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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초보자는 낯선 곳에서 불편함을 느끼고 여행 고수는 낯선 곳에서 편안함을 느낀다고 한다. 그러나 진정한 여행자는 낯익은 곳에서도 낯설음을 느낀다고 한다.

그런데 오늘날에는 ‘진정한 낯설음’을 체험하는 것이 무척 어렵다. 여행정보를 얻으려고 인터넷에 들어가면 너무 많은 자료가 쏟아진다. 물론 여행 자료와 실제 여행은 다른 것이니 자료가 많다는 게 문제가 아닐 수도 있다. 하지만 때로는 너무나 많은 자료들, 특히 사진들이 상상의 여지를 축소시키는 것은 사실이다. 잘 알려져 있지 않은 장소라서 첫 만남이 중요한 경우에는 더 그렇다.



그래서 필자의 한 친구는 "사진도 스포일러"라면서 인터넷 검색할 때 사진과 부딪히지 않으려고 애쓴다. 하지만 사진만 빼놓고 검색하는 것이 쉬운 일이 아니다. 뿐인가. 텔레비전을 틀면 수많은 여행 프로그램들이 도처에 출몰해서 한번도 못 가본 곳이 마치 많이 가본 곳인 양 느껴지게 만든다. 바야흐로 더 이상 새로운 장소, 새로운 경험이 사라진 듯한 시대이다.


장 보드리야르는 “새로움의 소멸”이라는 이런 현상이 현대 문화 특유의 조건이라고 말한다. 텔레비전이나 놀이동산 등으로 대표되는, 실재보다 더 실재 같은 가상인 시뮬라크르가 실재를 대체해서 이제 더 이상 실재와 가상의 구별이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보드리야르에 따르면 실재와 가상만이 아니라 참과 거짓, 내부와 외부, 과거와 미래도 구별불가능해졌다. 과거와 미래가 구별불가능하기 때문에 시간이나 역사라는 것도 더 이상 존재하지 않고, 그래서 '새로운 출발'이라는 것도 가능하지 않다. 현대인이 느끼는 무기력함의 이면에는 이런 사정이 깔려 있다.

그래서 현대인은 여행에 집착하는 것이 아닐까? 할인 항공권을 구해보려고 검색을 하면, 온 세상 사람들이 여행만 하고 사나 싶을 정도로 티켓이 귀하다.


하지만 오늘날의 여행은 출발의 시뮬라크르일 뿐 진정한 출발이 아니다. 현대의 새로운 유행인 '여행'은 출발이 가능하지 않은 시대에 출발의 제스처를 인공적으로 만들어내는 행위이다. 시뮬라크르로서의 여행은 '관광'이란 이름을 갖는다. 이 장르는 19세기에 와서 생겼다. 그 이전에 여행은 귀족들의 교양수업의 일환이었을 뿐 관광의 개념은 아니었다. 관광으로서의 여행은 출발이 불가능한 시대의 여행 방식이다.

 
예술가들은 대체로 여행을 좋아한다. 자기의 집에서도 낯설음을 느끼는 것이 여행자의 조건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예술가 역시 그렇다. 평생을 떠돌아다니며 산 랭보, 북아프리카를 마음의 고향으로 삼았던 플로베르, 알제리의 태양을 찾아 떠난 여행에서 낭만주의의 자양분을 발견했던 들라크루아나 남태평양의 섬에서 여생을 마친 고갱의 행로는 그들의 인생만이 아니라 작품의 방향을 결정했다.


고갱의 시대까지만 해도 '출발'에 대한 환상이 가능했다. 목적지에 도착한 후 그 환상이 깨졌더라도 적어도 출발할 때는 그럴 수 있었다. 하지만 오늘날, 지구 건너편의 일이 실시간으로 전달되는 글로벌리제이션의 시대에 여전히 여행에 대한 환상이 가능할까? 혹은 관광이 아닌 여행이 가능할까?

이런 질문에 대해 어떤 작가들은 여행이 관광일 수 밖에 없다는 걸 역이용하고, 어떤 작가들은 여행의 불가능함이라는 명제 그 자체로 맞선다.


한국과 영국 작가들로 구성된 프로젝트 그룹 리슨투더시티(Listen to the City)의 서울 투어스(2010)는 전자의 경우이다. 서울투어스 프로젝트는 "서울 사람도 잘 모르는 서울"을 슬로건으로 내거는 도시 리서치 작업이다. 인터넷으로 '관광단'을 모집해서 서울을 구경다니고 그 과정을 아카이브(사진, 영상, 텍스트, 지도 등) 구성한다.
 

코스를 선택하는 기준은 서울의 예전 모습이 남아있는 동네와 개발논리에 휩쓸린 동네를 함께 묶는 것이다. 예를 들어 중앙시장-황학동 벼룩시장-황학동 롯데 캐슬 아파트(청계천 개발때 황학시장 일부와 노점상을 철거하고 지은 아파트)의 코스, 인왕산-영천시장-교남동 뉴타운 예정지로 짜여진 코스 등이다.


'관광객'들은 시장에서 기념품도 사고 맛집에서 점심도 먹으면서 이 코스를 걸어서 둘러보는데, 반드시 각 장소 앞에서 전형적인 관광 기념사진 풍으로 사진을 찍는다.




이 프로젝트는 일상의 공간을 낯설게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일상의 공간 속에 숨은 정치적 의미를 드러낸다. 노점상을 철거하고 지은 명품 아파트 앞에서 단체 기념사진을 찍는 이 상투적인 제스처는 거꾸로 일상에서 우리가 공간을 경험하는 방식이 얼마나 상투적인가를  드러낸다. 보통 관광할 만한 장소가 아닌 곳에서 짐짓 관광사진을 찍는다. 이 행동은 일종의 연극이지만, 또 아니기도 하다. ‘투어’는 실제로 일어난 일이며 이 여행에서 참여자들이 어떤 의미를 얻어가는 것도 사실이기 때문이다.
 

김민경, 장윤주의 <차이나타운에서 가져온 정물>(2009)도 여행이 관광이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역이용한다. 이들이 '여행'한 곳은 인천 차이나타운이다. 이들이 이 곳에 간 것은  한국의 화교들이 받아온 차별 문제와 다문화 사회의 이슈들에 관심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들은 이 문제를 목소리 높여서 주장하지 않는다. “당신들은 화교들의 삶을 모르지만 우리는 안다”라는 식의 태도를 취하는 대신 이들은 “우리 역시 어차피 그들을 모른다” 라는 시각을 갖는다. 아무리 이해하다고 해봤자 자신들 역시 타자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그들은 여행객의 위치를 자처하면서 풍경을 '수집'한다.



이 수집품들은 차이나타운을 거닐면서 찍은 사진들과 길거리에서 주워온 사소한 물건들이다. 낡은 장갑, 시계, 과자상자, 빈 캔 병 등을 주워와서 '정물’을 구성한 다음, 사진으로 찍고 그림으로 그린다. 말 그대로 ‘정물화’를 만드는 것이다. 정물화는 여행객의 시선과 닮았다. 원래 그 장소에 있던 물건들이 아니라 인위적으로 구성된 풍경이기 때문이다.



정물화의 대상이 된 물건들은 딱히 ‘중국적인’ 느낌이 나는 것들도 아니다. 슬라이드 사진에 담긴 풍경도 마찬가지이다. 간간히 보이는 중국어와 붉은 색 등을 제외하면, 평범한 뒷골목과 가게들이다. 보는 사람이 이 정물화와 풍경을 이국적으로 느낀다면 그것은 차이나타운이라는 단어에서 느껴지는 이국성 때문일 것이다.




요컨대 이 작품의 주제는 차이나타운 그 자체가 아니라 그곳을 보는 여행자의 시선이다. 이곳을 ‘이국적으로’ 만든 것은, 그리고 타자화해온 것은 우리 자신인 것이다.   


후자, 즉 여행의 불가능함이라는 명제를 던지는 사례 중 하나는 40여 년 전 만들어진 작품이다. 미국의 대지미술 작가 로버트 스미드슨<나선형 방파제(Spiral Jetty)>(1971)가 그것이다. 이 작품은 갤러리 공간이 아니라 실제 자연 공간 속에 설치된 작품이다. 유타 주 솔트 레이크의 로젤 포인트라는, 찾아가기  힘든 후미진 곳이다. 1971년, 스미드슨은 주변의 돌과 흙6천5백여톤을 이용해 이곳에 지름 15피트의 소용돌이 모양의 방파제를 만들었다. 트럭 두 대, 트랙터 한 대, 로더 한 대가 동원되어 6일이 걸린 큰 공사였다.

이 작품은 호수의 수위 상승 때문에 30년 동안 물에 잠겼다가 1993년 다시 떠오른 후 오늘날까지 남아 있다.


이 작품을 보러가는 것 자체가 여행이다. 하지만 이 여행은 어떤 의미에서는 ‘불가능한’ 여행이다. 가는 길이 험하다는 의미에서는 아니다. 여정은 힘들기는 하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불가능한 것은 이 작품을 ‘온전히’ 감상하는 것이다.
 
방파제가 물에 잠겨 있었을 때는 물론 작품을 볼 수가 없었다. 물 위로 솟아오른 이후에도, 이 곳을 찾은 방문객들은 육안으로 전체 모양을 식별할 수가 없다. 방파제의 소용돌이 형태는 비행기의 시점에서만 온전히 보이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은 물 위로 얕게 솟아있는 불규칙한 돌멩이들과 거기에 끼여 있는 소금 결정체들(솔트 레이크는 담수와 해수가 섞이는 곳이라 염분의 농도가 높다)로 만들어진 구부러진 길 뿐이다. 방문객들은 이 길 위를 걸을 수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난관 역시 비행기를 탈 수 있다면 해결된다. 항공사진을 보면 간접적으로나마 전체를 볼 수 있다. 진정으로 ‘불가능’한 것은 이 작품에 포함된 시간을 온전히 체험하는 것이다.


스미드슨은 이 작품을 영원히 보존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사라지게끔 하기 위해서 만들었다. 지질학적 풍화작용 속에서 몇 만 년의 시간이 흐르면 방파제는 물론 호수도 소멸할 것이고, 작가가 염두에 둔 것은 그런 광대한 시간 그 자체이다.


‘소멸’이 가능하다면, ‘시간’도 가능할 것이다. 이 작품은 보드리야르가 말한 ‘시간의 불가능성’을 색다른 방식으로 반박한다. 시간은 가능하다. 하지만 단지 소멸 속에서만, 경험의 한계 속에서만 가능하다. 하지만 이 역설 속에서, 여행의 ‘불가능성’은 ‘가능성’으로 바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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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