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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에 시간의 때가 묻어 윤기가 날 때, 그때의 건축이 가장 아름답다고 나는 즐겨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남루했어도 거주인의 삶이 덧대어져 인문의 향기가 배어나는 건축은 마치 살아있는 생명체처럼 경이롭게 보이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한 건축은 건축가가 아니라 거주인이 시간과 더불어 완성해 가는 것이라고 말해왔다. 물론, 건축이 거주인에 의해 완성된다고 해서 건축가의 책임이 덜어지는 것은 아니다.

건축가는 모름지기 그 건축이 담아야 하는 시간을 재는 지혜를 가져 그 풍경의 변화를 짐작하는 통찰력을 지녀야 한다. 그런 건축가가 만드는 건축이면 시간이 지날수록 더욱 빛나기 마련이며, 그렇지 못하면 시간을 견디지 못해 소멸되거나 아니면 우리 환경의 일부가 되기 위한 비용이 만만찮게 들게 된다. 그래서 애초에 건강한 건축을 만드는 게 중요하다.

그런데 건축은 건축가 혼자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건축주가 있어야 하고 구조나 설비 등 다른 분야 엔지니어들의 협력이 있어야 하며, 시공이라는 대장정을 거쳐야 비로소 우리 삶을 담을 건축이 만들어진다. 이 험난한 과정을 거치는 동안, 건축가가 가진 처음의 생각을 끝까지 유지할 수 있다면 그는 위대하다. 수도 없이 많은 장애와 불가측의 요소들이 온 과정을 통해 즐비해 있어, 으레 상처투성이의 결과를 보고야 만다. 그 상처투성이의 건축이 그래도 감동을 준다면 애초의 모습은 대단히 숭고한 아름다움을 가졌을 것이다. 사회 구조가 후진적일수록 협업과 프로세스는 모순과 비상식으로 얽혀서 그 결과는 참담하기 마련이기 때문이다. 건축이 시대의 거울이라고 하는 오래된 말은 그 사회가 가진 시스템의 산물이 건축이라는 것을 일컫는 말과 같다.

건축의 시작은 의뢰인의 등장에서 비롯한다. 의사나 변호사도 마찬가지인데, 건축가와 더불어 세상에서 가장 오래된 이 세 가지 직업은 유사점이 많다. 개인의 건강을 지키며 사회의 정의를 지키고 가족의 단란을 보장하는, 많은 사람들의 생명에 대한 일인 만큼 그 직무에 대한 자격이 공인되어야 해서 라이선스가 필요하다는 것도 그 하나다. (건축가 중에서 자격증을 취득한 이를 건축사라고 한다.)

이 직업들은 의뢰인의 종류 때문에 그 성격도 바뀐다. 의사를 찾는 이들은 주로 몸이 불편한 환자들이며 변호사는 마음이 불편한 소송인들이 찾는 데 비해 건축가에게는 꿈을 꾸는 이들이 건축주로서 찾아온다.

그러므로 건축주의 꿈을 실현해주는 일이 건축가라는 직능의 목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게 다일까?

건축가는 건축주를 위해 일을 하지만 동시에 사회와 시민을 위해서도 일해야 하는 게 바른 직능이다. 왜냐면, 건축주가 자기 재산으로 개인의 집을 짓는다 해도 길가는 행인이나 옆집 사람도 그 집에 의해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좋은 건축은 집주인뿐 아니라 일반시민들의 이익도 지켜줄 수 있어야 한다. 어쩌면 건축주는 그 건축의 사용권만 가질 뿐, 소유권은 사회가 갖는 게 맞다. 건축이 목표하는 바는 단순한 부동산의 가치를 뛰어넘는 공공성의 가치라는 것인데 이는 바로 건축이 지녀야 할 윤리를 뜻한다.

서울 명동에 위치한 명동예술극장 (출처 : 경향DB)


그런 선한 건축 하나를 소개하면, 오래전부터 우리들에게 일상의 행복을 전하는 ‘샘터’라는 잡지의 사옥은 서울 대학로 대로변 가장 번화한 곳에 있다. 1970년대 말에 지어진 이 건축의 1층 가운데 부분은 비워져 있어 앞의 큰길과 뒤편 작은 길을 이어준다. 마치 도시의 로비처럼 바로 앞의 지하철역을 빠져나온 이들이 서로 약속하여 만나는 장소이며, 비 오는 날이면 길 가다 비 그치기를 기다리는 행인들로 북적이는 공간이다. 이 지역에서 가장 땅값이 비싼 곳이니 막아서 카페 같은 공간으로 쓰면 큰 수익을 올리련만 이 건축의 주인은 지난 수십년간 이 공간을 그냥 공공에 내주어 이제는 모두를 위한 공공의 장소가 되었다. 난삽한 상업적 풍경이 득세하는 대학로에서, 오랜 시간의 윤기가 맑게 배인 벽돌벽과 그 위를 덮은 담쟁이는 이 건축의 도시에 대한 헌신을 상징하며 그래서 넘보지 못할 기품이 늘 있다.

이 건축이 40년 가까운 세월을 한 장소에서 변함없이 건축의 윤리적 사명을 지키고 있는 것은 건축가 김수근 선생과 건축주 김재순 전 국회의장이 건축의 공공적 가치에 대해 완벽한 일치를 이룬 결과임을, 두 분을 익히 알고 있는 나는 능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런 행복한 결합만 있는 게 아니다. 건축주의 이익과 공공의 이익이 상충하는 경우가 있을 때, 그때 건축가는 누구의 편을 들어야 할까? 먼저 공공의 편에서 건축주를 설득해야 하는 게 직능의 의무이지만 그 설득이 유효하지 못하게 되면? 바른 건축가가 되기 위해서는, 아무리 그 일의 금전적 보상이 크다 해도 유혹에서 벗어나 마땅히 그 일에서 떠나야 한다.

오래전에 한 건축주가 제법 규모가 큰 건물의 설계를 내게 맡겼다. 땅은 대로변에 위치하였는데 다른 건물들이 죄다 도로경계에 바짝 붙어있어 나는 도시마당을 만들기 위해 건물을 뒤로 밀어 설계를 마쳤다. 내 설계안을 본 건축주는 임대효과를 높이기 위해 다른 건물과 마찬가지로 앞으로 당겨줄 것을 요구했으나 풍요로운 도시의 풍경을 이유로 물려야 한다는 의견을 내가 굽히지 않자 서로 심각하게 대립되는 지경이 되었다. 설득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안 나는 급기야 해서는 안될 말을 하고 만다. “이 집은 당신의 집이 아닙니다.” 그는 얼굴을 붉히며 떠나고 말았다. 그 당시 나는 건축가로 독립한 직후라 일이 궁하기 짝이 없었고, 규모도 꽤 되는 그 일은 사무실 운영에 참으로 요긴하였지만 실수하고 만 것이다.

그러나 한참 후에 다음과 같은 글을 읽게 되었다. 당나라 시인 유종원이 쓴 ‘재인전(梓人傳)’인데, 내용을 보면 오늘날의 건축가에 해당하는 재인의 직능과 태도에 대해 단호히 기술하고 있다. “부유아칙비(不由我則비) 유이이거(悠爾而去) 불굴오도(不屈吾道) 시성량재인이(是誠良梓人耳)”. 만약 집주인이 자기 주장을 내세워 직능을 방해하면, 유유히 떠나야 하며, 자신의 법도를 굽히지 말아야, 진실로 뛰어난 재인이라고 했다. 무려 1200년 전에도 이랬었는데…. 오래전 그 일은 실수가 아니었다. 나는 큰 위로를 받았다.


승효상 | 건축가·이로재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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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