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터데스크 관리자

도움말
닫기
적용하기   첫페이지 만들기

태터데스크 메시지

저장하였습니다.

퀴즈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화가의 작업실은 어디일까?

·

·

·

·

·

·

·

·

·

정답은

바로 여기.

 

광주광역시 동구 지산동 275번지에 있는
() 오지호(19051982) 화백의 작업실이다.
정확히 말하면, () 오지호·오승윤 부자의 작업실이다.
왜냐하면 이 작업실은 1953년 오지호 화백이 지었지만 아들 오승윤(19392006)이 물려받아 줄곧 사용했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이젤 주변에는 오지호·오승윤 부자가 쓰던 색색의 유화물감이 오랜 세월의 더께처럼 남아있다
.




파스텔 빛 물감은 아버지 오지호
, 조금 진한 색은 아들 오승윤의 것이란다.

사실, 근대 이후 수많은 미술가들이 작업실을 사용했지만, 그들의 사후(死後) 작업실이 온전히 보존되는 경우는 거의 없었다. 일제강점기 조선미술전람회(‘선전으로 약칭)의 최고 스타작가였던 대구출신 화가 이인성(19121950)은 대구 남산병원의 병원장이었던 장인이 병원 3층에 근사한 작업실을 마련해 주었지만 지금은 사진자료로만 확인할 수 있을 뿐, 아예 건물 자체가 사라져 버렸다. 또 근대기에 활동했던 화가 김두한의 예산 작업실은 당시로는 드물게 2층으로 된 작업실 전용 양옥 건물이었지만, 지금은 노래방으로 사용되고 있다고 한다. 따라서 현재 남한 땅에 온전히 남아있는 작가의 작업실로는 오지호·오승윤 부자의 작업실이 가장 오래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더욱이 이곳은 1953년 당시 모습 그대로, 원형을 유지하고 있어서 더욱 가치가 높다.

 


작업실에 놓여 있는 옛 작업실 사진만 봐도 지붕색만 바뀌었을 뿐
,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작업실 안에 있는 물건들은 오지호·오승윤 부자의 것이 섞여 있는데, 이젤은 아들, 의자는 아버지 것이라고.




내부를 꼼꼼히 살펴보면, 3대로 이어지는 화맥(畵脈)을 찾을 수도 있다.
커튼 위에 있는 항아리를 그린 그림은 오승윤 화백의 아들 병재 씨가 미술대학에 입학하면서 그린 것이라고.

 

 


위 사진에서 커튼 왼쪽이 오지호 화백, 커튼 오른쪽이 아들 오승윤 씨의 사진이다.

대략 6평 정도의 이 작업실은 몇 가지 구조적인 특징을 갖고 있다.
남쪽으로 난 창문은 두꺼운 커튼을 드리워 완전히 가렸다.
남쪽 빛은 워낙 변화무쌍해서 빛의 간섭이 심하기 때문이다.
대신 채광이 일정한 북쪽 빛을 살렸다.
어두운 낮 시간을 보완하기 위해 커튼 없이 북쪽으로 창을 크게 내고 지붕 일부를 뚫어 450cm 폭의 투명유리를 끼웠다. 북쪽의 큰 창은 반투명 유리를 끼워 빛만 들일 뿐, 내부를 밖에서 볼 수 없게 했다.
과연 빛에 민감한 인상파 화가다운 작업실이라 하겠다.

 

 


40년이 넘는 세월동안 오지호-오승윤 화백의 수많은 작품들이 바로 이곳에서 탄생되었다.
워낙 보존이 잘 되어 있어, 두 작가의 체온과 손길이 아직도 그대로 느껴지는 듯하다.
 




작업실 바로 맞은편은 3대가 살던 초가집이다.



오지호 가옥(吳之湖 家屋)’이라고 불리는 이 집은 원래 조선대학교의 관사로서,
조선대 회화과 초대교수가 되어 광주에 정착한 오지호 선생이 1949년부터 거처로 삼았다
.
(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이 소장하고 있는 대표작 남향집(1939)의 배경으로 종종 오인받곤 하지만,남향집은 그가 송도고보 교사 시절에 그린 작품으로, 이 초가집과는 관계가 없다
.)
그의 사후 아들 오승윤이 매입해 현재는 미망인 이상실 여사가 거주하면서 직접 관리하고 있다
.
초가집에 반해 결혼을 결심했다고 할 정도로, 이 집에  대한 애정이 남다르다.
 

  
 
 
 
 


과연 뒤뜰의 장독대와 소박한 집 모양새가 묘하게 사람을 잡아끄는 매력이 있다
.

사실 아무리 초가집이라곤 하지만 그 유명한 오지호 화백이 살던 곳인데...’라는 생각을 버릴 수 없었다.
그래서 제작년 이곳을 처음 방문했을 때, 말 그대로 초가 ‘4
인 것을 보고 적잖이 놀랐더랬다.
사람이 많으면 많은대로, 적으면 적은대로 모두 넉넉하게 품어내는 한옥의 신기한 능력을 익히 알고는 있었지만,
여기서 어떻게 3대가 옹기종기 살았는지, 방문객도 끊이지 않았을 텐데... 조금 의아스럽긴 하더라. 


현재 이곳은 광주기념물 제6호로 지정되어 있다.
하지만
대문 옆에 붙은 알림문구에서 알 수 있듯이, 일반인 출입금지다.



나는 다행히 매우 강력한 빽(?)이 있어서 어렵지 않게 방문할 수 있었다. ^^
제작년 광주비엔날레 취재차 갔을 때 처음 가보고, 이번에도 역시 비엔날레를 핑계로 내려가 
초가집과 작업실을 또 보고 싶다는 이유를 댔지만,
사실은...
이 집 무화과 맛을 잊지 못해서였다
. (이런, 잿밥에 눈이 먼...-_-;;;)

웬 무화과인고 하면, 바로 초가집 뒷편 작은 텃밭에 심은 무화과나무에서 따온 녀석들이다.
꽃이 없어서 무화과(無花果)라는 이름이 붙은 이 맛있는 열매는 정말 염치고 뭐고 없이 자동적으로 손을 뻗게 한다.
술안주로 나오는 달디 단 말린 무화과가 아니라 나무에서 갓 딴 싱싱하고 달콤한 무화과!

 
 



연한 껍질을 살살 벗겨서 한 입 크게 베어 물면~ 흐물흐물 푸짐한 과육이 허물어지면서 입 안 가득 달콤한 여운을 남긴다.  제대로 씹을 겨를도 없이 미끄덩~ 꿀꺽 자꾸만 목구멍으로 넘어간다. 아, 이렇게 품위 있는 단 맛이란~
올해는 먹을 복이 더해
, 말로만 듣던 동부 소를 넣은 모시잎송편까지! 'ㅂ'
정말이지 세상 부러울 게 없는 다과상이었다고나 할까. ㅎㅎ

화가의 오랜 손길이 남아있는 작업실, 따뜻한 숨결과 추억이 깃든 초가집, 그리고 달콤한 무화과와 따뜻한 차 한 잔의 여유... 오지호 화백의 그림처럼 부드럽고 포근한 가을 빛이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주는, 그런 평화로운 오후였다. 

Posted by Kh-art
2. 화가들 상인을 겸하다-최초의 화상은 화가



 미켈란젤로(Michelangelo di Lodovico Buonarroti Simoni,1475~1564)가 시스틴 성당에서 천지창조를 그리는 과정을 그린 영화 <고뇌와 절정>(The Agony and the Ecstasy, 1965)을 보면 그림을 주문한 율리우스 2세와 다투는 장면이 가끔 등장한다. 


찰턴 헤스턴이 미켈란젤로로 분한 <고뇌와 절정>. 이 작품에는 시스틴 성당 천장화를 주문한 율리유수 2세와 미켈란젤로가 싸우는 장면이 등장하곤 한다.


다툼의 원인은 돈 때문이었다. 작업에 필요한 대금을 계약대로 주지 않고 지급일 넘기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요즘 우리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일이지만 인문학이 절정에 이르고 문화예술에 대한 지원과 후원이 가장 융성했던 르네상스 기에도 이런 일은 있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화가들은 자신이 좋아하는 그림을 그려놓고 다음 소장가나 컬렉터를 찾는 대신 당시의 화가들은 주문제작을 했기 때문이다. 즉 화가들의 자유의지로 그림을 그리기 보다는 주문에 의해 그림을 그렸고 주문자는 특정한 색을 지정하고, 초상화의 경우 어떤 모습으로 그려달라는 것을 계약서에 명시했던 것이다. 


 따라서 미술품은 오늘날과는 달리 철저한 주문제작에 의한 상품이었고 여타의 공방에 물건을 주문하는 것과 다를 것이 없었다. 특히 초상화 제작이 주를 이루었던 당시는 요즘의 맞춤양복을 주문하는 과정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특히 계약조건에서 화가들을 괴롭힌 것은 작품이 주문자의 마음에 들지 않을 경우 그림을 인수하지 않을 수 있으며 자급한 경비도 돌려주어야 한다는 조항이었다. 


또 계약서에 의하면 당시 귀했던 금이나 금색을 사용한다던가, 울트라마린 블루를 사용하는 경우 특별히 몇 그램을 사용한다고 명시할 정도였다. 왜냐면 울트라마린 블루의 경우 동방에서 수입한 준보석인 청금석을 간 후 그 가루를 여러 번 물에 녹여 추출해내는 고급의 안료로 매우 고가였기 때문이다. 


또 사실적인 화풍으로 르네상스를 강타한 카라바조(Michelangelo da Caravaggio,1573~ 1610)의 삶을 돌아보면 당시 미술품 유통구조를 대강이나 그려볼 수 있다.


1595년, 25세가 된 카라바조는 조수생활을 청산하고 독자적으로 자신의 스튜디오를 연다. 그의 그림을 팔아줄 마에스트로 발렌티노(Maestro Valentino)라는 화상을 만난 때문이다. 어렵게 그림을 기던 그는 화상 발렌티노를 통해 교황의 실력자인 고위성직자 프란체스코 델 몬테(Francesco Maria del Monte, 1549~1626)추기경의 눈에 들어 그의 처소에 아틀리에를 마련하고 그림을 그리게 되었다. 타고난 다혈질과 자신의 작품에 대한 과도한 자신감은 내내 그를 괴롭혔지만 그의 그림을 좋아하는 컬렉터들 덕분에 다행히 연명할 수 있었다. 

카라바조, <성 바울의 개종(Conversion of St. Paul or The Conversion on the way to Damascus)>(1600~01), 캔버스에 유화, 230x175cm, 이탈리아 로마 산타 마리아 델 포폴로 성당


특히 그의 대표작으로 알려진 <성 바울의 개종>의 수난은 당시 화가들의 처지를 잘 설명해주는 일화이다. 작품을 주문받은 카라바조는 자신의 방식으로 말에서 떨어지는 바울을 그렸으나 성당 측은 당시의 성화들과는 거리가 먼 너무나 인간적인 바울을 보고 성스럽지 못하다는 이유로 인수를 거부했다

이 일로 <성 바울의 개종(초판)>은 성당을 책임지고 있던 사네시오 추기경(Cardinal Sannesio)이 작품가를 지불하고 소장하게 되었고 현재는 영화배우 톰 크루즈와 케이티 홈즈가 결혼식을 올린 로마 근교의 카스텔로 오데스칼치 성에 소장되어있다. 


화가면서 화상이었던 루이스달과 렘브란트 

그의 역동적 화면 구성과 테네브리즘(Tenebrism)[각주:1]을 계승한 17C의 렘브란트, 루벤스 등은 그림을 파는 재주에서는 카라바조를 능가하는 인물이었다. 

이미 바로크시대(1600∼1700년대 중반)로 접어들면서 화가들은 중산층과 시민들에게 판매할 목적으로 작품을 제작하기 시작했던 시기로  이 시기 대표적인 화가들인 루벤스(Peter Paul Rubens, 1577∼1640), 렘브란트(Rembrandt Harmenszoon van Rijn, 1606∼1669)는 물론 루이스달(Salomon van Ruysdael, 1600,1603?~1670), 호가스(William Hogarth, 1697∼1764)등은 화가로서의 재주도 출중했을 뿐만 아니라  화상으로서의 재주를 겸비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기도 했다.


루이스달(Salomon_van_Ruisdael), <Ferry on a River>(1649), 101.5x134.8cm, 미국 워싱턴DC National Gallery of Art

외교관으로 외국을 떠돈 루벤스는  헤롯왕의 영아학살을 주제로 한 <Massacre of the innocents>(1611-2).

그는 외국 귀족들의 취향을 파악해, 역사화를 주로 그렸다. 그림은 공방에서 대량제작했다. 


 루벤스는 화가이자 외교관이었으므로 이탈리아, 프랑스, 영국에서 체류하는 시간이 많아 귀족들과 친분이 있었다. 따라서 그는 그들의 취향을 간파하고 주로 귀족들의 일대기나 위대함을 주제로 한 역사화를 그렸다. 게다가 작업의 효율성을 위해 분업 방식을 통해 다량제작방식을 운용했다. 우선 루벤스가 밑그림을 그리면 제자들이 색칠을 하고 루벤스가 마무리를 하는 방식을 채택했다. 이 경우 루벤스는 자신이 그렸다는 의미로 ‘Rubens Pinxit’라는 사인을 남겼다. 또 풍속화를 그리기 위해서는 풍속화를 잘 그리는 브로웨르(Adriaen Brouwer , 1605~1638)가 그린 그림을 사 그 위에 더 그려 자신의 그림으로 팔거나 풍속화에 재주가 있는 다른 화가의 제자나 또 다른 화가들을 고용해서 함께 작업을 하기도 했다. 

<카드놀이를 하는 농민들>(1630~40)브로웨르는 브라우버르로 불리기도 하는데 플랑드르 지방의 농민들의 삶을 주제로 그림을 그렸다.

브로웨르<술에 취한 농민 The bitter drunk>


 렘브란트는 리히텐에서 암스테르담으로 이주하면서 경쟁이 심한 풍속화를 피해 경쟁이 비교적 덜 한 초상화분야를 선택해서 화상 헨드릭 반 율렌버그 (Hendrick van Uylenburgh, c. 1587~1661) 의 중개로 명성을 얻은 다음 역사화, 단체 초상화, 풍경화 등으로 분야를 넓혔다. 


렘브란트, <The night  watch(혹은 '프란스 바닝 코크와 빌렘 반 라위텐부르흐 민병대)>(1642), 캔버스에 오일, 
363x437cm, 네덜란드 라익스 미술관 Rijksmuseum 소장


렘브란트는 자신의 자화상도 여러 점 남겼다. 왼쪽은 1640년 제작한 자화상, 오른쪽은 1669년 제작한 자화상. 



 영국의 화가 호가스는 화가나 판화가로서 제대로 된 실력을 갖추지 못했었다. 돈을 내고 배울 형편도 되지 못했다.시계 기능공으로서 은세공 기술을 익혀 판화가로 특히 인기가 많은 풍자적 판화로 인기를 얻으며 부호의 대열에 올라설 수 있었다. 


화상의 등장: 플랑드르 지역의 경제적 안정과 그림의 수요 증가

특히 플랑드르 지방의 17세기는 소위 ‘황금시대’(Golden Age)라 일컬어지는 경제적 성장은 렘브란트 혹은 루이스달과 같은 재주 있는 화가들의 지위만을 상승시킨 화가들의 사회적 지위를 높이는데 일조했다. 하지만 유명 화가들은 늘 금전적으로 어려웠다. 그것은 수요 부족 때문이 아니라 수요가 넘쳐난 때문이었다.


 해양왕국 스페인의 뒤를 이어 대양을 장악한 플랑드르 즉 오늘날의 네덜란드는 많은 중산층들이 생겨나고 그림에 대한 수요 또한 폭증하였다. 이렇게 수요가 많아지자 지배자들은 미술가의 자격제한을 철폐하고 미술가 길드가  해체되면서 너도나도 그림을 그리는 화가로 등장했고 바야흐로 화가들의 범람시대를 맞게 되면서 그림의 공급과잉으로 이어졌기 때문이다. 이 당시 플랑드르 지방에는 7만점의 그림이 시장에 나왔으며 어떤 그림이건 소유를 원하는 사람들의 손으로 들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시장에 나온 그림에 대해 질을 담보할 만한 장치가 필요했고 그 결과 그림에 대한 전문지식을 갖춘 화상을 신뢰하고 그들의 신용을 담보로 작품을 구입하려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이즈음 또 다른 변화가 화상들의 영향력을 확대시켰는데 그것은 화가와 화상이 가입되어있는 길드의 미술품에 대한 수요는 고정되어있었다. 그 이유는 가격이 안정되기 위해서는 공급이 수요와 같아야 한다는 가정에서 출발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들은 미술품의 공개적인 매매를 확하게 반대했다. 공개매매는 통제 할 수 없는 미술품의 공급과잉으로 나타나 가격하락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Salomon van Ruisdael, <View of Deventer Seen from the North-West>(1657), Oil on oak, 
52x76cm, 런던 National Gallery


하지만 그와 반대로 풍경화가 루이스달를 중심으로 한 하를렘(Haarlem)의 화가집단은 공개매매 즉 경매방식을 선택해서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끌어내 수요를 촉진하고자 했다. 그리고 이들은 1644년 하를렘 시장으로부터 그림을 공개판매 할 수 있는 허가를 얻어낼 수 있었다. 드디어 미술품에 대한 수요를 자극함으로서 미술시장의 확대를 꾀하는 판매기법이 된 것이다. 


미술 시장의 출현과 발달

그리고 길드에 의해서 통제되던 미술시장의 시장적 행위들이 힘을 잃게 되면서 미술시장은 역동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이것은 마치 오늘날 경매결과가 그림을 소장할 의사가 없는 사람들에게도 관심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아무튼 이렇게 미술시장이 급증하면서 새로운 판매방식과 기술을 개발하게 되었고 점차 전문적인 화상들이 등장하기 시작했으며 이들에 의해 미술시장은 수 백 년 동안 발전을 거듭했다.  


화가들은 이즈음 작품 제작단가 절감방안을 연구하여 실천에 옮겼을 뿐 만 아니라 자신의 안목을 바탕으로 중요한 미술품이나 골동품 등을 사두었다 되파는 방식으로 부를 창조하기도 했다. 사실 렘브란트가 말년에 어렵게 보내게 된 것도 미리 사논 작품에 문제가 생겨 빛을 냈던 것이 원인이었다. 



*화가보다 그림중개상으로 더 열심히 활동했던 베르메르. 

왼쪽부터 차례대로 <A girl with pearl earing> 1665. <The Music Lesson(또는 A Lady at the Virginals with a Gentleman> ca.1662-5 <The Milkmaid>1658


또 유명한 베르메르(Johannes Vermeer, 1632~1675)도 자신의 그림중개인이 있었지만 스스로 화가보다는 중개인으로서 시간을 더 할애했다고 전해진다. 

인류역사상 ‘주식회사’를 처음으로 고안해 낸 네덜란드인들이 그림을 파는 전문 화상의 길도 열어간 것을 보면 역시 그들의 상재는 당 할 방법이 없는 것 같다. 


글/정준모(문화정책, 국민대 초빙교수)

  1. tenebrae는 어둠이라는 뜻의 라틴어로, 테네브리즘은 카라바조가 창안한 극적인 명암대조법을 말한다. 한 줄기 빛이 화면에 쏟아지고, 어두운 부분과 밝은 부분을 대비시켜 주제를 강조하는 것으로 렘브란트가 즐겨 사용했다. 이처럼 극적인 대비를 이루는 명암의 표현은 바로크 미술의 특징이기도 하다. [본문으로]
Posted by Kh-art
해발 1000미터의 산을 꼭대기까지 올라갔다가 내려왔다고 치자. 누군가가, "제자리로 돌아왔으니 결과는 0이군"이라고 말한다면 화가 날 것이다. 올라갔다 내려오느라  힘들었는데! 그렇다면 이번에는 선물을 싸들고 누군가에게 갔다고 치자. 선물을 받아야 할 사람이 극구 사양하면서 "마음만 받겠다"라고 딱 잘라 말해서 할 수 없이 그냥 들고 왔다. 이번에도 결과는 0인가? 물리적으로 보면 그렇다. 산에 올라갔다 온 것에 비해 별로 땀도 나지 않았다. 하지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은 아니다. 그런데 무슨 일이 일어난건가? 설명하기가 힘들다. 

이탈리아 작가 지아니 모티(Gianni Motti)의 작품 <기금전시(Funds Show)>에도 비슷한 종류의 아리송함이 있다. 이 작품의 모티브는 단순하다. 전시를 하기 위해서는 돈이 있어야 한다. 작품 제작비를 비롯해서 운송비, 설치비, 인건비 등 여러 항목의 예산이 필요하다. <기금전시>는 전시를 위해 미술관에서 작가에게 지불한 돈을 모두 현금으로 바꾸어 돈 그 자체를 작품으로 전시하는 작품이다.  다시 말해서, 전시장에 돈만 있고 다른 작품은 없다는 것이다. 

모티는 지난해 프랑스에서 열렸던 두 전시[Centre d’art contemporain de la Ferme du Buisson / Centre d’art la Synagogue de Delme 30 May – 13 September 2009 (Delme) / 10 April – 7 June 2009 (Ferme du Buisson)]에서 이 작품을 내놓았다. 애초 5천 달러를 받았는데 전시할 때는 환율 변동 때문에 6천4백 달러가 되었다고 한다. 작가는 이 돈들을 모두 1달러 짜리 지폐로 바뀌어 전시했다. 전시장 천정에 매달기도 하고 바닥에 뿌리기도 했다. 돈을 빨래처럼 나란히 줄에 매달아 놓기도 했다.


그리고 전시가 모두 끝난 이후 이 돈들을 미술관에 고스란히 돌려줬다. 그렇다면, 나간 돈이 고스란히 다시 돌아온 것이니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걸까? 산술적으로만 계산해보면 물론 그렇다. 미술관은 돈 한푼도 들이지 않고 전시를 했다. 작가는 돈을 전혀 쓰지 않고 작품을 전시했다. 결과는 0이다. 하지만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작가는 작품을 만들었으며 전시가 끝나고 미술관에 돈을 보태주기까지 했다. 미술관은 전시를 개최했고 돈을 돌려받기까지 했다. 많은 일이 일어났으니 결과는 0이라고 할 수 없다.   
 


투자와 생산이라는 자본주의의 원리에서 보면 들어간 것도 나온 것도 없지만, 그렇다고 자본주의의 원리를 벗어난 것도 아니다. 보통 미술관에서 전시를 개최하는 것은 자본주의와 무관한 것 같지만 그렇지 않다. 전시를 위해 작가에게 돈을 주는 것 역시 투자의 일종이며 작가는 그것을 바탕으로 부를 창출해야 한다. <기금전시>는 이렇게 자본주의 시스템을 전혀 위반하지 않고서도 그 시스템의 진실을 유머러스하게 폭로한다.   

<기금전시>는 지난 21일까지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열렸던 전시 <트릭스터가 세상을 만든다>(2010. 8. 31 - 11. 21)에서도 다른 버전으로 전시되었다. 이번에는 작품제작비로  800만원이 지급되었고 작가는 이를 8천개의 천원짜리 지폐로 바꾸어 바닥에 깔았다. 달러보다 확실히 더 감이 온다고나 할까. 의의로 천원짜리 8천장의 양은 얼마 되지 않는다.    

리움 미술관에서 열리는 전시 <미래의 기억들>(2010. 8. 26 - 2011.2. 13)에서도 '일어나지 않은 일'에 대한 작품이 있다. 김홍석의 <카메라 특정적-공공의 고백>과 <영문-공공의 고백>이 그것이다. 이 작품 역시 아주 단순하다. 두 대의 모니터가 설치돼 있고 두 개의 단채널 비디오 영상이 돌아가고 있다. 왼쪽에는 인물이 나오고, 오른쪽에는 영문 텍스트가 나온다.

왼쪽 영상의 인물은 어떤 젊은 여성이다. 얼굴이 클로즈업된 채로 등장하는데 시작부터 끝까지 카메라 각도가 바뀌지 않는다. 이 여성은 여러 작품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예를 들어 "지금부터 <자유의 광장>이라는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지금부터 <고독의 탑>이라는 작품에 대해 이야기하겠습니다" 이런 식이다. 그런데 정작 그 '작품'은 한번도 화면에 비치지 않는다. "<고독의 탑>은 1층은 유리로 되어 있고 지하는 콘크리트로 되어 있습니다..." 등등. 이제나 저제나 작품이 보일까 싶은데 영상은 그대로 끝나버린다.   

이 여성이 설명하고 있는 것은 실은 작가가 스케치한 8개의 공공조각 작품(<공공의 고백>)이다. 여성은 작가가 섭외한 배우이고, 작품을 설명한 '대본'을 준 뒤 연기를 부탁했다. 오른쪽 모니터에 영문으로 나오는 텍스트가 이 대본이다.

조각, 드로잉, 언어, 영상으로 이어지는 관계를 알면 더 흥미로운 작품이다. 하지만 이런 배경을 모르더라도(아니 어쩌면 배경을 모를때 더욱?), 단지 영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흥미로운 작품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기금전시>와 비슷하게, 이 작품은 '일어난 일'과 '일어나지 않은 일' 의 관계에 대해 생각해보게 만들기 때문이다. 

언어 속에서만 등장하는 '작품들'은 존재하지 않는걸까, 존재하는 걸까? 그 어떤 물질적 흔적도 없으니 존재하지 않는걸까. 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면, 관객이 언어를 통해 얻었던 느낌이나 이미지는 무엇일까. 아니, 언어 그 자체는 무엇일까. 언어 역시 단지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은 아닐까? 현대미술은 때로 이렇게 '어떤 것이 존재한다' '어떤 일이 일어났다'라는 단순한 말의 의미를 다시 곱씹어보게 만든다.

Posted by Kh-art

얼마전 막을 내린 광주 비엔날레. 막시밀리아노 지오니라는 스타 큐레이터가 총감독을 맡아서 맥락 풍부한 세련된 전시를 만들어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이번 비엔날레에는 서구 미술계의 이른바 '핫한' 스타 작가들이 꽤 참여해서 관심을 끌었는데, 기획자로도 활동하는 이탈리아 출신의 작가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과 올해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서른 네 살의 나이로 대대적인 개인전을 연 독일 작가(정확히 말하면 인도-독일 작가) 티노 세갈(Tino Sehgal)도 그런 작가들이다.

이 두 작가를 특별히 묶어서 거론하는 건 이번 광주 비엔날레에서 두 작가의 작품이 같은 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산전수전 다 겪은 관객들도 당황시킨 상당히 묘한 매치였다.  

우선 이것. 텅 빈 바닥에 티셔츠와 바지를 입은 젊은 여자가 누워서 춤 비슷한 걸 추고 있다. 아니, 말이 춤이지 바닥의 먼지를 죄다 휩쓸면서 이리저리 뒹굴고 있다는 표현이 더 맞을 듯하다. 아니 경련을 일으키면서 굴러다닌다고 해야 할까. 



살아있는 사람의 움직임이라고 보기에는 몸동작이 너무나 기묘하게 딱딱 단절적으로 끊어지기 때문에 사람이 아니라 내부 회로가 고장나서 제멋대로 움직이는 로보트나 인형 같다. 눈앞에 보고 있는 모양새가 너무나 이상하다보니 거의 모든 관객들은 그 앞에서  "정말 살아있는 사람 맞아?"하고 질문한다. 심지어 여자의 몸을 쿡 찔러 보기도 하고, 사람이냐 아니냐를 두고 설전까지 벌인다. 


이 작품을 본 뒤 고개를 다른 편으로 돌리면 여기엔 결코 덜 기묘하다고 말할 수 없는 또 다른 작품이 있다. 이번엔 흰 옷을 입고 갈색머리를 한 젊은 여자의 등이 보인다. 벽에 매달린 큰 관처럼 생긴 나무틀 안에 마치 예수처럼 손에 못이 박힌 채 매달려 있다. 손목과 팔목, 허리께엔 나무 부목 같은 것이 덧붙여져서 이 여자의 몸을 허공에 고정시키고 있다. 못박힌 손바닥이나 축 쳐진 머리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마치 핀이 꽂혀 있는 표본실의 나비 같은 느낌이 든다. 


관객들은 이 앞에서 "이거 진짜 사람은 아니지?"라는 질문을 또 한번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자세히 보면 못박힌 손바닥이 실제 사람이라면 있을 수 없는 각도로 꺾여저 있지만, 그런 것에 안심하기에는 전체적인 모양새가 너무나 살아있는 사람 같기 때문이다. 늘어진 맨발에 실감나게 때까지 끼어있어서 더 그런 느낌이 든다.  


첫번째 작품이 티노 세갈, 두번째 작품이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작품이다. 세갈의 작품은 정확히 말하면 바닥을 뒹구는 여자가 행하고 있는 몸짓 그 자체이다. 여자는 오디션을 통해 선발한 현대무용 전공 학생이며, 세갈의 작품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카텔란의 작품은 그의 다른 작품들이 그렇듯이, 진짜 같이 만든 극사실 조각이다. 

엄밀히 말하면 두 작품은 서로 연관이 없다. 다만 큐레이터에 의해 이렇게 쌍으로 배치된 것 뿐이다. 이 두 작품을 같은 작가의 것으로 착각한 관객들도 많을 것이다. 어쩌면 작가들 본인은 이런 혼돈스러운 배치를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큐레이터로서의 경험상 많은 작가들이 그렇다는 걸 알고 있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별도의 공간을 가지고 싶어한다.

하지만 묘한 것은 이렇게 나란히 놓으니 별도로 감상했을 때보다 확실히 생각할 거리가 많아진다는 것이다. 이 두 작품 앞에서 관객들은 똑같이 "이거 진짜 사람이야?"라는 질문을 던진다. 같은 질문이지만, 거기 담긴 의미는 사실 거의 정반대다. 세갈의 작품은 사람이 아닌 것 같고, 카텔란의 작품은 사람인 것 같은 거다. 두 작가 차이가 뭔지 더 알아보자. 
 
세갈의 작품은 사람을 필요로 한다. 아니 오로지 사람만을 필요로 한다. 그의 작품에 다른 물질적인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작품을 구현하는 퍼포머가 있을 뿐 그 어떤 오브제도 없다는 거다. 작가는 심지어 전시 카탈로그도 만들지 않고, 사진도 찍지 않는다. 모든 작품은 오로지 사람의 몸을 이용한 행위 그 자체일 뿐이다. 

 

그의 다른 작품, 예를 들어 <이것은 무척 현대적이다(This is so Contemporary)>을 보자. 미술관 전시 도우미들이 관객이 오면 "이것은 무척 현대적이다, 현대적이다, 현대적이다.."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춘다. 그러다 언제 그랬는가 싶게 다시 도우미들로 돌아간다. 다음 관객이 오면 또 똑같은 행위를 한다. 

작품이 행위 그 자체라는 점에서 해프닝의 창시자 앨런 캐프로 같은 1960년대의 실험적 작가들의 유산을 이어받은 듯 보이지만, 그들과의 차이점은 세갈의 작품은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허무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예술의 엘리트주의를 비판하고 관객참여를 고무하자는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팔리는 오브제로서의 예술이라는 개념에 저항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세갈은 자신의 작품을 태연하게 판매한다. 이 경우도 그 어떤 서류나 물증이 오가지 않는다고 한다. 단지 공증인과 작가, 컬렉터 세 명이 만나서 작품을 구현한 후 그 자리에서 현찰을 지급하고 공증인이 이 거래를 인정하는 절차로 이루어진다. 

요컨대 세갈의 작품은, 어떻게 '아닌 것'(그의 작품의 모든 면면은 "-이 아니다"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이 '아닌 것이 아닌 것', 즉 '어떤 것'이 되는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부정의 극단에서 어떻게 긍정이 생산되는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생산하기의 다른 방식에 관심이 있다"라는 작가 자신의 말은 이를 뒷받침해준다. 이런 점에서 세갈의 작품은 정치적이다.    

반면 카텔란의 작품은 꽉 차 있다. 무형의 것도 아니고, 비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너무나 꽉 차 있어서 그 생생한 현존이 부담스럽고 기괴하게 느껴지는 지점에 진입한다. 카텔란이 즐겨 만드는 도상들은 말이나 쥐 같은 동물들에서, 히틀러, 교황 등의 알려진 인물, 단순히 익명적인 사람들까지 다양하다. 미술관의 흰 벽에 머리를 쳐박은 말을 설치하거나, 나무 위에 목매단 듯한 세 명의 어린이를 걸어놓는 등, 카텔란의 작품들은 세갈의 그것만큼이나 센세이션을 일으켜왔다. 


이 조각들은 실제와 거의 구별되지 않는 섬찍한 닮은꼴들이지만 또 자세히 보면 머리 크기가 너무 크다던가 하는 만화 같은 과장이 곁들여져 있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도 불구하고 기괴한 느낌이 가시지는 않는다. 

그의 작품에는 육체적 고난을 담은 종교적 이미지나 폭력성의 흔적에 묘한 유머가 곁들여져 있는데, 광주 비엔날레 작품처럼, 많은 경우에 죽음의 느낌을 담고 있다. 하지만 한번도 살아있어 본 적이 없는 인형들에 죽음의 느낌이 담겨 있다는 것은 기묘하지 않은가? 살아있지 않은 것들이 죽어 있고, 한번도 움직여본 적 없는 것들이 지치고 고단한 육체를 쉬고 있다.

이런 점에서 카텔란의 작품은 세갈의 그것과 정반대편에 있다. 세갈의 작품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무엇인가가 있다면, 이번에는 반대로 무엇인가가 꽉 차 있는 것 같은데 사실 아무 것도 없다. 그러니 광주 비엔날레에서 두 작가의 작품을 한 방에 배치한 큐레이터의 감각은 상당히 재치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미술이 가고 있는 반대방향의 두 극단을 비교체험하게 해준 것이니 말이다. 생각해보면, 두 작가의 작품이 한 방에 있지 않았다면, "정말 살아있는거냐"란 질문이 이렇게 절박하게(?) 많이 나오지는 않았을거다.   

Posted by Kh-art
지난 번 포스팅에 이어서...
일본민예관과 리하쿠(李白)는 별로 멀지 않아서 함께 묶어 다녀올 만하다.
리하쿠는 조금 찾기 어려우니 잘 따라가 보자.

다시 고마바토오다이마에(駒場東大前) 역에서 시모키타자와(下北沢) 역으로 간다. 3분 소요.
시모키타자와에서 오다큐(小田急) 선을 오다하라(小田原) 방향으로 갈아타고 교오도오(経堂) 역으로. 4분 소요.
(지금 보니 표지판에 한글로도 표기가 되어 있네요.^^)



교오도오 역에서 표지판을 보고 스즈란도오리(すずらん) 쪽으로 건널목을 건넌다.
스즈란도오리 상점가로 들어서서 10분 정도 길을 따라 걷는다.

도쿄 외곽 쪽이어서인지, 도심처럼 복작거리지 않고 소박한 느낌을 주는 상점가다. 
길 양쪽에 늘어서 있는 가게들을 구경하며 걷는 재미가 꽤 쏠쏠하다.



...앗, 여기도 고서점이!
일본에서 가장 부러운건 길가에 서점들이 많다는 것이다. 
특히 괜찮은 고서점은 일반 서점이나 웬만한 도서관을 뺨치는 수준이다.

잠시 딴 길로 새면...
십 수 년 전 처음 도쿄 간다(神田)의 고서점가를 가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당시만 해도 '고서점'이라고 하면 '고물'이나 '폐품' 비스무리하다는 선입견을 갖고 있었는데, 일본에 와서 보니 완전히 차원이 달랐다.
일단 매우 깨끗한데다, 책 한 권 한 권을 모두 깔끔하게 손질해서 진열해 놓고 있는 모습이 매우 인상적이었다.
여기에 특유의 풍취까지 더해 마치 고급 골동품상점을 보는 듯했다.

그런 고서점이 일본 전역에 2,300여 점 정도 활발하게 운영되고 있다고 한다. 가맹점들 간에 네트워크도 잘 되어 있고, 심지어 인터넷 검색도 가능하다. (http://www.kosho.or.jp/)

특히 도쿄 간다의 진보초 고서점가는 170개 이상의 서점이 몰려 있는 대표적인 고서점가로 손꼽히는데, 그 명성에 걸맞게 매년 고서축제를 열고 있기도. 언젠가 꼭 한번 가보고 싶다. 얼마나 사재기를 할 지 생각만 해도 두렵지만. -_-;; 
올해 축제는 10월 27일부터 11월 3일까지. (http://jimbou.info/) (앗, 막 끝났구낭.ㅠ.ㅠ)

고서점뿐만이 아니다.
우리는 대학가 조차 서점 하나 보기가 힘들지만, 일본은 큰 서점들이 종류도 다양하게 길가에 늘어서 있다.

새벽 5시까지 문을 여는 서점도 있으니 말 다했다.



게다가 여기는 일본의 대표적인 환락가인 롯폰기 한복판.
보통은 아침 10시부터 새벽 5시까지 문을 열지만, 일요일에는 저녁 10시까지만 운영한다고. -.-
이런 상황인데 도대체 누가 일본 젊은이들이 책을 읽지 않는다고 하는지.
예전에 비해 독서률이 낮아졌다 뿐이지 결코 우리와 비교할 수준이 아닌 듯하다.


다시 리하쿠로 돌아와서...
낮시간이라 그런지 젊은 사람들은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조금 초조해진다. 10분 정도 걸으라고 했는데...혹시 지나친 걸까?

지나는 사람들이 대부분 할머니, 할아버지, 초등학생들이라 영어로 물어봤자 별 소득은 없을듯.
그래도 답답하면 "리하쿠 토 유우 오미세와 도코데스까?" ('이백'이라는 가게는 어디에 있습니까?)라고 물어보자. (대답을 알아듣는건 개인의 역량에 따른다. ^^;;)

답답해도 대략 10분 정도, 500m 가량 걷다보면 주변이 조금 한적해지는 느낌이 들면서
갑자기 오른쪽 골목에서 강하게 머리를 잡아끄는 힘이 느껴질 것이다.(포스를 잘 느껴보시길...^^;;)


 
골목 100미터 전방에 '李白'이라는 글씨가 눈에 띈다.
휴우~





이런 곳이...!
이 찻집에 대한 이야기는 예전부터 몇 번 씩이나 들은 터라 꼭 한번 와보고 싶었다.
리하쿠(李白)의 주인 미야하라 시게유키(宮原重之) 씨는 원래 젊은 시절 서양음악에 빠져 '모짜르트'라는 카페를 열고 10년 정도 운영했다고 한다. 당시 카페를 연 곳이 바로 고서점으로 유명한 간다 진보쵸(神田 神保町).
그는 젊어서부터 골동품에 관심이 많아 조금씩 수집을 하곤 했는데, 어느날 백화점의 작은 골동품 상점에서 우연히 조선백자를 보게 되었다고. 그리고 그때부터 그의 인생은 생각지도 못한 방향으로 흘러갔다.

그가 처음부터 조선시대 물건을 모으려고 한건 아니었다. 
하지만 가장 좋은 것들은 모두 조선의 것들이었다고
.

항아리, 접시, 사발 등 도자기 류와 반닫이, 소반과 같은 목공예품, 회화, 조각 등등... 이들과의 만남은 그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꿔버렸다. 

일단 카페 '모짜르트'는 다방 '리하쿠(李白)'로 바뀌었다. '리하쿠'는 백자의 백색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청렴결백' '실질강건(實質剛健, 꾸밈이 없이 성실하고, 굳세고 씩씩함)' 등 그가 생각하는 조선조의 이미지를 표현한 이름이기도 하다. 조선의 공예품, 예술작품을 통해 그 안에 내재해 있는 조선의 마음을 이해하게 되면서, 그것을 지키고 널리 알리고자 하는 마음도 강해졌다.  




작은 마당은 잡목림으로 자연스러운 멋을 살렸다. 잘 찾아보면 무궁화도 있다.
들어가는 입구에는 간단한 메뉴가 적혀있다. "커피 800엔, 전차 800엔, 말차 1000엔"




한옥을 재해석한 건물과 인테리어 모두 그의 작품이다.
서까래가 그대로 드러난 천장, 한옥 문짝과 한지를 바른 조명 등이 아늑한 분위기를 자아내고 있다.
그리고 곳곳에 그의 소중한 컬렉션들이 자리한다. 60여 년이라는 오랜 세월 동안, 하나 하나 그의 안목으로 걸러진 소중한 컬렉션이다. 




컬렉션에 관심있는 사람들에게는 직접 설명도 해주신다고. 
특히 그는 정체성과 뿌리에 대한 확신이 부족한 재일교포 청년들에게 조선의 미와 문화의 우수성을 깨닫게 해주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그런 취지에서 작년부터 한 달에 한 번씩 한국의 전통 무용, 전통 음악을 감상하는 자리도 함께 마련하고 있다고. 

 

리하쿠에서 가져온 전단지 3종. 
왼쪽은 지난 10월 3일에 열린 한국전통음악 공연 관련 팸플릿. 현대화한 전통음악 연주가의 공연에 전통무용가가 게스트로 참여했다. 작년부터 시작한 한국 전통문화 체험 공연은 금회로 15회째. 선착순 20명. 참가비 4천엔.(음료와 다식 포함) 예약제로 운영된다.
가운데는 리하쿠에서 열린 미술전시 팸플릿.
오른쪽은 10월 말부터 11월 말까지 총 8회, 2부로 나뉘어 진행되는 한국문화체험 프로그램 팸플릿.

아 참, 이 집 커피는 이렇게 예쁘게 나온다.
커피맛도 좋지만 함께 내온 간단한 다식도, 그릇의 질감도 매우 훌륭하다.
혼자서도 조용히 좋은 시간을 보낼 수 있는 곳으로 여력이 된다면 자주 들르고 싶은 곳이다.



리하쿠가 도쿄에서 조선의 미를 느낄 수 있는 독특한 공간으로 자리잡은 지 어언 50여 년의 세월이 흘렀다간다 진보초에서 50년을 보내고(카페 '모짜르트' 포함) 이곳 세다가야 구로 이사한 지도 10년이 되어 간다.
한국인도 아닌 그가, 일본 땅에서 이렇게 오랜 세월 '李白'이라는 특별한 공간을 꾸려올 수 있었던 것은 조선의 예술에 대한 그의 식을줄 모르는 애정과 열정, 깊은 이해와 존경이 없다면 불가능한 일이었을 것이다. 이미 일백 년 전에 망해 지구상에서 사라진 조선을, 그 조선의 예술과 아름다움을 평생토록 기리고 되살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미야자와 시게유키 씨. 조선의 후손으로서 정말 부끄럽고 고마울 뿐이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어느 한 나라의 사람이 다른 나라를 가장 깊이 있게 이해하는 길은 과학이나 정치상의 지식이 아니라 종교나 예술적인 내면을 이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고 했다. 미야자와 시게유키 씨가 되살린 조선, '리하쿠(李白)'를 보며 그 뜻을 마음에 새겨본다.




주소: 東京都世田谷区宮坂44
전화번호: 03-3427-3665
영업시간: 11-19시. 연중무휴




p.s. 여기서 잠깐. 사진 속 이 분은 누구일까요?
리하쿠에 걸려있던 유일한 사진이다. 정답은 다음 기회에...



Posted by Kh-art
경복궁역 근처 원서동에 있는 공간화랑 건물은 붉은 벽돌색 외장재가 멋들어진 곳이다. 이곳이 특이한 것은 내부벽도 붉은 벽돌로 마감돼 있다는 것. 넓지는 않지만 들어서는 순간 운치가 느껴지는 것은 이 때문이다. 이런 곳에 작품을 설치하는 건 흰 벽의 보통 갤러리보다 훨씬 더 까다롭지만, 성공할 경우 아우라도 더 상승한다. 이곳에는 중견 조각가들의 좋은 개인전들이 많이 개최된다. 올 봄에 열렸던 김기철의  <화양> 역시 그 중 하나다.


어둑하게 조명이 밝혀진 갤러리에 들어서면 단촐한 비주얼이 펼쳐진다. 정면 깊숙한 곳에 놓여 있는 둥근 원통, 그리고 벽에 걸린 두 개의 직육면체 상자 같은 것들. 나무색의 원통과 직육면체 상자 표면에는 작은 검은색의 사각형과 원형이 보인다. 하지만 그 외에 장소를 차지하고 있는 볼거리는 없다. 공간은 텅 비어 보인다. 하지만 이 공간에 실제로 들어가본 관객은 여기에 사진으로는 포착할 수 없는 어떤 것들이 꽉 차 있었다는 걸 기억할 것이다. 그것은 빗소리이다. 작지만 성능좋은 스피커들을 통해서 쏟아지는 빗소리는 정육면체와 원통형의 주변을 꽉 메운다. 

그 옆에는 또 다른 전시실이 있는데 관객이 들어가면 센서가 작동해 빗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옆 전시실의 소리들까지 겹쳐저서 이제 소리는 공간 속에 입체적인 레이어를 만든다. 소리의 예술, 이른바 사운드 아트이다. 소리가 무슨 미술이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어쩌겠는가. 현대미술이 이 영역 역시 자기 것으로 끌어당겨왔으니. 게다가 미술에서 다루는 소리는 음악에서의 소리와 다르다. 미술에서 소리는 어떤 식이건 공간성 혹은 물질성과 연관을 맺고 있기 때문이다.   


소리와 미술은 일찍부터 관련을 맺어왔다. 바실리 칸딘스키는 "모든 예술은 음악의 상태를 동경한다"라고 말하면서 음악적 요소들을 시각화하고자 했다. 칸딘스키 작품의 춤추는 듯한 리듬과 다양하게 변주되는 색채는 '음악의 상태'의 표현이다. 몬드리안은 <브로드웨이 부기우기>라는 작품을 통해 흥겨운 재즈의 리듬을 크고 작은 네모칸으로 형상화하기도 했다. 

이런 작품이 시각적인 것을 통해 간접적으로 소리를 표현한 것이라면, 직접 소리를 이용한 작품도 있다. 엄밀한 의미의 사운드아트는 이 경우를 가리킨다. 소리와 시각적인 것과의 이른바 공감각적 관계를 다루는 작업도 여기 속한다. 위에 소개한 <화양>에서는 그런 면이 크게 두드러지지는 않지만, 김기철은 예전에 소리를 눈에 보이는 음파로 변형하거나 드로잉이 소리가 되어 나오는 작품을 한 적이 있다. 

소리와 시각적인 것의 상호번역 혹은 공존. '비주얼 뮤직'이라고도 불리는 이런 경향의 작품은 오늘날 사운드아트의 주종이라고 해도 될 정도로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일본 작가 히라카와 노리미치(Hirakawa Norimich)의 <a circular structure for the internal observer>(2008)이나 미국 작가 신디 버나드(Cindy Bernard)의 작품 <projections+sound>(2005)이 여기에 속한다. 노리미치의 작품은 관객이 특정한 장소에 서면 컴퓨터에서 나오는 노이즈가 시각화되어 스크린에 투사되는 작품이다. 

 

신디 버나드의 작품에서 관객은 스크린 앞에 앉아 다양한 음악을 들으면서 각각의 곡의 이미지에 매치되는 색채를 스크린에서 볼 수 있다. 

 

어떤 형상이 아니라 그냥 추상적인 색채의 스크린만 등장하는 것이 작품의 포인트다. 특정한 형상이 등장하면 오히려 고정된 이미지에 의해 공감각적인 효과가 반감되기 때문에 사운드아트에서 시각적인 것은 종종 이렇게 최소한도로만 다루어진다. 앞에서 이야기한 김기철의 작품도 마찬가지. 

하지만 작품이 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이상 시각적인 것이 아예 없으면 그것도 곤란하다. 이 지점에서 작가들의 고민이 시작된다. 그냥 심심하니까 장식으로 거기 있는 것이 아니라 작품의 꼭 필요한 요소로서 시각적인 것이 배치될려면 어떻게 해야할까? 아니 나아가, 시각적인 것만이 공간을 점유할 수 있는 걸까? 공간을 채우는 다른 수단은 없을까?

여기서 궁극의 사운드아트의 가능성이 나온다. 이 가능성이란, "소리는 청각적인 것만이 아니다"란 명제에서 나온다. 소리가 청각적인 것이 아니라니? 이상한 말 같지만 틀린 말이 아니다. 소리는 궁극적으로는 음파, 그러니까 물질적인 진동이다. 그렇기 때문에 들을 수 없는 소리도 있다. 초음파는 인간이 들을 수 있는 주파수인 20kHz(킬로헤르츠)보다 주파수가 커서 '들리지 않는' 소리이다. 

 
소리가 그 자체로 물질적인 것이라면, 사운드아트를 전시장에 설치하기 위해 구태여 시각적인 것을 함께 배치할 필요가 없다. 김기철의 <화양>에서 빈 공간을 채우는 빗소리는 그런 종류의 사운드아트이다. 여기서 관건은 소리가 얼마나 정말로 물질적으로 감각에 작용할 수 있는가이다. 소리의 내용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파동적인 성격이 중요한 것이다. 

이런 종류의 사운드 아트는 종종 노이즈 아트(Noise art)의 형태로 나타난다. 작년에 내한한 즈비그뉴 칼콥스키(Zbigniew Karkowski)의 작업도 그 중 하나다. 노이즈 아트는 사운드 아트의 일종으로(때로 노이즈 아티스트는 자신들의 작업이 사운드아트가 아니라고도 주장한다), 말 그대로 '소음'을 다루는 분야이다. 그런데 이 소음의 극단은 더 이상 청각적인 것이 아니다.

작년, 칼콥스키가 백남준 아트센터에서 <Number Crunching>을 공연했을때, 장내를 가득 메운 관객의 삼분의 일 정도가 시작한지 1분도 채 안돼서 도망나온 사건(?)이 있었다. 대형 스피커에서 터져나오는 소음이 거의 물리적 고문의 수준으로 귀를 압박했기 때문이었다. 필자도 도망가고 싶었지만 귀를 막아가며 겨우 참고 있었는데, 앉아있는 동안 바닥과 벽이 계속 떨려서 그 진동이 몸에 전해져 왔다. 힘든 시간(!)이 끝나고보니 방 안의 유리 파티션 일부가 깨져 있었다. 여기서 소리는 청각적인 영역을 은유적으로가 아니라 실제적으로 넘어선다. 소리는 신체에 와 닿고 신체를 압박한다.

그런데 공간을 채우는 물질적인 소리라는 이 아이디어는 사실 21세기의 발명품이 아니다. 이미 1960년대에 독일의 아방가르드 작곡가 칼하인츠 슈톡하우젠(Karlheinz Stockhausen)은 공연장 여기 저기에 대형 스피커를 설치하고 관객들에게 '방향과 움직임이 있는 소리'를 들려주고자 했다. <소년의 노래>가 그것이다. 원래 슈톡하우젠은 다섯 대의 스피커를 천정에도 매다는 등 다양하게 배치할 생각이었지만 초연때 기술적인 문제로 무대 주변에 늘어놓는 것으로 대신했다고 한다. 


<소년의 노래>는 실황 공연으로만 온전히 감상할 수 있으며 인터넷 파일 같은 걸로는 절대 뉘앙스를 느낄 수가 없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유투브 링크를..) 이것이 이 곡이 음악이면서도 음악이 아닌 이유이다.

이 곡은 소년 합창단이 부르는 성가곡인데, 여기서 소년들이 부르는 노래는 전자음과 혼합된 채 조각 조각 해체되어 알아들을 수가 없다. 독일어라서 알아들을 수가 없는 것이 아니라 언어가 해체돼서 알아들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말은 흩어지고 모이는 입자들처럼 공중으로 분해된다. 사운드아트는 이렇게 세상의 모든 소리, 인간의 언어 역시 물질적인 차원을 갖는다는 것을 말해준다. 물질로서의 소리가 차 있는 빈 공간은, 비어있지 않다. 그리고 이것이 현대미술이 공간의 문제에 개입하는 한 가지 방식이다. 


>
Posted by Kh-art

중명전. 덕수궁에 속해있는 궁궐 건물이다.
한자 명자는 날일(日)이 아니라 눈 목(目)자를 썼다.
더 밝게 보겠다는 의지가 들어간 이름이라고 한다.




길고긴 복원의 시간이 끝나고 중명전이 문을 열였다. 유난히 무덥던 올해 여름이 채 가시기도 전인 8월 말의 일이었다. 나는 중명전이 문을 열기를 꽤 고대했던 사람이다. <청춘남녀, 백년 전 세상을 탐하다>를 쓸 때 꼭 보여주고픈 건물이었건만, 한창 공사가 진행중이라 먼 발치에서 사진만 찍었던 그 건물. 중명전.

중명전은 대한제국 시기의 중요한 역사를 목격한 장소다. 1899년 왕실 도서관으로 문을 연 중명전은, 1904년 원인 모를 화재가 나서 덕수궁의 전각 대부분을 태웠을 때부터 정치 무대의 중심에 섰다. 온통 서양식으로 꾸며진 중명전에서 외교관을 맞아들이며 임금과 그의 측근들은 나라의 앞날을 심대하게 고민했다. 강압에 의해 을사늑약이 체결된 후 그 울분을 삼키며 임금이 헤이그 특사를 명했던 곳도 바로 중명전이다.
중명전에서는 어떤 일이 일어났을까? 중명전은 그날을 기억하고 있을까?

복원을 마치고 모습을 드러낸 중명전. 덕수궁 궐역에서 벗어난 위치에 있다.


덕수궁에 속한 건물임에도 이 건물의 위치가 수상하다.
덕수궁 돌담길에서 뚝 떨어져 정동극장 안쪽에 자리잡고 있기 때문이다. 옆에는 미대사관저가 있어 일년 365일 삼엄한 경비를 서고 있는 그곳. 외따로 떨어진 궁궐 건물은 놀랍게도 붉은 벽돌로 지어졌다.


대한제국시기, 덕수궁(당시는 경운궁이라고 불렸다)을 정궁으로 삼은 고종황제는 궁궐의 규모를 날로 넓혀갔다. 지금 성공회 정동성당이 있는 덕수궁의 북쪽 지역에도 궐역이 있었으며(성공회 성당 뒷편에 한옥건물이 다소곳이 남아있다) 중명전이 있는 이 지역에도 여러 채의 건물이 지어져 궁궐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었다.

정동은 당시 영국, 미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등 많은 서양 국가들의 공관이 자리잡고 있었다. 일본세력을 견제하던 고종황제는 아버지 흥선대원군이 경희궁의 전각을 옮기면서까지 수백채의 전각을 세운 경복궁을 떠나 경운궁으로 몸을 옮겼다.

대한제국기에는 궁궐 안에 서양식 건물들이 많이 세워졌다.
경운궁과 경복궁은, 의도적인 방화이건, 자연적인 불꽃이건, 화재가 자주 일어나 임금의 목숨을 위협했다.  임금은 불에 타지 않는 서양식 건물을 궁궐 내에 서둘러 지었다. 중명전은 1897년에 완공되었으며, 경운궁 담 안쪽에는 1902년 경에 돈덕전, 구성헌, 정관헌 등 서양식 건물이 들어섰다. 그리고 계획은 일찌감치 시작되었으나 공사가 늦어져 1910년에 완공된 석조전이 들어서면서 경운궁은 조선 전통의 전각과 서양식 건물, 그리고 그 둘 사이를 교묘하게 섞은 혼합의 건물이 함께 있는 독특한 궁궐의 풍경을 자랑하게 되었다.


다시 중명전으로 돌아가보자. 한일합병 이후에는 외국인 클럽으로, 광복 후에는 이방자 여사의 소유물로 옮겨졌다가 민간에 매각된 후 이 건물은 역사에서 완전히 잊혀져 버렸다. 여러 회사가 함께 쓰는 사무실로 용도변경되면서 건물은 흉하게 첨삭되는 과정을 겪었다. 중명전이 새롭게 조명된 것은 2007년부터다. 헤이그 특사 사건 100주년을 기념한 전시회가 바로 그 중명전에서 열리면서 건물의 중요성이 새롭게 부각된 것이다. 궁궐 건물로 인정받지 못하던 중명전이 덕수궁에 속한 사적으로 문화재 등급이 높아졌고 흐트러진 모습을 바로 잡아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리자는 의지도 높아졌다. 그리고 3년이 지난 후 비로소 중명전이 우리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복원되기 전 중명전의 모습. 흰색 페인트로 칠해지고 테라스를 막아 버렸다.
내부도 손상이 심했다. 벽을 터서 테라스까지 모두 넓혔고 벽난로는 막혔다.
복원 작업은 이 모든 것을 새로 틔우고 막으면서 원래의 모습을 찾아가고자 했다.




 

흰색 건물이었던 중명전이 붉은 벽돌 몸을 드러내고 건물의 앞과 양쪽 옆에는 긴 회랑이 생겨났다. 이 회랑을 처음 본 순간 나는 살짝 감동하고야 말았다.  건물의 역사를 들여다보는 일. 건물의 역사를 내 눈으로 지켜보는 일은 언제나 흥분감을 준다. 중명전이 일반에게 공개되기는 했지만 내부를 관람하려면 미리 날짜와 시간을 예약해야 한다. 다른 일로 무척 바쁘던 9월의 어느날 짬을 내어 남편과 함께 중명전을 방문했다. 흥분은 나눠야 제맛이지 않은가. 어쩌다보니 초등학교 4학년 정도로 보이는 단체팀과 합류하면서 뭔가 제대로 된 관람이 불가능하긴 했지만서도. 



중명전 전시실 풍경. 1층은 중간 복도를 중심으로 오른쪽에 큰 홀이 있고

왼쪽에 두 개의 홀이 있다. 전시 내용은 을사늑약의 부당성과 헤이그 특사를 파견하게 된 배경 등
중명전에서 발생했던 큰 사건들이다.




중명전의 내부 장식은 옛날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 거의 없다. 대부분 첨삭과정에 의해

원형이 사라버렸다. 1층 중앙의 복도 타일만 유일하게 그 시대를 증언하는 것이다.
실내화로 갈아신는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마구잡이로 밟을까 하여
강화유리로 보호막을 만들었다. 꼭 유리로 덮어야 하나?





요런 이쁜 장식이 눈에 띈다. 당시 물건은 아니지만 이런 느낌의
창문 장식이 있었으리라 상상되었다.


 


당시 외교적인 상황을 보여주는 문건. 아래는 고종황제의 밀서.

전시용 사본이다. 어떤 글이 오고갔는지 보는 것도 흥미롭다.



2층에는 대형 홀과 두 개의 사무실이 있다. 문화유산국민신탁이라는 문화재 보호단체가
문화재청으로부터 중명전을 위탁관리하면서 일부를 사무실로 쓰고 있다.
2층 대형 홀에는 딱히 전시물이 없다. 뻥 뚫린 공간에는 고종의 어보를 전시했고,
옛 국기와 고종이 어진이 자리잡고 있다. 전시 구성에서 아쉬움이 많이 남는다.



황태자 이은과 이완용 내각 사진(1907). 이 사진의 배경이 된 곳이 중명전이다.

거꾸로 이 사진 한장으로 중명전의 복원이 시작되었다. 

 

중명전에 대한 흥분은 붉은 벽돌 건물로 되살린 것과 긴 회랑에서 느껴진 진지함이 전부였다. 내부를 둘러볼수록 아쉬움을 감출수가 없었다. 내부가 많이 손상된 건물이기에 복원에 어려움이 많았을 것이며, 겨우 남아있는 복도 타일만이라도 제대로 간수하겠다는 생각은 이해할 수 있다. 중명전은 외관만 남은 형식적인 건물이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내가 상상한 것은 이런 것인지도 모르겠다.
이탈리아 외교관 까를로 로제티가 남긴<꼬레아 에 꼬레아니>에 있다는 이런 내용.


"러시아인 기술자가 만든 쇠와 벽돌로 된 조잡한 건축물인 알현관 앞에는 대신 민종묵이라는 사람이 손님을 맞기 위해 자리하고 있다. 몇몇 나이 든 대신들을 제외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영어를 할 줄 아는데, 알현관의 큰 뜰에서 차를 마시며 알현시간을 기다리는 동안 대신들과 흥미로운 대화가 펼쳐지게 된다. 그리고 나서 알현관의 응접실로 들어서면 예기치 않았던 매우 기이한 것들이 눈에 들어온다. 가구들이나 장식이 동양적인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바닥에는 붉은 카페트가 깔려있고 주위에는 비엔나풍의 의자가 12개 정도 놓여있다. 그 가운데에는 이집트 담배들과 하바나 시가, 차와 비스켓, 바카라 컵들과 독일제 찻잔 등이 놓인 탁자가 하나 자리잡고 있다. 응접실에 한국 것이라고는 벽 구석에 서 있는 거대한 병풍 뿐인데, 병풍에는 한국의 기마병들에게 쫓기는 중국 벽사들의 모습이 그려져있다."

<대한제국 1907 헤이그 특사 100주년 기념 특별 기획전-국립고궁박물관, 민족문제연구소(2007)> 도록에서 재인용.


 
붉은 양탄자나 우리 민족의 우수성을 보여주는 귀한 병풍은 없더라도 궁궐다운 위엄이 있기를 원했던 것인데, 100년의 시간이 흐르면서 그 모든 이야기와 역사는 떠나버린 듯했다. 떠나버린 역사를 복원하려니 억지스럽고 힘겨운 싸움이 된 것이다.

부족한 예산으로 저렴한 재료를 쓸 수밖에 없는 사정, 부족한 자료로 인해 원형에 더 다가가지 못한 사정, 아직도 논의가 거듭되어야 할 근대사의 의미들, 당시의 재료를 더 이상 조달하지 못하는 기술적인 한계
등 근대건축물을 되살리는 일에 뒤따르는 각종 문제들이 중명전에는 한꺼번에 발생한 것 같다. 거기에 한 가지 더. 전시관으로 사용하는 문화재 건물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유기적인 전시 프로그램의 부재까지 포함되어 있다.

확실하지 않은 부분을 애써 그럴싸한 것으로 복원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중명전을 돌아보면서 느낀 것은 애써 그럴싸한 것으로 복원하지 않은 부분이 너무 많다는 점이었다. 우리 근대사의 비어있는 부분이 그대로 느껴졌다.

2010년 10월 13일에 중명전에서 복원 기념 심포지엄이 열렸다.
 
학문적으로 연구하는 분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나의 대책없는 아쉬움도 위로를 얻지 않을까 하여 심포지엄에 참석했다. 한국건축역사학회에서 주관한 이 행사에는 학계 인물들 외에도 일반인들도 많이 참가해서 중명전에 대한 관심이 깊음을 보여주었다.



중명전의 복원은 영친왕과 일본 황태자가 함께 찍은 사진 한장에서 시작되었다고 한다. 도면도 없고 서류도 남아있는 것이 없으니 당연히 복원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창틀이나 벽돌의 구조, 벽난로의 형태 등 디테일의 원형은 알 수 없었다. 학계에서조차 협력이 이루어지지 않아 중요한 자료를 공유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했다. 겨우 결론을 내리고 공사를 마무리할 무렵, 뒤늦게 발견된 자료 때문에 관계자들은 밤잠을 설쳐야 했다. 예산이 부족하여 제대로 완성되지 못한 부분도 많았다.



커다란 논의는 없었다. 그럼에도 5시간에 걸친 심포지엄을 꿋꿋하게 들어보면서 한 가지 의미를 발견할 수 있엇다. 중명전은 그러하기에 역설적으로 의미를 지닌다는 점이다. 근대건축물의 복원, 혹은 원형 찾기에 대한 의문을 폭넓게 제시했다고 할까? 

복원 그 자체가 문화재의 해답이 될 수 없으며, 복원이 마무리되었다고 하여 모든 역사적 의문점이 해결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오히려 건물의 복원은 역사적 의문점의 시작이라 하겠다. 복원은 언제든지 새로운 자료와 새로운 탐구로 인해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중명전이 공개되고 연구가 구체화될수록 도처에 흩어진 많은 자료들이 모여들 것이며 앞으로 더 많은 새로운 이야기들이 수면 위로 솟아오를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역사를 탐구하는 과정과도 닮았다. 

근대건축물의 원형찾기는 근대사를 복원하는 것과 마찬가지 아니겠는가.





more information>>-----------------------------------------------------------------------------

중명전 
위치-서울시 중구 정동 1-11 


좀 더 읽어볼 책











덕수궁-시대의 운명을 안고 제국의 중심에 서다

안창모/ 동녘(2009)
- 근대국가 프로젝트가 펼쳐졌던 대한제국기를 알고 싶다면!


고종황제가 사랑한 정동과 덕수궁
김정동/ 발언(2004)
-당시 외교의 거리였던 정동의 분위기가 궁금하다면!


통감관저, 잊혀진 경술국치의 현장
이순우/ 하늘재 (2010)
- 중명전의 건립 연대에 대한 논의가 담겨있군요.


꼬레아 에 꼬레아니(사진해설판)
이탈리아 외교관 카를로 로제티가 쓴 대한제국 견문기
그가 수집한 사진들만 모아서 해설한 책.
1900년대 초반의 궁궐, 도시, 사회, 사람들이 가득.

--------------------------------------------------------------------------------------------
Posted by Kh-art
크로스 지킴이 윤민용 기자가 필진열전에 쓴 오싹한세로드립을 보고 단풍구경 갈 짐을 싸다말고 컴퓨터 앞에 앉았다. 쓰고 가지 않으면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른다....!

실은 지난 달 말, 잠시 도쿄에 다녀왔다. 목적은 일종의 휴가. 다녀와서 바로 재미있는 글을 올리겠다는 말로 순진한 윤 기자를 안심시키고 튀었다’. 아니, ‘날았다’.

문득 달력을 보니, 다녀온 지 스무날도 더 지났다. 뭐라 할 말이 없다. 하지만 백수 과로사라고, 결코 노느라 약속을 지키지 않은 건 아니라고 되지도 않는 변명을 해본다. (미안, 미안~) 



이번 도쿄 행에서는 꼭 가보고 싶은 곳이 있었다.
바로 일본민예관(日本民藝館)과 리하쿠(李白)라는 오래된 찻집.
십 여 년 전부터 벼르던 곳들인데, 생각만큼 쉽지 않았다. 이유는 찾기 힘들다는 것

다행히 이번엔 재일교포 친구의 도움으로 두 곳 모두 아주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일본민예관과 리하쿠는 모두 조선과 깊은 관련이 있다. 두 곳 모두 조선의 미에 흠뻑 빠져 평생을 산, ‘전생에 조선사람이었을 법한 일본인이 지은 곳이라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도쿄의 일본민예관은 일본 민예운동의 총 본산지로 야나기 무네요시(柳宗悅)가 세운 박물관이고, 리하쿠는 컬렉터인 미야하라 시게유키(宮原重之씨가 40년도 넘게 운영하고 있는 찻집으로 모두 조선의 미를 알리는 데 열심인 곳이다

야나기 무네요시의 이름을 알게된 건 대학 1학년 미학입문 시간이었다야나기 무네요시가 아닌 柳宗悅이라고 들었던지라 막연히 한국사람이겠거니 생각했고, 한국인 유종열 씨가 아니라 일본인 야나기 무네요시라는 것을 알게된 것은 조금 더 시간이 지난 후였다.

야나기 무네요시(1889-1961)는 일본 민예운동의 창시자이자 종교철학자, 미술평론가, 미학자로서 지금도 일본과 한국의 미학, 미술사학계에 막강한 영향을 끼치고 있는 사람이다. 그가 만든 민예(民藝)’민화(民畵)’를 본래 우리말인 양 쓰고 있는 것만 봐도 알 수 있듯이 말이다. 

생명력 넘치는 민중의 생활미술에서 진정한 아름다움을 찾고자 한 그의 사상과 철학은 당시 수많은 사람들을 매료시켰다. 그리고 야나기를 숭배하는 수많은 무리들은 그를 좇아 각 지방에 민예관을 만들어 민예품을 수집, 소장하고 특히 뛰어난 조선의 민예품을 애호하게 됐다. 현재 일본민예협회 회원으로 가입된 각 지방 민예관 및 공예관은 총 29개. 이들 각 지방의 민예관은 일 년에 한번 씩 민예대회를 열고 있는데 그 중심이 바로 도쿄의 일본민예관이다. 아마 일본에 다양한 잡화(雜貨)’가 발달한 것도 일찍이 생활 속의 공예, ‘민예를 중시한 야나기 무네요시의 영향이 아닐까.

그가 조선의 민예에 빠지게 된 것은 아사카와 노리다카(淺川伯敎), 아사카와 다쿠미(淺川巧) 형제를 알게된 뒤부터라고 한다. 1914년 아사카와 노리다카에게 조선 백자를 선물 받은 후 조선 민예의 아름다움에 눈을 뜬 그는 1916년 처음 불국사와 석굴암, 해인사 등지를 답사하며 본격적으로 조선과 인연을 맺게 된다. 그후 1922년에 조선과 그 예술이라는 첫 단행본을 냈는데, 그가 직접 서문에서 밝혔듯이, ‘조선 문제에 대한 공분(公憤)’그 예술에 대한 사모(思慕)’가 계기가 되어 글을 쓰게 되었다고. 하나같이 주옥같은 글이다. 꼭 한번 읽어 보시길 

특히 그가 19229월 일제의 광화문 철거에 반대하며 카이조(改造)에 쓴 사라지려 하는 한 조선 건축을 위하여는 읽을 때마다 심금을 울린다. 조선인이 아닌 일본인이 쓴 글이어서 더 놀랍고 부끄럽기도 하다.


광화문이여, 광화문이여, 너의 목숨이 이제 경각에 달려 있다. 네가 일찍이 이 세상에 있었다는 기억이 차가운 망각 속에 파묻혀버리려 하고 있다. 어쩌면 좋단 말인가. 내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있다.”

광화문이여, 너의 존재는 멀지 않아 빼앗길 것이다. 그러나 빼앗겨서는 안 될 존재이기에 나는 이 글을 쓰는 것이다. 지상에서 너의 모습이 없어지더라도 나의 이 글만은 적어도 지상의 어딘가에 뿌려질 것이다. 나는 끈질기게 너를 기념하기 위해 이 추도의 글을 공중(公衆) 앞에 내보내는 것이다. 광화문이여, 사랑하는 벗이여, 도리 없이 죽음으로 몰려 얼마나 분하겠는가. 나는 네가 당해야 할 고통과 쓸쓸함을 생각한다.”

오오, 광화문이여, 너는 얼마나 서글프게 생각할 것인가. 너의 많은 친구들은 너보다 먼저 죽임을 당하고 말았다. 서울 서쪽을 장식했던 돈의문(서대문), 소의문(서소문)은 이제 시민의 눈에 띄지 않는다. 지난해 나는 혜화문(동소문)을 찾았는데 보호하는 자가 없어 가련하게도 비바람에 지탱하기조차 힘들어 보였다. 너의 귀중한 형제인 숭례문(남대문)은 성벽에서 고립되어 아무 상관도 없는 울타리에 의해 겨우 지켜지고 있다.


여기까지 읽고 있으려니, 불 타버린 숭례문 생각에 가슴이 먹먹해 진다 

그는 1916년 이후 몇 차례 조선을 더 방문해 각종 민예품을 수집했고, 1924년에는 드디어 경복궁 내 집경당에 조선민족미술관을 열었다. 이 미술관 건립을 위해 그는 자신이 편집위원이었던 문예지 시라카바(白樺)의 독자들에게 기부금을 구하기도 하고, 경성의 동아일보사 강당에서 성악가였던 부인의 독창회를 열어 모금운동을 하기도 했다. 그가 굳이 힘들게 미술관을 연 이유가 궁금해진다.

나는 항상 한 나라의 인정을 이해하려면 그 예술을 찾는 것이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일본과 조선의 관계가 긴박한 오늘날, 나는 이 점을 더욱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중략) 그 예술을 좀더 이해하게 된다면 일본은 따뜻한 조선의 벗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술은 언제나 국경을 초월하고 마음의 차별을 초월한다. (중략) 나는 조선 민족의 저 우수한 작품이 우리의 마음과 깊이 교류하는 날이 올 것임을 조금도 의심치 않는다. 그리하여 그 작자로서의 민족이 우리 마음의 벗이 될 것이라는 것도 의심치 않는다. 나는 그러한 희망과 신념을 완수하기 위해 조선민족미술관설립을 드디어 계획했다.”

나는 먼저 여기서 민족예술(folk art)로서의 조선의 풍취가 배어있는 작품을 수집하고자 한다. 어떤 의미에서건 나는 이 미술관에서 사람들에게 조선의 미를 전하고 싶다. (중략) 나는 이것이 사라지려고 하는 민족예술을 지속시키고 새로이 부활하게 하는 동인이 되기를 바란다. 수가 적은 조선의 작품은 아마 10년 후에는 뿔뿔이 흩어지는 슬픔을 맛볼 것이다. 지금 조선 사람들은 눈앞의 일 때문에 그것들을 되돌아볼 여유가 없다. (중략) 나는 그 불행한 흩어짐을 방지하기 위해서도 이 기획을 실천에 옮겨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일을 서두르지 않으면 기회를 잃어버릴 뿐만 아니라 민족의 고유한 아름다움마저 마침내 과거의 것으로 묻혀버릴 것이다.”




일본에 있는 우리 것은 모두 일본사람들이 약탈한 것이라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
물론 약탈품이 많은 건 사실이지만, 정당한 경매나 매입 절차를 통해 유입된 물건들도 상당하다는 것이다. 그런 것들까지 우리가 왈가왈부할 수는 없지 않을까? 이미 우리가 팔아버리고, 잃어버린 것들 아니냔 말이다. 잃어버리는 것은 쉬워도 다시 찾기는 힘들다.  


그런 이유로 눈 밝은 그가 일찍이 조선의 민예를 수집한 것은 정말 다행스럽고 고마운 일이 아닐까. 그가 조선의 민예를 알아보지 못했다면, 우리는 그것들을 영영 잃어버리지 않았을까? 헛되이 버려지거나 뿔뿔이 흩어지고 전쟁통에 모두 잃어버렸을 수도... 생각만 해도 아찔한 일이다 


그가 쓴 글에 관심이 있다면 국내에 번역된 책이 몇 권 있으니 참고해 보자. 개인적으로는 조선을 생각한다(도서출판 학고재)수집이야기(도서출판 산처럼)를 추천한다. 특히 최근 몇 년 동안 미술품 수집에 열을 올리는 사람들이 많아졌는데, ‘철학이 있는 수집또는 수집의 철학을 배우고 싶은 분이라면 수집이야기》가 강추다.

아무튼 ... 그럼에도 불구하고 야나기 무네요시에 대한 국내의 평가는 긍정적이지만은 않다. 1920년대 그가 우리 미술의 특징을 비애의 미라고 했다는 게 원인이다. 마치 고차원적으로 식민사관을 주입시킨 지능범이라고나 할까. 하지만 그러기엔 너무나 선한 눈의 그를, 그의 따뜻한 마음 씀씀이를 그대로 믿고 싶은 것은 글에서 느껴지는 진실함 때문이다. 


조선의 벗이고자 했던 그의 진심을 헤아려보고 싶었다. 그리고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던 민예에서 아름다움을 찾아낸 그의 예리한 안목을 배우고 싶었다. 그가 구축한 미의 세계는 오늘날에도 충분히 매력적이다

그를 만나러 간다. 

도쿄에서 일본민예관에 가려면 일단 시부야(渋谷) 역으로 가야한다.


게이오 열차의 승강장으로 가는 길에는 오카모토 타로(岡本太郞)의 초대형 벽화 내일의 신화가 있다. “예술은 폭발이다라는 강렬한 메시지를 남기고 세상을 등진 이 작가는 일본의 대표적인 현대작가 중 한 사람이다. 높이 5.5미터, 너비 30미터에 이르는 내일의 신화1970년 오사카만국박람회의 심볼이 된 태양의 탑과 짝을 이루는, 작가의 대표작이다. 본래 멕시코의 어느 실업가에게 작품을 의뢰받아 1968년 멕시코 현지에서 2년간 제작, 완성한 것이었는데, 이후 소리 없이 사라져 30여 년간 소재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러던 중 2003년 멕시코시티의 근교 어느 허름한 자재창고에서 극적으로 발견되어, 다음 해 일본운송과 수복작업이 본격적으로 추진되었고 1년여에 걸쳐 원래의 모습으로 되살아났다. 가나사키시(川崎市)에 오카모토 타로 미술관이, 아오야마에 오카모토 타로의 기념관이 있다.


시부야역은 여러 종류의 열차를 갈아탈 수 있는 굉장히 규모가 큰 역이다. 여기서 게이오(KEIO) 열차의 이노카시라 라인(頭線)을 탄다. 기치죠지(吉祥寺) 방향, 120. 이때 주의할 점은 반.드.. ‘local(各停)’을 타야한다는 거. ‘급행(express)’을 타려는 사람들을 따라 엉겁결에 같이 뛰어 탔다간 다시 되돌아와야 하는 낭패를 보게 된다. (...그래요제가 그랬어요.)
 




느긋하게 ‘local’을 타고 두 번째 정거장인 고마바토다이마에(駒場東大前) 역에서 내린다.
3
분 소요. 도쿄대 교양학부가 있는 작은 역이다.

  


계단을 내려오면 멀리 캠퍼스의 상징인 시계탑이 보인다
. 여기서 U! 뒤로 돌아 일방통행 길을 따라 죽~ 내려간다. 길가의 약도로 위치를 확인하고 고개를 돌리자마자 표시되어 있듯이 바로 눈앞에 소바집이 보인다. ‘믿을만하군. 이대로 가면 되겠어.’ 물론... 소바집에도 들어가 봤다. 자동판매기로 먹고 싶은 메뉴표를 직접 뽑아 주문하는 시스템인데 아저씨들만 드글드글 모여 있는 심상치 않은 분위기라 그냥 돌아 나왔다.

 


가는 길에는
李朝木工이라 쓴 푯말과 같이 조선시대 목공예품을 파는 골동품 상점도 심심찮게 눈에 띈다. 일본에서는 보기 힘든 교회도 보인다. 작고 단아한 모습이 맘에 든다. 아점으로 먹은 매운 카레 오므라이스. 모든 채소와 달걀은 유기농으로 목장에서 바로바로 가져와 쓴다고. 맛은? ...그냥 so so.




, 이제 나왔다. 왼쪽으로는 주차장과 서관(西館, 야나기 무네요시가 생전에 살던 저택)이 보이고, 오른쪽 건물이 민예관이다.




입장료는 일반 1000, 학생 5백 엔, ·중고생 2백 엔.
개관은 10시부터 오후 5시까지.
휴일은 월요일, 연말연시, 전시 교체기간이란다.

신발 속에 이름을 적어 넣어두고 슬리퍼로 갈아 신는다
.




1936년에 세워진 이 건물은 2층 건물로, 기획전이 열리는 대형 전시실과 7개의 작은 전시실로 이루어져 있다. 소장품으로 1년에 4회 정도 기획전이 열리고, 가끔 특별전이 열린. 15천 여 점의 민예품을 소장하고 있는데, 그중 약 3천 점 이상이 조선시대의 것이라고. 그래서 일본민예관에는 조선시대 공예를 위한 상설전시실도 당당히 한 개 관을 차지하고 있다. 호랑이를 그린 조선시대 백자가 눈에 익다.

 



중간중간 놓여있던 세련된 디자인의 의자. 야나기 무네요시가 고안한 의자라고. 나가노현 마쓰모토시의 민예가구로, 제품화되어 지금도 판매되고 있다.



1층 화장실 옆 벽에 붙어 있던 각종 전시 포스터들. 오른쪽 위에 오사카 민예박물관에서 열리는 가을 특별전 <민예운동의 작가들-소장품을 중심으로>(9.11-12.12)  포스터가, 왼쪽 아래에 <흑선. 페리의 세계>(9.10-11.7)라는 전시를 알리는 포스터가 붙어있다. 참고로 일본의 근현대 역사에서 페리와 맥아더는 은인으로 꼽히는 두 미국인이다. 물론 결과론적인 이야기이지만, 유엔군 총사령관이었던 맥아더는 제2차 세계대전의 패전국인 일본을 경제 대국으로 만드는 발판을 마련해 주었고, 1853년 에도시대 말기 해군 제독이었던 메튜 페리는 흑선(黑船, 구로후네)을 이끌고 들어와 일본을 일찍이 근대화의 길로 나서게 해 주었다. 서툰 명암법으로 서양인을 그린 그림이 재미있다.




일본민예협회에서 발행하는 기관지 民藝. 작년이 야나기 무네요시의 탄생 120주년이었다. 20103월호의 표지 사진은 1921년 도쿄에서 열린 조선민족미술전람회에서 포즈를 취한 야나기 무네요시의 모습을 찍은 것.


본관 맞은편에 있는 서관은 야나기 무네요시가 생전에 살던 저택으로, 건축보호를 위해 월4회만 한정 공개하고 있다.(둘째, 셋째 수요일과 토요일) 불행히도 다섯째 수요일에 방문한 나는 다음을 기약할 수밖에. ;~;

하지만 살짝 문을 열고 들어가 살펴보니, 신발장 옆에 고구려 고분벽화의 흑백사진이...! 그가 조선의 역사와 문화에 얼마나 큰 관심이 있었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다음 번엔 시간을 잘 맞춰서 꼭 둘러봐야지.



짧게 쓰려던 이 글은 이미 용량 초과다. 일단 그냥 올린다. 리하쿠 소개는 다음에.
잠시 광주와 담양, 지리산을 돌고 올까 한다.

일본 민예관 홈페이지는 www.mingeikan.or.jp 

Posted by Kh-art

백남준 하면 흔히 미술관이나 대기업 로비에 설치돼 있는 비디오 설치작품을 떠올린다. 여러 대의 모니터가 쌓여 있고 스타카토 같은 영상이 번쩍거리는 그런 작품들 말이다. 미술을 모르는 사람들도 백남준의 이름은 알고, '백남준 스타일'이 이렇다는 건 안다. 

그런데 작품을 보고 돌아서서 적지 않은 사람들이 중얼거리는 말이 있다. "백남준이 뭐가 그렇게 대단한지 모르겠다" 유명한 미술가라는 건 알겠는데 작품이 그냥 쉬워 보이고 어떤 점이 대단한지 모르겠다는 거다.

"당신이 미술을 모르니까 그렇지!"라고 일축해버리기엔 석연치 않은 구석이 있다. 일단, 업계 비밀(?)을 좀 누설하자면, 실제로 백남준 작품 치고는 범작인 것들이 있다. 어디 있는 뭐라고 말하기는 그렇지만, 그런게 없는 건 아니라는 거다. 미켈란젤로나 레오나르도 다 빈치 작품도 범작이 있는데 이 정도야 그럴 수도 있다.

근데 그런 것을 넘어서, '익숙함'의 문제일 수도 있다. 미술작품이란 걸 처음 접하던 순간부터 우리 머리 속에는 '백남준 스타일'이 입력돼 있어서, 그걸 너무 당연한 걸로 받아들인다는거다.

따지고 보면 루브르 박물관에 가서 살인 인파를 뚫고 <모나리자> 앞에 서 본 사람도 비슷한 감상을 내뱉는다. "뭐가 그렇게 대단하지?"

하지만 우리가 만약 다 빈치가 스푸마토 기법(색의 윤곽을 흐릿하게 하여 은은한 음영 효과를 만들어내는 기법)을 만들어내기 전에 살았다면, 그림이 이런 신비한 분위기를 표현할 수 있다는 걸 상상하지 못했을 거다. 마찬가지로 백남준 이전에는 그 누구도 '티비 모니터와 그 속의 영상이 미술작품의 재료로 쓰일 수 있다'는 걸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니 모든 건 콜럼부스의 달걀이다. 
 

W. J. T. 미첼의 말대로 "언어는 차이에 의해 작동하고, 이미지는 동일화에 의해 작동한다." 어떤 이미지를 볼 때 우리는 항상 "어디서 봤더라..."라는 생각을 먼저 한다는 거다. 우리 기억 속에 저장돼 있는 어떤 이미지와 재빨리 맞춰보고 익숙한 걸 골라낸다는 것이다. 사정이 이러니 이미지를 다루는 미술가들이 뭔가 새로운 걸 만들어낸다는 건 참 어렵다. 처음부터 불리한(?) 게임인 것이다.

더군다나 '못보던 이미지'를 만드는 걸 너머 '못보던 예술'을 만들려고 하는 작가라면 고민이 많을 수 밖에 없다. '못보던 예술'이란 결국 이미 있는 예술로 설명될 수 없는 예술, 말하자면, '출발지점에 선 예술'이다. 백남준은 누구보다 더 '출발'을 화두로 삼았던 작가였다.

백남준의 비디오 설치작품들이 익숙함에 의해 많이 희석되었다면, 좀 덜 익숙한 작품을 감상해보는 것은 어떨까? 좀 덜 알려져 있는 사실 중 하나는 백남준이 원래 미술학도가 아니라 음악학도였다는 것이다. 한국전쟁을 피해 가족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간 백은 도쿄대학에서 쇤베르크 미학으로 석사학위를 받았으며 쇤베르크를 더 공부하기 위해 독일로 간다. 거기서 '플럭서스'라 불리는 일련의 전위예술가들을 만나서 함께 여러 가지 실험적 작업을 하게 된다. 

플럭서스는 서구 부르주아 문화의 엘리트주의에 반대하고 '누구나 예술가가 될 수 있다'는 모토를 내걸었던 운동이었다. 그들은 전통적인 예술에 반대되는 거라면 뭐든지 했는데 그 중에서도 중요한 것이 퍼포먼스였다. 플럭서스엔 백과 마찬가지로 음악적 배경을 가진 작가들이 있었다. 그래서 그들의 퍼포먼스는 일종의 '콘서트'로 간주되었다. '악보'도 있었다.  

하지만 평범한 음악 콘서트는 아니다. 그들의 공연은 '음악의 출발'에 대한 것이기 때문이다. 음악이란 무엇인가? 궁극적으로 그것은 '소리'다. 어떤 소리가 음악인가? 전통적인 음악에서는 음악이 될 수 있는 소리와 그렇지 않은 소리가 따로 있다고 생각했다. 백남준과 플럭서스 멤버들은 이 위계질서에 반기를 들었다.

<바이얼린 솔로를 위한 하나(One for Violin Solo)>(1962)도 이런 작품 중 하나다. 이 작품에서 백남준이 한 일이라고는 바이얼린을 오분간 높이 들었다가 내려치는 것 뿐이다. 저 사람이 뭘하나 궁금해하며 기다리던 청중들은 바이얼린이 큰 소리를 내면서 부서지는 순간 화들짝 깨어난다. 
 


이 순간, 음악이 탄생한다. '바이얼린이 부서지는 소리'라는 음악. 하지만 그것만이 아니다. 바이얼린이 부서지면서 오분의 시간이 끝난다. 이 순간, 침묵 속에서 흘러간 시간 그 자체가 음악의 시간이 된다. 행위를 통해 시간을 절단하는 작업, 그것이 전통적인 음악이 망각하고 있었던 음악의 출발점이라는 것이다.

달리 말하면, 이 작업은 전통적인 음악이 관습적으로 음악이라고 불렀던 어떤 '상상의 시간'을 실재의 시간으로 절단내는 행위를 보여준다.  

플럭서스에 큰 영향을 준 전위 음악가 존 케이지는 세상의 모든 소리들, 심지어 소음과 침묵조차도 음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백남준은 한술 더 떠서 연주자와 청중의 행위조차도 음악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케이지가 음악을 '시간 속에서의 소리의 지속'으로 정의했다면, 백은 연주자와 청중의 행위라는 요소를 통해서 '음악을 공간화'시켰다(백남준의 비디오아트 작품도 또 다른 방식의 음악의 공간화 혹은 시간의 절단이다).
.
이 작품의 특징은 누구나 연주자가 될 수 있다는 거다. 백남준이 아니라 누구라도 이 작품을 연주할 수 있다. 바이얼린을 들고 있는 시간이나 내려치는 강도를 자기 맘대로 정할 수 있다는 점에서 누구나 이 곡을 새롭게 작곡할 수도 있다. 아래 동영상은 동시대 독일의 실험음악가 마크 로렌츠 키셀라(Mark Lorenz Kysela)가 이 곡을 연주하는 장면이다.





실험음악가가 아니라도 누구나 이 곡을 연주할 수 있다. 집에 바이얼린이 없으면 아무 거나 집어들고 하면 된다. 단 값이 덜 나가는 물건이 권장된다. 가히 '음악의 출발'에 대한 곡이라고 할만 하지 않은가. 하지만 이 곡의 단점은 자꾸 하면 걸오사형 말대로 습관된다는거다. 또 다시 익숙함이라는 놈이 자리를 차지한다. 그러니 2010년의 우리가 '출발'을 꿈꾼다면 백남준이 하지 못했던 것을 해야 한다.  


Posted by Kh-art

아핏차퐁 위라세타쿤. 도무지 외우기도 힘들고 발음하기도 힘든 이름이다. 얼마전까지 나도 '아칫파퐁'이라고 알고 있었을 정도.

이 난해한 이름이 얼마전부터 심심찮게 잡지나 인터넷에 등장하고 있다. <정오의 낯선 물체> <징후와 세기> <열대병> <엉클 분미> 등을 만든 태국 영화감독 이름이다. 올해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을 받으면서 대중에게도 알려졌고 얼마전 한국을 방문해서 일간지 인터뷰 기사까지 났다.

정성일씨 같은 영화평론가들 입에나 오르내릴 정도로 극소수 애호가들에게만 알려져 있던 아트영화 감독이 이 정도면 인기인이 되었다고 할만 하다. 거기다 태국에 대한 이미지까지 바꿨다.

태국 영화라면 <옹박> 같은 액션물이나 <디 아이> 같은 공포물 정도를 떠올릴 정도로 적어도 문화적으로는 낯선 나라였던 태국이 갑자기 이 감독 덕분에 가까이 다가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




정작 본인은 이런 관심이 낯선 듯 한 인터뷰에서 "개인적인 소규모 영화인 자기 영화가 황금종려상까지 받다니 뜻밖이다 팀 버튼 심사위원장이 잘 봐주신 것 같다 "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사람 영화는 일반적으로 우리가 보통 영화라고 알고 있는 것들과 동떨어져도 한참 동떨어져 있기 때문이다. 내러티브나 플롯 대신 한없이 긴 침묵이, 일관된 캐릭터 대신 호랑이로 원숭이로 변신하는 인간들이, 알아들을 수 있는 일상의 대사 대신 수수께끼 같은 잠언들이, 화려한 시각효과 대신 끝없는 정글 속 사각거리는 소리가 있다. 배부르고 졸리는 상태에서 극장에 들어갔다간 자다가 깨서 "여긴 어디? 난 누구?"란 소감만 안고 나올 터. 


'현대미술과 극단의 실험들'이라는 주제로 글을 쓴다면서 왠 영화 이야기? 미술과 관련없는 이야기가 아니다. 아핏차퐁은 미술가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극장에서 '상영'되는 영화도 만들지만 갤러리에서 '전시'되는 비디오아트 작품도 만든다. 

후자를 보고 싶으면 서울시립미술관으로 가면 된다. 격년제로 열리는 미디어아트 비엔날레인 '미디어씨티 서울'(2010.9.7-11.17)에 그의 <프리미티브 프로젝트>가 전시되고 있으니까.

지금 극장에 걸려 있는 영화 <엉클 분미>와 한 세트인 작품이다. 이 작품의 일부인 <나부아의 유령들>은 올 봄에도 서울의 한 미술관에서 볼 수 있었다. 아시아 현대미술가에게 주는 '아시안 아트 어워드'(2010.4.8-6.6. 소마미술관)에서 6명의 후보 중 최종 수상작가로 선정되었으니까. 

여하간 미술인들은 이 사람을 영화인이기 이전에 미술가로 알고 있었다. 미술인들은 아핏차퐁 영화 같은 스타일에 익숙하다. 영화라고 보면 너무나 낯설지만 비디오아트라고 보면 딱히 낯설 것도 없는 것이다.

'프리미티브 프로젝트', 뮌헨의 하우스 데어 쿤스트(Haus der Kunst)에서의 설치광경(2009)



영화계와 미술계을 오가는 사람이 있다는 이야기를 하려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람이 있다는 거야 특별한 일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이 감독의 작품이 전통적인 영화도 전통적인 미술도 아니고 그 두 영역을 다 벗어난 바깥 어디쯤에서 만난다는 것이다. 그리고 현대미술은 바로 그곳을 자기 집으로 삼아왔다는 것이다.


기승전결의 내러티브가 실종된 영상은 관객이 무작위적으로 들락거릴 수 있는 갤러리 공간의 관람방식과 맞닿고, 냄새와 온도가 느껴지는 화면은 기묘하게 촉각적이어서 필름에 손을 대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그것은 이미 미술의 영역이다. 아니 '이미 미술의 영역'이라는 말도 어폐가 있다. 미술 자체가 계속 달라져왔기 때문이다.

현대미술은 더 이상 미술이 아니고 더 이상 영화가 아니고 더 이상 건축이 아니고 더 이상 문학이 아닌 영역에서 자기 영역을 발견해왔다. 

'no limit'라는 블로그의 제목은 이런 의미에서 붙였다. 그러니 뭔가 확실한(자극적인?) 볼거리가 나올 것이라는 기대는 버리시는게 좋다. 현대미술은 '볼거리'라고 알려져 있는 어떤 안전한 영역을 끊임없이 탈출하면서 자기 이름을 알려왔으니까.

Posted by Kh-art
1. 들어가며-화가와 화상, 그 애증의 관계


우리가 알고 있는 미술의 역사를 들여다보면 수많은 화가들과 사조들이 명멸하며 오늘에 이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오늘날 이름이 붙어있는 많은 화가들과 사조들이 미술사의 전부는 아닐 것이다. 다만 미술사는 알려지지 않은 수많은 미술가 무리를 넘어선 자들만 우선적으로 다루기 때문에 그들의 이름이 우리 곁에 남았을 뿐이다.

고흐가 생전에 그림을 한 점 밖에 팔지 못했던 시절, 당시 사람들은 그림을 사지 않았을까.
그렇지 않다. 고흐의 동생 테오가 형의 작품을 단돈 100프랑에 팔던 시절 같은 화랑에서 프랑스 화가 알프레드 드 뇌빌(Alfred de Neuville, 1852~1941)의 그림은 15만 프랑에 팔렸다.

화가들의 경제적, 세속적 성공은 그가 살아있던 시절에 이루어졌다면 더 없이 행복한 삶을 살았을 터이지만 모든 화가들에게 그런 영광이 찾아드는 것은 아니었다. 어떤 경우는 어이없게도 그가 어렵게 살다 죽고 나서 그 생전의 비운을 보상이라도 하려는 듯 천문학적인 금액으로 거래되어 부러움과 함께 안타까움을 불러일으키기도 한다.
하지만 미술시장의 메커니즘에 따르면 이런 일은 단순하게 운명이 결정지어주는 것은 아니다. 신체를 변화시킬 수 있는 마법의 힘, 가치 없는 것을 돈을 주고도 손에 넣을 수 없는 귀한 것으로 탈바꿈시키는 능력이 화가들에게 있다고 사람들은 생각한다. 마치 사제가 밀떡을 ‘그리스도의 몸’으로, 포도주를 ‘주님의 피’로 변화시키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이런 능력은 화가들의 것이 아니라 화상(gallerist)들의 몫이다.

이들은 문화적 재화인 미술품을 경제적 재화인 ‘돈’으로 바꾸어 낼 줄 아는 환전상과 같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동물적인 감각과 천부족인 사업 감각으로 작가와 그림을 고를 줄 아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게다가 미술시장이라는 체제가 만들어내는 신화가 작품의 경제적인 가치의 척도가 된다. 미술시장에서 전설 같은 이익을 가져다 준 사례로 자주 등장하는 것은 이런 화상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무도 거들떠 보지 않던 무명의 청년작가를 발견하고 그를 지원하고 후원하면서 많은 그림을 확보한다. 그 후 그가 유명해지면서 그 화상은 천문학적인 돈방석에 올라앉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 말이다.

그렇다고 모든 화상들이 이렇게 시장에서 성공하는 것은 아니다. 때로는 화상으로서의 본분(?)을 벗어나 작가와 작품에 대해 작가 못지않은 열정으로 덤벼들었다가 경제적인 어려움에 봉착해서 불우한 말년을 맞은 이들도 많다. 경우에 따라 돈만 아는 것으로 묘사되기도 하는 화상들이지만 이들 중에는 돈만 아는 이들, 돈도 알고 그림도 아는 이 그리고 돈 보다 그림이 좋아 실패한 화상들로 나뉜다.

사람 사는 세상의 이치와 다를 바 없다. 그중에서도 가장 행복한 사람들은 그림을 통해 돈도 벌고 명성도 얻는 동시에 미술사에서도 화랑과 화상들의 감각과 의지는 때로는 새로운 미술운동의 기폭제가 되기도 하고 실험적인 미술활동의 아카데믹한 평가를 이끌어 냄으로서와 미술사 발전에 한 몫을 하기도 한다.

인상파를 키운 폴 뒤랑 뤼엘.


현대미술의 단초가 된 인상파는 폴 뒤랑 뤼엘(Paul Durand Ruel, 1831∼1922)이라는 파리의 화상이 없었다면 미술사에 등재되지 못 했을 것이다. 또 20세기 미술사를 관통하면서 그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피카소 역시 프랑스의 화상이자 출판업자였던 앙브루아즈 볼라르(Ambroise Vollard, 1868~1939)와 만남을 통해 그의 천재성은 발휘될 수 있었다. 그는 드가와 세잔, 마티스와 같은 무명 화가들을 발탁해서 천부적인 안목과 비즈니스 감각의 조화를 통해 작가들을 지원해 줌으로써 화상으로서의 역할을 다했다.

입체파 작가들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다니엘-헨리 칸바일러


칸 바일러(Kahnweiler, Daniel-Henry,1884~1979) 화랑과 입체파, 오늘날의 구겐하임미술관의 모태가 된 페기 구겐하임(Peggy Guggenheim,1898~1979)의 금세기 예술화랑(Art of this Century Gallery)과 추상 표현주의, 베를린 슈투름(Der Sturm) 화랑을 열고 같은 이름의 잡지를 발간하면서 코코슈카 등 표현주의 미술을 미술사에 등재시킨 헤르바르트 발덴(Herwarth Walden,1879~1941), 미국의 팝아트를 대표하는 야스퍼 존스, 앤디워홀, 로버트 라우젠버그 등을 키워낸 레오 카스텔리(Leo Castelli,1907~1999)의 존재 등을 살펴보면 미술사에 새로운 유파가 등장할 때 마다 화랑의 후원과 이해아래 발전해 나왔음을 알 수 있다. 또 1955년 ‘움직임’이라는 전시를 개최한 드니즈 르네(Denise Rene, 1913~ )는 ‘키네틱 아트’의 산파로 미술사에 당당하게 그 이름을 등재시켰다.

이렇게 미술사를 풍성하게 해준 패트론(Patron)으로서의 화상의 면면을 살펴봄으로서 그들의 삶을 지배한 것이 돈이었는지 아니면 예술에 대한 열정과 혜안이 그들에게 부를 가져다주었는지 살펴보기로 한다.

Posted by Kh-art


오빠는 풍각쟁이야~”라는 노래가 있다. 여가수의 새침한 목소리 속에 앙탈과 애교가 가득 묻어있다. 가사를 보면 이렇다.


오빠는 풍각쟁이야 뭐 오빠는 심술쟁이야 뭐
난 몰라잉 난 몰라잉 내 반찬 다 뺏어 먹는 건 난 몰라
불고기 떡볶이는 혼자만 먹구 오이지 콩나물이면 나한테 주구
오빠는 욕심쟁이 오빠는 심술쟁이 오빠는 깍쟁이야

오빠는 트집쟁이야 뭐 오빠는 심술쟁이야 뭐
난 시려잉,
난 시려잉 내 편지 남 몰래 보는 것 난 시려
양취자 구경갈 땐 혼자만 가구 심부름 시킬 때면 엄벙띵허구
오빠는 핑계쟁이 오빠는 안달쟁이 오빠는 트집쟁이야

오빠는 주정뱅이야 뭐 오빠는 모주꾼이야 뭐
난 몰라잉 난 몰라잉 밤 늦게 술취해 오는 것 난 시려
날마다 회사에선 지각만 하구 월급만 안 오른다구 짜증만 내구
오빠는 짜증쟁이 오빠는 모두쟁이 오빠는 대포쟁이야."


누구나 따라 부르기 쉽고 가사도 친근하다
. 이 노래는 1930년대 불린 유행가다. 당시의 대중가요를 만가라고 부른다. 만가는 현실을 해학적으로 바라보는 가사와 유쾌한 가락이 특징이다.

1930
년대라면 일제강점기가 한창 무르익었을 때 아닌가? 노래는 발랄하고 노래 속 오빠는 지금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오빠라는 존재들과 하등 다를 것 없다. 그 시절도 회사에 지각하고 월급 안 오른다고 짜증내던 인물이 살던 시대였던 것이다. 그 시절을 살던 사람들도 여배우와 여가수에 열광하고 심지어 2010년의 우리들도 좋아하는 떡볶이를 남주기 아까워하면서 먹었던 것이다.

우리 귀에 익숙한 전통가요나 동요 중에는 일제 강점기부터 불리던 노래들이 많다. 전통 가요 프로그램의 단골 레퍼토리인 카츄샤의 노래1916년 단성사에서 열린 신파극의 주제곡이었고, 이난영을 목포의 여인으로 만든 목포의 눈물1935년 향토 노래 현상 모집에서 당선된 노래였다. 윤극영의 반달홍난파의 달마중’, ‘울밑에선 봉선화도 그렇다.

1930년대는 노래의 시대다. 한해 평균 1만 장의 레코드가 팔렸다. 먹을 것도 부족하던 시대인데 사람들은 유성기를 샀다. 유성기를 들으러 다방과 카페를 드나들던 모던보이와 모던 걸도 흔했다. 음이 높고 간질간질한 노랫가락은 험한 세상을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달콤한 처방이었다.

사람들이 쉽게 따라 부를 수 있는 대중가요가 생겨났고 요즘처럼 아이돌도 등장해서 극장마다 노래를 듣겠다고 모여든 사람들이 가득가득했다. 아이돌이라고 해도 쪽진 머리에 치마 저고리를 입었지만 말이다. 폴리도르 레코드, 콜롬비아 레코드, 오케 레코드, 빅타 레코드, 태평 레코드 등 5대 레코드 회사들이 우리나라에 들어와 노래를 불러줄 아리따운 가수를 찾아 기생을 교육하는 권번을 들락거렸다

인천 권번의 기생
이화자장일타홍은 레코드 회사가 사랑하는 예인이었다. 그런데, 그들이 불렀던 노래는 어떤 것이었을까
? 그들의 노래를 들어보려 인천아트플랫폼으로 가보았다.

100년 전 건물에서 옛 노래를 듣다



복합문화 매개공간인 인천 아트 플랫폼.
인천문화재단에서 운영하며 인천시 중구에 위치해있다.  
전시장, 공연장, 교육관을 포함하여
입주작가들의 스튜디오와 공방이 포함된 복합공간이다.




군회조점, 구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대한통운 창고 등
근대건축물 세 채를 중심으로 이들 건물과 닮도록 붉은 벽돌로
다른 건물들을 만들어 끼워넣었다. 비슷한 볼륨의 건물 10동이
중앙의 도로를 중심으로 양쪽에 나열되어 있다.


인천아트플랫홈은 개항장이었던 인천의 흔적이 가장 많이 남아있는 중구청 앞 일명 차이나타운 안쪽에 자리 잡고 있는 꽤 큰 규모의 예술 마을이다. 전시 홀과 공연장을 따로 두고 입주 작가들의 스튜디오와 공방, 게스트하우스 등을 설치하여 모두 열 개의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고작
2년 전에 문을 열었지만 이곳에서는 100년 전의 풍경을 읽을 수 있다. 시간의 때를 묻힌 채 서있는 붉은 벽돌 창고 건물이 예사롭지 않아 보인다. 대한통운 창고 건물과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 지점, 군회조점이라는 세 개의 근대 건축물이 이 예술 마을의 중심이 되는데, 다른 건물들도 붉은 벽돌을 주조로 박공지붕을 얹어 건물의 형태를 연결감있게 연출했다.

나는 이곳을 무척 좋아한다. 이 거리에 들어서면 차이나타운의 번잡함과 소란스러움이 사라지고 오롯이 역사와 마주한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붉은 벽돌 건물이 양쪽으로 늘어선 거리는 50미터 가량 이어지는데, 느긋하게 걸으면서 생각에 잠기기에 좋다. 백년 전 세상에 온 듯 당시 분위기를 상상해보는 일도 좋고, 오늘은 어떤 전시가 열리나, 어떤 공연이 있나 프로그램을 들여다보아도 좋다.


교육관 및 전시관. 1902년에 지어진
군회조점 사무실 건물이다.



노란색 문이 인상적인 대한통운 창고.
옛날에는 미곡을 쌓아두던 창고였다.




구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 사무소.
1888년에 세워진 건물로

근대건축물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지금은 자료관으로 일반에게 개방된 곳이다.



길 양 끝에
100년의 시간을 훌쩍 넘긴 근대 건축물이 자리 잡고 있다. 전시실과 교육실이 있는 교육관은 군회조점(郡廻漕店)이라는 해운업 사무소이며 1902년에 세워진 건물이다. 다른쪽 끝에는 1888년에 세워진 일본우선주식회사 인천지점(등록문화재 248호)가 자료실로 개방되어 있다.

맞은 편에는 대한통운이라는 흰색 글자가 적힌 창고 건물이 육중한 몸집을 자랑한다. 내부 공간이 깊고 넓은 창고건물은 공연장으로 사용된다. 오래된 근대 문화재 건물도 지키고 이 거리의 역사도 현재에 되살린 인천 아트플랫폼은 오롯이 역사의 풍경을 재현하고 있다
.

그리고 이 거리와 건물에는 옛 시대를 복원하는 다양한 예술 프로젝트가 열린다
. 건물이 재현하는 분위기 때문인지 이곳에서 보는 그림과 이곳에서 듣는 음악은 거미줄처럼 채워지고 엮인 시간의 흔적이 느껴진다.

거문고가 노래하는 일타홍



장 일타홍을 알게 된 것은 인천 아트플랫폼에서 열린 공연에서였다. ‘매혹의 시대’. 1930년대를 연주자들은 이렇게 불렀다. 유성기를 통해 당시 사람들의 마음을 울리고 웃게했던 노래들은 지지직거리는 낡은 유성기 음반으로나마 생명을 이어가고 있었다. 연주자들은 유성기 속에서 예인의 목소리를 끄집어 내보고자 했다. 1930년대 사람들의 마음을 감싸주던 노래를 2010년에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오래된 붉은 벽돌 창고에서 들어본다면 말이다.

1930
년을 매혹의 시대로 풀이한 연주자들의 악기는 뜻밖에도 거문고였다. 유성기 속에 흐르는 1930
년대의 대중가요와 조선시대 사대부의 악기로 뇌리에 남아있는 거문고가 만들어내는 조합이 호기심을 끈다.


거문고 앙상블 '다비'는 '매혹의 소리'를 들려주기 위해 피아노와 퍼커션, 피리의 소리를 서로 섞어넣었다. 거문고의 비장하고 다부진 선율은 피아노가 있어 나긋해지고 퍼커션이 매끄러워졌다. 예인 장일타홍의 신민요 두곡, 작곡가 김탄포의 '세기말의 노래', 민간에서 전해지던 거문고 풍류 2곡, 그리고 우리 귀에 익은 동요 '반달'과 '달마중'이 차례대로 연주되었다.

다비가 선택한 노래들 속에는 거문고라는 가사가 들린다. 지금 사람들보다 당시 사람들이 거문고와 더욱 친했던 모양이다. 남실남실 타는 거문고, 내 사랑 거문고. 묵직하고 진중한 거문고 현이 노래가 되면 몰랑몰랑해지고 보드라워진다. 사랑스럽다.

거문고는 일타홍이 유성기 앨범으로 남긴 '옛님을 그리면서'와 '아리랑의 꿈을 노래했다. 일타홍은 앞서 말한 대로 인천권번의 기생이었다. 1930년대 인천은 향락의 도시였다. 육지의 여러 나라를 이으며 물건을 사고팔아 이익을 챙기는 회사, 배와 창고를 빌려주며 온갖 값나가는 물건을 쌓아두던 회사들이 우후죽순이었다. 일본은행들도 한푼이라도 더 벌려고 했고 투기장이나 다름없던 미두취인소가 있어 쌀과 재산을 한탕 노름에 걸었다가 하루아침에 거지가 된 사람이 수두룩했다. 돈이 모이던 그곳에는 예외 없이 유흥가가 형성되었다.

인천아트플랫폼이 위치한 지역은 일명 개항장 지역. 인천항이 있던 이곳은 새로운 것이 닿고 빠지는 접점이었다. 거리마다 요릿집과 여관, 호텔이 즐비했다. 구 일본해운주식회사 인천지점 윗쪽에 있는 비어있는 택지에 우리나라 최초의 호텔이라는 대불호텔이 있었고 그 주변은 먹고 마시고 돈을 쓰기 위해 모여든 사람들로 가득했다.

일타홍은 이곳에서 노래를 불렀다. 나라를 빼앗긴 서글픔, 몸과 마음을 팔아야 하는 서글픔이 뒤섞인 노래들이다.

"...아리랑 어데요. 아리랑 부르며 꿈을 찾어서 노래로 고개를 넘고 또 넘네."-장일타홍, 아리랑의 꿈(리갈 레코드)

서글픔이 묻어나는 선율 속에, 떡볶이도 먹어보고 양취자의 노래도 들어보지만 시절이 하 수상하여 제 뜻을 펼치지 못했던 풍각쟁이 오빠의 뒷모습이 겹쳐진다.


거문고 앙상블 다비는 강희진, 안정희로 이루어진
거문고 연주단이다. 예스러운 소리에서 머물던 거문고에서
감수성 어린 가락을 찾아내 관객들에게 들려준다.
다양한 창작곡 레퍼토리도 보여준다.


앵콜곡인 달마중을 모던걸의 모습으로
직접 노래하는 다비 안정희 님.

일타홍의 마음처럼 구슬픈 선율 속에 거문고가 바람처럼 흔들린다. 악기의 서늘한 소리가 마음을 흟고 지나간 후에 귀에 익은 동요가 흐른다.

"아가야, 나오너라, 달마중가자. ....검둥개야 너도 가자 냇가로 가자...."(1929년, 윤석중 작사, 홍난파 작곡)

장난스럽고 사랑스러운 노랫자락에 희망이라는 두 글자가 머문다. 1930년은 갈길 잃은 서글픈 신세에 비탄에 젖고 어둡고 추운 거리를 헤매는 시절이지만 희망이라는 두 글자로 가슴 한 켠이 따뜻해지던 시대였을까?  



인천 아트 플랫폼 공연장에 모인 사람들.
새로운 음악과 낯선 악기의 호흡을 숨죽이고 지켜보았다


매혹의 시대는 지금도 계속된다. 2010년의 가을이라고 해서 1930년과 다를 바가 무엇이겠는가? 우리 역시 그 만큼의 아픔과 절망과 서글픔을 뼈저리게 체험하며 이 시대를 살고 있으니. 가슴 한구석을 싸늘하게 만드는 것들을 덮어둘 수 있는 음악이 있기에 잊을 수 있고 희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도, 그 시절도 음악 없이는, 노래를 부르지 않고서는 살아갈 수가 없는 것이다. 매혹의 1930년으로 여행을 다녀오면서 마지막 노래 달마중을 내내 흥얼거렸다. 그 시절 사람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어루만져준 노래라는 달콤한 처방은 2010년 지금까지도 계속된다.  


more information >>--------------------------------------------------------------------------

인천아트 플랫폼

위치 - 인천시 중구 제물랑로218번길 3(해안로 1가) www.inartplatform.kr

더 읽어볼 책과 더 들어볼 음악



오빠는 풍각쟁이야
장유정 저/ 민음인 (2006)



풍각쟁이 은진
최은진/ 비트볼뮤직(2010)



the스토리
가야금 앙상블 다비/로엔(2009)


-------------------------------------------------------------------------------------------

Posted by Kh-art

최예선(1974~)
작가. 카피라이터, 에디터.






신문방송학과를 1997년에 졸업하고
 1999년부터 건축전문지 <C3 KOREA>와 
문화교양지 <J.J.MAGAZINE> 등 잡지사 에디터로 일했다. 

2003년 프랑스로 건너가  리옹 제2대학 미술사학과를 마쳤다.

유학 시절, 유럽 도처의 문화재와
유적지를 찾아다니며 옛 풍경 속 이야기에 귀 기울이던 순간이
지금도 생생하다. 그 기억을 더듬으며 지금도 우리의 옛 풍경을 찾아 불쑥 길을 떠나곤 한다.

연남동의 작은 작업실에서 미술, 건축, 여행, 문화 등 삶을 풍요롭게
해주는 분야에 대해 글을 쓰고 있다.
작업실의 이름은 '달콤한 작업실'. 홍차를 마시며 근대 문화 유산을 이야기할 수 있는 독특한 장소다.

지은 책으로
<홍차, 느리게 매혹되다(2009)> <청춘남녀, 백년 전 세상을 탐하다(2010)>가 있다.




e-mail: lena_choi@naver.com
blog: 마담고치와 무슈봉봉의 작업실 판타지(blog.naver.com/lena_choi)
Posted by Kh-art

누구에게나 가슴 설레는 일일 것이다. 작가의 작업실을 찾아가는 것은.
작가의 작업실은 늘 알 수 없는 비밀에 둘러싸여 있는 듯하다. 저 방안에서는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걸까? 당장 문을 밀고 들어가 창작의 비밀을 낱낱이 밝혀버리고 싶은 기분이 든다. 그럴 수 없다면 그냥 한번 둘러보기라도 했으면. 도대체 어떤 과정을 거쳐 작품이 탄생되는 건지 궁금하기 짝이 없다.


그런 까닭에 처음 미술전문지 기자가 됐을 때 제일 신이 났던 것이 바로 취재를 빙자한 작가의 작업실 탐방이었다. 그리고 그 첫 방문지가 바로 최우람의 양재동 지하 작업실이었다. 그러니까 그와의 인연은 2003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최우람은 기자가 되어 처음 취재계획을 세우고 지면에 소개한 작가이기도 하다. 젊은 작가만을 소개하는 꼭지였는데, 그에겐 비슷한 경력과 나이대의 작가 중에서 유독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바로 ‘움직이는 기계 작품’을 만든다는 사실. 당시 유행하던 개념적이거나 인터렉티브한 설치작품도, 전통적인 재료로 만든 조각작품도 아닌 스스로 움직이는 기계라니. 게다가 그 기계는 단지 움직일 뿐만이 아니라 작가에 의해 하나의 ‘의미 있는 생명체’로서 우리 눈앞에 버젓이 모습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미켈란젤로가 “나는 조각한 것이 아니다. 대리석 안에 있는 상을 끄집어 낸 것일뿐”이라고 말했다면, 최우람의 경우는 “이것은 원래 우리와 함께 살고있는 생명체다. 내가 ‘발견’했다. 어때, 신기하지?”라고 보여주는 식이다. 이렇게 말이다.




 

도시의 큰 안테나 주변을 떠돌며 송수신 전파를 먹고사는 ‘에코나비고(Echo Navigo)’(사진 위)와 그것을 전시장에 설치한 모습(사진 아래). 아래 사진의 벽에는 에코나비고의 유생 3마리도 보인다. 과연 이 녀석들의 운명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그는 사람들에게 조금의 의심도 버리라는 듯이, 이 ‘기계 생명체’에 정식 학술명칭을 붙이고 그것의 생식분포, 성장과정, 섭식패턴, 종의 분류 등을 마치 박물관의 생물표본 설명서처럼 작성해서 함께 제시한다. 그러니까 작가는 이 기계 생명체의 ‘창조자’라기보다 ‘발견자’이며, ‘기계생명연합연구소’(약칭 U.R.A.M., 그의 이름 URAM과 같다)의 소장님인 셈이다.

예를 들어, 2006년 도쿄 모리미술관에서 전시된 녀석의 이름은 ‘어바너스(Urbanus)’다. 학술명은 꽤 길다. ‘Anmopista Volaticus Floris Uram’. -_- 연구소가 조사한 바에 의하면, ‘어바너스’는 주로 고도 200m 상공에서 도시의 에너지를 흡수하며 살아가는 놈들이다. 흡수한 에너지를 빛으로 방출하는 꽃 모양의 암컷과 암컷에게 에너지를 받아 활동하는 수컷들, 새끼와 촌충들…. 이 ‘어바너스’ 패밀리를 보고 혹자는 “너희는 어느 별에서 왔니”라고 물을 지도 모르지만, 최우람의 말에 의하면 이것들은 엄연히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는 생명체다. 도시의 에너지를 먹고사는 이 기계생명체들은 보통은 사람의 눈을 피해 기생하지만 ‘고스트 바스터즈’같은 ‘기계생명연합연구소’의 ‘매의 눈’을 피할 수 없었던 것이다.


")//]]>

이것이 그때의 전시 광경을 찍은 동영상이다.(2006.3.10∼5.7) 모리미술관의 신진작가 지원 프로그램인 “MAM Project”를 통해 열린 개인전이었는데, 마침 미술관이 빌딩 53층에 위치한 터라 창 너머 도쿄의 야경이 에너지 자장으로 보이며 ‘어바너스’의 존재를 더욱 실감나게 했다. 당시 휴가를 쪼개 전시를 보러 간 나는 긴장과 흥분으로 잔뜩 고조된 그를 전시장에서 만날 수 있었는데, 그도 그럴 것이, 지하 작업실 높이가 2.4m인 탓에 3.5m 크기의 암컷 ‘어바너스’의 날개를 겨우 한쪽만 테스트해 보고 왔다는 것이다. 다행히 우려했던 작품의 설치와 움직임은 성공, 전시도 대성공이었다.    (자료: 작가 제공)


여기까지 듣고 “이 무슨 택도 없는 소리냐”라고 할 사람도 있을 테고, 지금까지 알고 있던 조각의 개념에 혼란이 와서 머리가 아픈 분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아는 미술작품 대부분은 실은 ‘택도 없는’ 판타지를 그린 상상력의 소산이 아닐지. 꽃의 신 플로라와 서풍의 신 제피로스의 꽃바람에 실려 커다란 조가비를 타고 파도에 떠밀려오는(어디 될 법한 소리인가 말이다) 비너스를 그린 보티첼리의 <비너스의 탄생>이나 온갖 기괴하고 요망한 괴물들로 우글우글한 지옥도를 그린 보쉬의 <쾌락의 동산>, 셰익스피어 희곡의 주인공을 그린 밀레의 <오필리어> 등등 일일이 다 열거할 수도 없다. 모두 우리 눈에 익숙해졌거나 그럴듯해 보이도록 작가가 ‘마법’을 건 것들일 뿐. 이러한 마법이 어떻게 실행되는 지, 그 비밀은 바로 작가의 작업실 속에 숨겨져 있다.



위·연희동 어느 모처, 여느 가정집과 별다를 것 없는 외관의 작업실  /  가운데·작업실 내부 전경. "끼릭~ 끼리릭~" "쉭~ 쉭~" 곳곳에서 녀석들의 움직임이 감지된다.   /  아래·연구소 작업 모습 도촬. 오는 11월에 있을 국립현대미술관 〈Made in Popland전〉의 작품 준비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모습이다.




현재 최우람은 양재동 지하 작업실을 벗어나 2008년부터 연희동에 새 둥지를 틀었다. 꿈에 그리던 천장이 높은 작업실이다. 첨단 연구소다운 면모도 언뜻 느껴진다. 하지만 '기계생명연합연구소'의 활동이 전세계를 무대로 활발해지고 점점 더 다양하고 엄청난 기계생명체들을 '발견'해나가고 있는지라 작업실은 금새 포화상태가 될 듯하다. 지하층과 1층 작업실에는 그 존재가 이미 세상에 알려진  ‘Una Lumino’, ‘Jet Hiatus’, ‘Cakra-2552-a’...등 녀석들의 움직임이 곳곳에서 느껴진다. 그리고 2층의 연구소는 밤낮을 잊은 소장과 연구원들(프로그래머, 디자이너 등)이 새로운 기계생명체를 추적하는 곳이다.

작업실을 찾은 토요일은 최우람 씨만이 나와 작품의 구상에 여념이 없었다. 다른 스텝들은 주 5일제란다. 그는 전날 잠을 설쳤다고는 하지만 도대체 얼마동안이나 작업실에서 숙식을 해결하고 있었는지 가늠이 안될 정도로 초췌한 모습이었다. 11월에 있을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에 신작을 선보이기 위해 불철주야 작업에 매진한 탓이다. 창작의 비밀을 캐내기 위해 눈을 반짝이는 필자를 인식했는지, 그는 묻기도 전에 작업과정을 순순히 털어놓았다.

작품의 제작과정은 어느 정도 분업화되어 있지만 상당히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 작품의 구상에서 전체적인 모습과 움직임이 결정되기까지는, 스텝들과의 끊임없는 대화와 수없이 많은 실험과 수정 과정을 거친다. 하지만 그 복잡하고도 심오한 과정이 끝나면, 그 후의 작업은 오히려 수월하다고 할 수 있다. 작품의 컨셉에 맞게 멋진 외형을 완성하는 한편, 움직임을 조정하는 CPU와 모터드라이버, 메모리, 센서 등등이 내장된 작은 PCB(printed circuit board)를 만들고, 그것을 잘 장착하여 실행시키면 되는 것.


이것이 바로 기계생명체의 모든 비밀이 들어있는 PCB다.



게다가 (쉬잇∼!) 이날 작업실을 엿본 바에 의하면, 그의 작업에는 어떤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었다. 지금까지의 이야기가 도시에 기생하는 기계생명체에 관한 것이었다면, 앞으로의 이야기는 새로운 ‘신화’를 토대로 우주에 존재하는 온갖 잡신(?)들을 찾아내는 게 될 것이라는 것. 그야말로 ‘고스트 바스터즈’다. 나 역시 이렇게 말은 하고 있지만, 그가 무엇을 보여줄 지는 전혀 알 수 없다. 분명한 것은 “당신이 무엇을 생각하건, 그 이상을 보게 될 것이다”라는 것.
두둥~ 개봉박두!





약력
최우람은 1970년 서울에서 출생했다. 중앙대 조소과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문명∈숙주〉(1998)를 시작으로, 〈170개의 박스로봇〉(2001), 〈Ultima Mudfox〉(2002), 〈도시에너지〉(MAM프로젝트, 2006) 등 9회의 개인전과 다수의 그룹전에 참여했다. 〈제1회 포스코 스틸아트 어워드〉(2006)에서 대상을, 〈오늘의 젊은 미술가상〉(순수미술 부문, 2006), 〈김세중 조각상〉(청년조각 부문, 2009)을 수상. 두산갤러리 뉴욕 레지던시 프로그램(2009)에 참여했다.



작가의 홈페이지 www.uram.net  

")//]]>

올해 미국 내쉬빌의 Frist Center for the Visual Arts에서 열린 개인전 동영상

Posted by Kh-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