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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송수정의 사진 속으로

디지털 검은 사각형

 

박상우, 디지털 검은 사각형, 2016


캔버스 위에 그려진 검정 사각형 하나. 러시아 화가 말레비치가 1915년 ‘검은 사각형’을 발표함으로써 미술은 무엇이든 그릴 수 있는 무한의 가능성을 얻었다.

 

한편으로는 형태와 색채를 사라지게 만든 이 사각의 절대성을 넘어설 수 없게 되었다는 뜻이기도 했다. 신과 인간 세계에 대한 재현의 강박으로부터 도망치던 서양 회화가 점선면으로 응축되더니, ‘검은 사각형’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회화의 모두 구성 요소를 삼켜버렸다.

 

그 순간 말레비치의 표현대로 예술은 대상의 멍에로부터 해방되었고, 평면의 캔버스는 한없이 깊은 비가시의 세계로 들어섰다. 덕분에 회화는 존재의 심연까지를 건드리는 숭고한 매체로 변신했다.

 

여기 또 다른 검은 사각형. 말레비치의 작품 제목 앞에 디지털이라는 수식을 덧보탰다. 공들여 촬영한 휴대폰의 검은색 액정 화면. 이 사각형들은 공학적인 비례와 지능성까지를 겸비한다. 이 검정 화면이 열리는 순간 세상이 서로에게 연결되면서 삼라만상이 펼쳐진다. 추상 회화가 떨쳐내려 했던 구체적 대상이면서 심지어 세속적이기까지 한 사물의 표면. 그러나 이 매끈한 사각형의 존재 가치가 말레비치의 사각형보다 가볍다고는 말할 수 없다.

 

사진이론가 박상우가 룩스에서 열고 있는 첫 개인전 ‘뉴 모노크롬-회화에서 사진으로’는 사진의 매체성을 고민한 이론가의 실천 무대다. 그는 보이지 않는 것, 정신적인 것이 더 고상하다는 압묵적 강박을 깨고 휴대폰은 물론 금은이나 화폐 속에서 아름다운 모노크롬의 세계를 구현한다. 그 시도는 인간 시각의 한계를 넘어서려는 사진 매체의 절대성에 관한 신선한 실험이기도 하다.

 

송수정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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