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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슬립시네마호텔

아피찻퐁 위라세타쿤, SLEEPCINEMAHOTEL(슬립시네마호텔), 2018, 영상, 혼합재료, 로테르담 WTC 설치 장면.


아피찻퐁 위라세타쿤은 6일 동안 특별한 호텔을 운영하기로 했다. 4시가 넘으면 서서히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하는 겨울, 로테르담 국제영화제 기간이었다. 로테르담 세계무역센터 한쪽에 ‘슬립시네마호텔’이라는 간판을 내걸고 투숙객을 맞이했다. 

 

전면의 큰 유리창 너머로는 전쟁의 폭격에 초토화된 도시를 과거 그대로 복원하기보다, 개성 있고 실험적인 새로운 건축에 내주어 현대건축의 메카가 된 로테르담의 마천루가 펼쳐졌다. 어둠이 조심스럽게 벽을 대신할 뿐, 전체가 하나로 개방된 객실이라 잠자리가 다 노출되는 환경이었지만, 객실은 일찌감치 매진되었다.

 

과거 인터뷰에서 사람들이 내 영화를 보다가 잠 들어도 괜찮다는 말을 몇 차례 반복한 작가는 도시의 스펙터클을 담은 큰 창문 위로 ‘가장 오래된 TV’라는 보름달을 닮은 스크린을 설치하고, 24시간 내내 영상을 상영했다. 이 영상은 숙면을 돕기도, 방해하기도 할 터였다. 깨어 있는 동안에도 사람들의 상상력과 교감할 수 있지만, 수면 중에도 우리의 무의식에 스며들어 어떤 작용을 할 법한 영상을 만들기 위해 작가는 ‘아이필름뮤지엄’과 ‘사운드 앤드 비전 인스티튜트’의 협조를 받았다. 한 세기 남짓 인간의 삶과 풍경을 기록한 영상 아카이브 가운데 잠자는 동물, 잠자는 사람, 하늘, 강, 바다, 숲, 항해, 비행 등의 장면을 선택해 편집한 이 영상은 호텔 개장일부터 폐장일까지 단 한순간도 반복되지 않았다. 6일의 러닝타임을 가진 한 편의 작품이었던 셈이다.

 

흘러가면 돌이킬 수 없는 시간처럼, 반복 없이 변화하는 영상은 투숙객이 마주하는 매 순간을 고유한 경험으로 만들어 주었다. 잊지 못할 하룻밤에 일조한 그 영상이 이미 누군가의 경험을 담은 흘러간 ‘역사’의 콜라주였다는 것을 알아차렸지만, 새로움이란, 고유함이란 다 그렇게 오는 법 아닌가.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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