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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희철의 건축스케치

운현궁

안국역 4번 출구를 나와 낙원상가 방향으로 발길을 내딛는다. 도로에 면해 기와지붕이 얹힌 담장이 도로를 따라 길게 드리워져 있다. 운현궁 기획전시실의 뒷면이기도 한 이 담장은 정문인 솟을대문으로 나를 인도한다.

 

운현궁은 조선말기 흥선대원군의 집으로 잘 알려져 있다. 운현(雲峴)이란 이름은 조선시대 천문을 맡아보던 관청인 서운관(書雲觀) 앞에 있는 고개(峴)라는 의미에서 따 왔다고 한다.

 

고종이 임금에 오르자 대원군은 자신의 집을 크게 확장하면서 궁이라 부르게 하였고 이후 이 집은 운현궁으로 불리게 된다. 운현궁은 원래 지금의 교동초등학교와 삼환기업, 그리고 일본대사관까지 달하는 큰 규모였으나 권불십년 대원군의 몰락과 함께 점차 지금의 규모로 축소되었다. 현재는 입구의 앞마당과 대원군을 지키던 경비들의 처소인 수직사와 노락당, 노안당 그리고 뒤쪽의 이로당만 남아 있다.

 

매표소를 들어서면 남북으로 길다란 앞마당이 놓여 있다. 방금 무슨 공연이 있었는지 무대세트 제거작업이 한창이다. 마당을 지나 또 하나의 솟을대문을 들어서면 사랑채인 노안당(老安堂)을 만난다. 높다란 기단 위에 앉힌 사랑채에서 세상을 호령하던 세도가의 한옥 모습을 면면히 살펴볼 수가 있다.

 

노안당 안쪽의 중문은 뒤쪽의 노락당(老樂堂)으로 연결된다. 안채에 해당하는 노락당은 고종이 민비와 가례를 치렀던 곳이고 이후 고종이 운현궁을 들를 때 거처로 사용하였다. 안채가 고종의 처소로 사용되다보니 또 하나의 안채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노락당 뒤쪽으로 실질적인 안채 역할을 하는 이로당(二老堂)이 지어졌다.

 

남자들의 출입을 막기 위해 ㅁ자 형태로 되어 있는 이로당은 복도를 통하여 노락당과 이어진다. 이러한 복도는 일반 사대부 가옥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것으로 궁궐의 복도를 사대부 가옥에 적용한 것이니 당대의 흥선대원군의 위세를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서울 중심가 큰 도로변에서 손쉽게 접할 수 있는 세도가의 위풍당당한 한옥 저택의 모습, 서울의 또 한가지 자랑거리가 아닐까?

 

윤희철 대진대 교수 휴먼건축학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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