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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조선령의 NO Limit: 현대미술과 극단의 실험들

보이지 않는 풍경들



얼마전 아이패드를 샀다. 기본적으로 작고 가벼운 컴퓨터라고 할 수 있지만 일반 피씨에 없는 여러가지 기능들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앱이다. 여러가지 앱 찾아보고 다운받는 재미가 쏠쏠한데, 그 중 꽤 유용한 것이 여행정보나 지도 관련 앱이다. 돌아다니기를 좋아하지만 심각한 방향치인 필자에게는 꽤 도움이 된다.


아이패드나 각동 스마트폰 지도앱들의 특징은 실시간 인터랙션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그 중 어떤 앱은 단순히 작동시키기만 해도 현재 위치를 자동적으로 알려준다. 세상 참 좋아졌다는 할머니 같은 소리가 나올법한 기능들이다.


GPS 기능이 있는 이런 지도를 쓰면서 필자는 종종 이것은 우리 시대의 독특한 풍경화라는 생각을 한다. 18세기의 네덜란드 풍경화와 19세기 영국 풍경화가 그 시대 문화의 하나의 아이콘이었듯이, GPS적 풍경화는 현대의 아이콘인 것이다.


그런데 GPS 적 풍경화는 전통적인 풍경화와는 전혀 다른 것을 보여준다. 눈앞에 펼쳐진 경치를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위치가 어디인지를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풍경은 우리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둘러싸고 있다. 말하자면 우리는 풍경의 일부이다.


풍경이 우리의 소유가 아니라 우리가 풍경의 일부인 이런 상황은 일찍이 발터 벤야민이 전통적인 것과 구별되는 현대 특유의 것이라고 말한 지각방식과 통한다. "보들레르의 몇 가지 모티브에 관하여"에서 벤야민은 보들레르의 시가 군중을 묘사하는 경우가 거의 없지만 그의 시는 대도시의 군중에 대한 것이라고 썼다. 보들레르 자신이 이미 대도시에 익숙한 사람으로서 군중의 외부가 아니라 내부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보들레르가 살았던 19세기 중엽의 파리는 현대 도시문화가 자리잡아가는 곳이었다. 유리와 철골로 만든 아케이드 상점가, 그곳을 어슬렁거리는 산책자들, 거리에 물결치는 광고간판, 신호등과 자동차의 불빛들은 벤야민의 표현대로 인간의 지각방식을 '충격'으로 재구성한다.


벤야민에 따르면, 충격으로서의 지각은 시각적이기보다는 촉각적이다.
그것은 어떤 고정점에 머물면서 대상을 하나의 이미지로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 움직이면서 대상의 내부를 '스캔하는' 지각방식이다.


벤야민은 20세기 초에 활동한 이론가이지만 그의 글은 예언적인 것이어서 21세기인 오늘날 오히려 더 잘 이해되는 면이 있다. 동시대의 미술작품 속에서 종종 이와 관련된 관점을 읽어낼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다.


김성수의 <메탈리카> 시리즈도 그 중 하나다. 화려한 형광색 선과 빛의추상화처럼 보이는 이 작품은 한편으로는 추상화가 아니다. 자세히 보면 대각선으로 뻗은 선들이 한 곳으로 수렴되면서 삼차원의 깊이가 있는 공간의 느낌이 만들어진다.





환각적인 공간감은 철골과 유리로 된 도시의 건물들이 만들어내는 풍경을 보여준다. 아니 보여준다는 말은 정확하지 않다. 볼거리는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화면 안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선들이 수렴되는 가상의 소실점이 그 맞은편에 있을 우리 자신의 위치를 알려줄 뿐이다. 화면을 가로지르는 빛의 궤적들은 방향을 알려주는 표지선 같은 역할을 한다. 벤야민이 보들레르의 시에 대해 말한 것처럼, 여기서 우리는 풍경 '속에' 있는 것이다.


프랑스에서 유학한 작가 김성수는 루브르 미술관의 유리 파사드가 이 작품의 모티브가 되었다고 한다. 한국에 돌아와서 도시의 화려함이 유럽보다 더 번쩍거리게 된 것을 것을 목격한 이후 이 모티브는 연작으로 발전했다. 그의 <메탈리카> 시리즈는 도시 안에서 볼 수 있는 무엇에 대한 작품이라기보다는 도시 안에서의 뱡향찾기 혹은 방향상실에 대해 말해주는 작품이다.


김성수의 작품이 보여주듯이, 현대 도시의 풍경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라 무엇보다 네온사인이나 서치라이트 같은 비물질적인 요소들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빛 그 자체를 이용해서 실제 삼차원의 공간 속에 구현되는 작품을 하나 감상해보자. 멕시코 출신 작가 라파엘-로자노 해머(Rafael-Lozano Hemmer)의 <vertical elevation>이 그것이다. 이 작품은 2000년 멕시코시티의 조칼로 광장을 시작으로 더블린 등 다른 몇 도시에서 실현되었다.





여기에도 전통적인 의미의 '볼거리'는 없다. 단지 밤하늘을 수놓으며 여러 각도로 교차하면서 변화하는 수십개의 서치라이트 불빛들이 있을 뿐이다. 이 불빛을 디자인한 것은 작가 자신이 아니라 작가가 개설한 웹사이트를 방문한 수많은 일반인들이다. 방문자들이 웹사이트에 서치라이트의 각도와 시간 등을 입력하면 그 결과가 실제로 반영되는 것이다.


일반인이 웹사이트를 통해 작품에 참여한다는 컨셉 자체는 흔한 것이지만, 그것을 '광장'에서 구현되는 일종의 공공미술로 만들었다는 점이 이 작품의 포인트이다. 밤하늘을 캔버스 삼아 실제의 공간이 하나의 풍경가 된다. 이 풍경화는 서치라이트 불빛이 가로지르는 밤하늘을 배경으로 만들어지는 것인 동시에 웹사이트를 통한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가상의 공간에서 만들어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풍경화 역시 우리 앞에 놓인 이미지는 아니다.


독일 작가 디륵 플리이쉬만(Dirk Fleischmann)의 <My Empire> 역시 사이버 스페이스라는 공간을 풍경화로 변형시키는 작품이다. 관객이 이 작품에서 볼 수 있는 것은 갤러리의 한 벽면을 꽉 채우며 거의 실제 크기로 투사된 도시의 스카이라인이다.



얼핏 사진이나 영화의 한 장면처럼 보이지만 이 풍경은 사실 한 건물 옥상에 작가가 설치한 웹캠을 통해 실시간으로 보이는 실제 독일의 도시풍경(프랑크푸르트)이다. 거의 움직임이 없는 듯 하지만, 그 앞에 오래 서 있으면 바람소리도 들리고 구름이 흘러가는 것도 보인다.


관객은 허구의 이미지가 아닌 실제 공간을 앞에 두고 있다, 그러면서도 이곳은 웹캠이라는 장비를 통해 가상의 공간 속에서만 존재하는 곳이다. 인터넷이 없었더라면 수만 킬로미터 가까이 떨어진 곳의 풍경을 실시간으로 볼 수는 없을테니 말이다. 이 점이 이 작품의 공간을 기묘한 것으로 만든다.


이 작품은 필자가 2005-6년에 부산시립미술관에서 기획한 한 전시에 소개되었다. 한국과 독일 사이의 8시간의 시차 때문에, 오전에 전시장을 찾은 관객은 밤의 도시를 보게 된다. 오후에 전시장을 찾은 관객은 일출과 아침노을을 목격하게 된다. 겨울이었기 때문에, 눈 내리는 것을 볼 수도 있었다. 아마도 프랑크푸르트에 살고있는 사람이 깨닫기도 전에 그 도시에 눈이 내리는 것을 보았을 수도 있을 것이다.


여기서 작가가 '나의 제국' 이라고 일컬은 것은 지금 우리가 눈앞에 보고 있는 풍경이 아니다. 그것은 분명히 실제하는 곳이지만 또 어디에도 없는 곳이기도 하다. 이 작품 속에서 전통적인 '이미지로서의 풍경'은 사라디는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현실 전체와 바꿔치기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