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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마모토 화호 농장 미곡창고. 세월에 몸을 맡긴 채 숨을 거둘 날을 기다리는 중입니다.


<청춘남녀, 백년 전 세상을 만나다>라는 책을 펴낸 후, 근대문화유산 기행은 우리 부부의 일상이 되었습니다.
그 후 다시 가본 곳도 있고 새로이 가보게 된 곳도 여럿 있었어요. 그 중에서 화호리는 다시 한번 가보고 싶은 곳으로 첫손에 꼽히던 곳입니다.

화호리라는 지명을 들어보셨나요? 전라북도 여러 소읍 중 하나인 이곳은 번듯한 건물도 화려한 거리도 없는 고요한 마을입니다. 사전 정보 없이 문화재청에 소개된 일제강점기 가옥의 주소만 달랑 들고 찾아갔던 화호리. 이곳에 도착했을 때, 묘한 예감을 솔솔 밀려오더군요. 문화재로 등록된 것도 아니고 귀에 익숙한 지명도 아니지만 마을 입구에 서있는 거대한 건물이 시선을 사로잡았습니다.

그것은 거대한 창고 건물이었습니다. 이곳에는 어떤 사연이 있길래, 콘크리트도 튼튼하게 지어진 창고가, 그것도 이렇게 큰 창고가 있었던 것일까요? 이 지역의 너른 평야를 보면 쌀가마니를 쟁여두던 창고였겠지만, 부서진 출입구하며 잡초가 가득한 주변을 보면 오랫동안 방치된 듯한 모습이었지요.

전북에 펼쳐진 거대한 황금 들녘에 적잖이 감동을 받고 올라온 후 자료를 찾아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알고 봤더니 화호리는 일제강점기 전북 지역에 대농장을 일구던 구마모토 리헤이의 소유지였으며 농장의 흔적이 지금도 많이 남아있는 지역이었던 것이지요. 구마모토의 농장은 군산을 중심으로 개정면 일대 외에도 화호리 역시 그의 농장이 거대 화호 농장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우리가 호기심을 갖고 보았던 거대한 창고는 구마모토 농장에서 수확한 엄청난 미곡을 보관하던 미곡창고이자 농장사무실이었던 것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시간을 들여서 꼼꼼히 들여다보았을 텐데, 놓치고 온 것들이 무척 아쉬웠습니다.

                  오랜만에 답사 동행자가 생겼습니다. 잡지사 취재팀과 함께 답사를 떠났습니다.


2011년 1월 중순, KTX 매거진 촬영팀과 함께 근대건축답사를 다녀왔습니다. 매거진 팀에서 살펴보고자 했던 장소가 때마침 김제와 정읍 일대였습니다. 큰 눈과 추위에 구제역까지 발생하여 쉬운 답사가 될 리 만무했지만 이때다 싶어서 화호리를 첫 답사지로 추천했지요. 화호리에 비중을 두고 살펴보면서 신태인읍 도정공장 창고, 하시모토 농장사무소, 백구금융조합, 부용역까지 살펴보았습니다.

그 때 다녀온 답사지를 두번으로 나누어 소개할까 합니다. 김제, 정읍이라고 해도 군산과 맞닿아있는데다 서로 밀접하게 관련된 지역이라 하나로 묶어서 답사 여행을 계획해도 좋겠습니다. 아침 일찍 서두른다면 하루에 모두 다 볼 수 있답니다.

군산 일대를 여행하다 보면 구마모토 리헤이에 대해 자주 듣게 됩니다. 그는 군산, 김제, 정읍 일대의 3,200정보의 토지를 소유하여 ‘전북 지주왕’으로 불렸던 인물입니다. 1정보는 1천 평을 말하는데, 일제강점기 말엽에 그가 소유한 토지는 여의도의 10배에 이른다고 합니다. 그는 만경강, 동진강 일대의 비옥한 땅을 소유하고 너른 평야를 샘솟는 곡식들을 모두 일본으로 반출하여 갑부의 반열에 오른 인물이지요.

일제 강점기 초기 군산 일대에서 농장경영을 하던 인물들을 살펴보면 농장 경영의 선구자로 꼽히는 미야자키 가타로가 있고, 2,300정보의 농장을 세운 후 동양척식주식회사에 토지를 판 오쿠라 이하치로, 오사카 출신의 미곡상 후지이 간타로가 세운 후지모토 합자회사(이후 불이흥업주식회사로 개칭합니다), 미쓰비시 재벌의 이와사키 히사야, 그리고 종교를 통해 지주로서 탄탄하게 자리잡은 마스토미 야스자에몬 등이 있습니다. 특이한 점은 전북에 진출한 지주들은 오사카 출신이 많으며(오사카는 예부터 상업이 발달했지요. 돈의 흐름을 아는 사람들이 많았던가 봅니다.) 메이지 유신으로 세력이 약화된 지역의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그들은 일본 내에서 얻을 수 없는 부귀를 위해 조선땅으로 건너온 것이지요.

구마모토 리헤이는 일본에서 건너온 정치인, 경제인들과 비교하면 크게 중요하게 다뤄지지 않습니다만, 전북 지역에는 그의 흔적이 곳곳에 남아있습니다. 젊은 시절, 조선으로 눈을 돌린 구마모토는 청일 전쟁 이후 조선을 시찰한 후 전북의 땅을 낙점했습니다. 그 후 오사카 유지들을 독려해서 투자를 받아 전라북도의 땅을 사들이고 이 땅을 관리하며 조선과 일본을 오가게 됩니다. 그러다가 일본 내 경제가 악화되면서 투자자들이 헐값에 조선의 토지를 내놓게 되는데, 구마모토는 이때 이 토지들을 사들여 거대지주로 등극합니다. 시대가 그의 편이었나 봅니다.

농장은 중간 관리자인 마름을 두어 조선인 소작농을 부렸는데, 구마모토 농장의 소작료는 다른 곳보다 높았습니다. 개량 농법을 사용하여 생산량이 높았기 때문이지요. 높은 소작료를 내지 못하면 소작인을 내쫓고 땅을 몰수했지요. 이렇게 구마모토 농장은 땅과 부를 축적해갑니다.

다시 찾아온 화호리. 황금들녘 대신 흰 눈이 덮인 들판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지난번 방문과 마찬가지로 햇살이 짱짱하군요. 화호리 마을 초입에 세워진 거대한 신전을 다시 찾아갑니다. 2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부서져 있고 문도 막혀있지만 계단 아래로 내부로 들어가보았습니다. 아!

          오늘 답사자들은 허허벌판 폐허에 탐닉하는 존재들입니다. 미곡창고의 내부를 들여다볼까요?


1,2층을 나눴던 흔적이 뚜렷하게 남아있어요. 한문만 보면 까막눈이 되네요. 블라블라... 글자도 쓰여져있고.
 

          문 안에 작은 공간 안에는 우물이 있습니다.


만국기가 펼럭이고 고장난 앰프도 널브러져 있지만 내부를 더듬어볼 만한 구조물은 그대로 남아있습니다. 천장을 떠받치고 있는 목조 트러스와 견고한 콘크리트로 마감한 벽체, 그리고 문과 창문의 흔적까지 고스란히 보입니다. 구조적으로 보면 2층으로 사용된 건물인데, 1,2층이 언제부터 이렇게 뚫려 있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꽤 오래 된 것 같습니다. 외부에서 느껴지듯 창고 안은 거대했습니다.

동네 할머니께 여쭤보니 5년 전쯤 약장수가 와서 마을 어르신들을 모셔놓고 창고 안에서 시끌벅적 요란을 피웠던가 봅니다. 휘날리는 만국기와 앰프는 그날의 흔적이라고 합니다. 이 창고보다는 좀 작은 규모이긴 하지만 창고가 네 개가 더 있었다는 말씀도 해주셨어요. 화호 농장의 쌀가마니가 창고에 모여있다가 신태인으로 집결한 후 군산으로 옮겨졌고 이어 일본으로 건너갔습니다.

                                  만국기와 앰프까지.... 스토리가 많은 건물이군요.

 

                                  미곡창고는 광복 후 화호중앙병원으로 바뀌었습니다.


                                  입구가 위풍당당하군요. 펄럭이는 적십자기하며.


                                  잠시 화호여고로 사용되었다고 해요.


화호 미곡 창고는 광복 후 마을의 건강을 책임지는 중앙병원으로 사용되었습니다. 정부의 농촌 지원이 끊어지자 병원은 운영이 어려워져 1972년 문을 닫았습니다. 그 후 잠시 화호 여고 교사로 이용되기도 했지요. 미곡창고는 참 다양한 길을 걸어왔습니다. 그 동안 없던 창문이 생겼다가 다시 막혔고 정문이 생겼다가 막혔으며 2층 계단이 놓였다가 무너졌지요. 세월이 길었던 탓일까요? 마을 사람들은 건물에 대한 어떤 애증도 없이 살아가고 있습니다.

          다우에 가족이 살았던 가옥 겸 사무실. 한때 화호우체국으로 사용된 적도 있다고 합니다.

 
화호리는 구마모토 농장도 있었지만 다우에 타로, 오사와 신조와 같은 일본인들이 토지를 보유하며 살고 있었습니다. 일본에 살면서 농장을 원격조종했던 구마모토와 달리 이들은 화호에서 제2의 인생을 시작한 사람들이지요. 화호는 일본인 거류지로서 일본 어린이를 위한 학교와 상점, 여관 등이 길을 따라 밀집되어 있었습니다. 조선인촌과 학교는 일본인촌과 떨어져 있었습니다.

다우에 가족이 살았던 목조 가옥은 형체만 겨우 남아 세월의 흐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고 있습니다. 광복 후 우체국으로 사용되기도 했던 전력에 비하면 참 초라한 모습입니다. 지붕이 내려앉았고, 집을 이루던 기와며 흙과 나무가 모두 지난 세월처럼 흘러내리고 있습니다. 좁은 복도를 중앙에 두고 양쪽으로 방이 놓여있고 안쪽에 큰 규모의 부엌이 있습니다. 좁은 계단을 따라 2층으로 올라가니 널찍한 방이 나옵니다. 동쪽과 남쪽을 향한 창이 많아 바깥의 바람과 햇살이 그대로 들어옵니다. 좀 일찍 문화재로 지정했더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운 마음이 들었습니다.

          모든 것이 허물어지는 와중에 튼튼하게 남아있는 지붕지지 장치.


          다우에 가옥의 측면 2층. 창문 안은 작은 방이 있습니다.
 

          아슬아슬한 계단을 올라 2층 방을 구경합니다. 마을 아이들의 낙서가 가득합니다.


일본인들이 묵었던 여관 건물도 그 모습을 남겨두고 있습니다. 여관은 광복 후 양조장 주인의 살림집으로 바뀌어 따뜻한 보금자리로 오랫동안 구실을 다해왔고 양조장으로 쓰였던 외부 건물은 농사도구를 쟁여두는 창고로 바뀌었습니다. 사람의 온기가 집을 살린 것 같습니다.

 

일본인들이 머물던 옛 여관은 마을 사람들의 살림집이 되었습니다. 살림살이에 맞게 많이 개조했지만 어렴풋이 옛 모습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화호 농장의 병원으로 사용되었던 일본식 목조가옥. 역시 살림집으로 사용되고 있지요.


                                  위 가옥의 옛 모습입니다. 의사들이 환자를 돌보던 농장 부설 병원이었지요.


화호 마을에는 옛 가옥들이 많이 남아있지만 마을 주민들의 살림집으로 바뀌면서 보통의 농촌가옥인지 옛 건물인지 구분이 모호하게 보입니다. 소개해드린 건물 외에도 등록문화재로 지정된 농촌가옥도 있고 화호 농장의 진료소로 사용했던 일본식 가옥도 찾아볼 수 있습니다.

고요한 소읍의 건물들은 그저 사람들의 보금자리가 되어 지금껏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담으며 남아있습니다. 이런 건물들을 일제강점기의 분노 혹은 치욕이라는 이름으로 단죄하고 싶지 않습니다. 지금은 마을 사람들에게 기꺼이 몸을 내맡기는 그저 착한 집들이며 세월의 흐름에 조용히 숨을 거둘 시간을 기다리는 순응의 집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너르고 풍요로운 평야의 움트는 생명력에 비하면 인간이 지은 건물이란 얼마나 초라한 것인지요.

 
* 자료사진은 <20세기 화호리의 경관과 기억>에서 재촬영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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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마모토 화호 농장 미곡 창고

- 주소가 나와있지 않습니다. 하지만 화호리 마을 초입에 있기 때문에 쉽게 찾을 수 있습니다.

다우에 농장 사무실 겸 살림집
주소- 전라북도 정읍시 화호리 335번지

화호 농장 진료소
주소- 전라북도 정읍시 화호리 766-9번지

소화여관
주소- 전라북도 정읍시 화호리 454-1번지

더 읽어볼 책----











20세기 화호리의 경관과 기억
(20세기 민중생활사 연구단/ 눈빛)

화호리 마을 역사를 주민들의 구술을 통해 살펴본 자료입니다. 꼼꼼한 사진자료와 주민들이 갖고 있던 옛 자료를 보는 재미도 있지요. 이런 책이 많이 나와주면 좋겠습니다.











식민지 조선의 일본인들(다카사키 소지/ 역사비평사)


도대체 어떤 사람들이 조선을 찾아왔을까요? 그들은 이땅을 어떻게 생각했고 이나라 사람들을 어떻게 생각했을까요?그게 궁금해서 찾아보니 이런 책이 있더군요.











식민지 조선과 일본, 일본인 (이규수/ 다할미디어)

위 책의 역자가 호남지역의 주요 일본인들 및 사건을 추려서 정리한 책입니다. 구마모토 리헤이에 대한 내용은 단 한줄 뿐이더군요.구마모토 외에도 더 무시무시한 농장주들이 많았다는 뜻이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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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