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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전 막을 내린 광주 비엔날레. 막시밀리아노 지오니라는 스타 큐레이터가 총감독을 맡아서 맥락 풍부한 세련된 전시를 만들어냈다는 호평을 받았다. 

이번 비엔날레에는 서구 미술계의 이른바 '핫한' 스타 작가들이 꽤 참여해서 관심을 끌었는데, 기획자로도 활동하는 이탈리아 출신의 작가 마우리치오 카텔란(Maurizio Cattelan)과 올해 구겐하임 미술관에서 서른 네 살의 나이로 대대적인 개인전을 연 독일 작가(정확히 말하면 인도-독일 작가) 티노 세갈(Tino Sehgal)도 그런 작가들이다.

이 두 작가를 특별히 묶어서 거론하는 건 이번 광주 비엔날레에서 두 작가의 작품이 같은 방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건 
산전수전 다 겪은 관객들도 당황시킨 상당히 묘한 매치였다.  

우선 이것. 텅 빈 바닥에 티셔츠와 바지를 입은 젊은 여자가 누워서 춤 비슷한 걸 추고 있다. 아니, 말이 춤이지 바닥의 먼지를 죄다 휩쓸면서 이리저리 뒹굴고 있다는 표현이 더 맞을 듯하다. 아니 경련을 일으키면서 굴러다닌다고 해야 할까. 



살아있는 사람의 움직임이라고 보기에는 몸동작이 너무나 기묘하게 딱딱 단절적으로 끊어지기 때문에 사람이 아니라 내부 회로가 고장나서 제멋대로 움직이는 로보트나 인형 같다. 눈앞에 보고 있는 모양새가 너무나 이상하다보니 거의 모든 관객들은 그 앞에서  "정말 살아있는 사람 맞아?"하고 질문한다. 심지어 여자의 몸을 쿡 찔러 보기도 하고, 사람이냐 아니냐를 두고 설전까지 벌인다. 


이 작품을 본 뒤 고개를 다른 편으로 돌리면 여기엔 결코 덜 기묘하다고 말할 수 없는 또 다른 작품이 있다. 이번엔 흰 옷을 입고 갈색머리를 한 젊은 여자의 등이 보인다. 벽에 매달린 큰 관처럼 생긴 나무틀 안에 마치 예수처럼 손에 못이 박힌 채 매달려 있다. 손목과 팔목, 허리께엔 나무 부목 같은 것이 덧붙여져서 이 여자의 몸을 허공에 고정시키고 있다. 못박힌 손바닥이나 축 쳐진 머리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마치 핀이 꽂혀 있는 표본실의 나비 같은 느낌이 든다. 


관객들은 이 앞에서 "이거 진짜 사람은 아니지?"라는 질문을 또 한번 던지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자세히 보면 못박힌 손바닥이 실제 사람이라면 있을 수 없는 각도로 꺾여저 있지만, 그런 것에 안심하기에는 전체적인 모양새가 너무나 살아있는 사람 같기 때문이다. 늘어진 맨발에 실감나게 때까지 끼어있어서 더 그런 느낌이 든다.  


첫번째 작품이 티노 세갈, 두번째 작품이 마우리치오 카텔란의 작품이다. 세갈의 작품은 정확히 말하면 바닥을 뒹구는 여자가 행하고 있는 몸짓 그 자체이다. 여자는 오디션을 통해 선발한 현대무용 전공 학생이며, 세갈의 작품을 '실현하고' 있는 것이다. 카텔란의 작품은 그의 다른 작품들이 그렇듯이, 진짜 같이 만든 극사실 조각이다. 

엄밀히 말하면 두 작품은 서로 연관이 없다. 다만 큐레이터에 의해 이렇게 쌍으로 배치된 것 뿐이다. 이 두 작품을 같은 작가의 것으로 착각한 관객들도 많을 것이다. 어쩌면 작가들 본인은 이런 혼돈스러운 배치를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 큐레이터로서의 경험상 많은 작가들이 그렇다는 걸 알고 있다. 대부분의 작가들은 별도의 공간을 가지고 싶어한다.

하지만 묘한 것은 이렇게 나란히 놓으니 별도로 감상했을 때보다 확실히 생각할 거리가 많아진다는 것이다. 이 두 작품 앞에서 관객들은 똑같이 "이거 진짜 사람이야?"라는 질문을 던진다. 같은 질문이지만, 거기 담긴 의미는 사실 거의 정반대다. 세갈의 작품은 사람이 아닌 것 같고, 카텔란의 작품은 사람인 것 같은 거다. 두 작가 차이가 뭔지 더 알아보자. 
 
세갈의 작품은 사람을 필요로 한다. 아니 오로지 사람만을 필요로 한다. 그의 작품에 다른 물질적인 것이라곤 아무 것도 없다. 작품을 구현하는 퍼포머가 있을 뿐 그 어떤 오브제도 없다는 거다. 작가는 심지어 전시 카탈로그도 만들지 않고, 사진도 찍지 않는다. 모든 작품은 오로지 사람의 몸을 이용한 행위 그 자체일 뿐이다. 

 

그의 다른 작품, 예를 들어 <이것은 무척 현대적이다(This is so Contemporary)>을 보자. 미술관 전시 도우미들이 관객이 오면 "이것은 무척 현대적이다, 현대적이다, 현대적이다.."라는 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춘다. 그러다 언제 그랬는가 싶게 다시 도우미들로 돌아간다. 다음 관객이 오면 또 똑같은 행위를 한다. 

작품이 행위 그 자체라는 점에서 해프닝의 창시자 앨런 캐프로 같은 1960년대의 실험적 작가들의 유산을 이어받은 듯 보이지만, 그들과의 차이점은 세갈의 작품은 예술과 일상의 경계를 허무는 데 목적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예술의 엘리트주의를 비판하고 관객참여를 고무하자는 것도 아니다. 자본주의 시장에서 팔리는 오브제로서의 예술이라는 개념에 저항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세갈은 자신의 작품을 태연하게 판매한다. 이 경우도 그 어떤 서류나 물증이 오가지 않는다고 한다. 단지 공증인과 작가, 컬렉터 세 명이 만나서 작품을 구현한 후 그 자리에서 현찰을 지급하고 공증인이 이 거래를 인정하는 절차로 이루어진다. 

요컨대 세갈의 작품은, 어떻게 '아닌 것'(그의 작품의 모든 면면은 "-이 아니다"란 구조로 이루어져 있다)이 '아닌 것이 아닌 것', 즉 '어떤 것'이 되는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 다시 말하면, 부정의 극단에서 어떻게 긍정이 생산되는가 하는 것을 보여준다. "나는 생산하기의 다른 방식에 관심이 있다"라는 작가 자신의 말은 이를 뒷받침해준다. 이런 점에서 세갈의 작품은 정치적이다.    

반면 카텔란의 작품은 꽉 차 있다. 무형의 것도 아니고, 비어 있는 것도 아니고, 무엇을 부정하는 것도 아니다. 너무나 꽉 차 있어서 그 생생한 현존이 부담스럽고 기괴하게 느껴지는 지점에 진입한다. 카텔란이 즐겨 만드는 도상들은 말이나 쥐 같은 동물들에서, 히틀러, 교황 등의 알려진 인물, 단순히 익명적인 사람들까지 다양하다. 미술관의 흰 벽에 머리를 쳐박은 말을 설치하거나, 나무 위에 목매단 듯한 세 명의 어린이를 걸어놓는 등, 카텔란의 작품들은 세갈의 그것만큼이나 센세이션을 일으켜왔다. 


이 조각들은 실제와 거의 구별되지 않는 섬찍한 닮은꼴들이지만 또 자세히 보면 머리 크기가 너무 크다던가 하는 만화 같은 과장이 곁들여져 있다. 하지만 이런 과정에도 불구하고 기괴한 느낌이 가시지는 않는다. 

그의 작품에는 육체적 고난을 담은 종교적 이미지나 폭력성의 흔적에 묘한 유머가 곁들여져 있는데, 광주 비엔날레 작품처럼, 많은 경우에 죽음의 느낌을 담고 있다. 하지만 한번도 살아있어 본 적이 없는 인형들에 죽음의 느낌이 담겨 있다는 것은 기묘하지 않은가? 살아있지 않은 것들이 죽어 있고, 한번도 움직여본 적 없는 것들이 지치고 고단한 육체를 쉬고 있다.

이런 점에서 카텔란의 작품은 세갈의 그것과 정반대편에 있다. 세갈의 작품이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은데 무엇인가가 있다면, 이번에는 반대로 무엇인가가 꽉 차 있는 것 같은데 사실 아무 것도 없다. 그러니 광주 비엔날레에서 두 작가의 작품을 한 방에 배치한 큐레이터의 감각은 상당히 재치있다고 하지 않을 수 없다. 현대미술이 가고 있는 반대방향의 두 극단을 비교체험하게 해준 것이니 말이다. 생각해보면, 두 작가의 작품이 한 방에 있지 않았다면, "정말 살아있는거냐"란 질문이 이렇게 절박하게(?) 많이 나오지는 않았을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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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