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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조선령의 NO Limit: 현대미술과 극단의 실험들

리듬, 혹은 보이는 것 사이의 틈


             

월드컵이나 유로 같은 큰 경기 할때만 열올리는 냄비 축구팬이지만, 축구를 좋아한다. 이유는 단순하다. 아름답기 때문이다. 축구가 무식한 경기처럼 보여서 관심이 없던 시절이 있었는데 그건 아마도 잘 하는 플레이를 본 적이 없어서였던 거 같다. 2002년 월드컵 때 불현듯 축구의 매력을 발견한 후 죽 축구팬을 자처하고 있다.

최고의 플레이어들이 펼치는 경기에는 한 편의 발레 같은 우아함이 있다. 그것도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표현수단인 몸을 통해서 구현되는 것이라 핵심을 꿰뚫는 것 같은 간결함과 깊이를 동반한다. 

얼핏 보면 축구는 폭력적이고 무질서해보인다. 하지만 그 속에는 숨겨진 질서가 작동하고 있다. 더 매력적인 건, 그 질서는 미리 정해진 게 아니라 매순간 실현되면서 드러나는 질서라는 거다. 

축구는 공을 차는 경기가 아니라 공간을 창조하고 공간을 지배하는 경기이다. 하지만 축구가 창조하는 '공간'은 형체를 가지고 고정돼 있는 공간이 아니라, 순간적으로만 창조되고 다음 순간 사라져버리는, 끊임없이 생성과 소멸 속에서만 존재하는 것이다.  

축구는 눈에 보이는 것에만 익숙해 있는 우리들에게 변화, 움직임, 리듬의 차원이 있다는 걸 드러내준다. 앞에서 축구의 우아함이라고 썼는데, 우아함은 기본적으로 정지된 것이 아니라 움직이는 것에 적용할 수 있는 단어이다. 우아한 이미지라는 말은 좀 이상하지만 우아한 움직임이라는 말은 어울리는 건 이 때문이다. 

축구가 미술과 닮았다는 생각을 종종 한다. 아니 어쩌면 축구는 현대미술이 지향하는 걸 이미 갖고 있다는 생각을 한다. 현대미술의 지향점 중 하나가, '이미지를 통해서 이미지화할 수 없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라면 말이다. 

이런 점 때문일까. 축구를 소재로 한 미술작품이 종종 있다. 독일작가 하룬 파루키(Harun Farocki)의 <딥 플레이(Deep Play)>(2007)도 그 중 하나다. 필자는 이 작품을 2007년의 카셀 도큐멘타 12에서 봤는데, 최근 한국에서도 전시되어서 반가웠다(플랫폼 2010:프로젝티드 이미지, 아트선재센터, 2010, 11.3-11.19). 미술이 무슨 소재인들 못다루겠냐만은 축구와 미술의 관계는 좀 특별하게 느껴진다. 필자의 개인 취향만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딥 플레이>가 축구의 매력을 보여주기 위해 만들어진 건 아니다. 어쩌면 월드컵이라는 전세계적 이벤트의 스펙터클한 성격을 해체하고 비판하기 위해서 만들어진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측면에서 이 작품을 보면 오히려 지루하다는 것이 필자의 소감이다. 현대사회, 미디어, 스펙터클, 이런 것에 대한 비판은 새롭지 않다. 보이는 것 사이의 '틈'과 '리듬'이라는 면에서 감상하는 게 더 흥미롭다. 

<딥 플레이>는 2006년 7월 9일 베를린에서 열린 월드컵 결승전(이탈리아 대 프랑스)을 소재로 한 작품이다. 승부차기를 포함해서 장장 두 시간 15분에 걸친 경기를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작품을 다 보자면 두 시간 15분이 소요된다는 뜻이다. 하지만 우리가 티비에서 봤던 그대로의 중계를 보여주는 건 아니다. 열 두 개의 영상이 전시장 벽면에 투사된다. 하나의 경기를 열 두 개의 시각으로 보여준다는 의미이다. 

예를 들어 한 화면에는 월드컵 공식 중계 화면이, 다른 화면에는 작가가 개인적으로 촬영한 화면이, 또 다른 화면에는 경기에 대한 3D 시뮬레이션 화면이 보여지는 식이다. 프랑스와 이탈리아 축구 감독만을 찍은 화면도 있고, 각 선수들의 순간 스피드와 이동량을 도표화해서 보여주는 화면도 있으며, 경기장 출입구 폐쇄회로 카메라를 보여주는 화면도 있다. 

 
 Harun Farocki, <Deep Play>(2007)

같은 장소, 같은 시각에 발생한 사건을 이 처럼 열 두 개의 방식으로 보여주는 이 작품은 우리가 '지각한다'는 것에 내재한 맹점이나 틈을 드러내준다. 그 누구도 동시에 이 모든 것을 지각할 수 없다. 열 두 개의 영상을 모아놓은 전시장에서도 관객은 그 모든 영상들을 동시에 지각할 수 없다. 이 영상들 사이에는 기승전결의 깔끔한 내러티브 같은 것이 없으며, 하나를 볼 때 다른 하나를 놓치는 경험이 있을 뿐이다. 그래서 이 작품이 진정으로 존재하는 곳은 영상들 사이의 관계, 틈 속인 것이다. 


2006년 월드컵 결승전은 유난히 승부차기에 약한 이탈리아가 승부차기 끝에 우승컵을 거머쥐었다는 점에서도 흥미진한 경기였지만, 프랑스의 지네딘 지단이 자신의 은퇴경기가 될 이 경기에서 이탈리아 선수 마테라치의 가슴팍을 머리로 들이박고 그대로 퇴장당한 초유의 사건으로 유명한 경기이기도 하다. 새벽에 이 경기를 라이브로 본 필자 역시 이 장면을 목격하고 헉 하고 말았다. 


이후 지단의 행동을 둘러싸고 분분한 논란이 일었고 필자는 침을 튀겨가며 지단을 변호하고 다녔다. 지금 생각하면 변호라는 게 의미가 없었다 싶지만, 그냥 있을 수가 없었던 건 지단은 필자에게 아주 특별한 선수였기 때문이다. 필자가 축구의 아름다움을 인정하게 된 것은 다름아닌 지단 덕분이었으니. 그의 플레이는 축구가 어떻게 예술의 경지에 진입할 수 있는가를 더 이상의 설명없이 훌륭하게 보여주었다.

축구를 소재로 한 미술작품들이 유난히 지단을 많이 등장시키는 것도 지단의 플레이에서 필자가 받았던 특별한 느낌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고 멋대로 짐작해본다. <딥 플레이>만이 아니라 더글러스 고든과 필리페 페리노(Douglas Gordon & Philippe Parreno)의 <지단 : 21세기의 초상(Zidane, un portrait du 21e siècle)>(2006) 역시 지단이 나온 경기를 소재로 하고 있다. 

Douglas Gordon & Philippe Parreno, 'Zidane, un portrait du 21e siècle', 96min, 2006 (still image)

         

<지단, 21세기의 초상>(제목은 솔직히 좀 구리다)는 열 두 개의 영상으로 축구를 분해한다거나 애니메이션을 동원한다거나 하는 장치도 없이, 있는 그대로 지단의 플레이를 따라가면서 찍은 다큐멘터리이다. 스페인 축구리그인 프리메라리가로 카메라를 돌려서 2005년 4월 23일에 열린 레알 마드리드 대 비야 레알의 경기를 96분에 걸쳐 실시간으로 보여준다. 이 역시 작품을 다 보려면 96분이 소요된다는 의미이다. 

필자는 <페스티벌 봄>(2009. 3.27-4.12)에서 이 작품을 보았다. 당시 이 작품은 극장에서 상영되었는데 다큐멘터리라는 성격상 이렇게 보는 것이 더 어울릴 수도 있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갤러리에서 흘끗흘끗 보는 것보다 이렇게 집중해서 보는 것이 더 힘들다. 일단 극장에 들어가면 도중에 뛰쳐나올 수도 없고 끝까지 봐야 한다. 

작품을 감상하는데 힘들다는둥 뛰쳐나온다는 둥 하는 하는 말이 왜 나오는가 싶겠지만, 작품이 특수하다보니 그렇다. 축구 경기를 볼 때 96분의 시간은 금방 지나간다. 하지만 이 작품이 상영되는 극장에서는 그 시간을 견디는 것이 만만치가 않다. 

이 작품은 사실 축구 경기 그 자체에는 관심이 없다. 어느 팀이 이기고 있는지, 누가 패스했고 누가 슛을 쐈는지는 아무 관심이 없다. 고성능 카메라가 오로지 지단만을 뒤쫓는다. 그것도 아주 밀착해서. 땀방울 하나 하나가 보이고 숨소리 하나 하나가 들릴 정도로 익스트림 클로즈업이 많다. 거의 편집증적이다. 스코틀랜드 그룹 모과이(Mogwai)의 음악이 배경으로 깔리는 가운데 지단이 한 말들(인터뷰 내용)이 자막으로 깔릴 뿐, 다른 어떤 시청각적 장치도 없다. 

 
Douglas Gordon & Philippe Parreno, <Zidane, un portrait du 21e siècle>, 96min, 2006 (일부) (주의! 구린 화질)

있는 그대로의 액션만을 촬영한다고 하는 행위가 여기서는 그 극단에 이르러 오히려 거꾸로 초현실적인 효과에 진입한다. 

<딥 플레이>가 열 두 개의 영상으로 보여준 '지각경험 사이의 틈'이 여기서는 영상 하나를 통해 감지된다. 이 틈은 가까이 다가갈수록 드러나는 틈이다. 카메라가 지단의 모든 것을 담으려고 할수록 거꾸로 관객은 아무 것도 볼 수가 없게 된다. 몸으로 본다고 말해야 할까. 어쩌면 더 이상 본다는 말은 적절치 않고, 느낀다 혹은 감지한다고 말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현실은 해체되고 시간은 정지되고 움직임의 리듬 그 자체만 수수께끼처럼 명멸하는 이 경험은 96분의 시간을 무사히(?) 견딘 관객에게 주어지는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