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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시시각각 예술 칼럼

[기고]‘법보다 예술버스’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 저작자·발명가·과학기술자와 예술가의 권리는 법률로써 보호한다.”

대한민국 헌법 제22조는 예술의 자유 및 예술가의 권리를 보장하고 있다. 예술의 특권적 지위를 위해서나 예술가가 우월하기 때문이 아니다. 어느 시대든 예술의 사회적 역할과 가치가 지배권력으로부터 억압받지 않고 작동할 수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 사회가 예술가의 권리를 법률로써 보호해야 하는 것은 예술가들이 가난하고 힘이 없기 때문이 아니다. 현대 자본주의에서 예술이 창조경제를 이끌고, 문화융성을 위해 애쓰기 때문은 더욱 아니다. 예술가들은 세상을 조금 더 감각적으로 마주하는 역할을 해왔으며, 타인의 고통과 사회적 모순에 좀 더 민감하다. 그래서 예술가들은 늘 국가권력의 폭력에 예민하며, 지배계급의 모순을 비웃고, 사회적 약자들의 삶에 공감하며, 새로운 세계를 향한 불온한 상상을 즐겨 한다. 예술의 감수성과 창조성은 자주 국가권력과 지배계급을 불편하게 만들지만, 이처럼 불온하고 위험한 예술일수록 우리 사회에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에 예술은 법률로써 보호받을 가치가 있다. 헌법 제22조는 국가권력과 지배계급이 불쾌하더라도 예술을 함부로 대하지 말라는 일종의 경고문이자 안전장치다.

박근혜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문화융성’을 강조한 이후 오히려 대한민국 곳곳에서 예술이 구속되거나 처벌받는 괴이한 일이 늘어나고 있다. 세월호 참사의 진실을 요구했기 때문에, 밀양 할머니들의 땅을 함께 지켰기 때문에, 제주 강정 앞바다의 군사기지 공사를 반대했기 때문에, 부당하게 해고당한 노동자들의 고통과 함께했기 때문에, 대통령과 정부를 노골적으로 비판했기 때문에…. 대한민국의 예술가들은 지금 이 순간에도 법률의 보호를 받는 것이 아니라 법률의 처벌을 받고 있다. 자신의 치부를 드러내는 예술이 불편한 지배권력은 예술에 대한 구속을 강화하고, 법리적 가치나 민주주의 원리보다는 권력관계에 익숙해진 법원은 앵무새처럼 ‘실정법’을 반복하며 예술을 처벌하는 법률자판기로 전락했다.

희망버스 유성기업 고공농성장으로 (출처 : 경향DB)


이런 예술 탄압에 저항하기 위해 11일 오전 8시 서울 대한문 앞에서 부산고등법원을 향해 버스가 출발한다. ‘법보다 예술 버스’라 불리는 이 버스에는 ‘희망버스운동’에 참여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서게 된 박래군, 송경동, 정진우의 재판에 함께하는 다양한 사람들이 탑승한다. 사회적 기획으로서 예술의 역할과 가치를 널리 알려준 희망버스운동에 대한 존중과 법률적 판단을 지켜보기 위해 예술가들 역시 이 버스에 탑승할 것이다.

우리는 희망버스운동이 법률적으로는 위험한 경계에 서 있을지 몰라도, 예술적으로는 거대한 자본의 모순을 고발하며 사회적 죽음을 강요당하던 한 노동자와 다수의 시민들이 함께 교감하고 연대했던 사회적 사건이라 확신한다. 희망버스운동은 현대 예술의 관점에서 본다면 놀라운 ‘관계의 미학’이자 파격적인 ‘공공예술’이다.

우리는 기대한다. 오늘 부산고등법원이 대한민국 헌법 제22조를 기억하기를, 지배권력의 폭력을 고발해온 불온하고 용기 있는 예술들을 법률적 가치로 보호하기를. 물론 그 결과와 무관하게 예술들은 결국 청와대, 국회, 법원 그리고 교도소 위를 거닐 것이다. 늘 그랬듯이. 그것이 예술이 해야 할 중요한 사회적 역할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이원재 | 문화연대 문화정책센터 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