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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송수정의 사진 속으로

무명

경제성장이 요동치는 중국에서도 길거리의 전광판이나 광고판 사용료는 비싸다. 영세한 사업자나 불법 자영업자에게는 당연히 그림의 떡. 대신 그들은 전봇대나 벽에다 낙서처럼 광고를 남긴다. 임대 안내는 얌전한 편이고 성매매나 무기 거래, 불법 시술처럼 은밀한 거래를 알리는 광고도 적지 않다. 당연히 공무원들은 이 광고를 지우는 데 혈안이다. 다만 어떻게 지울지에 대해서는 많이 신경 쓰지 않는다. 가끔 물걸레나 긁개를 사용해 말끔히 제거도 하지만, 그렇게 공들이면 품이 많이 드니 페인트로 아예 낙서를 덮어버리는 식이다. 정보는 사라졌지만, 벽 위에는 더 요란하게 흔적이 남는다. 채 지워지지 못한 전화번호와 몇몇 단어들이 페인트 아래에서 오히려 시선을 끌기도 한다. 벽 색깔과 맞추기 위해 흰색이나 회색을 주로 쓰지만, 페인트칠의 톤과 크기는 불법 광고의 수만큼이나 다양하다.

 

Wang Ningde, No Name no. 25, 2015

 

왕닝더는 이 페인트 흔적을 사진으로 일일이 채집한 뒤, 자신이 촬영해 둔 도시의 풍경이나 사람들의 얼굴 위에 포토샵으로 덧입힌다. 첫눈에 보면 캔버스 위로 붓질이 거칠게 난 그림 같기도 하고, 길거리의 그라피티를 촬영한 사진 같기도 하다. 불법 광고로나마 자신의 존재를 드러내는 이름 없는 수많은 이들, 그 익명의 개개인 얼굴과 그들이 벌이는 사건을 왕닝더는 아예 은폐해 버리려는 것일까. 오히려 왕닝더는 존재감을 지우려 할수록 어떤 식으로든 잉여의 흔적을 남기는 무명씨들이야말로 일상의 주체임을 강하게 피력한다. 공권력과 개인의 생존 게임의 결과에서 얻어진 그의 작업은 좀 거창하게는 인민이 역사의 주인공임을 호명해낸다.

 

송수정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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