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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유경희의 아트살롱

수도사의 불륜이 낳은 그림 피렌체에 가면 보티첼리만큼 그림을 아름답게 그리는 화가를 만날 수 있다. 보티첼리의 스승 프라 필리포 리피다. 그래서인지 보티첼리가 그린 비너스 속 시모네타만큼 어여쁜 여자들이 그의 그림에 넘쳐난다. 어쩌면 그녀들은 보티첼리보다 덜 이상화되어 있는 동시에 훨씬 더 관능적인 여자들임에 틀림없다. 프라(fra)는 이탈리아어로 ‘승려’라는 뜻이다. 고아가 된 리피는 15세 무렵 자신의 뜻과는 상관없이 카르멜수도회에서 운영하는 카르미네 수도원에 입단해 평생 수도사 겸 화가로 살게 된다. 미술사상 그 누구보다 다채로운 삶을 살았던 그는 많은 일화와 추문을 남겼다. 술과 여색을 탐했으며, 술고래에 사기꾼으로 알려진 그는 방탕하고 분방한 일생을 보냈지만, 예술에서만큼은 타고난 재능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빛의 교차를 .. 더보기
사냥의 여신이 된 왕의 애첩 18세기 로코코 예술의 핵심 인물은 마담 퐁파두르다. 그래서 어떤 미술사가들은 로코코 예술을 마담 퐁파두르 양식으로 부른다. 마담 퐁파두르는 루이 15세의 애첩으로 20여년 동안 문화예술의 후견인은 물론 섭정도 마다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녀는 왕관 없는 여왕으로 프랑스 역사상 가장 매력적이고 영리하며 창의력이 뛰어난 여성이 되었다. 평민 출신이었던 퐁파두르가 왕의 여자가 될 수 있었던 이유는 점성술에 심취했던 어머니 덕분이다. 이제 겨우 아홉 살의 딸이 미래에 왕의 여자가 된다는 점술을 들은 모친은 치밀한 계획을 세운다. 왕의 여자가 되기 위한 모든 사교술과 매너, 인문학과 음악·예술 등 다방면의 재능을 키우기 위한 집중교육에 들어간 것. 다행히도 총명하고 성격이 활발했던 퐁파두르는 모든 방면에 탁월한 .. 더보기
프란체스카의 부활 오랫동안 서양미술사를 들여다보면, 예기치 못한 화가가 좋아지기 시작한다. 피에로 델라 프란체스카가 그런 화가다. 전공자들도 처음엔 미술사에서 중요하다고 자리매김된 작품들에 시선을 둔다. 그러나 오랫동안 미학이나 미술사를 가르치게 되면, 미술사에서 배제된 작품들에 눈길이 간다. 자기만의 독특한 시각이 생기는 것이다. 이탈리아 산세폴크로에 있는 ‘부활’이라는 그림은 미술사에서 과소평가된 작품 중 하나였다. 산세폴크로가 너무 외진 작은 마을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다빈치나 라파엘의 그림과 비교할 때 너무 조용하고 유혹적이지도 않아 재미도 감동도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다가 18세기에 다른 용도로 쓰이기 위해 벽화가 지워졌고, 19세기에 회벽이 깨지면서 드러나기 시작해 15세기의 가장 중요한 프레스코화로 떠.. 더보기
섬세와 실용의 속 깊은 만남 미국 뉴욕에 가면, 마치 숨겨놓은 애인을 만나듯 홀로 은밀히 다녀오는 곳이 있다. 맨해튼 최북단, 허드슨 강을 내려다보는 언덕에 위치한 클로이스터다. 메트로폴리탄 뮤지엄의 분관인 클로이스터는 프랑스에 있던 중세 수도원 몇 개를 가져와 그대로 재조립한 중세 유럽예술의 보고다. 이 미술관의 하이라이트는 단연코 로베르 캉팽의 ‘수태고지’다. 플랑드르의 거장인 캉팽은 인류사의 가장 충격적인 사건인, 예수가 태어날 것이라는 사실을 고지하러 온 가브리엘 대천사와 마리아의 모습을 1400년대 플랑드르 지방 중산층 가정의 전형적인 모습을 통해 보여주고 있다. 왼쪽은 기증자인 잉겔브레히트 부부로 당시 유명 상인이다. 상인계급의 봉헌자들은 수태고지의 순간이 마치 자신의 집안에서 일어나는 것처럼 보이길 바랐으며, 그 순간을.. 더보기
뜻밖의 삶을 춤추어라! 마티스는 춤이 자기 안에 있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춤은 그의 인생의 활기였다. 그런 그에게 1909년 러시아 최고의 미술품 애호가로 유명했던 섬유왕 세르게이 슈추킨(Sergei Ivanovich Shchukin)이 자신의 저택 계단 벽을 장식할 그림을 주문한다. 바로 전년 를 사들였던 슈추킨은 자신이 구입한 그림에 만족하고, 춤 그림을 그려보라고 제안했던 것이다. 마티스는 슈추킨의 찬사와 격려에 고무되어 순간적으로 분출하는 영감에 휩싸여 유화 스케치인 을 완성했다. 러시아 발레단의 춤, 카탈류냐 해변에서 어부들의 춤, ‘파랑돌’이라는 프로방스 지방의 춤 등에서 영감을 받은 마티스는 발랄함과 유례없는 활기, 과단성이 결합되어 있는 그림을 그렸다. 이어 그린 는 더욱 격정적인 색조와 원초적이며 강렬한 춤의 .. 더보기
아몬드 나뭇가지에 핀 꿈 아몬드 꽃은 매화처럼 아주 이른 봄에 피는 꽃이다. 이 작품은 1890년 반 고흐가 아를에서 고갱과의 불화 끝에 귀를 자르고, 자발적으로 들어간 생레미의 정신병원에서 그린 그림이다. 사랑하는 동생 테오가 아들을 낳자, 조카의 탄생을 기념하는 선물로 주려고 그린 것. 그것도 파란 눈을 가진, 자기와 똑같은 ‘빈센트’라는 이름을 가지게 될 조카를 위해서 말이다. 이른 봄에 피는 아몬드 꽃처럼 조카가 고통을 잘 극복하고 생명력 넘치는 인생을 살라는 의미일 것이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그림은 반 고흐가 자살한 해의 마지막 봄에 그려진 그림이다. 반 고흐는 이 그림을 완성한 후 몸져누워 몇 주간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인지 이 그림은 탄생과 죽음이 공존하는 기묘한 뉘앙스를 풍기는 것만 같다. 삼촌도 .. 더보기
아주 안타깝고 아까운, 한 여성화가 너무 일찍 갑작스럽게 세상을 뜬 여성화가가 있었다. 파울라 모더존 베커(1876~1907). 그렇게 일찍 죽지만 않았어도 20세기 최고의 화가 중 하나가 되었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는 당대의 시각으로 보았을 때도 독자적인 화풍을 추구한 존재였다. 1898년 독일 브레멘 근교의 예술인 공동체 마을 보르프스베데에 정착한 모더존은 그곳에서 시대를 선도하는 미술가들을 만나고 우정을 쌓는다. 시인 라이너 마리아 릴케와 그의 부인이 된 조각가 클라라 베스트호프와 만난 곳도 그곳이다. 모더존은 동료 화가였던 오토 모더존과 결혼했고, 짧은 공동작업 시간도 가지지만, 결혼과 작업에 회의를 느껴 파리로 떠난다. 표현에 있어 형태를 최대한 단순화하고자 했던 그가 선택한 파리는 예술적 영감의 스펙트럼을 다양하게 만들어주는 .. 더보기
메멘토모리와 카르페디엠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다(Vanitas vanitatum et omnia vanitas: 전도서 1장 1절).” 라틴어 ‘바니타스(vanitas·영어로는 vanity)’는 허무, 무상, 허영을 뜻한다. 바니타스는 17세기 네덜란드에서 탄생한 거의 모든 정물화의 기본 주제다. 그중에서도 해골이 등장하는 정물화를 특별히 바니타스 정물화라고 부른다. 인생이 허무한 건 인간이 죽음 앞에 무력하기 때문이고, 해골만큼 죽음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모티프는 없기 때문이다. 초기 바니타스 정물의 대표작인 바르텔 브륀 1세가 그린 ‘제인-로이즈 티시에르의 초상화 뒤편에 그려진 바니타스 정물’에는 두개골이 벽감(니치)에 놓여있다. 두개골은 이미 턱뼈가 빠져 있는데, 인체가 점차 해체, 소멸되어 가는 .. 더보기
상처 입은 삶의 포에지 실연을 한 후 몽유병 환자처럼 어떤 의지도 없이 미술관에 갔다. 그때 내 심경의 이마주는 길고 가느다란 자코메티의 걷고 있는 인물상과 접촉했다. 사랑으로 인한 상처와 절망을 안고 찾아가기엔 미술관만 한 곳이 없다. 거기엔 나보다 더 예민하고 민감하고 처절하게 삶과 사랑에 배반당한 존재들의 환대(?)가 있으니까. 스위스 출신의 조각가 알베르토 자코메티는 기다랗고 야위고, 날카롭고 납작하고, 의식 없이 출몰하는 조각으로 파리의 미술가들 사이에서 유명해졌다. 이후 뉴욕에서 열린 두 차례의 전람회(1948, 1950년)와 프랑스 실존주의 작가 장 폴 사르트르가 쓴 작품론으로 미국에서 더 명성을 떨쳤다. 절친이던 사진가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 혹은 유섭 카쉬가 찍은 자코메티의 얼굴은 그대로 그의 작품이다. 꾸미지 .. 더보기
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 베이컨은 항상 “나는 왜 정육점의 고기가 아닌가?”라고 반문했다. 그는 살아있다는 것을 정육점의 고기와 같이 비참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고통받는 인간은 동물이고, 고통받는 동물은 인간”이라고 했던 베이컨은 자화상을 그리는 것도 모자라 실제 소 갈빗대를 들고 사진을 찍기까지 했다. 스스로 잔혹한 초상이 되는 방법을 선택한 것이다. 루시앙 프로이트(프로이트의 손자)와 더불어 영국 구상미술의 독보적 존재였던 프랜시스 베이컨은 동명인 근대경험론 철학의 선구자 프랜시스 베이컨의 후손이다. 중학교 중퇴 정도의 학력을 가진 그가 엄청난 동물적 영리함과 감각적 지성의 소유자라는 사실은 매우 충격적이다. 하지만 조상의 유전자도 무시할 수 없지 않은가? 베이컨은 엄마 옷을 입고 화장을 하다가 아버지한테 쫓겨나 속기사, .. 더보기
잃어버린 미소 ‘아르카익 스마일’ 내 서재에 걸려있는 미륵반가사유상의 미소는 언제나 질문하게 한다. 도대체 저 묘연한 미소의 근원과 정체는 무엇인가? 물론 그 미소는 학구적으로는 해석되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왠지 부족하다. 때로는 문제를 풀지 않는 편이 옳다. 반가사유상의 미소는 기원전 2세기쯤 알렉산더 대왕의 간다라 정벌에서 유래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반가사유상을 비롯해 석굴암의 본존불, 서산 마애삼존불의 미소는 고대 그리스의 아르카익 스마일과 닮아있다. 분명 최초의 불상들은 그리스 조각들처럼 서구인의 얼굴을 그대로 보여준다. 헤어스타일과 의상도 그리스식이다. 이들은 실크로드를 따라 한반도까지 전파되었으리라. 고대 그리스 미술은 크게 네 시기로 구분하는데, 기하학적 시기(B.C. 1100~800년), 아르카익기(B.C. 600~480년).. 더보기
꽃보다 어리석음 초현실주의자들이 흠모한 두 사람이 있다. 프로이트와 보슈다. 당시 지식인과 예술가의 호기심을 자극했던 프로이트는 동시대 사람이었지만, 히에로니무스 보슈는 500년 전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북구 르네상스의 거장이었다. 인간의 무의식과 잠재의식을 악몽처럼 그린 보슈는 여행을 전혀 하지 않았고, 집 밖에 나오는 일도 없었다. 거의 은둔자였던 보슈는 마치 악마와 교통하듯이 지옥의 세계를 잘 알고 있었다. 대표작인 ‘쾌락의 정원’과 ‘최후의 심판’은 그가 가진 상상의 세계가 얼마나 엽기적이고 불가사의하고 세기말적인지 보여준다. 중세 말은 잦은 천재지변과 전염병, 전쟁, 반란 등 세기말적인 징후가 가득한 시기였다. 이 시기를 통과한 보슈는 세상은 진정한 안식처가 아니라 험난한 순례를 거쳐야만 하는.. 더보기
나는 베일을 사랑해요! 어쩌면 우리는 어떤 사람에 대해 안다고 했을 때, 그 사람이 말한 것에 의해서보다는 침묵한 것에 의해서 그를 더 잘 알게 되지 않을까. 마그리트는 좀체 유년 시절에 대해 입을 열지 않았다. 얼마 되지 않는 추억들도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든 매우 환상적인 것들로 채워나갔다. 이처럼 의식 저편으로 사라져버린 그의 기억들은 호기심을 자극한다. 특히 베일을 씌운 그림들이 그렇다. 마그리트의 ‘베일’에 대해 추측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이렇다. 유년 시절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이미지로부터 왔다는 것. 우울증이었던 어머니가 야밤에 몸을 강에 던져 스스로 생을 마감했던 것이다. 13살의 마그리트가 본 어머니의 마지막 모습은 잠옷으로 가려진 얼굴과 신발을 거꾸로 신은 몸이었다. 어머니가 스스로 택한 죽음을 보지 않으려고 .. 더보기
양들의 침묵 희생양은 ‘다른 사람의 잘못을 대신 뒤집어쓴 사람’을 비유한다. 희생양 덕분에 진짜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쉽게 잊혀져 배후의 인물로 남아있게 된다. 이렇듯 더 큰 희생을 막기 위해 사소한 희생을 치른다는 희생양의 메커니즘에는 음모와 폭력성이 내재되어 있기 마련이다. 신화학자 프레이저는 “우리 죄와 고통을 다른 어떤 존재에게 떠넘겨 우리 대신 감당하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미개인에게는 익숙한 사고방식”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어찌 이것이 미개인에게만 있겠는가? 오늘날 더 미묘하고 저열한 방식으로 비일비재하게 일어나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면 희생제의에서 왜 양인가? 아마도 동물 중에 가장 인간적인 것이 채택되었을 것이다. 죽여서는 안되는 순하디 순한 동물을 바쳐야 그런 살해행위가 끔찍하게 여겨진다. 그만큼 드.. 더보기
달리가 그린 솔(Soul) 푸드 어릴 적 요리사를 꿈꾸었던 달리는 부엌을 동경했다. 엄격한 집안에서 자란 달리에게 부엌은 금지령이 내려진, 그럴수록 매혹적으로 다가온 신비의 장소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까닭에 그는 여자들로 북적이고 활기 넘치는 부엌에 잠입할 기회를 호시탐탐 엿보며 늘 그곳을 서성거리곤 했다. 부엌에서 음식을 먹는 것을 죄악이라고 배웠던 달리는 그곳에서 일하는 육감적인 하녀들의 땀내, 흩어진 포도송이, 끓고 있는 기름, 벗겨진 토끼의 가죽, 마요네즈를 뿌린 게 다리 등의 열기와 향기를 음미했다. 추억은 언제나 향기로 각인되는 것이다! 특별히 달리는 식사를 신을 받아들이는 성찬식처럼 신비롭고 거룩한 행위로 여겼다. 더군다나 그는 작업에 몰두할 때 빵과 물만을 먹으면서 지냈다. 마치 그림 그리는 행위를 예수의 고행과 동일시했.. 더보기
손들의 춤 더 이상 손은 몸의 한 부분이 아니다. 이 손들은 무엇을 붙잡으려 하는 것일까? 무엇을 어루만지려 하는 것일까? 서로를 어떻게 바라보고 있는 것일까? 사실, 이 손들은 전혀 접촉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어떤 각도에서 보면 살짝 닿아 있고, 어떤 부분에서 보면 친밀하게 맞닿아 있다. 저 부유하는 아련한 손들은 시선과 응시라는 내적 필연성에 의해 일체가 되어 있는 동시에, 영원히 합일되지 못할 운명에 대한 암시 같기도 하다. 로댕의 ‘대성당’은 원래 분수장식을 위해 제작되었다. 휘어진 활 모양의 두 손 사이로 물이 솟아오르도록 계획되어 있었던 것. 처음에는 ‘언약의 궤’라는 이름을 붙였으나, 나중에는 ‘대성당’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단순한 구성에서 느껴지는 기념비적인 분위기가 성스러운 감정을 갖게 한다는.. 더보기
잃어버린 영혼, 안드레이 류블로프 알음알음 좋은 영화를 보기 위해 비디오테이프를 돌려보던 시절이 있었다. 그때 화가 선배로부터 건네받은 영화가 A 타르코프스키의 (1966)였다. 15세기 탁월한 성화를 남긴 러시아의 유명한 화가이자 수도사였던 안드레이 류블로프(1360~1430)를 소재로 한 영화다. 흑백영화는 전율 그 자체였고, 마치 천국의 열쇠를 쥔 사람처럼, 지인들에게 발설하고, 선물하고, 강권했다. 인생에서 이런 드문 만남은 일종의 ‘에피파니(Epiphany·신의 현현)’가 아닌가! 류블로프의 대표작 ‘성삼위일체’는 러시아 정교에서 최고로 손꼽는 이콘화다. 예수와 성가족을 그린 이콘(icon)은 기독교 예배를 위한 그림을 말하는데 주로 동방교회에서 예배를 위해 많이 사용되었다. 이 그림은 현재 러시아에서 가장 중요한 수도원 중 하.. 더보기
조강지처도 섹시할 때가 있었다? 그리스 최고의 여신 헤라는 예술가들의 호기심을 충족시키지 못했던 것 같다. 헤라를 그린 그림이 드물고 걸작이 없는 것만 보아도 그렇다. 조강지처라는 한계, 그러니까 더 이상 한 남자의 욕망을 자극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은 예술가들을 시큰둥하게 만들었을 것이다. 헤라는 질투의 여신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가정과 결혼의 수호신이다. 안정적인 가정과 결혼을 위해 바람기 많은 남편을 지키려다보니 질투가 가장 중요한 캐릭터가 된 것이다. 어쨌거나 헤라는 그리스라는 가부장적 이데올로기 사회에서 여성의 역할을 극명하게 드러낸다. 제우스는 아름다운 헤라를 어떻게 유혹했을까? 그는 그녀를 품고 싶은 욕정에 이끌렸지만 무턱대고 덤벼들지는 않았다. 헤라의 연민을 자극하기 위해 비 맞은 한 마리 애처로운 새.. 더보기
미친 사람을 그린다는 것? 낭만주의의 기본적인 정조는 ‘동경’이다. 낭만주의자들은 상상적인 것, 무한한 것, 먼 곳에 대한 동경을 모토로 한다. 현실감은 좀 떨어지고, 이국적인 것, 관능적인 것, 악마적인 것에 관심이 많다. 18세기 말에서 19세기 전반에 걸쳐 탄생한 낭만주의는 천재와 광기의 예술가 개념을 만들었다. 통상 예술가를 생각할 때 과도한 감정, 자유와 방종, 괴팍함, 혼돈을 떠올린다면 낭만주의자로서의 예술가를 염두에 둔 것이다. 낭만주의자들의 먼 곳에 대한 사랑 혹은 동경은 두 가지로 나타난다. 시간적으로는 중세와 바로크 시대, 공간적으로는 페르시아와 북아프리카 같은 근동과 인도와 중국, 일본 같은 극동에 대한 향수를 가진다. 낭만주의자들이 하렘의 여자들과 말을 탄 모로코인과 같은 근동지방의 정서를 표현하는 것도 그 .. 더보기
여성 화가로 산다는 것 19세기에 여자가 화가로 산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그것은 남성들과 대등하게 지적, 사회적, 정치적 경험 속에 자신을 던진다는 의미다. 그러나 안정을 모토로 하는 중산층 가문의 여자가 예술가가 된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자 어쩔 수 없는 한계와 대면하는 일이었다. 인상파 최초의 여성 화가 베르트 모리조가 그랬다. 모리조는 집안의 적극적인 도움으로 화가에 입문했고, 재능에 있어서도 남부러울 것이 없었다. 그렇지만 그녀는 예술과 결혼 사이에서 감정적으로 갈등했다. 결혼을 거부할 만큼 화가로서의 인생을 살고자 했지만 작품은 아마추어의 느낌을 배제할 수 없었다. 즉 서사적 맥락과 극적 긴장감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에서 취약해 보였다. 모리조의 작품은 그 속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고 있으며, 그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