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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계단을 내려오는 봄비’

인터넷에서 ‘당신은 무엇이 보이나요?’ ‘○○○로 보는 당신의 성격 유형은?’이라는 질문이 붙은 테스트 코너를 만나면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 이미지를 들여다보는 나의 시선이 나도 잘 알아차리지 못하는 심리상태, 성향, 사고 유형을 알려준다고 하니, 점집을 찾는 마음으로 마우스를 클릭하며 테스트에 몰입할 수밖에. 주재환의 이 그림도 일종의 테스트지 같다. 검은색, 흰색, 노란색으로 이루어진 단순한 화면에서 당신은 무엇을 보았는가?


계단을 내려오는 봄비, 주재환, 종이에 채색판화, 61×42㎝, 1983


화면을 사선으로 가르는 하얀 부분은 계단이다. 계단 위에 사람이 있다. 어떤 이는 검은 사람을, 어떤 이는 노란 사람을 알아차릴 것이다. 검은 사람에 초점을 두고 보면 마르셀 뒤샹의 ‘계단을 내려오는 나부’ 이미지가 보인다. 뒤샹은 계단을 내려오는 사람의 연속 동작을 한 화면에 기록하듯 그렸다. 이때 그는 인체를 기계처럼 묘사했는데, 1912년 당시 사람들에게 기계와 결합한 듯한 인체 이미지는 감당할 수 없는 충격을 던져주었다. 뒤샹은 그렇게 미술의 역사를 전복시키며 새 역사를 써내려갔던 인물이다. 그러나 그가 이루었다는 성과가 대체 나의 삶과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노란 형상은 허리를 살짝 숙인 채 계단 위에서 소변을 보고 있는 남자들의 모습이다. 계단 아래 서 있는 사람의 머리 위로 오줌발이 쏟아진다. 오줌발은 계단 아래로 내려갈수록 굵어져, 끝에는 그 형태를 제대로 알아볼 수 없을 지경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기어이 높은 곳에 올라가려고 하나 보다. 부조리와 불합리가 머리를 무겁게 짓누르는 세상에서 살고 싶은 사람은 없다.

계단과 오줌발은 계급사회에 대한 은유이면서 동시에 서양의 명작이 누리는 명예를 향한 작가의 반항심이기도 하다. 미술사 이야기는 차치하고라도, 노란 오줌발에서 봄날의 신호탄인 개나리 같은 희망을 읽고 싶은 심리는 계단 아래 살고 있는 내가 버티기 위해 필요한 희망 고문이 작동한 결과일지도 모르겠다. 작품 제목은 ‘계단을 내려오는 봄비’다.



김지연 |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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