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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승효상의 보이지 않는 건축, 움직이는 도시

‘포촘킨파사드’와 도시의 속살

18세기 중엽, 프러시아 출신으로 러시아의 절대군주가 된 예카테리나 2세는 남편인 표도르 3세를 축출하면서 제위에 오를 만큼 권력지향적 인물이었다. 그녀의 러시아는 폴란드 분할과 크림반도의 합병으로 영토를 확장하고 내부로는 행정개혁과 문예부흥을 성공적으로 이뤄 절정의 시대를 구가한다. 이방의 여인임에도 러시아의 전통과 풍습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모습으로 러시아 국민들의 사랑을 얻은 그녀는 예카테리나 대제로도 불렸으니 성공한 통치자였다.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른 당나라의 측천무후와도 곧잘 비교되는데, 특히 남성편력에서 둘은 막상막하였다. 그녀의 많은 정부 중에 크림반도 총독으로 임명된 그레고리 포촘킨이라는 인물이 있다. 1787년 여제가 크림반도를 시찰하겠다고 하자, 조잡하고 낙후된 마을 풍경이 마음에 걸렸던 포촘킨은 잘 정돈된 시가지 풍경을 그린 대형 가리개를 강변에 급히 줄지어 세운다. 그리고 주민들을 그 앞에 정렬시켜 여제가 배를 타고 지나갈 때 환호하게 하여 흡족하게 된 그녀의 환심을 사는 데 성공하였다.

이 총독의 이름에 건물의 정면을 뜻하는 ‘파사드’를 붙인 ‘포촘킨파사드’라는 단어는 그런 전시적 도시 풍경을 설명할 때 쓰는 건축용어로 남는다. 에이젠슈타인 감독이 만든 영화 <전함 포촘킨>을 기억하시는지. 다른 풍경을 빌려 합성시키는 몽타주 기법을 최초로 사용했다는 이 영화의 이름이 내겐 그래서 더 의미 있다.

전시용으로 급조한 거리 풍경, 이 ‘포촘킨파사드’의 경험을 사실 우리는 무지하게 많이 가지고 있다. 예컨대 1970년대에 남북회담이 성사되어 북측 인사들이 서울로 오게 되자, 이들이 지나가는 거리 뒤편의 거친 도시 풍경을 가리기 위해 합판을 세우고 페인트로 그림과 구호들을 집어넣었다. 그들이 물러가면 어김없이 가림판들은 쓰레기가 된다. 외국 정상들이 방문할 때도 가로변은 또 새 가리개와 현수막으로 뒤덮였고 우리들은 줄로 격리된 가리개 앞에서 국기를 흔들고 있었으니, 포촘킨의 도시와 다를 바가 전혀 없었다.

우리가 못살던 시절, 국빈급 손님들이 오면 대개 워커힐로 숙소를 잡게 했다. 1962년에 지은 워커힐은, 한국에 주둔하는 미군들이 휴가 때면 일본에 가서 쓰는 유흥비를 아깝게 여긴 군사정부가 워커나 맥아더 등 한국전쟁에 참전한 미국 장성의 이름까지 붙이면서 미군들을 붙들기 위해 급히 지은 위락시설이었다. 현실의 낙후된 시가지 풍경과 완전히 격리되었으니 고위인사들의 일탈과 방종이 보장된 환상의 세계였다. 외국에서 오는 손님들이 김포공항에 내려 이곳을 가려면 시가지를 통과할 수밖에 없는데 이 접근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 삼일(청계)고가도로를 만들기까지 한다. 근데, 고가도로가 지나는 청계천변의 가난한 풍경이 문제가 되자 고가 주변의 땅에 선형의 고층 아파트를 지어 그 바깥의 풍경을 가리게 했다. 이게 현재의 삼일아파트이며 실체화된 포촘킨의 도시였다.

그런데, 어쩌면 이런 포촘킨파사드가 우리가 사는 현대 도시의 전형적 모습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강남의 대로들을 가보시라. 대로변에 즐비한 고층 건물의 화려한 파사드, 그 위에 명멸하는 네온사인과 불빛들…. 욕망의 풍경이 만드는 환상으로 우리는 그 꺼풀 뒤의 실제 풍경을 쉽게 잊고 만다. 그러나 그 뒷길에만 들어가면 그 앞의 소란과는 비교할 수 없는 질박한 풍경이 전개된다. 집장사들이 만든 주택들과 거친 입면의 소형 건물들, 그 사이의 좁은 길…. 사실은 이런 속살의 풍경이 이 도시의 진실인데도 이 질박함이 싫다 하여, 주요 가로변은 죄다 근린상업지구로 지정하여 고층의 상업빌딩으로 가렸다. 우리가 살고 걷는 거의 모든 대로들이 그러하니 우리는 어쩌면 완벽한 포촘킨 도시에서 살고 있는 게다. 겉살과 속살이 다른 도시, 우리는 그래서 늘 떠도는 삶을 사는가?



지난주, 세종대로변 서울시의회 건물과 덕수궁 사이에 새로운 풍경이 나타났다. 남대문세무서 별관으로 쓰이던 건물 하나를 허문 결과이다. 이 땅은 원래 덕수궁의 일부로서 영친왕의 생모인 귀비 엄씨의 사당 ‘덕안당’이 있었던 곳이다. 일제는 1937년 이 자리에 덕수궁의 전각들을 내려다볼 수 있도록 4층 높이의 조선체신사업회관을 짓는다. 그 11년 전인 1926년, 바로 그 뒤편에는 성공회성당이 지어진 바 있었다. 영국성공회가 서울의 한복판에 짓는 건축인 만큼 주변의 도시 풍경을 고려하여 기품 있는 로마네스크 양식으로 세웠지만, 일제는 이 아름다운 건축마저 가리고 만다. 사실 이 성당은 예산 문제로 인한 미완성의 건축이었다. 1996년 이 성당의 증축이 논의되었을 때 마침 이 성당의 전체 설계도가 영국에서 발견되었다. 건축가 김원 선생은 이미 증축설계를 의뢰받은 바 있었지만, 주저 없이 원설계대로 지을 것을 제안하여 전체를 완성하게 한다. 로마네스크적 힘과 절제의 아름다움이 고스란히 나타난 이 건축은 가로변의 건물들에 가려져 안타깝게도 일반에게는 미지의 풍경이었다.



건축가 김원 광장 대표_경향DB



조선체신사업회관은 1930년대 당시 세계적으로 유행했던 모더니즘에 입각한 건축으로 내부 공간이나 외관의 구성이 준수하였다. 그러나 해방 후, 내부 개조와 증축을 거치면서 원형이 막대하게 훼손되었으며, 1980년에는 전면도로인 태평로의 확장으로 급기야 정면부가 뜯겨나고 막된 입면을 가진 가로변 건물로 남았다. 그러다 최근 국세청의 통합 이전으로 이 건물이 비게 되면서 서울시는 논의 끝에 허물기로 결단을 내린다. 그러자, 흔하지 않은 풍경이 펼쳐진 것이다.

로마네스크라는 서양식 건물이지만 오랫동안 이 땅에서 비바람 맞은 탓에 주변과 대단히 조화된 모습으로 성당이 나타났다. 지나는 이들이 발걸음을 멈췄다. 언제 이런 아름다운 풍경이 있었던가? 성소의 풍경이어서 그런지 번잡함에 지친 삶이 위안까지 받는다고 했다. 성당만 보이는 게 아니었다. 덕수궁 돌담길도 보이고 옛길도 나타나고 그 너머의 풍경도 보였다. 서울의 속살이었다.

사실 서울의 속살은 대단히 아름답다. 대로변을 벗어나 골목길로 들어서 보시라. 로마네스크 성당이 없다 해도, 한옥이 많아 보전지구로 지정된 곳이 아니라도, 그저 흔해 빠지고 남루하며 보잘것없는 동네의 길들을 걸으면서도 느껴지는 행복과 평화가 있다.

드디어 우리 도시의 진실이 여기에 있음을 알게 된 외국 관광객들도 요즘은 가로변을 떠나 속으로 스며들고, 골목길에는 예쁜 가게가 하나둘씩 자리하기 시작했다. 도시의 속살이 빛을 보기 시작한 것이다. 그게 다름이 아니다. 포촘킨파사드의 허망에 지친 우리가 도시에서 보고자 하는 게, 이제는 건축이 아니라 우리의 삶인 까닭이라는 것을 나는 안다.



승효상 건축가·이로재 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