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지난 칼럼=====/조선령의 NO Limit: 현대미술과 극단의 실험들

행동하라, 무언가에 부딪힐 때까지.

지난해 화제가 된 영화 중에 김지운 감독의 <악마를 보았다>가 있었다. 필자는 전작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의 열혈팬이었지만 비위가 약해서 폭력이 난무한다는 이 영화를 끝내 보지 못했다. 하지만 영화 잡지들에 실린 논쟁은 열심히 들여다봤는데 찬반 양론이 격심했던 걸로 기억한다. 실제로 영화를 안봤으니 어느 쪽이건 편을 들 수는 없었지만, 영화가 폭력적이고 잔인하다는 비판에는 수긍할 수 없었다. 마찬가지로 "현실이 영화보다 더 끔찍하기 때문에" 폭력 묘사가 정당화된다는 시각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런 옹호론은 사실 자승자박이다. 이 말은 영화가, 아니 예술이 현실에 비해 열등하다는 것을 고백하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영화 속의 폭력이 아무리 끔찍해도 영화는 가짜고 현실은 진짜다. 가짜가 진짜를 이길 수는 없다. "현실의 폭력이 영화보다 더 끔찍하다면 왜 구태여 영화를 통해 폭력을 경험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이 나왔을 때 뭐라고 대답할 것인가? 이것은 영화가 폭력적이어는 안된다는 말과는 다른 차원의 것이다. 


영화가, 예를 들어, 폭력이라는 모티브를 통해 현실과 대결한다면, 미술은 어떤 지점에서 비슷한 일을 할 수 있을까? 

                                  
영국 작가들로 구성된 그룹 블래스트 티오리(Blast Theory)의 <율리케와 이아몬의 순응(Ulrike and Eamon Complaint)>(2009)을 예로 들어보자. 2009년 베니스 비엔날레에서 선보인 이 작품은 갤러리에서 전시되는 것도 아니고 무대에서 공연되는 것도 아니다. 관객이 직접 참여해야만 완성되는 '라이브' 작품이다.   



관객이 누군가의 인터뷰 영상이 상영되는 방 안에 들어서면 방 안에 핸드폰과 선글러스가 놓여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핸드폰을 집어들고 버튼을 누르면 '작품'이 시작된다. 핸드폰 속의 목소리가 선글라스를 끼라고 지시하고 관객으로 하여금 이아몬 콜린스(1999년 살해된 아일랜드공화국군[IRA]의 멤버)와 율리케 마인호프(테러조직 적군파[REF]의 멤버였던 독일 저널리스트) 중 누가 되고 싶냐고 물어본다. 관객이 선택하면 목소리는 관객을 방 밖으로 이끌어낸다.      


Ulrike and Eamon Compliant from Blast Theory on Vimeo.


관객은 목소리가 지시하는대로 움직이며 거리를 걸어다니다 어떤 교회의 방 안으로 이끌려 들어가게 된다. 거기서 율리케 혹은 이아몬으로서 인터뷰 대상이 되는데, "당신은 무엇을 위해 싸웁니까?"라는 질문이 처음 주어진다. 이어서 "누군가 당신 영역으로 들어와서 당신의 친구와 이웃들을 죽인다면 어떻게 하겠습니까?" 등의 질문이 이어진다. 관객이 이 인터뷰를 끝내고 나면, 처음 출발점에서 보았던 인터뷰 영상이 이 장소를 촬영한 것임을 알게 된다. 다음 인터뷰이가 들어오면 그의 인터뷰 모습을 지켜보게 되며 그후 교회 밖으로 나가면 '작품'이 끝난다.



필자는 처음에는 이 작품이 꽤 흥미로웠는데 어떤 작가가 "무한도전 같았어요"라고 이야기하는 걸 듣고는 갑자기 팍 식어버렸다. 무한도전이 어떻다는 것이 아니라(노파심에서 말하자면 무한도전 꽤 즐겨본다), 듣고 보니 과연 그랬기 때문이다. ㅋ 요컨대 오리지널리티가 떨어진다는 소리로 들렸기 때문이다. 게다가, 재미로 따지자면 무한도전이 몇 수 위 아닌가! 현실에서 일어난 정치적 사건의 주인공 역할을 하면서 거리를 걸어다니고 인터뷰를 하는 것이 현실과 미술의 긴장관계를 드러내는 데 어떤 의미를 가질 것인가? 이런 작품은 현실의 강렬함을 따라가지 못하는 어설픈 역할극에 불과한 걸까 아니면 전위적 실험인일까?   


평가를 미룬다 하더라도, 이 작품이 강한 인상으로 남은 것은 사실이다. 그것은 작품의 컨셉 그 자체가 아니라 작품의 어떤 한 순간 때문이다. 몇 개의 다리를 건너서 인터뷰 장소인 교회로 들어가기 이전, 핸드폰 속의 목소리는 참여자를 벤치에 앉히고 묻는다. 지금 그만두고 싶다면 전화를 끊고, 계속 하고 싶다면 들고 있으라고. 목소리가 현실로 나갈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참여자가 계속 하기를 선택했을 때, 그는 진정으로 이 작품의 주인공이 된다. 


필자는 이아몬 콜린스에 대해서는 모르지만 적군파와 율리케 마인호프에 대해서는 관심이 있기 때문에 개인적으로 흥미로웠던 것도 있었다. 하지만 적군파를 모르고 그에 대해 아무런 정서적 감흥도 없는 사람들이 이 작품에 참여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가 있을까? 오히려 그 내용보다 더 흥미로운 것은 작품을 스스로 계속할 것인가 그만둘 것인가 결정을 내리는 그 순간에 있었다. 왜냐하면 이 순간에 현실과 예술 사이의 틈이 벌어지고, 그 틈 사이로 어떤 스파크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이런 '순간'은, 블래스트 티오리 같은 작업의 원조격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 작가 앨런 캐프로(Allan Kaprow)의 1969년 작품 <Pose>를 재연한 아래 동영상에도 있다. 캐프로는 자신이 '해프닝'이라고 불렀던 퍼포먼스 작업을 통해 갤러리 공간에서 벗어나 '예술과 일상의 통합'을 꾀했던 아티스트였다. 로스 엔젤레스에 있는 현대미술관(LA MoCA)은 2008년 봄에 캐프로의 회고전을 열면서 당시의 해프닝을 재연했는데, 다음의 동영상은 그 재연 장면 중 하나이다(캐프로는 해프닝을 거의 기록하지 않았기 때문에 당시의 영상물은 남아있지 않다). 해프닝은 역시 관객 참여로 실현된다. 처음에 간단한 디렉션이 주어지고, 관객은 그 내용을 지키는 한에서 자신이 하고 싶은 대로 그 내용을 실현한다.



http://www.moca.org/kaprow/
(전시 사이트)

필자는 지난 학기 수업시간에 학생들과 같이 이 동영상을 보았는데, 어떤 학생이 "저 해프닝은 경찰의 허락을 받고 했을까요?"라고 물었다. 영상을 끝까지 보지 않은 상태에서 수업에 가져온 필자는 "그러게요, 나도 궁금하네"하면서 같이 봤다. 영상의 3분의 2 정도 지난 부분(4분 57초부터)에 보면 그 답이 나온다. 

그 장면에서 필자가 장영혜 중공업의 <삼성>을 떠올린 것은 우연일까. 플래시로 구성된 간결하면서도 파워풀한 웹 작업으로 미술에 큰 관심없는 사람들에게도 잘 알려져 있는 장영혜 중공업은 삼성(그 삼성 기업 맞다)에 유난히 지대한 관심을 보이는 작가로 유명하다(?). 물론 삼성 자체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의 아이콘으로서의 삼성에 관심이 있는 것이다.


자본과 권력의 아이콘을 난데없이 에로틱하고 염세적인 뉘앙스로 녹여내는 장영혜중공업의 작업은 '삼성'이라는 너무나 평범한 단어가 예술작품 속에 등장했을 때 얼마나 생경한 효과를 만들어내는지를 시니컬하게 보여준다(장영혜중공업은 예전에 삼성 사옥 옥상에 몰래 올라가 설치작업을 하고 내려오는 작품을 한 적도 있었다). 

http://www.yhchang.com/SAMSUNG_KO.html
(<삼성>)



예술이 현실과 경쟁하는 헛수고를 하지 않으려면 현실에 이미 있는 것을 가져와서는 안된다. 현실에 없는 것, 현실이 망각하고 있는 것을 가져와야 한다. 현실이 망각하고 있는 것, 그것은, 예술은 현실과 통합될 수 없으며 다만 현실과 부딪힐 수 있을 뿐이라는 진실이다. 그런 점에서 <삼성>은 성공적이다.  





왼쪽: 블래스트 티오리 ( 이 그룹의 홈페이지에도 흥미로운 프로젝트가 많다.)
오른쪽:  1961년 한 갤러리의 뒷마당을 낡은 타이어로 가득 채우고 있는 앨런 캐프로. 작품 제목은 <Yard>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