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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일식

카지미르 말레비치, 검은 원, 1913, 캔버스에 유채, 105×105㎝


얼마 전 미국에서는 1918년 이후 99년 만에 대륙 전체를 관통하는 개기일식이 있었다. 평생 한 번 보기 힘든 장관이라고 하여, 원정단을 꾸려 미국으로 가는 이들도 있었다. 달이 태양을 완전히 가리는 순간, 사람들은 태양을 잃어버리는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단다.

 

지구의 생태계에 가장 근본적인 영향을 미치는 태양을 연구하는 것은 천문학계의 오랜 과제이지만, 태양은 그 빛이 너무 강해 제대로 관측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과학계는 태양이 가려지는 이 순간, 태양을 제대로 관측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잡았다. 태양의 강렬한 빛이 사라졌을 때 비로소 볼 수 있는 것이 있었던 것이다.

 

러시아의 혁명과 개혁의 시기에 살았던 카지미르 말레비치는 1913년 오페라 <태양에 대한 승리>의 무대장식과 의상을 맡아 흰색 배경에 검은 사각형 콘셉트의 커튼을 제작했다. 이 작업은 그가 ‘절대주의’라고 명명한, 철저하게 비재현적인 회화, ‘검은 그림’의 단초가 되었다.    

   

새로운 질서로 개편되는 세계의 흐름을 체감한 그는, 세상의 형상을 모방하는 것이 아니라 순수한 색과 형태에 집중하는 작업을 통해, 눈에 보이는 세상 너머의 세상에 닿고자 했다. 현존하는 세계와 다른 질서를 가진 세계에 대한 관심을 키워나간 그는 그런 생각을 검은 그림에 반영했다.

 

그는 관객이 작품 속의 서사를 따라가면서 감상하는 것이 아니라, 화면이 전하는 감정에 집중하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 그가 선택한 것은 작품에서 현실과 연관되는 모든 것을 배제하는 일이었다. 오로지 검은 색면만 있는 화면이 전하는 감정, 그 긴장감을 마주하면서 지금까지 보아왔던 것과 다른 무엇을 경험할 수 있기를 기대했다. 그렇게 작가는 형태를 지운 세상에서 비로소 만날 수 있는 세계의 문을 열어주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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