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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제목 없는 자유

- 5월 6일 지면기사 내용입니다-


 

샌정, 무제, 2017, 혼합매체, 가변크기(두산갤러리 제공)


기억 속에 남아 있는 추억의 잔상, 평소 누적된 상념의 부스러기는 그림이 될 수 있다. 동일한 장소에서라도 사람마다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기억을 쌓을 수 있으며, 서로 다른 이들의 기억 간에는 조금의 연관관계도 필요 없다. 내면세계라는, 객관적으로 들여다볼 수도 없고, 말해도 정확하게 이해할 수 없는 그 세계를 일단 꺼내 놓고 싶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이때 왜 꺼내 놓으려고 하느냐는 질문은 하지 않겠다.

 

그 세계는 말하지 못하는 것인지 말할 수 없는 것인지, 의미를 전하는 것인지 숨기는 것인지 알 수 없는 비언어적 사유의 세계다. 그곳이 바로 화가 샌정이 화폭에 담는 세계다. 형태를 그리고 지우기를 되풀이하는 과정을 통해 경험은 누적되고 감정은 감추어지고 의미는 흐려진다. 말하지 못할 무엇은 그렇게 그림 속에 자리 잡는다.

 

사적인 기록을 소재로 구상과 추상의 경계를 타며 새로운 이미지를 길어 올리는 그는, 쉽게 포착되지 않는 형태로 자신의 심리적 경험을 담는다. 회화는 그 모호함을 정서적으로 담아내기에 꽤 유용한 장르다. 그래서 작가는, 회화에 대한 세상의 시선이 롤러코스터를 타든 말든 꾸준히 그림을 그려 왔다. 하지만 그 모호함은 사람들을 불편하게 만들기도 한다. 친절한 소통을 할 의지가 없다면 밖으로 나오지 말라고 말하기도 한다.

 

공동체의 건강한 삶을 꿈꾸는 날선 예술적 발언, 그 선명성이 세상을 물들인다. 그런 예술작품이나 태도에 동의하는 것과 무관하게, 샌정의 화면 앞을 떠나지 못하는 이유는 흐릿한 그 세계가 주는 자유로움 때문일지도 모른다.

 

한 필자는 칸딘스키를 인용하여 샌정의 태도를 옹호한다. “작가의 눈은 자기 개인의 내적 세계로 뜨여 있어야 하며, 귀는 내적 필연성에 기울이고 있어야 한다. 이것이 한 작품의 기본적인 요소인 신비스러운 필연성을 표현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제목 없는 그의 세계가 울림을 갖는 이유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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