"


 

Julius Shulman, Stahl Residence ,1960

담소를 나누는 여인들이 우아한 분위기를 한껏 불러일으키는 사진.
바깥에 펼쳐진 로스 앤젤레스의 풍경과 어울려 풍요로운 한 때를 절묘하게 연출한다.
슐만은 우연하게 이 장면을 포착했다.
셔터를 누르는 슐만의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까지 들릴 듯한 생생한 사진이다.



은 시절의 슐만의 모습. 위와 같은 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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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명전. 덕수궁에 속해있는 궁궐 건물이다.
한자 명자는 날일(日)이 아니라 눈 목(目)자를 썼다.
더 밝게 보겠다는 의지가 들어간 이름이라고 한다.




길고긴 복원의 시간이 끝나고 중명전이 문을 열였다. 유난히 무덥던 올해 여름이 채 가시기도 전인 8월 말의 일이었다. 나는 중명전이 문을 열기를 꽤 고대했던 사람이다. <청춘남녀, 백년 전 세상을 탐하다>를 쓸 때 꼭 보여주고픈 건물이었건만, 한창 공사가 진행중이라 먼 발치에서 사진만 찍었던 그 건물. 중명전.

중명전은 대한제국 시기의 중요한 역사를 목격한 장소다. 1899년 왕실 도서관으로 문을 연 중명전은, 1904년 원인 모를 화재가 나서 덕수궁의 전각 대부분을 태웠을 때부터 정치 무대의 중심에 섰다. 온통 서양식으로 꾸며진 중명전에서 외교관을 맞아들이며 임금과 그의 측근들은 나라의 앞날을 심대하게 고민했다. 강압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그 울분을 삼키며 임금이 헤이그 특사를 명했던 곳도 바로 중명전이다.
중명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중명전은 그날을 기억하고 있을까?

복원을 마치고 모습을 드러낸 중명전. 덕수궁 궐역에서 벗어난 위치에 있다.


덕수궁에 속한 건물임에도 이 건물의 위치가 수상하다.
덕수궁 돌담길에서 뚝 떨어져 정동극장 안쪽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옆에는 미대사관저가 있어 일년 365일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는 그곳. 외따로 떨어진 궁궐 건물은 놀랍게도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대한제국시기, 덕수궁(당시는 경운궁이라고 불렸다)을 정궁으로 삼은 고종황제는 궁궐의 규모를 날로 넓혀갔다. 지금 성공회 정동성당이 있는 덕수궁의 북쪽 지역에도 궐역이 있었으며(성공회 성당 뒷편에 한옥건물이 다소곳이 남아있다) 중명전이 있는 이 지역에도 여러 채의 건물이 지어져 궁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정동은 당시 영국, 미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 많은 서양 국가들의 공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일본세력을 견제하던 고종황제는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경희궁의 전각을 옮기면서까지 수백채의 전각을 세운 경복궁을 떠나 경운궁으로 몸을 옮겼다.

대한제국기에는 궁궐 안에 서양식 건물들이 많이 세워졌다.
경운궁과 경복궁은, 의도적인 방화이건, 자연적인 불꽃이건, 화재가 자주 일어나 임금의 목숨을 위협했다.  임금은 불에 타지 않는 서양식 건물을 궁궐 내에 서둘러 지었다. 중명전은 1897년에 완공되었으며, 경운궁 담 안쪽에는 1902년 경에 돈덕전, 구성헌, 정관헌 등 서양식 건물이 들어섰다. 그리고 계획은 일찌감치 시작되었으나 공사가 늦어져 1910년에 완공된 석조전이 들어서면서 경운궁은 조선 전통의 전각과 서양식 건물, 그리고 그 둘 사이를 교묘하게 섞은 혼합의 건물이 함께 있는 독특한 궁궐의 풍경을 자랑하게 되었다.


다시 중명전으로 돌아가보자. 한일합병 이후에는 외국인 클럽으로, 광복 후에는 이방자 여사의 소유물로 옮겨졌다가 민간에 매각된 후 이 건물은 역사에서 완전히 잊혀져 버렸다. 여러 회사가 함께 쓰는 사무실로 용도변경되면서 건물은 흉하게 첨삭되는 과정을 겪었다. 중명전이 새롭게 조명된 것은 2007년부터다. 헤이그 특사 사건 100주년을 기념한 전시회가 바로 그 중명전에서 열리면서 건물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된 것이다. 궁궐 건물로 인정받지 못하던 중명전이 덕수궁에 속한 사적으로 문화재 등급이 높아졌고 흐트러진 모습을 바로 잡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자는 의지도 높아졌다. 그리고 3년이 지난 후 비로소 중명전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복원되기 전 중명전의 모습. 흰색 페인트로 칠해지고 테라스를 막아 버렸다.
내부도 손상이 심했다. 벽을 터서 테라스까지 모두 넓혔고 벽난로는 막혔다.
복원 작업은 이 모든 것을 새로 틔우고 막으면서 원래의 모습을 찾아가고자 했다.




 

흰색 건물이었던 중명전이 붉은 벽돌 몸을 드러내고 건물의 앞과 양쪽 옆에는 긴 회랑이 생겨났다. 이 회랑을 처음 본 순간 나는 살짝 감동하고야 말았다.  건물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일. 건물의 역사를 내 눈으로 지켜보는 일은 언제나 흥분감을 준다. 중명전이 일반에게 공개되기는 했지만 내부를 관람하려면 미리 날짜와 시간을 예약해야 한다. 다른 일로 무척 바쁘던 9월의 어느날 짬을 내어 남편과 함께 중명전을 방문했다. 흥분은 나눠야 제맛이지 않은가. 어쩌다보니 초등학교 4학년 정도로 보이는 단체팀과 합류하면서 뭔가 제대로 된 관람이 불가능하긴 했지만서도. 



중명전 전시실 풍경. 1층은 중간 복도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큰 홀이 있고

왼쪽에 두 개의 홀이 있다. 전시 내용은 을사늑약의 부당성과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게 된 배경 등
중명전에서 발생했던 큰 사건들이다.




중명전의 내부 장식은 옛날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대부분 첨삭과정에 의해

원형이 사라버렸다. 1층 중앙의 복도 타일만 유일하게 그 시대를 증언하는 것이다.
실내화로 갈아신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밟을까 하여
강화유리로 보호막을 만들었다. 꼭 유리로 덮어야 하나?





요런 이쁜 장식이 눈에 띈다. 당시 물건은 아니지만 이런 느낌의
창문 장식이 있었으리라 상상되었다.


 


당시 외교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문건. 아래는 고종황제의 밀서.

전시용 사본이다. 어떤 글이 오고갔는지 보는 것도 흥미롭다.



2층에는 대형 홀과 두 개의 사무실이 있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이라는 문화재 보호단체가
문화재청으로부터 중명전을 위탁관리하면서 일부를 사무실로 쓰고 있다.
2층 대형 홀에는 딱히 전시물이 없다. 뻥 뚫린 공간에는 고종의 어보를 전시했고,
옛 국기와 고종이 어진이 자리잡고 있다. 전시 구성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황태자 이은과 이완용 내각 사진(1907). 이 사진의 배경이 된 곳이 중명전이다.

거꾸로 이 사진 한장으로 중명전의 복원이 시작되었다. 

 

중명전에 대한 흥분은 붉은 벽돌 건물로 되살린 것과 긴 회랑에서 느껴진 진지함이 전부였다. 내부를 둘러볼수록 아쉬움을 감출수가 없었다. 내부가 많이 손상된 건물이기에 복원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며, 겨우 남아있는 복도 타일만이라도 제대로 간수하겠다는 생각은 이해할 수 있다. 중명전은 외관만 남은 형식적인 건물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내가 상상한 것은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탈리아 외교관 까를로 로제티가 남긴<꼬레아 에 꼬레아니>에 있다는 이런 내용.


"러시아인 기술자가 만든 쇠와 벽돌로 된 조잡한 건축물인 알현관 앞에는 대신 민종묵이라는 사람이 손님을 맞기 위해 자리하고 있다. 몇몇 나이 든 대신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어를 할 줄 아는데, 알현관의 큰 뜰에서 차를 마시며 알현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대신들과 흥미로운 대화가 펼쳐지게 된다. 그리고 나서 알현관의 응접실로 들어서면 예기치 않았던 매우 기이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가구들이나 장식이 동양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바닥에는 붉은 카페트가 깔려있고 주위에는 비엔나풍의 의자가 12개 정도 놓여있다. 그 가운데에는 이집트 담배들과 하바나 시가, 차와 비스켓, 바카라 컵들과 독일제 찻잔 등이 놓인 탁자가 하나 자리잡고 있다. 응접실에 한국 것이라고는 벽 구석에 서 있는 거대한 병풍 뿐인데, 병풍에는 한국의 기마병들에게 쫓기는 중국 벽사들의 모습이 그려져있다."

<대한제국 1907 헤이그 특사 100주년 기념 특별 기획전-국립고궁박물관, 민족문제연구소(2007)> 도록에서 재인용.


 
붉은 양탄자나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귀한 병풍은 없더라도 궁궐다운 위엄이 있기를 원했던 것인데, 100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그 모든 이야기와 역사는 떠나버린 듯했다. 떠나버린 역사를 복원하려니 억지스럽고 힘겨운 싸움이 된 것이다.

부족한 예산으로 저렴한 재료를 쓸 수밖에 없는 사정, 부족한 자료로 인해 원형에 더 다가가지 못한 사정, 아직도 논의가 거듭되어야 할 근대사의 의미들, 당시의 재료를 더 이상 조달하지 못하는 기술적인 한계
등 근대건축물을 되살리는 일에 뒤따르는 각종 문제들이 중명전에는 한꺼번에 발생한 것 같다. 거기에 한 가지 더. 전시관으로 사용하는 문화재 건물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유기적인 전시 프로그램의 부재까지 포함되어 있다.

확실하지 않은 부분을 애써 그럴싸한 것으로 복원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중명전을 돌아보면서 느낀 것은 애써 그럴싸한 것으로 복원하지 않은 부분이 너무 많다는 점이었다. 우리 근대사의 비어있는 부분이 그대로 느껴졌다.

2010년 10월 13일에 중명전에서 복원 기념 심포지엄이 열렸다.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나의 대책없는 아쉬움도 위로를 얻지 않을까 하여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한국건축역사학회에서 주관한 이 행사에는 학계 인물들 외에도 일반인들도 많이 참가해서 중명전에 대한 관심이 깊음을 보여주었다.



중명전의 복원은 영친왕과 일본 황태자가 함께 찍은 사진 한장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도면도 없고 서류도 남아있는 것이 없으니 당연히 복원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창틀이나 벽돌의 구조, 벽난로의 형태 등 디테일의 원형은 알 수 없었다. 학계에서조차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아 중요한 자료를 공유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겨우 결론을 내리고 공사를 마무리할 무렵, 뒤늦게 발견된 자료 때문에 관계자들은 밤잠을 설쳐야 했다. 예산이 부족하여 제대로 완성되지 못한 부분도 많았다.



커다란 논의는 없었다. 그럼에도 5시간에 걸친 심포지엄을 꿋꿋하게 들어보면서 한 가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엇다. 중명전은 그러하기에 역설적으로 의미를 지닌다는 점이다. 근대건축물의 복원, 혹은 원형 찾기에 대한 의문을 폭넓게 제시했다고 할까? 

복원 그 자체가 문화재의 해답이 될 수 없으며, 복원이 마무리되었다고 하여 모든 역사적 의문점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건물의 복원은 역사적 의문점의 시작이라 하겠다. 복원은 언제든지 새로운 자료와 새로운 탐구로 인해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중명전이 공개되고 연구가 구체화될수록 도처에 흩어진 많은 자료들이 모여들 것이며 앞으로 더 많은 새로운 이야기들이 수면 위로 솟아오를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역사를 탐구하는 과정과도 닮았다. 

근대건축물의 원형찾기는 근대사를 복원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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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명전 
위치-서울시 중구 정동 1-11 


좀 더 읽어볼 책











덕수궁-시대의 운명을 안고 제국의 중심에 서다

안창모/ 동녘(2009)
- 근대국가 프로젝트가 펼쳐졌던 대한제국기를 알고 싶다면!


고종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
김정동/ 발언(2004)
-당시 외교의 거리였던 정동의 분위기가 궁금하다면!


통감관저, 잊혀진 경술국치의 현장
이순우/ 하늘재 (2010)
- 중명전의 건립 연대에 대한 논의가 담겨있군요.


꼬레아 에 꼬레아니(사진해설판)
이탈리아 외교관 카를로 로제티가 쓴 대한제국 견문기
그가 수집한 사진들만 모아서 해설한 책.
1900년대 초반의 궁궐, 도시, 사회, 사람들이 가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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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빠는 풍각쟁이야~”라는 노래가 있다. 여가수의 새침한 목소리 속에 앙탈과 애교가 가득 묻어있다. 가사를 보면 이렇다.


오빠는 풍각쟁이야 뭐 오빠는 심술쟁이야 뭐
난 몰라잉 난 몰라잉 내 반찬 다 뺏어 먹는 건 난 몰라
불고기 떡볶이는 혼자만 먹구 오이지 콩나물이면 나한테 주구
오빠는 욕심쟁이 오빠는 심술쟁이 오빠는 깍쟁이야

오빠는 트집쟁이야 뭐 오빠는 심술쟁이야 뭐
난 시려잉,
난 시려잉 내 편지 남 몰래 보는 것 난 시려
양취자 구경갈 땐 혼자만 가구 심부름 시킬 때면 엄벙띵허구
오빠는 핑계쟁이 오빠는 안달쟁이 오빠는 트집쟁이야

오빠는 주정뱅이야 뭐 오빠는 모주꾼이야 뭐
난 몰라잉 난 몰라잉 밤 늦게 술취해 오는 것 난 시려
날마다 회사에선 지각만 하구 월급만 안 오른다구 짜증만 내구
오빠는 짜증쟁이 오빠는 모두쟁이 오빠는 대포쟁이야."


누구나 따라 부르기 쉽고 가사도 친근하다
. 이 노래는 1930년대 불린 유행가다. 당시의 대중가요를 만가라고 부른다. 만가는 현실을 해학적으로 바라보는 가사와 유쾌한 가락이 특징이다.

1930
년대라면 일제강점기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아닌가? 노래는 발랄하고 노래 속 오빠는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오빠라는 존재들과 하등 다를 것 없다. 그 시절도 회사에 지각하고 월급 안 오른다고 짜증내던 인물이 살던 시대였던 것이다. 그 시절을 살던 사람들도 여배우와 여가수에 열광하고 심지어 2010년의 우리들도 좋아하는 떡볶이를 남주기 아까워하면서 먹었던 것이다.

우리 귀에 익숙한 전통가요나 동요 중에는 일제 강점기부터 불리던 노래들이 많다. 전통 가요 프로그램의 단골 레퍼토리인 카츄샤의 노래1916년 단성사에서 열린 신파극의 주제곡이었고, 이난영을 목포의 여인으로 만든 목포의 눈물1935년 향토 노래 현상 모집에서 당선된 노래였다. 윤극영의 반달홍난파의 달마중’, ‘울밑에선 봉선화도 그렇다.

1930년대는 노래의 시대다. 한해 평균 1만 장의 레코드가 팔렸다. 먹을 것도 부족하던 시대인데 사람들은 유성기를 샀다. 유성기를 들으러 다방과 카페를 드나들던 모던보이와 모던 걸도 흔했다. 음이 높고 간질간질한 노랫가락은 험한 세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달콤한 처방이었다.

사람들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대중가요가 생겨났고 요즘처럼 아이돌도 등장해서 극장마다 노래를 듣겠다고 모여든 사람들이 가득가득했다. 아이돌이라고 해도 쪽진 머리에 치마 저고리를 입었지만 말이다. 폴리도르 레코드, 콜롬비아 레코드, 오케 레코드, 빅타 레코드, 태평 레코드 등 5대 레코드 회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노래를 불러줄 아리따운 가수를 찾아 기생을 교육하는 권번을 들락거렸다

인천 권번의 기생
이화자장일타홍은 레코드 회사가 사랑하는 예인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불렀던 노래는 어떤 것이었을까
? 그들의 노래를 들어보려 인천아트플랫폼으로 가보았다.

100년 전 건물에서 옛 노래를 듣다



복합문화 매개공간인 인천 아트 플랫폼.
인천문화재단에서 운영하며 인천시 중구에 위치해있다.  
전시장, 공연장, 교육관을 포함하여
입주작가들의 스튜디오와 공방이 포함된 복합공간이다.




군회조점, 구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대한통운 창고 등
근대건축물 세 채를 중심으로 이들 건물과 닮도록 붉은 벽돌로
다른 건물들을 만들어 끼워넣었다. 비슷한 볼륨의 건물 10동이
중앙의 도로를 중심으로 양쪽에 나열되어 있다.


인천아트플랫홈은 개항장이었던 인천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중구청 앞 일명 차이나타운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 꽤 큰 규모의 예술 마을이다. 전시 홀과 공연장을 따로 두고 입주 작가들의 스튜디오와 공방, 게스트하우스 등을 설치하여 모두 열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고작
2년 전에 문을 열었지만 이곳에서는 100년 전의 풍경을 읽을 수 있다. 시간의 때를 묻힌 채 서있는 붉은 벽돌 창고 건물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대한통운 창고 건물과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 지점, 군회조점이라는 세 개의 근대 건축물이 이 예술 마을의 중심이 되는데, 다른 건물들도 붉은 벽돌을 주조로 박공지붕을 얹어 건물의 형태를 연결감있게 연출했다.

나는 이곳을 무척 좋아한다. 이 거리에 들어서면 차이나타운의 번잡함과 소란스러움이 사라지고 오롯이 역사와 마주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붉은 벽돌 건물이 양쪽으로 늘어선 거리는 50미터 가량 이어지는데, 느긋하게 걸으면서 생각에 잠기기에 좋다. 백년 전 세상에 온 듯 당시 분위기를 상상해보는 일도 좋고, 오늘은 어떤 전시가 열리나, 어떤 공연이 있나 프로그램을 들여다보아도 좋다.


교육관 및 전시관. 1902년에 지어진
군회조점 사무실 건물이다.



노란색 문이 인상적인 대한통운 창고.
옛날에는 미곡을 쌓아두던 창고였다.




구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사무소.
1888년에 세워진 건물로

근대건축물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은 자료관으로 일반에게 개방된 곳이다.



길 양 끝에
100년의 시간을 훌쩍 넘긴 근대 건축물이 자리 잡고 있다. 전시실과 교육실이 있는 교육관은 군회조점(郡廻漕店)이라는 해운업 사무소이며 1902년에 세워진 건물이다. 다른쪽 끝에는 1888년에 세워진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등록문화재 248호)가 자료실로 개방되어 있다.

맞은 편에는 대한통운이라는 흰색 글자가 적힌 창고 건물이 육중한 몸집을 자랑한다. 내부 공간이 깊고 넓은 창고건물은 공연장으로 사용된다. 오래된 근대 문화재 건물도 지키고 이 거리의 역사도 현재에 되살린 인천 아트플랫폼은 오롯이 역사의 풍경을 재현하고 있다
.

그리고 이 거리와 건물에는 옛 시대를 복원하는 다양한 예술 프로젝트가 열린다
. 건물이 재현하는 분위기 때문인지 이곳에서 보는 그림과 이곳에서 듣는 음악은 거미줄처럼 채워지고 엮인 시간의 흔적이 느껴진다.

거문고가 노래하는 일타홍



장 일타홍을 알게 된 것은 인천 아트플랫폼에서 열린 공연에서였다. ‘매혹의 시대’. 1930년대를 연주자들은 이렇게 불렀다. 유성기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웃게했던 노래들은 지지직거리는 낡은 유성기 음반으로나마 생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연주자들은 유성기 속에서 예인의 목소리를 끄집어 내보고자 했다. 1930년대 사람들의 마음을 감싸주던 노래를 2010년에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오래된 붉은 벽돌 창고에서 들어본다면 말이다.

1930
년을 매혹의 시대로 풀이한 연주자들의 악기는 뜻밖에도 거문고였다. 유성기 속에 흐르는 1930
년대의 대중가요와 조선시대 사대부의 악기로 뇌리에 남아있는 거문고가 만들어내는 조합이 호기심을 끈다.


거문고 앙상블 '다비'는 '매혹의 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피아노와 퍼커션, 피리의 소리를 서로 섞어넣었다. 거문고의 비장하고 다부진 선율은 피아노가 있어 나긋해지고 퍼커션이 매끄러워졌다. 예인 장일타홍의 신민요 두곡, 작곡가 김탄포의 '세기말의 노래', 민간에서 전해지던 거문고 풍류 2곡, 그리고 우리 귀에 익은 동요 '반달'과 '달마중'이 차례대로 연주되었다.

다비가 선택한 노래들 속에는 거문고라는 가사가 들린다. 지금 사람들보다 당시 사람들이 거문고와 더욱 친했던 모양이다. 남실남실 타는 거문고, 내 사랑 거문고. 묵직하고 진중한 거문고 현이 노래가 되면 몰랑몰랑해지고 보드라워진다. 사랑스럽다.

거문고는 일타홍이 유성기 앨범으로 남긴 '옛님을 그리면서'와 '아리랑의 꿈을 노래했다. 일타홍은 앞서 말한 대로 인천권번의 기생이었다. 1930년대 인천은 향락의 도시였다. 육지의 여러 나라를 이으며 물건을 사고팔아 이익을 챙기는 회사, 배와 창고를 빌려주며 온갖 값나가는 물건을 쌓아두던 회사들이 우후죽순이었다. 일본은행들도 한푼이라도 더 벌려고 했고 투기장이나 다름없던 미두취인소가 있어 쌀과 재산을 한탕 노름에 걸었다가 하루아침에 거지가 된 사람이 수두룩했다. 돈이 모이던 그곳에는 예외 없이 유흥가가 형성되었다.

인천아트플랫폼이 위치한 지역은 일명 개항장 지역. 인천항이 있던 이곳은 새로운 것이 닿고 빠지는 접점이었다. 거리마다 요릿집과 여관, 호텔이 즐비했다. 구 일본해운주식회사 인천지점 윗쪽에 있는 비어있는 택지에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이라는 대불호텔이 있었고 그 주변은 먹고 마시고 돈을 쓰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가득했다.

일타홍은 이곳에서 노래를 불렀다. 나라를 빼앗긴 서글픔, 몸과 마음을 팔아야 하는 서글픔이 뒤섞인 노래들이다.

"...아리랑 어데요. 아리랑 부르며 꿈을 찾어서 노래로 고개를 넘고 또 넘네."-장일타홍, 아리랑의 꿈(리갈 레코드)

서글픔이 묻어나는 선율 속에, 떡볶이도 먹어보고 양취자의 노래도 들어보지만 시절이 하 수상하여 제 뜻을 펼치지 못했던 풍각쟁이 오빠의 뒷모습이 겹쳐진다.


거문고 앙상블 다비는 강희진, 안정희로 이루어진
거문고 연주단이다. 예스러운 소리에서 머물던 거문고에서
감수성 어린 가락을 찾아내 관객들에게 들려준다.
다양한 창작곡 레퍼토리도 보여준다.


앵콜곡인 달마중을 모던걸의 모습으로
직접 노래하는 다비 안정희 님.

일타홍의 마음처럼 구슬픈 선율 속에 거문고가 바람처럼 흔들린다. 악기의 서늘한 소리가 마음을 흟고 지나간 후에 귀에 익은 동요가 흐른다.

"아가야, 나오너라, 달마중가자. ....검둥개야 너도 가자 냇가로 가자...."(1929년, 윤석중 작사, 홍난파 작곡)

장난스럽고 사랑스러운 노랫자락에 희망이라는 두 글자가 머문다. 1930년은 갈길 잃은 서글픈 신세에 비탄에 젖고 어둡고 추운 거리를 헤매는 시절이지만 희망이라는 두 글자로 가슴 한 켠이 따뜻해지던 시대였을까?  



인천 아트 플랫폼 공연장에 모인 사람들.
새로운 음악과 낯선 악기의 호흡을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매혹의 시대는 지금도 계속된다. 2010년의 가을이라고 해서 1930년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우리 역시 그 만큼의 아픔과 절망과 서글픔을 뼈저리게 체험하며 이 시대를 살고 있으니. 가슴 한구석을 싸늘하게 만드는 것들을 덮어둘 수 있는 음악이 있기에 잊을 수 있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도, 그 시절도 음악 없이는, 노래를 부르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매혹의 1930년으로 여행을 다녀오면서 마지막 노래 달마중을 내내 흥얼거렸다. 그 시절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준 노래라는 달콤한 처방은 2010년 지금까지도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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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천아트 플랫폼

위치 - 인천시 중구 제물랑로218번길 3(해안로 1가) www.inartplatform.kr

더 읽어볼 책과 더 들어볼 음악



오빠는 풍각쟁이야
장유정 저/ 민음인 (2006)



풍각쟁이 은진
최은진/ 비트볼뮤직(2010)



the스토리
가야금 앙상블 다비/로엔(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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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

최예선(1974~)
작가. 카피라이터, 에디터.






신문방송학과를 1997년에 졸업하고
 1999년부터 건축전문지 <C3 KOREA>와 
문화교양지 <J.J.MAGAZINE> 등 잡지사 에디터로 일했다. 

2003년 프랑스로 건너가  리옹 제2대학 미술사학과를 마쳤다.

유학 시절, 유럽 도처의 문화재와
유적지를 찾아다니며 옛 풍경 속 이야기에 귀 기울이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기억을 더듬으며 지금도 우리의 옛 풍경을 찾아 불쑥 길을 떠나곤 한다.

연남동의 작은 작업실에서 미술, 건축, 여행, 문화 등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분야에 대해 글을 쓰고 있다.
작업실의 이름은 '달콤한 작업실'. 홍차를 마시며 근대 문화 유산을 이야기할 수 있는 독특한 장소다.

지은 책으로
<홍차, 느리게 매혹되다(2009)> <청춘남녀, 백년 전 세상을 탐하다(2010)>가 있다.




e-mail: lena_choi@naver.com
blog: 마담고치와 무슈봉봉의 작업실 판타지(blog.naver.com/lena_cho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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