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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유경희의 아트살롱

궁극의 드로잉


케테 콜비츠, ‘독일 어린이들이 굶고 있다’, 석판화, 1924년


케테 콜비츠의 드로잉은 ‘살아 있다’는 말로는 부족하다. 전쟁의 상흔을 그만큼 미학적으로 묘사한 화가가 또 있을까. 여자를 성적인 매력이나 여성다움으로 치부하던 시대에 ‘여류’라는 사실을 잊게 만든, 예술을 넘어선 경지의 예술을 보여준 이가 콜비츠다.

독일 표현주의를 대표하는 콜비츠는 전쟁으로 아들을 잃은 세상 모든 어머니들을 대변한 여성이자 화가였다. 그는 평생 병든 사람들을 무료 진료한 의사인 남편과 동지로서, 가난한 사람들과 함께 생활했다. 그런 콜비츠에게 닥쳐온 비극은 시대적인 것이었다. “아기의 탯줄을 또 한번 끊는 심정이다. 살라고 널 낳았는데, 이제는 죽으러 가는구나!” 1차 세계대전 때 열여덟 살밖에 안된 둘째아들을 잃고, 2차 세계대전에서는 손자를 잃었다. 그에게 이보다 더 큰 고통과 슬픔은 없었다. 이때부터 콜비츠의 판화는 전쟁으로 아들을 잃은 모든 어머니들을 대변하며 젊은이들을 더 이상 전쟁터로 끌고 가지 못하도록 하는 방편이 되었다. 그렇게 전쟁의 참혹함과 잔인함을 알리기 위한 일을 지속했다.

콜비츠의 그림이 절실하게 몸으로 파고들 듯이 각인되는 것은 그것이 드로잉에 근간한 작품(판화일 경우가 많다)이기 때문이다. 흑백이라는 절제된 목탄 드로잉의 특유한 파토스적 붓터치는 그대로 숭고한 생명력의 극치를 부여해 준다. 한국에서는 드로잉이라는 장르 자체가 회화로 불리지 못하고, 그저 습작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폄하되곤 한다. 콜비츠의 작품같이 견고한 드로잉 회화를 목도하는 날이 오길 기다리며, 또한 그것이 제대로 대접받는 풍토가 형성되기를 바란다.

지금으로부터 65년 전에 존재했던 저 퀭한 눈동자의 ‘우리의 아이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초로가 되었을 그들의 눈동자는 또 어떻게 변해 있을까? 그들은 자기 눈동자를 잘 지켜내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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