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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터널

뒤늦게 찾아봤던 드라마 <터널>에서 터널은 ‘운명과 시간이 교차하는 곳’이었다. 연쇄 살인사건의 범인을 찾던 형사가 자신의 의지와 무관하게 터널을 통해 미래로 가고, 그곳에서 과거와 미래의 연결고리를 발견하면서 범인을 추적하고 진실에 다가가는 내용. 진실에 닿기 위해 필요한 건 시간여행인 걸까. 시간은 종종 많은 것을 해결해준다.

 

익숙한 주변 풍경에 낯선 기운을 불어넣는 데 탁월한 피터 도이그가 화면에 담은 터널은 무지개색이었다. 꿈인 듯 현실인 듯 알 수 없는 기묘한 화면의 톤 덕분에 사람들은 피터 도이그의 그림을 통해 몽환적인 상황을 만나곤 한다.

 

피터 도이그, Country-rock(wing-mirror), 1998~1999

 

토론토에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알고 있는 유명한 이 터널에 무지개가 뜬 건 1972년의 일이다. 노르웨이 출신 베르그 욘슨이 교통사고로 사망한 친구를 애도하는 마음을 담아 어두운 터널 입구에 무지개색을 입혔다. 모름지기 무지개란, 잠깐 떴다가 덧없이 사라지는 한시적인 판타지이건만, 소년은 시간이 흘러 페인트가 벗겨지면 다시 칠하고 또 칠하기를 반복하며 이 판타지를 붙잡았던 모양이다. 처음에는 고요한 풍경을 치고 들어온 현란한 페인트색에 거부감을 표하던 마을 사람도 언제부터인가 소년을 도와 무지개를 그렸단다.

 

너무 익숙해서 당연하게 여기다가 사라진 뒤에야 황망하게 만드는 많은 것들. 소년은 훌쩍 떠난 친구와의 우정을 터널 앞 무지개로 기억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베르그 욘슨은 자신을 ‘꿈 지킴이’라고 칭하면서 이 무지개가 서로 인사도 잘 안 하고, 잘 웃지도 않는 토론토 사람들의 얼굴에 미소를 주었으면 좋겠다는 바람을 덧붙였으니, 누군가에게 무지개 터널은 좋은 기억을 상기시키는 장소가 될지도 모른다. 그렇게 지나간 것은 아름답게, 사라진 것은 애틋하게 추억의 장소에 깃들어 시간여행을 인도한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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