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분류 전체보기

북두칠낙 사라진 희귀 성씨 중에 낙씨가 있다. 윤태준의 거짓말은 이 사실에서부터 출발한다. 그는 한성백제가 축조한 경기 의왕시 모락산성을 배경으로 낙씨의 탄생 설화를 지어낸 뒤 그 일대에서 그럴싸한 기록사진을 만들어낸다. 모락산성에서 주어온 돌멩이에는 관리번호를 매긴 뒤 사료로 삼고, 박물관에서 찍어온 유물 사진 또한 관련 자료라고 제시한다. 그가 지어낸 얘기대로라면 낙씨의 시조를 키운 인물은 훈족에게 끌려왔다가 한성백제의 강제노역에까지 동원된 로마제국 출신의 서역인이다. 때는 465년 8월25일. 낙씨가 태어날 때는 까마귀 떼가 울었는데, 그 새들이 앉았던 바위에는 북두칠성이 새겨져 있다. 작업 제목 ‘북두칠낙’은 이런 줄거리에서 비롯했다. 황당무계하지만 듣다 보면 그럴싸해지는 이야기는 사진이 뒷받침돼 더욱 믿.. 더보기
덕수궁에서 바라본 서울 풍경 신록이 무르익어가는 5월 초 러시아 문학을 공부하고 있는 대학생 딸아이와 함께 덕수궁 현대미술관에서 변월룡(1916~1990)의 세계를 감상하였다. 수많은 인물화와 폭풍우 몰아치는 풍경, 소나무를 비롯한 다양한 북녘 자연의 묘사에 한동안 우리 부녀의 시선이 움직일 줄 몰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익숙지 않은 그 이름 변월룡. 고려인 2세로 옛 소련에서 가장 유명한 레핀 예술학교 교수가 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인정받았음에도 끝까지 변월룡이란 한국 이름을 고수하였던 인물. 그는 1953년 소련 문화성의 명령에 따라 북한에 파견된다. 북한에 머물렀던 1년3개월 동안 변월룡은 수많은 북한의 인물, 풍경을 화폭에 담으며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모범을 전수했다. 하지만 북한의 영구 귀화를 거부하여 북한에서도 잊혀진 인.. 더보기
붉은 발과 성소수자 이번주 내내 낙원동에는 ‘낙원에 오신 걸 환영합니다. 잊지 마세요. 5월17일은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입니다’라고 적힌 분홍색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질병으로 취급했던 동성애를 1990년 5월17일에야 비로소 질병 분류에서 삭제했고, 2004년 5월17일 미국 최초로 매사추세츠주가 동성 결혼을 합법화했다. 이 의미 깊은 날은 라는 책을 통해 이성애 중심 문화는 종교의 산물이라고 정의 내린 루이 조르주 탱의 제안으로 ‘국제 성소수자 혐오 반대의 날’로 선포되었다. 쿠바 난민 출신으로 뉴욕에서 활동한 미술가 펠릭스 곤잘레스 토레즈는 동성애자가 범죄자와 다를 바 없던 시절을 미국에서 보냈다. 연인을 에이즈로 잃고, 그 역시 에이즈 합병증으로 죽어가면서도 유색인종, 성소수자에게 쏟.. 더보기
골목, 기억의 목소리 이곳에는 혁명가 체 게바라를 기념할 줄 아는 이가 거쳐 갔다. 그러나 그가 꿈꾸던 혁명의 기운이 골목 가득 풍기지는 않는다. 점처럼 박힌 채 노란 칠마저 뒤집어쓴 그의 얼굴은 변혁을 꿈꾸는 이들의 슬픈 최후 같기도 하다. 그 옆으로는 투박한 얼굴이 마냥 싱글벙글 웃고 있다. 조롱인지 희망인지 모르겠는 두 얼굴의 묘한 동거. 조만간 이 두 얼굴의 운명은 누군가에 의해 또다시 바뀔지도 모른다.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외진 길목의 시간을 멈추지 않으려는 듯 들꽃은 이제 늙어 홀씨를 퍼뜨리려 한다. 이렇듯 무심해 보이는 골목을 문선희는 ‘묻고, 묻지 못한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80곳이나 기록했다. 그리고 그 골목에서 유년을 보냈던 80명의 이들과 인터뷰도 했다. 이제 모두 40대가 된 그들은 유치원생이나 초등학.. 더보기
전쟁놀이 하늘을 가득 메운 것은 틀림없이 먹구름이다. 좋지 않은 징조를 비유할 때 등장하는 먹구름이 공기를 압박하면서 무겁게 땅으로 내려앉을 기세다. 그래서인지 거리는 어둡기만 하다. 구름 아래 동네에는 아이들이 모여 있다. 얼굴에 표정은 없지만 이들은 볼이 빨갛게 상기될 정도로 집중해서 뛰어노는 중이다. 저 멀리 자전거 타는 아이들이 보이고, 동생을 등에 업고 길에 나온 소녀의 모습도 보인다. 일군의 아이들은 바닥에 쪼그리고 앉아 있다. 무심히 화면을 훑어내리다보면 한 인물과 눈이 마주친다. 관람자를 향해 총을 겨누는 시늉을 하고 서 있는 이 아이 얼굴에는 표정이 없다. 오싹하다. 그러고 보니, 화면 속 몇몇 아이들이 총을 든 포즈를 취하고 있다. 누군가는 감시당하며 바닥에 엎드려 있다. 두 손을 머리 위로 치.. 더보기
눈의 백일몽 의자에서 뛰어내리는 슈퍼맨은 과연 안전하게 착지를 할까. 아직 자라지 않은 여린 몸, 깊지 않은 낙하의 폭은 설령 추락한다 할지라도 대형 사고가 아님을 쉽사리 감지시킨다. 그런데도 묘하게 시선을 잡아끄는 힘이 있다. 사내아이의 흔한 장난일 가능성이 높은 상황일 텐데도 시시한 게 아니라 묘한 불안과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과감하게 생략된 얼굴, 파랑과 빨강의 극명한 대조, 순간 낙하의 재빠른 속도감은 정사각 구도를 꽉 찬 긴장감으로 가득 채운다. 심지어 지금 슈퍼맨은 뛰어내리는 것이 아니라 위로 치솟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아니다. 어쩌면 슈퍼맨은 창 밖 나무와 창문에 비친 실내 풍경에서 눈을 빼앗기 위한 장치였을지도 모른다. 손이숙은 이런 착각과 착시 효과를 노린다. 그녀는 익숙한 풍경을 다시 한번 들.. 더보기
인더스트리 코리아 인간이 만들어 놓고도 스스로 놀라는 경외의 장면들이 있다. 예전에는 거대한 피라미드나 사라진 아즈텍 유적처럼 짐작 가능한 기술력을 넘어서는 건축물이 당연 이런 불가사의에 속했다. 그것은 모래폭풍이 이는 사막에 뼈대를 세우는 식의 신비스러움마저 갖췄다. 요즘에는 이런 감동을 엄청나게 크고 정교한 규모에서 얻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흡사해져 가는 인공지능 같은 데서 찾는다. 인간 복제 혹은 인간을 능가하는 두뇌에 대한 두려움과 호기심은 물질의 세계가 아닌 차가운 사이버의 세계에서 경이로움을 찾게 만든다. 그러나 조춘만은 전혀 다른 차가운 곳에서 예전과 다른 스펙터클함을 불러낸다. 그곳은 심지어 늘 관심밖에 있었을 뿐 몹시 일상적인 중공업 현장이다. 그의 사진에서는 거대한 불똥 아래서도 생산에 여념이 없는 산업.. 더보기
가마솥은 사랑이다 가마솥은 어쩌면 동시대 우리의 일상에서는 멀어진 유물이다. 방에서 구들장을 들어내면서 아궁이가 사라졌고, 그 위에 자리 잡았던 가마솥도 부엌을 떠났다. 환경이 바뀌면 도구는 달라진다. 하지만 대가족의 세끼 식사를 감당해야 하는 큼직한 무쇠 가마솥이 부뚜막에 걸려 있던 장면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아직 있다. 가마솥에서 구수하게 올라오는 밥 냄새를 맡으면 고향에서의 어린 시절이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사람들이 아직 있다. 쉽게 뜨거워지지 않지만 한번 뜨거워지면 쉽게 식지 않는 무쇠 가마솥만이 전해줄 수 있는 음식의 풍미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아직 있다. 그런 이들에게 가마솥 밥은 그리움이다. 몇몇 식당은 여전히 커다란 가마솥을 사용해서 밥을 짓고, 탕을 끓여 사람들의 추억 여행에 동행한다. 어느 날, 임옥상은 길에.. 더보기
아르메니아 실직 노동자의 손 전시장에 들어서면 아홉 개의 모니터에서 아홉 사람의 손이 움직인다. 양손을 꼭 쥐기도 하고, 비비기도 하고 주먹을 쥐기도 하고 박수를 치기도 한다. 프랑스 작가 말릭 오하니안은 손의 동작과 연동해 그들 손이 만드는 박수 소리를 리드미컬하게 편집해 전시장을 채웠다. 경쾌한 박수 소리가 있으니 손동작이 흥겹게 보이는데, 화면에 집중하다보면 거칠고 투박한 손등이며 손가락 마디가 눈에 들어온다, 손의 주인공들은 아르메니아의 실직 노동자들이다. 1991년 독립을 선언한 이후 아르메니아는 시장경제로 전환을 시작하는데, 대량실업, 빈곤, 양극화 현상을 겪으면서도 2004년에 이르면 1990년대 수준으로 경기를 회복한다. 2002년 무렵부터는 한 해 두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할 정도로 경기가 회복되었지만, 생산 시스템이.. 더보기
침묵 3년 전 처음 미키 하세가와를 만났을 때, 그녀는 한창 예쁘게 자라나는 자신의 아이를 찍고 있었다. 찬란한 빛을 배경으로 춤을 추거나 장난을 치는 유치원생 소녀는 그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사랑스러워 보였다. 일상이 곧 작업이 되는 삶이란 얼마나 풍요로운가. 매일에 충실했을 뿐인데 작업마저 쌓이는 드물게 운 좋은 사진가라고 당시에는 생각했다. 그런 그녀가 얼마 전 새로운 작업을 내밀었다. 오후 햇살이 부서지는 평범한 주택가 사진에는 여전히 그녀 특유의 감수성과 색감이 묻어나 있었다. 사진 속에는 아무도 등장하지 않는 대신 그 장소에 살던 아이나 엄마가 던진 짤막한 문장만이 병치되었는데 그 내용은 사회면 기사의 내용처럼 건조하고 끔찍했다. 사진 속 모든 장소는 엄마의 학대로 아이가 사망한 곳이었기 때문이다. .. 더보기
도심 속의 평화로운 섬 명동성당 지난달 중순 서울 명동성당에서 아퀴나스 합창단이 부르는 슈베르트의 ‘십자가 아래의 어머니(Stabat Mater)’를 감상할 기회가 있었다. 음악에 관심이 많은 터라 명동성당 안에서 불리는 합창의 음향이 관객에게 어떻게 전달되고 들리는지 무척이나 궁금했다. 중국, 일본 등지에서 온 외국인 관광객들이 인산인해를 이루는 복잡한 명동거리를 통과해 성당에 도착한 나는 갑자기 어떤 외딴 섬에 도착한 듯한 착각이 들었다. 그 복잡하고 국내에서 땅값이 가장 비싸다는 명동에 이렇게 여유있고 평화로운 넓은 공간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기 때문이다. 간삼건축의 설계로 명동성당 종합계획의 1단계 공사가 2014년 마무리됐다. 그 전의 명동성당과는 또 다른 새로운 모습이었다. 1898년 미국인 코스트 신부의 설계로 건립된 .. 더보기
정면을 응시하는 사람들 혁명의 계절이다. 부정선거를 심판하고 민주주의를 쟁취하기 위해 피 흘린 4·19 혁명이 56주년을 맞이했고, 4·13 총선은 민주주의가 후퇴해가는 현실에 경종을 울리며 여소야대 정국을 만들어 선거혁명이라고 불린다. 56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사람들은 여러 차례 거리로 쏟아져 나와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노력했는데, 이번 선거 결과를 보니 이제 피로써 권력을 심판하는 시대는 지나간 것 같다. 선거 과정에서 내가 흥미로웠던 것은 ‘시민의 눈’이라는 자발적인 시민 감시단의 활동이었다. 부정선거를 감시하기 위해 온라인과 오프라인에서 “두 눈을 부릅 뜬” 이들의 활약은 여러 면에서 자극제가 되었다. 그들이 눈을 뜨고 지켜보지 않았다면 결과가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시민의 눈’을 보면서 이우성의 작품 ‘정면을.. 더보기
기념비의 역사 문화혁명이 시작하던 해에 태어난 왕칭송은 중국의 현실 사회와 기존의 가치관이 충돌하는 지점을 특유의 방식으로 풍자하는 작가다. 본래 예술학교에서 그림을 전공한 그는 중국식 팝아트풍으로 풍자화를 그리다 1990년대 중반 사진 매체로 옮겨왔다. 그는 마치 영화감독처럼 거대한 규모의 세트장을 만들고 모델을 섭외해 원하는 상황을 연출한다. 맥도널드와 콜라로 상징되는 자본주의에 대한 동경, 어떻게든 올라가야 하는 신분 상승의 열망, 시골을 떠나 대도시에 정착할 수밖에 없는 노동자의 거친 인생 등 그가 대형 사진 한 장 속에 담아내는 장면은 중국의 오늘을 날것 그대로 보여준다. ‘기념비의 역사’는 여기에서 더 나아가 역사란 과연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박물관이나 교과서에서 연대기 형식으로 나열된 거대한 역사는.. 더보기
바리데기 우리는 모두 바다에서 왔다고 했다. 생명 탄생의 첫걸음이 바다에서 시작한 것 같기 때문이라고 했다. 크기와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바다는 무한함을 상징한다고 했다. 그리고 인간은 무한하다 싶은 것 속에 있다고 느낄 때 제약을 넘어설 수 있는 용기를 얻는다고 했다. 그래서 바다를 항해하는 배야말로 인간의 대담함과 지혜로움의 증거라고 했다. 생명의 요람 바다에는 생명이 버려지기도 했다. 아비 목숨을 살릴 생명수를 구해 온 바리데기도 애초에는 부모가 바다에 버렸다. 오매불망 아들을 기다리던 부부 사이에서 일곱 번째로 태어난 딸이었기 때문인데, 부모는 그가 꼭 죽기를 바란 건 아니라고 했다. 누군가 좋은 사람이 구해서 키워주어도 좋겠다 싶었단다. 운좋게 노부부가 구해주어 잘 자란 바리데기는, 제 목숨 살리자고 .. 더보기
피동사물 프랑스 시민은 1789년 혁명을 일으켜 스스로의 자유와 인권을 지켜냈다. 세금과 노동력을 착취당하던 허수아비로서의 시민은 비로소 모두가 평등해졌다. 그러나 우리가 생각했던 진정한 자유는 당시에도 온전히 지켜지지는 못했다. 왕정을 무너뜨리고 만들어진 최초의 혁명 헌법은 ‘능동시민’에게만 투표권을 부여했다. 평균 3일치의 임금을 한 해 세금으로 낼 수 있는 남자만이 오직 능동성을 인정받았다. 반대로 능동적으로 세금을 낼 수 있는 여성도, 능동적으로 투표를 행사할 수 있는 남자도 모두 ‘피동시민’으로 전락했다. 피동은 스스로가 상태를 선택한 것이 아니기에 애초 성립할 수 없는 모순 조건이자, 배제와 차별의 폭력성을 전제로 한다. 뒤집어보면 이 피동의 운명이 꼭 사람에게 해당하는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안초롱.. 더보기
자하 하디드의 유작 ‘동대문디자인프라자’ 봄내음이 무르익기 시작하던 지난 1일 내 눈을 의심케 하는 소식이 인터넷에 올라왔다. 자하 하디드(Zaha Hadid)가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마침 만우절이어서 도처에서 장난기 섞인 소식들이 올라오던 터라 이 역시 장난이겠거니 하고 일축하려 했다. 그런데 현지시간으로 3월31일이란 내용을 접하고 여기저기 살펴보니 자하 하디드의 사망은 사실이었다. 앞으로도 한참 활동할 나이인 65세에 심장마비로 사망했다니 도저히 믿어지지 않았다. 이라크 출신 건축가인 그는 2004년 여성 최초로 건축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프리츠커상을 수상했다. 그는 내놓는 설계 안마다 건축계의 이목을 집중시킨 이슈 메이커였다. 옛 동대문운동장 부지에 2014년 개관한 동대문디자인프라자(DDP)는 자하 하디드의 대표적인 유작이 됐다. 국.. 더보기
오지리에서 작가는 농부의 아들이다. 충남 서산시 대산읍 오지리에서 태어나 성장한 화가 이종구에게 농촌과 고향은 작업의 핵심이다. 그에게 고향의 농부들은 우리나라 농경문화 전통의 마지막 세대일 것만 같다. 그들은 근대화,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되었고, 세계화, 자유무역협정(FTA)의 벽 앞에 무력했다. 시간은 흐르고 권력은 야멸차게 농부의 권리를 앗아가지만 그들은 농촌에서 농부로 산다. 다만 새로운 농부 세대의 등장이 요원할 뿐이다. ‘오지리에서’ 연작은 대선 포스터 앞에 앉은 농부들의 표정을 쌀부대 위에 그린 작품이다. 첫 작품은 1987년 대통령 선거 이후 농부들의 모습이고, 두 번째는 2002년 16대 대통령 선거 포스터 앞에 그들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세 번째 그림은 2007년 17대 대통령 선거 때의 풍경이.. 더보기
뮤지엄 아나토미 명화 한 점을 그리는 데 8~15시간 정도가 걸린다면 너무 짧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른다. 그런데 캔버스가 사람의 맨살이라면 얘기가 달라진다. 그림을 완성하기까지 최소한의 생리적 현상만을 해결해야 하는 것은 물론이고, 만약 팔을 머리 위로 올리거나 등을 구부린 자세를 취해야 한다면 몸이 통째로 굳는 것 같은 고통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이다. 채드윅과 스펙터는 특이한 작업을 펼치는 팀이다. 이들은 복원 중이거나 세간에 쉽게 공개되지 않는 19세기 이전의 회화 작품을 몸 위에 그린 뒤 한 장의 사진으로 남긴다. 그림은 하루 만에 완성하지만, 자료를 조사하거나 해당 미술관을 방문하고 밑그림을 구상하는 등의 준비 기간은 1년 가까이 걸리기도 한다. 최근에는 FBI와 런던경시청 홈페이지에 올라온 자료를 참고 삼아 도.. 더보기
그 총알들 어디로 갔을까 보라색은 외향성을 나타내는 빨강과 그 반대의 성질을 가지고 있는 파랑이 혼합된 색이다. 따뜻한 색과 차가운 색의 이질성이 절묘하게 공존해 조화를 이끌어내는 만큼, 보라색은 혼재하는 감정에 대한 심리를 담는다. 심신이 피로할 때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보라색을 찾는다는데 균형을 추구하는 성질이 우리를 치유하는 모양이다. 그러나 균형을 찾는다는 말에는 그것이 결여돼 있다는 고백이 담겨 있으니, 현재 불안정한 상태라는 것을 인정하는 셈이다. 그래서 보라색은 우울함, 불행, 죽음, 억압된 감정, 깊은 상처를 뜻한다. 한편 과거에는 안료를 구하기 어려워 특정 신분의 사람들만 즐길 수 있는 색이었기 때문에 고귀함과 우아함, 권력을 상징하기도 한다. 박영균은 제주 4·3항쟁 때 최후의 인민유격대가 주둔했고, 유격대장 .. 더보기
변신 상쾌한 저녁 바람을 얼굴로 느끼며 퇴근하는데 정말 고약한 방귀 냄새가 났다. 무취에서 악취까지 0부터 10으로 표현한다면 10점 만점이었다. 불의의 후각 공격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앞을 보니 두 명의 직장인이 아기염소처럼 즐겁게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억울했다. ‘거기 방금 방귀 뀌었죠!’라고 항의를 하려니 그 역시 우습다. 두 사람 중 하나가 소화기관 내 가스를 의도적으로 배출했다는 증거가 없을 뿐더러, 혐의를 부인하면 그만이었다. 기분은 상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맑은 공기를 허파꽈리 깊숙이 들이켜 후, 하고 흘려보냈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타인의 방귀에 대해 관대해지는 것이다. 볼기 사이로 이산화탄소·수소·메탄 가스가 섞인 기체가 소리를 동반하며 배출되는 생리적 현상을 신기해하는 것은 에..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