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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유경희의 아트살롱

잃어버린 우리의 얼굴


 



‘잠자는 뮤즈’, 브론즈, 1910년, 길이 27㎝, 파리국립근대미술관 소장



오래전 처음 파리에 갔을 때, 내가 처음 만난 예술가는 콩스탕탱 브랑쿠시였다. 파리 온 시내에 축제처럼 나부끼던 황금빛 찬란한 깃발광고와 포스터가 바로 브랑쿠시의 ‘잠자는 뮤즈’였다. 그 황금빛 얼굴은 기묘하게도 음울해 보이는 파리의 고색창연한 건축물과 너무도 환상적인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마침 퐁피두센터에서 열린 브랑쿠시 회고전은 니체가 말한 우연이 주는 귀족적인 만남이었던 것일까!


1876년 루마니아에서 태어난 브랑쿠시는 11세 때 가출해 1904년 파리로 온다. 잠시 로댕의 조각에 심취했던 브랑쿠시에게 어느 날 로댕이 다가온다. 전시를 보고 그의 재능에 탄복해 조수 겸 제자가 될 것을 제안했지만 브랑쿠시는 거절했다. 큰 나무 아래서는 나무가 자랄 수 없다는 점을 깨달았던 것. 더불어 자기 예술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절대적이고 기본적인 형태, 빛나는 표면의 완벽성 등을 자유로이 혼자서 탐구하고 싶었던 것이다.


대표작 ‘잠자는 뮤즈’는 사지가 모두 사라진, 머리만 있는, 얼굴이라고 할 수도 없는, 몇 개의 선만으로 되어 있다. 이런 얼굴이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인가? 현대 추상조각의 거장답게 브랑쿠시의 조각은 단순화의 극치를 추구하는 등 매우 응축된 표현방법을 보여준다. 그는 사물의 본질을 포착하려는 욕망을 가지고 있었고, 사물의 외관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으로는 결코 자기만의 예술을 성취할 수 없다고 굳게 믿고 있었다. 이런 단순화와 신비화의 힘은 11세기 티베트 승려 밀라레파의 신비주의적 문헌에서 영향을 받았다.


아주 평온하기만 한 뮤즈의 잠을 누가 깨울 것인가? 그것은 아마 비울 것을 다 비우고, 버릴 것을 다 버린 순수하고 단순한 인간의 마음만이 할 수 있는 게 아닐까? 단순함에서 강력함이 오고, 이때 비로소 아름다움의 경지에 이르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