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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오지리에서

작가는 농부의 아들이다. 충남 서산시 대산읍 오지리에서 태어나 성장한 화가 이종구에게 농촌과 고향은 작업의 핵심이다. 그에게 고향의 농부들은 우리나라 농경문화 전통의 마지막 세대일 것만 같다. 그들은 근대화, 산업화 과정에서 소외되었고, 세계화, 자유무역협정(FTA)의 벽 앞에 무력했다. 시간은 흐르고 권력은 야멸차게 농부의 권리를 앗아가지만 그들은 농촌에서 농부로 산다. 다만 새로운 농부 세대의 등장이 요원할 뿐이다.

‘오지리에서’ 연작은 대선 포스터 앞에 앉은 농부들의 표정을 쌀부대 위에 그린 작품이다. 첫 작품은 1987년 대통령 선거 이후 농부들의 모습이고, 두 번째는 2002년 16대 대통령 선거 포스터 앞에 그들이 앉아 있는 모습이다. 세 번째 그림은 2007년 17대 대통령 선거 때의 풍경이다. 이종구는 같은 농부들을 20년간 화폭에 담았다. 그사이 농부들은 늙고, 병들고, 작고했다. 포스터 속 대권 주자들은 생기 있는 표정에 세련된 복장을 하고 희망 넘치는 공약을 유권자들에게 투척하지만, 화가가 그려넣은 농부들의 표정은 시큰둥할 뿐이다. 그들이 들었던 약속의 말은 농촌을 약속의 땅으로 만들어주지 않았다.

이종구 ‘다시 오지리에서’ 2003년 종이에 아크릴릭, 인쇄물, 215×195㎝

20년 세월 따라 쌀부대는 정부양곡에서 일반미로, 급기야 미국 수입쌀 칼로스 부대로 변했다. 수입개방으로 농촌은 피폐함을 넘어 붕괴됐으나, 정치인에게 농촌은 ‘표밭’일 뿐, 우리 생명의 뿌리가 아닌 모양이다. 농촌에서 바른 먹거리 농사를 지으며 살고 싶다는 소망을 품었던 농부 백남기는 권력의 물대포를 맞아야 했고, 여전히 병상에 누워 사경을 헤맨다. 권력은 사과하지 않으니, 농촌도 혼수상태다. 그런데 또 유혹의 ‘시즌’이 왔다. 물광 피부의 권력자들은 농부의 거친 손을 잡으며 달달한 공약을 뿌리고 있을 게다.

이제 오지리의 두 농부는 더 늙고 병들어 동네 보건소 다니는 일이 일상이 되었단다. 대선 때마다 거짓 구호에 속는 농부들의 삶을 연속적으로 기록하는 이 연작은 세 분 모두 작고하시면 끝을 맺는다.



김지연 |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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