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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이름을 갖지 못한 기억

 

△의 풍경-노근리, 2016, 피그먼트 프린트, 110×150㎝


사슴이 숨어 있다고 전해지던 한 부락 마을을 사람들은 ‘녹은(鹿隱)’이라 불렀다. 신화 속에서 지상과 천상을 매개하는 신령스러운 영매이자 영생, 재생의 상징성을 가지고 있는 사슴이 숨어 사는 곳이니, 그 마을의 기운은 상상 가능하다. 마을이 이름을 잃은 것은 일제강점기다. 마을 사람들은 그들의 의지와 무관하게 노근(老斤)으로 개명당했다. ‘녹은’이 어렵다는 이유였다. 이름을 빼앗긴 마을에도 일상은 흘렀다. 앞으로는 서송원천이 흐르고 주변을 산들이 둘러싼 전형적인 농촌 마을 사람들은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보낼 터였다.

 

일상이 어그러진 것은 전쟁의 폭력성 때문이었다. 1950년 전쟁을 피해 길 떠나던 이들, 굴 속에 대피해 있던 사람들을 향해 미군은 무차별적으로 총을 쏘았다. 300여명이 살해당했다. 당시 미군은 노근리 부근에서 발견한 민간인들을 적으로 간주하라는 명령을 받았단다. 사람이 죽었으나, 그 죽음은 마치 ‘아무것도 아닌’ 양 수면 아래로 가라앉았다. 권력은 입을 꼭 닫았다. 집집마다 매년 떼제사가 벌어졌으나 진실을 만나기까지는 긴 세월이 필요했다.

 

해방 이후 정치적 혼란과 전쟁으로 피폐해진 한국 사회가 맞닥뜨린 공동체 붕괴라는 현실에 대한 문제의식을 가지고 작업해온 고승욱은 노근리 쌍굴다리를 바라보았다. 벽 곳곳에 동그라미와 세모 표시가 그려져 있었다. 유족들이 학살의 현장을 보존하기 위해 총알 흔적에는 ○, 총알이 박힌 흔적에는 △ 표시를 해나간 결과 완성된 기묘한 벽화였다. 전쟁 이후 공동체적 규범이 사라졌을 뿐 아니라 공동체가 제공하던 사회적 안전망까지 무너져 내렸던 마을에서, 제대로 이름을 찾지 못한 채 지워질 것을 강요당한 이들이 남긴 학살의 흔적, 죽음에 대한 소리없는 증언이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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