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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선재의 봄 창덕궁 동쪽 끝자락에는 궁궐의 위세 높은 형상과는 사뭇 다른 소박한 모습의 한옥 몇 채가 눈에 들어온다. 조선 제24대 왕 헌종이 후궁 경빈 김씨를 위해 지었다는 낙선재(樂善齋)가 그것이다 ‘선한 일을 즐겨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는 낙선재와 그 오른쪽으로 후사를 기원하는 의미의 석복헌(錫福軒), 그리고 만수무강을 빈다는 뜻의 수강재(壽康齋)를 합하여 이들 영역 전체를 낙선재라 부른다. 헌종의 정비였던 효현왕후 김씨가 혼례를 치른 지 2년 만에 운명하자 뒤이어 효정왕후 홍씨가 간택되었다. 그러나 혼례 후 만 2년이 흘러도 후사가 없자 헌종은 이를 이유로 오래전부터 마음에 두고 있었던 경빈 김씨를 후궁으로 맞이하게 된다. 경빈 김씨를 끔찍이도 사랑했던 헌종은 궁궐 한 모퉁이에 자신의 서재인 낙선재와 함께 .. 더보기
‘계단을 내려오는 봄비’ 인터넷에서 ‘당신은 무엇이 보이나요?’ ‘○○○로 보는 당신의 성격 유형은?’이라는 질문이 붙은 테스트 코너를 만나면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이미지를 들여다보는 나의 시선이 나도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심리상태, 성향, 사고 유형을 알려준다고 하니, 점집을 찾는 마음으로 마우스를 클릭하며 테스트에 몰입할 수밖에. 주재환의 이 그림도 일종의 테스트지 같다. 검은색, 흰색, 노란색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화면에서 당신은 무엇을 보았는가? 화면을 사선으로 가르는 하얀 부분은 계단이다. 계단 위에 사람이 있다. 어떤 이는 검은 사람을, 어떤 이는 노란 사람을 알아차릴 것이다. 검은 사람에 초점을 두고 보면 마르셀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 이미지가 보인다. 뒤샹은 계단을 내려오는 사람의 연속 동작을 한 화면에 .. 더보기
당신이 나에 대해 알고 싶어하지 않던 50가지 이 담배꽁초, 질서 정연한 배치로 보아 분명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는 것 같기는 하다. 그런데 금연 캠페인이라 하기에는 덜 무섭고, 광고라 하기에는 딱히 먹음직스러워 보이지 않는다. 관리 상태가 너무 깨끗해 범죄 현장의 증거물 같지도 않다. 그렇다면 도대체 이 사진의 정체가 뭘까. 바로 사진가 페리트 쿠야스가 하루 동안 피운 담배의 총량이다. 각 꽁초 밑에는 자그맣게 담배를 피운 시간까지 적어 놓았다. 집과 작업실을 오가며 두 종류의 담배를 피운 이 남자는 아침 7시5분22초를 시작으로 그 다음날 3시35분27초까지 무려 36개비를 피워댔다. 반복적으로 길어졌다 짧아졌다 하는 꽁초의 길이는 몇 모금만 빨고 장초로 남겨 놓은 뒤, 다시 불을 붙여 마지막까지 피우는 그의 독특한 버릇마저 눈치채게 만든다. 굳.. 더보기
난센 여권 “아직 얼마 동안은 빛이 우리 가운데 있을 것이다.” 디자이너 그룹 ‘일상의 실천’이 테이크아웃드로잉에서 열렸던 ‘난민’에 대한 프로젝트 에 참여하면서 난민의 현실을 표현하기 위해 선택한 문장이다. ‘난센 여권’은 난민을 위한 신분증으로, 탐험가이자 해양학자이면서 난민 구제 활동에 힘쓴 프리드쇼프 난센이 국제연맹에 발의해 1922년 도입되었다. 1942년에는 52개국 정부가 난센 여권을 승인해, 국적 없이 떠돌던 난민들이 난센 여권을 들고 원하는 나라로 이주할 수 있었다. 한국 사회에도 난민이 있지만, 우리는 그 사실을 잘 알아차리지 못한다. 은 사회의 약자인 난민에 대한 관심을 환기시키는 예술프로젝트였다. 프로젝트에 참여한 난민들은 자신의 삶을 대변할 수 있는 색을 선택하고, 그 색을 매개로 자신의 개.. 더보기
[사진 속으로]텐슬리스 하늘색 벽을 넝쿨 뿌리가 온통 휘감았다. 계절이 기우는 것인지 생명이 저무는 것인지 넝쿨 색은 시들어 배경의 상큼함을 더욱 무색하게 한다. 깨져버린 창문은 쓸쓸함에 더해 스산한 기운마저 풍긴다. 그 앞 거칠게 가지를 뻗은 나무는 바람의 방향을 짐작하게 한다. 길들여지지 않은 초록 가지들이 뿜어내는 생명력에 눈을 고정시키려는 순간 죽은 염소의 머리뼈가 우리를 바라본다. 도대체 죽음을 기억하라는 것인지 살아 있음을 축복하라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함. 사진 속에는 죽음과 생명이, 자연과 파괴가 함께 뒤엉킨다. 더없이 자극적인 색과 장면에 홀려 절대 들어오면 안 되는 금단의 땅에 들어선 듯한 불안감 속에서 바라보면 바라볼수록 미궁에 빠질 뿐이다. 박형근이 2004년 이후 지속적으로 내놓은 ‘텐슬리스’ 연작은.. 더보기
태권도, 내 손과 발로 길을 만들다 마음과 몸의 단련은 하나다. 마음의 수양은 몸의 단련으로 완성된다. 학수고대하던 태권도 수련을 시작했다. 태권도 사범께서 태권도는 발을 움직이는 ‘태(跆)’와 손을 움직이는 ‘권(拳)’으로 길(道)을 연다는 의미라고 했다. 내 손과 발로 길을 연다는 삶의 태도에 도복을 여며본다. 태권도는 개인의 심신단련뿐만 아니라 문화로서 무예(武藝)라는 것을 새삼 깨닫는다. 무예의 기본은 예의다. 상대방과 정정당당하게 대결하고, 승패에 관계없이 예를 갖추는 삶의 기본을 몸에 익혀본다. 태권도를 배우는 것은 어린 시절 보던 애니메이션 (1977) 덕분이다. 파란해골 13호가 세계 핵물리학자 회의가 열리는 수중공원을 공격하고, 장박사를 납치해 지구의 왕이 되려는 음모를 꾸민다. 태권동자 마루치와 아라치가 파란해골 13호와.. 더보기
낙산돌 대학로와 동대문 일대에 걸쳐 있는 낙산은 전망이 좋기로 유명하다. 전망이 좋다는 건 수고롭게 올라야 할 만큼 높다는 뜻이다. 요즘에는 공원으로도 조성해 등반이 필요 없을 것 같은 착각에 빠지게 하지만, 어쨌거나 본래 이름은 낙타 모양을 한 ‘산’이다. 그러니 도성이 세워지기 훨씬 전부터 우뚝 솟아 있던 서울의 지리적 터줏대감이기도 하다. 변상환은 어느 날 이 낙산 아래 창신동으로 이사를 왔다. 그는 창신동 주민이 되기 전부터도 돌과 친한 작가였다. 그는 우리의 시각 정보에 대한 유쾌한 반전을 꾀하는데 예를 들면 붕어빵이나 고무장갑, 소주잔 같은 익숙한 사물을 시멘트로 굳혀 화석처럼 만드는 식이다. 그에게 연약하고 부식될 것 같은 일상의 물건을 시멘트로 굳힌다는 것은 단단하고 강한 생명력을 부여하는 과정이.. 더보기
국제감각과 문화영토 국제감각이란 세상을 보는 관점이자 힘이다. 나와 관련된 세상이다. 문화인식이 반영된다는 점에서 문화영토다. 세계인식으로 힘의 균형을 잡고, 문화인식으로 감성의 조화를 기른다. 세계지도는 지리지인 동시에 세계인식을 반영한다. 우리나라가 그려낸 세계지도로 무엇이 있을까? 1402년 조선의 태종은 조선건국 3년차에 세계지도인 ‘혼일강리역대국도지도’를 제작하게 했다. 이 지도는 현존하는 세계지도 중에서도 그 중요성이 주목받는다. 이탈리아의 콜럼버스가 아시아의 인도로 가기 위해 탐험을 떠난 것이 1492년이라는 것을 떠올리면, 얼마나 일찍 제작된 세계지도인가를 알 수 있다. 15세기 초 조선, 중국, 일본의 동아시아뿐만 아니라 유럽, 중동, 아프리카대륙까지 포함시켰다는 점에서 역사적 가치가 높다. 아쉽게도 원본은.. 더보기
동굴 금값이 비싸다. 김익현은 IMF 외환위기 때 금 모으기 방송을 통해 이 반짝이는 금붙이를 처음 보았다. 나랏빚을 갚겠다고 장롱 속 돌 반지를 꺼내들고 긴 행렬을 이룬 모습은 진풍경이기는 했다. 당시 이 금 모으기를 둘러싼 의견은 분분했는데, 이웃이든 나라든 어려움에 처하면 황금도 기꺼이 내놓는 특유의 미덕이라든지, 나라가 잘못한 살림을 백성이 해결하게 만드는 대국민 이벤트라는 식이었다. 도대체 금이 무엇이기에 빚더미에 빠진 나라마저도 구하는 것일까. 금 모으기 방송을 보고 자란 김익현이 훗날 사진가가 되어 이 반짝이는 것을 향한 욕망의 뿌리를 찾다 도달한 곳은 금은방이 아니라 금을 채굴하던 광산이었다. 우리나라에도 금광이 많았다. 우리 시대에 금 모으기 열풍이 있었다면 일제강점기는 금광 개발에 미친 시대.. 더보기
멀리서 오는 친구를 가졌는가? 우정을 생각한다. 한 서류에 친한 친구 두 명을 쓰는 칸이 있었다. 누구를 쓸까? 몇몇 얼굴이 떠올랐다. 고등학교 친구 한 명과 늘 변함없이 지지해주는 대학선배의 이름을 썼다. 잠시 나는 그들에게 좋은 친구일까라고 아득한 심연에 빠졌다. 논어는 삶에서 가장 소중한 세 가지 감정으로 시작한다. 공부의 기쁨, 우정의 즐거움, 인정받지 못한 노여움이다. 공자는 배우면 기쁘고, 멀리서 친구가 찾아오면 즐겁고, 남에게 인정받지 못해도 노여워하지 않는다면 군자라고 했다. 기쁨은 나로부터, 즐거움은 우정에서, 노여움은 타인과의 관계에서 나온다. 우정은 소리를 넘어선 울림이다. 통일신라의 최치원은 선승 무염(無染)을 위해 비문을 썼다. 그는 무염을 회상하며 도연명이 즐겨 말한 ‘줄 없는 거문고’라는 ‘무현의 금’을 인.. 더보기
수건 이 낡은 넉 장의 수건 앞에서 느끼는 숙연함의 정체는 도대체 무엇인가. 여러 번 빨아서 두께는 얇아졌고, 빨수록 물때가 진해져서 더 이상 깨끗해질 기미란 없어 보이는 초라한 면 헝겊. 그런데도 그것은 몸을 바짝 말린 채, 단아하게 각을 잡고 있다. 애초 내세울 자존심이랄 것도 딱히 없었다는 듯 서로에게 의지해 포개져 있는 모습은 오히려 저마다의 존재감마저 돋보이게 한다. 평범하기 그지없는 이 사물 앞에서 피부가 얇아진 노년의 육신을 느끼거나 그 육신이 거쳐온 시간 따위를 생각하는 것은 지나친 과장일까. 수수하면서도 까닭 모르게 눈에 밟히는 이런 사진들을 얻기 위해 김수강은 오랫동안 복잡한 프린트 기법을 고수해왔다. 검프린트라 불리는 이 기법은 판화지 위에 조색한 안료를 바르고 필름에 빛을 쪼인 뒤 물 속.. 더보기
행운감수성 운명은 친절할까? 삶의 순간마다 천사들이 나를 돕고 있다. 소소한 행운들을 잘 알아차리는 감성이 행운감수성이다. 금방 도착하는 지하철, 때마침 맑은 날씨, 좋아하는 음악이 라디오에서 나올 때, 별것 아닌 일들이 사실은 모두 행운이다. 알고 보면 허점투성이인 삶을 붉게 물들인다. 행운감수성은 작디작은 일마저 운이 좋다고 생각하면, 점점 운이 좋아지는 특이한 작동원리로 움직인다. 행운감수성은 평범한 나를 영화의 주인공으로 만들어 준다. 내 삶에 배경음악을 틀 것인가는 내 몫이다. 불교에서 음악을 관장하는 신인 건달바(Gandhava)는 향을 먹고 살며 할랑할랑하게 나타난다. 천상과 지상의 사이에서 옷자락을 바람에 날리며 음악을 들려줄 때, 아름다움의 행운을 알아채는 것이 감성이다. 백제 용봉향로에서 음악으로.. 더보기
싸움 연필 공장을 개조했으나 여전히 창고나 다름없는 건물에서 재수를 하던 늦봄, 친구가 찾아왔다. 신촌에서 대학을 다니기 시작한 친구는 말수 없던 평소와 달리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그날 친구는 대화의 절반을 소개팅이 아니라 강경대의 죽음과 그 뒤 이어진 대규모 규탄 집회에 대한 내용으로 채웠다. 말 속에서 최루탄 냄새가 풍겼다. 친구가 다녀간 뒤로 운동권의 거듭된 분신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듬해 신입생이 되어 마주한 대학가에는 단순히 시위만 있지 않았다. 대동제는 1987년 민주화 정신 계승이라는 말로 긴장감이 넘쳤으나 동시에 패배주의와 X세대라는 말도 등장했다. 운동을 하던 선배들이 각종 고시를 준비하는 일도 더는 낯설지 않았다. 신념에 찬 운동권의 등장으로 시작해 애매한 남편 찾기로 막을 내린 은 우리가.. 더보기
지옥과 이슬 한 모금의 이슬이 소중한 까닭은 삶이 지옥이 아닌 적이 없어서다. 사람은 죽음을 피하지 못하는 유한한 생명체다. 삶은 생명의 기쁨인 동시에 사멸의 고통이다. 고통이 강할수록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서 이상향을 갈망한다. 감로도(甘露圖)는 지옥에서 어머니를 구하려는 강렬한 자식의 마음이다. 목련존자가 아귀도에서 먹지 못하는 고통에 빠진 어머니를 구하기 위해 부처에게 구원의 방법을 물은 내용을 그린 그림이다. 엄격한 유교사회 조선에서도 감로도와 같은 불교회화가 허용된 것은 이런 효심 때문일까. 구원의 태도란 어머니를 구하는 마음으로 대중의 고통을 구원한다는 뜻이 숨어있으리라. 18세기에 그려진 감로도는 중앙에 커다란 아귀가 있고, 하단에는 고통받는 사람들의 모습이, 상단에는 구원자가 등장한다. 왜 이렇게 아귀를.. 더보기
노마드 아마 설이라도 다가오는 모양이다. 닭 한 마리씩을 챙긴 장 보따리가 꽤 묵직하다. 아낙의 치마 무늬마저 지울 기세로 눈발은 더 굵어진다. 밤새 쌓이고 나면 봄이 올 때까지 쉬 녹지 않을지도 모른다. 1983년 겨울. 지금 봐도 그 시절 옷차림은 꽤 시리다. 여름 빼고는 철을 가리지 않고 쓰던 나일론 스카프에 장날이라 챙겨 입었을 면빌로드 치마로 겨울을 나던 때였다. 장갑을 끼는 둥 마는 둥 시린 손을 호주머니에 꽂고도 머리에 인 보따리는 흔들림이 없다. 눈이 와서 해가 더 빨리 지는 오후, 불현듯 마중 나온 카메라 앞에서 쑥스러운 듯 웃는 표정은 코끝 찡하게 춥던 그 시절을 그립게 만든다. 더불어 인적 없는 그 자리에서 유일하게 사진 속에 담기지 못한 사진가까지도. 이 사진은 고 권태균 선생의 1주기를 .. 더보기
옛 서울역사를 바라보며 2004년 현대식으로 지어진 새 역사의 등장으로 그간 우리 민족의 희로애락을 한몸에 담아왔던 옛 서울역사가 본연의 기능을 뒤로하고 이제는 문화공간으로 변신하였다. 1947년까지 경성역으로 불리던 옛 서울역사는 1925년 일본인의 설계로 완공되었다. 당시 “동양 제1역은 교토역, 제2역은 경성역”이라 할 정도로 옛 서울역사는 규모가 큰 역사였다. 건물의 양식은 중앙 돔을 중심으로 비례가 중시된 좌우 대칭의 르네상스 양식이 주를 이루고 있다. 또한 중앙에 놓인 돔은 사각형 평면 위에 원형의 돔을 얹는 형식(펜덴티브 돔)이 특징인 비잔틴 양식으로 되어 있다. 돔 네 귀퉁이에 세워져 있는 탑은 장식적 요소가 많은 바로크 양식의 기법이 더해져 결국 옛 서울역사는 여러 가지 양식이 혼합된 절충주의 양식으로 정의된다.. 더보기
회복탄력성과 지속가능성 우리는 혼자가 아니며, 마음을 합쳐서 같이 어려움을 이겨나가는 지혜가 한국미학이다. 어려움을 이겨내는 회복탄력성이 삶을 풍부하게 해준다. 크고 작은 어려움은 누구에게나 닥친다. 회복탄력성이란 삶의 어려움을 견디어 다시 일어나는 힘이다. 심지어 사람은 고난을 겪고 나서 마음이 더욱 풍부해진다고 한다. 회복탄력성은 생존과 진화의 원동력이다. 조선 후기 임희지(林熙之·1765~?)의 난초 그림을 본다. 그는 조선 말 중인 출신으로 중국어 번역을 담당하는 한역관이었다. 그는 중인이라는 신분의 한계로 높은 관직에 오를 수는 없었지만, 깨끗한 풍모를 지녔다고 지인에게 평가를 받았다. 그는 서울의 중인들과 인왕산 아래에 있는 옥류동의 송석원에서 결성한 문학 동아리인 송석원시사에 참가했다. 그의 행복은 벗들과 함께 나.. 더보기
세련된 사람 20년은 묵은 앨범에서 나온 듯한 뿌연 색의 이 사진. 에이라인 스커트에 꽃무늬 스카프, 실내에서도 착실히 고수한 선글라스까지 나름 멋을 부린 흔적이 역력하다. 작품 앞에서 기념으로 취한 포즈까지를 포함해 한때 우리는 이런 사진을 얻기 위해 꽤나 노력했다. 한껏 챙겨 입고 나서는 미술관 나들이는 얼마나 모던한 도시의 일상인가. 이런 날 똑딱이 카메라로 사진 한 방은 남겨야 도시인의 도리를 지키는 법이다. 그런데 가만히 보면 사진에 찍힌 날짜가 최근이다. 유통 기한이 한참 지난 것만 같은 이 사진은 사실 최근에 생산되었다. 예전에는 날짜가 찍히는 사진기야말로 신식이었는데 이제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촌스럽다는 인상을 풍긴다. 발품을 팔아 구한 옛날 옷들로 치장한 채 스스로가 사진 속 모델이 된 전은정은 일부.. 더보기
신나는 모험 삶에서 몇 번이나 모험을 할까. 지금은 고독의 성찰보다 생존의 야성을 되살릴 때다. 강렬한 야성의 활력소는 호기심과 모험심이다. 때로는 역경에 부딪혀 살아남고자 하는 절박함은 생명의지를 선사한다. 현재 한국사회에서 ‘모험을 한다’는 것은 미지의 세계를 향한 탐험이라기보다 수직상승을 향한 도전을 의미하는 것은 아닌지 되돌아보자. (트리나 폴러스·시공사)이라는 책에서 위로만 오르려면 욕망은 결국 지금을 잃어버린다고 경고한다. 신나는 모험은 수직상승보다 사방으로 뛰어다니는 호기심으로 가득한 탐험의 삶이다. 신라 5세기 무덤에서 봉황 머리 모양 유리병과 유리잔이 출토되었다. 누가 가지고 왔을까? 유리병 모양은 오이노코에(Oinochoe)라고 불리는 그리스 로마의 병과 형태가 같다. 소담하게 부풀어 오르는 꽃봉오.. 더보기
여기 그리고 저 멀리 매년 11월 둘째주 파리에서 열리는 파리포토는 사진을 거래하는 최대의 아트마켓이다. 예술은 돈과 거리를 둘 것처럼 고상해 보이지만, 사실 돈으로 거래할 수 있는 가장 사치스러운 상품이기도 하다. 실제로 파리포토를 이루는 모든 것들은 화려하다. 근사한 장소, 감각적으로 꾸며 놓은 간이 전시 부스, 개성 넘치는 사람, 갖고 싶은 작품들. 이 틈에 섞이는 순간 예술이면서도 상품이려고 하는 사진의 이중성으로 인해 마음은 몹시 복잡해진다. 특히나 그런 모순 속에 기대어 사는 스스로를 발견할 때, 고상한 분위기 속에서도 불현듯 피로감이 인다. 펜티 사말라티의 사진을 처음 접한 건 수년 전 파리포토의 그 혼돈스러움 속에서였다. 세련된 액자로 장식한 대형 프린트 사이에서 그의 아날로그 사진은 유행에는 아랑곳하지 않은 ..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