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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대지진과 원전 사고가 발생한지 80일째. 한동안 방사능 비를 피해야 하니 일본 농수산물을 먹으면 안되니 하더니 언제냐 싶게 비도 맞고 생선도 사먹는다. 플루토늄이 흘러나오고 멜트다운이 일어나도 해는 뜨고 삶은 계속된다. 일본인들의 놀라운 침착함 뒤에 의도적인 침묵과 희생을 강요하는 일본 정부와 일본 문화가 있다는걸 알고 내뱉었던 아연실색의 소감도 이제 점차 무디어진다.

하지만 그건 딴 나라 사람인 우리 이야기고 당사자들에겐 시간이 흘러도 쉽게 극복할 수 없는 엄청난 트라우마가 생겼을 것이다. 바다 건너의 시청자에 불과한 내가 텔레비전의 영상을 보는 것만으로도 외상후 스트레스 중후군에 육박하는 충격을 받았는데 직접 당한 사람들은 어떨까 상상이 가지 않는다.

일본인들에겐 말 꺼내기도 미안한 일이지만 한동안 극심한 충격과 우울에 시달렸다. 세상의 모든 일들이 다 무의미하고 부질없어질 정도로. 원전 사태가 심각해진다는 뉴스가 연달아 나올 때는 이대로 지구가 멸망하는게 아닌가 싶었다(멸망까지는 아니겠지만 지금도 사태가 심각한건 분명하다).

생각해보면 아이티에서도 스촨성에서도 큰 지진이 일어났었는데 유독 이번 지진이 이렇게까지 큰 충격을 준 건 왜일까. 물론 원전 사태라는 가공할 재앙과 역사상 4번째의 지진이라는 엄청난 강도가 가장 큰 원인이겠지만 충격은 방사능 누출 소식 이전부터 생겼던 걸 보면 플러스 요인이 분명 있다. 아마도 일본의 발달한 매스미디어가 그 요인이 아니었을까? 지진과 쓰나미의 생방송이라는 사상 초유의 일이 일어났을 뿐 아니라 피해 지역을 찍은 놀랍도록 신속한 보도 사진들이 눈을 의심케 하고 현실감각을 마비시켰다.


시커먼 파도가 제방을 넘어 집과 자동차를 쓸어버리는 현장을 직접 눈으로 본다는건 예전에는 상상조차 못했던 일이다. 레고블럭 같은 것들이 흩어져 있는 듯한데 알고보니 흙 속에 쳐박힌 컨테이너들이다. 비행기들이 어린아이가 갖고 놀다 버린 장난감인 양 폐허가 된 활주로를 제멋대로 굴러다닌다. 원폭을 맞으면 이렇게 될까 싶게 형체를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전무한 마을 사진도 보았다. 이 장면들에 비하면 영화의 상상력은 얼마나 초라한가. 현실은 그 모든 상상력의 산물을 압도하고 모든 코멘트를 앗아가버린다.


(다시 보고싶지 않은 이미지들이지만 어쩔 수 없이 올렸다)

이 영상과 사진들의 힘을 이미지의 힘이라고 부를 수도 있겠지만 이 이미지는 허구가 아니라 현실에 속한다. 매스 미디어의 이미지들이 실재를 대체해버린 허구라는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의 주장은 이 압도적인 현실감앞에서 힘을 잃는다. "걸프전은 일어나지 않았다"라는 보드리야르의 명제는 이 앞에서 지탱되기 어려운 한가한 가설로 변한다.


이 영상과 사진들은 우리를 허구의 그물망 안에서 유희하도록 붙잡아두는 게 아니라 그 그물망을 찢고 더 이상 어떤 도피처도 없는 심연과 직접 맞닥뜨리게 만든다. 그런 점에서 이 이미지들은 파국의 이미지가 아니라 이미지의 파국을 보여주는 반(anti) 이미지이다. 이런 종류의 이미지를 전에도 본 기억이 있다. 10년전, CNN에서 세계무역센터 빌딩에 부딪혀 불타는 여객기를 보았을 때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다.

아무리 큰 재난이 일어났어도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 쇼크 불면증 우울증 같은 증세가 나타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미지의 힘이란 그만큼 강렬하다. 한 장의 사진이 열 마디의 말보다 오래 남는다. 미국이 오사마 빈 라덴의 시신 사진을 공개하지 않기로 한 것도 이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사진이 공개된다면 그 처참한 모습에 미군의 잔인함에 대한 규탄과 빈 라덴에 대한 동정 여론이 일수도 있을테니까.

이미지의 힘은 정서적 충격을 주는 힘이다. 그렇다면 그 힘을 치유에 쓸 수도 있지 않을까? 이미지를 직접 만드는 것은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을 표현하고 그래서 마음 속 상처를 조금이라도 치료하는 방법이 될 수 있다. 그렇게 생각한 한국의 한 미술치료사가 일본 미술치료사들과 함께 동일본 지진 재해 지역에서 외상후 스트레스 증후군에 시달리고 있는 아이들을 위한 미술치료 활동을 하고있다. 정은혜씨가 그 분이다. 이분은 페이스북에 compassion art project Japan이라는 그룹을 개설해 미술계 사람들에게 갖고있는 미술재료들을 기부해달라고 했다. 필자는 갖고있는 미술재료가 없어서 크레파스 붓 등을 사서 보내주었고, 많은 사람들이 호응해서 재료가 꽤 모였다. 이 재료들은 일본의 Japan Creative Arts Therapy Center (J-CAT-C) 소속 미술치료사들에게 전달되었으며 이들은 복잡한 철차 때문에 시간이 걸리는 공식 구호품 수송루트를 타지 않고 직접 재해 지역에 들어가서 활동하고 있다.


한국에서 보내온 미술재료로 그림을 그리는 후쿠시마현의 어린이들.

얼마전 내한하여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라는 제목으로 강연했던 도쿄 거주 미술가 나카무라 마사토씨는 자신이 운영하는 커뮤니티 아트 프로젝트 갤러리 3331(
http://3331.jp)의 장기 프로젝트 '동일본대지진 부흥지원 arts action 3331'(http://action.3331.jp)에 참가한 미술가들의 활동을 소개했다. 활동은 크게 두 가지로 분류된다. 전시를 열어 수익금을 재해 지역에 기부하는 것과 재해민들을 치유하는 이미지를 함께 만드는 작업이 그것이다.

후자의 사례를 몇 개 들어보자. 이이지와 코스케의 '벛꽃net 도호쿠'는 재해 지역의 사람들이 벛꽃 사진을 찍어 보내주면 작가가 프린트해서 전시하는 프로젝트이다.(http://exuok.exblog.jp/) 히비노 가츠히코의 'heart mark veiwing'(
http://heartmarkviewing.jp/)은 재해민들과 하트 모양의 장식물을 함께 만들어 건물을 장식하는 활동이다. 무라야마 슈지로의 'green line project'는 사라져버린 도호쿠 지방의 녹색 산과 들을 실제 식물에서 추출한 재료로 그리는 벽화 작업이다.(http://plantart.exblog.jp/14658647/)(http://action.3331.jp/000006.html)


'아트 치요다 3331'에서 운영하는 '동일본대지진부흥지원 arts action 3331' 프로젝트의 사이트 메인 사진. 

이런 프로젝트들은, 공공미술과 민중미술의 선례가 보여주었듯이, 나이브한 활동이 아닌가 하는 논란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예술성'의 차원에서는 그럴지도 모른다. 하지만 때로 예술가들은 예술성 이전에 이미지의 정서적 힘을 통해 사람들에게 다가가려는 노력을 한다. 정신적인 상처는 어떤 의미에서는 물질적인 것보다 훨씬 더 깊고 오래가지만, 잘 눈에 띠지 않고 그래서 자칫 가장 덜 돌보게 되는 부분이다. 이런 부분에 관심을 가지고 이런 부분을 돌보기 위해 나서는 사람들은 이미지의 정서적 충격과 또 그 힘에 대해 느끼고 있는 사람들일 수 밖에 없다. 한 장의 사진이 위안이 될 수 있고 한 가닥의 선이 마음에 힘을 줄 수도 있다. 그런 것이 있다는 건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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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