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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원 모어 타임

“시간 그 자체가 아니라면 무엇이 시간을 가릴 수 있을까?” 코넬리아 파커는 런던의 세인트 판크라스 기차역을 운영하는 회사 HS1과 로열 아카데미가 협력·기획한 아트프로젝트 ‘테라스 와이어즈’ 시리즈 출품 제안을 받고, 처음에는 거절했다. 주최 측이 유로스타로 여행하는 사람들이 기차역의 철제 천장을 올려다볼 수 있는 작품을 부탁했지만 좋은 아이디어가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던 어느 날, 유로스타를 타고 프랑스에서 영국으로 돌아오던 그는 역의 벽시계가 다른 작업에 가려져 보이지 않는 장면을 목격한다.

 

코넬리아 파커, 원 모어 타임, 2015, 런던 세인트 판크라스 기차역 설치, 지름 5.44m ⓒ코넬리아 파커, RA

 

기차 출발 시간에 맞추기 위해 조바심 내며 움직이는 사람들로 가득 찬 기차역에서 시계가 사라지는 순간은 작가에게 시간의 의미를 환기시켰다. 그는 기차역의 ‘세속적’인 시간으로부터 초연한 시간을 표현해보고 싶었다. 이 아이디어는 시계로 시계를 가린다는 구상으로 이어진다. 그는 기존 벽에 걸려 있던 하얀 벽시계의 도플갱어 같은 시계를 제작해 천장에 설치했다. 크기도 모양도 같지만 색깔만 다른 검은 시계였다.

 

직경 5.44m에 무게 1.6t의 이 시계는, 기존 벽시계에서 약 16m 떨어진 천장, 역내를 걷는 사람들 머리 위에 매달렸다. 두 시계는 마치 시간의 빛과 어둠처럼 시각을 지시했다. 관객이 어느 위치에서 두 시계를 바라보느냐에 따라 둘은 30초 정도의 시간차를 보이기도 했고, 흰 시계가 검은 시계에 완전히 가려져 사라지기도 했다. 작가는 검은 시계를 런던 표준시보다 1시간 앞선 프랑스 시간에 맞추고 싶었지만, 승객을 혼란에 빠뜨릴 것 같아 차마 그렇게까지는 못했다. “시간의 지배를 받으며 위험한 삶을 사는 사람들”을 너무 큰 혼란에 빠뜨리지는 않겠다는 작가의 작은 ‘배려’였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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