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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시시각각 예술 칼럼

‘넘버 5’ 감상법

미국 화가 잭슨 폴록의 ‘넘버 5’가 그림 거래 최고가인 1억4000만달러(약 1313억원)에 팔렸다. 사람들은 비현실적인 가격에 놀란다. 그리고 가격 책정의 근거와 구매 동기에 미심쩍은 시선을 보낸다. ‘도대체 그 그림이 뭐 길래 그 액수를 주고 샀지?’ 마치 어떤 예술가의 정신적 가치도 그 액수로 평가되어선 안 되고, 어떤 수집가의 그림 사랑도 그 액수로 표현되어선 안 된다는 듯이. 그림 하나가 온 가족이 평생 번 돈을 다 합해도 살 수 없다는데, 누군들 짜증나지 않겠는가. 그 누군가가 마침 그림을 사랑하는 이라면 더욱 화가 나지 않겠는가? 하지만 그림에 대한 생각을 조금만 바꾸면 가격과 무관하게 편한 마음으로 미술을 즐길 수 있다.


잭슨 플록의 ‘넘버 22’ (경향DB)



그림 시장은 ‘예술적 가치∈미술사적 가치∈경제적 가치’의 세 가치의 조합으로 가격을 결정한다. 예술적 가치는 미술사적 가치에 반영되고, 미술사적 가치는 경제적 가치에 반영되는 논리적 구조라고 보면 된다. 예술적 가치부터 보자. 예술작품은 삶을 획일화하는 외부에 맞서 고유한 개인의 내면을 드러내 온전한 소통을 열망하는 행위의 산물이다. 여기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얼마나 깊이 공감해, 자기 자신의 고유한 개별성을 발견하는가에 따라 예술적 가치는 결정된다. 화가와 관객의 행복한 내면적 만남의 순간이 가치발생의 지점이며, 행복의 정도는 관객의 주관이 절반을 결정한다. 이런 까닭에 예술적 가치를 그림이라는 대상의 보편적 교환가치인 가격으로 표현하는 것은 근원적으로 불합리하다. 예술적 가치가 평가가 용이한 미술사적 가치로 대체되는 이유다.

 


미술사적 가치는 얼마나 새로운 사조의 대표적인 작품인가로 평가된다. ‘넘버 5’는 잭슨 폴록이 창시한 액션 페인팅의 대표작이다. 액션 페인팅은 물감을 캔버스에 뿌리거나 튀겨 무정형의 추상화를 그리는 작법이다. 조형미보다 화가의 내면을 직접 반영하는, 그리는 행위 자체를 강조한다. 한마디로 화가의 내면을 사물의 매개 없이 직접 화폭에 전하려는 시도이자, 관객이 캔버스 너머를 보라는 요구이기도 하다. ‘넘버 5’의 미술사적 가치는 대단히 높다. 액션페인팅이 아방가르드 미술의 중심을 유럽에서 미국으로 옮겨 놓은 계기가 됐기 때문이다. 하지만 따지고 보면, 미술사적 가치를 교환가치로 환산하는 기준은 없다. 결국 미술사적 가치 또한 그림 구매의 다양한 동기, 즉 경제적 가치의 한 요소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예술적 가치, 미술사적 가치와 무관한 경제적 가치는 어떤 것들인가? 부자들이 그림을 구매하는 동기는 복합적이다. 그림을 사고팔아 차익을 남길 수도 있고, 상속과 증여의 과세를 피하기 위한 돈세탁의 도구로 이용하기도 하며, 더러는 ‘행복한 눈물’처럼 로비 수단으로 삼기도 한다. 또 그림의 구매를 통해 문화적 소양을 뽐내면서 자본축적 과정에서 구겨진 이미지를 만회하려는 이도 있을 것이다. 이 경우 그림은 탈세와 부정부패를 덮기 위한 고액권이며 위선적 가면에 불과하다.


리히텐슈타인의 원화를 패러디한 박순찬의 ‘행복한 눈물’ (경향DB)



물론 모든 고가의 그림 구매를 이런 경제적 동기로 일반화할 수는 없다. 예술적 가치에 대한 인정비용으로 수백억원을 썼다는 이도 있을 것이다. 1313억원을 주고 ‘넘버 5’를 구매한 멕시코 금융재벌 데이비드 마르티네스도 폴록의 내면과 만나는 것이 그렇게 행복했을까? 화가였던 폴록의 아내에 따르면 “폴록이 물감을 뿌리는 행위는 신음소리 같았다”고 한다. 액션페인팅을 통해 평생 알코올중독과 우울증에 시달렸던 고통스러운 내면을 표현하고자 했던 폴록과 성공한 금융재벌 마르티네스의 행복한 내면적 만남이 상상되는가? 폴록이 살아 있다면, 그림의 예술적 가치가 경제적 교환가치로 환산되는 이 광경에 대해 뭐라고 했을까?



예술적 가치는 가격과 무관하다. 문제는 그림 가격이 아니라 예술적 가치를 돈으로 계산하는 태도다. 진본 소유가 그림을 즐기는 유일한 방법도 아니다. 중요한 건 캔버스를 통해 화가의 내면과 접속하고자 하는 열망이다. 그게 있다면 복사본을 거실에 걸어 놓아도 화가 사후에 진본에 1000억원을 쓰는 것보다 더 정중하게 예의를 표하는 것이리라.




[정동칼럼] 남재일 | 경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