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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송수정의 사진 속으로

낙산돌 대학로와 동대문 일대에 걸쳐 있는 낙산은 전망이 좋기로 유명하다. 전망이 좋다는 건 수고롭게 올라야 할 만큼 높다는 뜻이다. 요즘에는 공원으로도 조성해 등반이 필요 없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지만, 어쨌거나 본래 이름은 낙타 모양을 한 ‘산’이다. 그러니 도성이 세워지기 훨씬 전부터 우뚝 솟아 있던 서울의 지리적 터줏대감이기도 하다. 변상환은 어느 날 이 낙산 아래 창신동으로 이사를 왔다. 그는 창신동 주민이 되기 전부터도 돌과 친한 작가였다. 그는 우리의 시각 정보에 대한 유쾌한 반전을 꾀하는데 예를 들면 붕어빵이나 고무장갑, 소주잔 같은 익숙한 사물을 시멘트로 굳혀 화석처럼 만드는 식이다. 그에게 연약하고 부식될 것 같은 일상의 물건을 시멘트로 굳힌다는 것은 단단하고 강한 생명력을 부여하는 과정이.. 더보기
동굴 금값이 비싸다. 김익현은 IMF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 방송을 통해 이 반짝이는 금붙이를 처음 보았다. 나랏빚을 갚겠다고 장롱 속 돌 반지를 꺼내들고 긴 행렬을 이룬 모습은 진풍경이기는 했다. 당시 이 금 모으기를 둘러싼 의견은 분분했는데, 이웃이든 나라든 어려움에 처하면 황금도 기꺼이 내놓는 특유의 미덕이라든지, 나라가 잘못한 살림을 백성이 해결하게 만드는 대국민 이벤트라는 식이었다. 도대체 금이 무엇이기에 빚더미에 빠진 나라마저도 구하는 것일까. 금 모으기 방송을 보고 자란 김익현이 훗날 사진가가 되어 이 반짝이는 것을 향한 욕망의 뿌리를 찾다 도달한 곳은 금은방이 아니라 금을 채굴하던 광산이었다. 우리나라에도 금광이 많았다. 우리 시대에 금 모으기 열풍이 있었다면 일제강점기는 금광 개발에 미친 시대.. 더보기
수건 이 낡은 넉 장의 수건 앞에서 느끼는 숙연함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여러 번 빨아서 두께는 얇아졌고, 빨수록 물때가 진해져서 더 이상 깨끗해질 기미란 없어 보이는 초라한 면 헝겊. 그런데도 그것은 몸을 바짝 말린 채, 단아하게 각을 잡고 있다. 애초 내세울 자존심이랄 것도 딱히 없었다는 듯 서로에게 의지해 포개져 있는 모습은 오히려 저마다의 존재감마저 돋보이게 한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 사물 앞에서 피부가 얇아진 노년의 육신을 느끼거나 그 육신이 거쳐온 시간 따위를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과장일까. 수수하면서도 까닭 모르게 눈에 밟히는 이런 사진들을 얻기 위해 김수강은 오랫동안 복잡한 프린트 기법을 고수해왔다. 검프린트라 불리는 이 기법은 판화지 위에 조색한 안료를 바르고 필름에 빛을 쪼인 뒤 물 속.. 더보기
싸움 연필 공장을 개조했으나 여전히 창고나 다름없는 건물에서 재수를 하던 늦봄, 친구가 찾아왔다. 신촌에서 대학을 다니기 시작한 친구는 말수 없던 평소와 달리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그날 친구는 대화의 절반을 소개팅이 아니라 강경대의 죽음과 그 뒤 이어진 대규모 규탄 집회에 대한 내용으로 채웠다. 말 속에서 최루탄 냄새가 풍겼다. 친구가 다녀간 뒤로 운동권의 거듭된 분신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듬해 신입생이 되어 마주한 대학가에는 단순히 시위만 있지 않았다. 대동제는 1987년 민주화 정신 계승이라는 말로 긴장감이 넘쳤으나 동시에 패배주의와 X세대라는 말도 등장했다. 운동을 하던 선배들이 각종 고시를 준비하는 일도 더는 낯설지 않았다. 신념에 찬 운동권의 등장으로 시작해 애매한 남편 찾기로 막을 내린 은 우리가.. 더보기
세련된 사람 20년은 묵은 앨범에서 나온 듯한 뿌연 색의 이 사진. 에이라인 스커트에 꽃무늬 스카프, 실내에서도 착실히 고수한 선글라스까지 나름 멋을 부린 흔적이 역력하다. 작품 앞에서 기념으로 취한 포즈까지를 포함해 한때 우리는 이런 사진을 얻기 위해 꽤나 노력했다. 한껏 챙겨 입고 나서는 미술관 나들이는 얼마나 모던한 도시의 일상인가. 이런 날 똑딱이 카메라로 사진 한 방은 남겨야 도시인의 도리를 지키는 법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사진에 찍힌 날짜가 최근이다. 유통 기한이 한참 지난 것만 같은 이 사진은 사실 최근에 생산되었다. 예전에는 날짜가 찍히는 사진기야말로 신식이었는데 이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촌스럽다는 인상을 풍긴다. 발품을 팔아 구한 옛날 옷들로 치장한 채 스스로가 사진 속 모델이 된 전은정은 일부.. 더보기
여기 그리고 저 멀리 매년 11월 둘째주 파리에서 열리는 파리포토는 사진을 거래하는 최대의 아트마켓이다. 예술은 돈과 거리를 둘 것처럼 고상해 보이지만, 사실 돈으로 거래할 수 있는 가장 사치스러운 상품이기도 하다. 실제로 파리포토를 이루는 모든 것들은 화려하다. 근사한 장소, 감각적으로 꾸며 놓은 간이 전시 부스, 개성 넘치는 사람, 갖고 싶은 작품들. 이 틈에 섞이는 순간 예술이면서도 상품이려고 하는 사진의 이중성으로 인해 마음은 몹시 복잡해진다. 특히나 그런 모순 속에 기대어 사는 스스로를 발견할 때, 고상한 분위기 속에서도 불현듯 피로감이 인다. 펜티 사말라티의 사진을 처음 접한 건 수년 전 파리포토의 그 혼돈스러움 속에서였다. 세련된 액자로 장식한 대형 프린트 사이에서 그의 아날로그 사진은 유행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 더보기
안목의 쪽지 추운 날 뜻밖의 소포가 도착했다. 갖고 싶던 필립 퍼키스의 사진집. 미국 사진가 필립 퍼키스는 놀라운 힘을 지녔다. 아무렇지 않은 대상을 그가 아무렇지 않게 툭 찍는 순간, 눈길을 거둘 수 없는 끌림의 장면이 탄생한다. 여기에 시어에 가까운 그의 글까지 보태지면, 한 장의 사진은 한없이 편안하면서도 무한대로 빨려 들어가는 사유의 장으로 변한다. 그의 사진집을 낸 ‘안목’은 사진가 박태희가 꾸려나가는 1인 출판사다. 그는 유학 시절 필립 퍼키스에게 사진을 배웠다. 이제 둘은 사제지간을 넘어 서로 같은 길을 걷는 사진가로서 우정과 교감을 나누는 사이다. 전시와는 또 다른 분위기로 필립 퍼키스의 매력을 전하는 이 정갈한 책에 예사롭지 않은 쪽지가 딸려 있다. 쪽지가 들려주는, 증정본을 전하는 사연은 이렇다. .. 더보기
밀착 사진에서 밀착은 확대기를 쓰지 않고, 인화지 위에 필름을 그대로 얹어 얻어낸 프린트를 말한다. 아날로그 시대에 36컷짜리 필름 한 통을 한 장의 프린트로 보기 위해 주로 사용했다. 모니터가 달려있지 않은 필름 카메라의 특성상 밀착은 촬영한 결과물을 처음 육안으로 확인하는 떨리는 순간을 선물했다. 비용과 시간 절감을 위해서도 밀착은 필수였는데, 사진가가 하루에 36컷짜리 필름 10통씩을 찍으며 한 달 동안 여행을 했을 경우 모든 사진을 제대로 인화해서 본다는 것은 물리적으로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밀착은 초점과 노출은 적당했는지 등의 기본적인 상태 점검에서부터 과연 어떤 사진을 골라 남들 앞에 내놓을지를 결정하는 사진 선정의 필수 단계였다. 우리가 기억하는 대다수의 대표작들은 그 전후에 찍힌 수많은.. 더보기
Yes We Cam 감시와 통제 수단으로서의 사진의 역할은 사진의 발명과 함께 예고된 숙명이었다. 사진 발명 직후인 1840년대 이미 파리 경시청의 알퐁소 베르티옹은 범죄인의 식별과 유형학적 분류를 위해 정면과 측면 얼굴을 촬영하는 ‘머그샷’을 고안했다. 1871년의 파리코뮌은 남북전쟁과 함께 사진이 본격적 기록 대상으로 삼은 역사적 사건이지만, 그 사진으로 인해 수많은 참가자들이 잡혀간 채증 사건의 원조로 꼽히기도 한다. 파리68혁명 당시에는, 시위대가 구타를 당하는 사진이 ‘파리마치’ 표지에 실리자 경찰은 사진가들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학생들은 사진가들이 찍은 사진이 채증 목적으로 사용되자 그들을 경계하기 시작했다. 억울한 목소리들이 광장에서 쉼없이 퍼지는 요즘, 이 감시의 시선들은 훨씬 견고해졌다. 경찰은 아예 채증팀.. 더보기
[사진 속으로]108인의 초상 처음 일본군 위안부 문제를 접한 건 1995년에 개봉한 변영주 감독의 영화 를 통해서였다. 1991년 김학순 할머니가 침묵을 깨고 실명으로 희생자임을 밝힌 이래 위안부의 실상에 대한 낮은 목소리들이 터져 나오던 무렵이었다. 피해자였음에도 마치 죄인인 것 마냥 조용히 웅얼거릴 수밖에 없던 할머니들의 사연은 낮은 소리이니 오히려 더 주의 깊게 들어달라는 묵직한 요청 같았다. 정말 그랬다. ‘열여섯 꽃다운 나이로 인생이 끝났다’는 할머니의 고백은 한번 들으면 결코 잊을 수 없어서 점점 더 크게 자라나곤 했다. 억울함을 풀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나는 할머니들이 점점 늘어날수록 그 소리는 이상하게도 더욱 크고 절박하게 공명을 반복했다. 차진현의 ‘108인의 초상’은 전국에 흩어져 있는 위안부 피해 할머니들을 기록한.. 더보기
마지막 버스 지난가을, 어느 그리스 미술관장을 만났다. 의도치 않았음에도 우리의 얘기는 자꾸만 무거운 주제를 맴돌았다. 그리스의 재정난으로 인해 유럽연합의 지원금을 받아 간신히 살림을 꾸려가고 있다는 말끝에 그는 하루하루가 공황 상태라고 했다. 아침에 바닷가에 나가면 난민들의 시신을 발견하는 일이 낯설지 않다는 설명과 함께. 그리스와 터키는 IS의 끔찍한 폭력을 피해 유럽으로 넘어오는 난민들의 관문이다. 그러나 서양 문명의 자존심이었던 그리스는 난민을 보듬을 만큼의 여력이 있어보이지는 않는다. 목숨이 너무 가벼워지는 현실 앞에서 미술관의 미래를 얘기하기에 그는 무기력함을 느끼고 있었다. 그리스의 상황은 유럽의 오늘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국가를 상실한 이들의 탈출 앞에서 가난해진 유럽의 국가들은 자국민 보호를 핑계 삼.. 더보기
블록 프랑스 이론가 레지스 드브레는 에서 시각 이미지는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불멸에 대한 욕망에서 시작했다고 말한다. 심지어 고대 그리스 시대에 보지 못한다는 것은 생명을 잃는 것을 뜻했으며, 그래서 눈을 감았다와 숨을 거뒀다는 같은 의미였다는 것이다. 맥락은 약간 다르지만 갤러리 룩스에서 전시 중인 박찬민의 아파트 작업은 시력을 상실해 가는 도심 주거 공간에 대한 이야기로 읽힐 만하다. 대도시의 삶을 이야기할 때, 아파트는 이제 단골처럼 등장하는 작업 대상이기는 하다. 그만큼 일상에 치명적인 영향을 미치기 때문일 것이다. 처음에 박찬민은 아파트 벽에 새겨진 단지명을 지우는 연작을 소개하더니, 이번에는 아예 아파트 벽에 난 모든 창문들을 지워버렸다. 아파트의 이름이나 창문을 제거해 버리는 그 순간, 그곳은 집.. 더보기
언더프린트 언더프린트는 화폐나 우표 밑바탕에 깔리는 희미한 인쇄다. 그림과 사진을 오가며 작업하는 강홍구는 이 언더프린트에 착안한 작품을 최근 원앤제이에서 선보이고 있다. 그는 서울의 재개발 동네부터 고향인 전남 신안까지를 어슬렁거리다 밑바탕이 될 만한 담이나 길바닥을 사진으로 찍은 뒤 그 위에 그림을 그렸다. 벽에 직접 그리는 낙서를 대신해 자신이 찍은 벽 사진 위에 낙서를 한 셈이다. 생선 꼬리가 뒹굴던 길바닥 사진 위에는 생선 머리를, 나뭇가지 그림자 사이로는 참새들을 그려 넣는다. 세월호에 대한 풍자부터 명작 패러디나 짜장면 그림까지 낙서의 종류는 꽤 다양하다. 특히 여전히 남아 있는 게 신기한 시골 마을의 방공 문구 중 ‘간첩’이라는 글자가 지워진 자리에는 연두색의 네이버 검색창을 그려 넣은 유머 감각이 .. 더보기
가족과 함께 여전히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는 60대 중반의 네덜란드 작가 한스 아이켈붐. 그는 한때 오후 세 시경, 무작정 가정집의 초인종을 누르곤 했다. 그 시간대에는 남편이나 아빠는 일터로 나가 집을 비우는 경우가 많았다. 그는 집에 남겨진 나머지 식구들에게 부탁해 그 집 거실에서 가족사진을 찍었다. 셀프 타이머를 이용한 그 촬영에서 아빠의 자리는 한스 자신이 차지했다. 설명 없이 본다면 단란하기 그지없는 이 가족사진은 여러 장을 함께 늘어놓고 볼 때에야 비로소 동일한 등장인물이 있음을 가까스로 눈치챌 수 있을 정도다. 이 연작의 제목은 ‘가족과 함께’. 소유격이 생략된 이 제목은 사진의 눈속임에 완벽한 알리바이를 제공한다. 작가는 결코 자신의 가족인지, 친구네 가족인지 정체를 말해준 적이 없기에, 우리들의 길.. 더보기
완행열차 점점 사라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중국 내에서 완행열차는 여전히 요긴하다. 넓은 대륙의 구석구석을 잇기에 완행열차만 한 것이 없고, 주머니가 가벼운 도시 노동자들의 유일한 귀향길 수단이기 때문이기도 하다. 난징에서 상하이로 가는 1시간40분짜리 고속철도 1등석 요금이면 완행열차로 중국 국토 여행이 가능하다니 기찻삯이 싸긴 싼 모양이지만, 성수기에는 그만큼의 대가가 따르기도 한다. 에어컨도, 지정 좌석도 없는 이등칸에서 한여름 80시간을 달렸다는 이야기는 무용담 축에도 끼지 못할 정도다. 가난하기로는 이 열차 손님 못지않은 무명의 사진가 키안 하이펑은 4년 가까이 중국 내 거의 모든 완행열차에 올랐다. 호텔에서 수리공으로 일하며 벌어들인 40만원이 채 안되는 월급은 죄다 촬영비로 들어갔다. 지난 23일 밤,.. 더보기
여관방 연상게임 채승우는 신문사 사진기자였다. 우리나라 신문 사진의 성향은 유독 보수적인 편이다. 적은 인원으로 사건 중심 보도에 치우치다 보니 사진기자 특유의 시선을 담아낼 여지가 거의 없다. 그래서였을까. 그는 중년이 다 돼 장가를 가는 늦복을 누리더니, 홀연 19년의 사진기자 생활을 청산하고 아내와 세계여행을 다녀왔다. 평소에도 끼가 많던 그이기에 빈손으로 오지는 않았을 터였다. 가지 못한 곳을 다녀온 사람에게 부리는 심술인지 모르겠으나 뻔한 여행 사진이면 왠지 서운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1년 동안 31개국을 돌며 깊이 있게 찍는다는 건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이런 호기심에 답하려는 듯 마침내 그가 류가헌에서 ‘여관방 연상게임’이라는 제목으로 전시를 열었다. 여관방은 ‘여행 관광 방랑’의 줄임말이다. 그는 수많은.. 더보기
현과 백 빛과 시간을 응축하면 상은 단순해지고, 색은 깊어진다. 손성모의 바다 사진에는 선과 색으로만 이뤄진 가장 단순한 세계만이 존재한다. 대형 카메라로 한 시간 가까이 장노출을 주자 바다와 하늘은 각기 짙은 회색과 흰색으로 무화되었다. 미니멀리즘 회화처럼 보이는 사진은 육안으로 지각하지 못했을 뿐 하늘의 밝음과 땅의 어둠이 대자연의 이치임을 깨닫게 한다. 디자이너 하라 겐야의 말을 빌리면, 백(白)은 색채가 아니라 하얗다고 느끼는 감수성으로 존재한다. 그 감수성은 텅 빔, 고요함, 맑음 등의 의미를 포함한다. 모든 찬란한 빛들을 합쳐 놓으면 아무런 빛도 없는 백의 세계가 되기에 그것은 있음과 없음의 양면이기도 하다. Lock wait timeout exceeded; try restarting transacti.. 더보기
은마 아파트 은마 아파트는 단순한 아파트가 아니다. 1970년대 말 강남 개발의 주역이자 상가 건물까지를 거느린 대규모 아파트의 원조 격이기도 하다. 팰리스와 타운 등을 붙인 고층 아파트에 밀려 구식으로 취급받을 때조차도 사교육 열풍에 힘입어 대치동 명당 자리의 위용을 굳건히 지켜냈다. 심지어 재개발이 확실시되면서 아파트 불패 신화의 주인공으로 우뚝 서고 있다. 1970년대 이후 우리가 겪어온 경제개발과 주거, 교육 환경의 변천사가 이 은마 아파트라는 이름 하나에 응축되어 있는 셈이다. 우리나라에서 살아본 적도 없는 벨기에 사진가 세바스티앵 쿠벨리에가 한국을 상징하는 공간으로 은마 아파트를 꼽은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몇 년 전 미국 교포인 여자 친구를 만나러 서울에 왔다가 처음 은마 아파트를 발견했다. 아무런 연고.. 더보기
미장센 광장에는 무수한 말들이 떠돈다. 절실함으로 가득 찬 이들이 찾는 이 열린 공간에서는 설령 혼자서 말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외침이지 독백이 아니다. 그러나 정작 광장 자체는 말이 없다. 극우 기독교 단체의 구국 기도회와 해고 노동자의 복직 투쟁은 같은 장소에서 돌림노래처럼 퍼져나간다. 백만명을 끌어모은 나치의 정치쇼도 북한의 화려한 매스게임도 월드컵을 뜨겁게 물들였던 붉은악마의 응원도 모두 광장에서 일어났다. 카메라를 든 사람이라면 한번쯤 찾아오기 마련인 집회장에서 노기훈은 언제부터인가 사람이 아니라 장소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뜨겁지만 멀리 퍼지지 못하는, 혹은 서로 다른 말들이 부딪치며 아수라장이 되는 그곳이 그에게는 마치 연극 무대 같았다. 광장은 모두에게 열린 공간이라는 환상을 심어주며 신고된 일정에 .. 더보기
쇼룸 아날로그 시절의 앨범 사진은 기술적으로만 보면 거의가 B컷이다. 초점은 흔들리고 신체의 일부는 구도 밖으로 잘려나가기 일쑤다. 그럼에도 찍는 사람이나 찍히는 사람이나 꽤 진지했다. 똑딱이 수준의 카메라여도 필름을 사고 사진으로 뽑아내는 데는 값을 내야 했기에 촬영은 다시는 돌이킬 수 없는 일종의 의식 같았다. 그만큼 카메라를 쥔 사람의 주문이란 절대적이었다. 의욕이 클수록 모두가 얼어붙은 자세로 나오는 정반대의 결과가 허다했지만 말이다. 그러나 찍는 사람과 찍히는 사람이 같아진 셀피 시대에는 상황이 다르다. 누군가가 나를 바라보고 있다는 불편함 없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면 다시 누르면 그뿐이다. 엉뚱한 표정, 흔들리는 동작이 담긴 B컷을 일부러 즐긴다. 네덜란드 사진가 윌렘 포펠리에는 이런 표정들을 수집한..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