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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흘러간다

네쉬린 코드르, 확장된 바다, 2017, 비디오 설치, 12시간, ⓒ네쉬린 코드르


세상에 멈추어 있는 것은 없다. 지구는 여전히 시속 1600㎞의 속도로 자전하고, 시속 10만㎞의 속도로 공전 중이니, 멈추고 싶어도 그럴 수 없다. 가만히 있어도 분주하고 번잡한 이유는 모두 정신없이 돌고 달리는 지구 때문이다. 하루를 돌리고, 계절을 달리는 지구의 속도 위에 흐르지 않는 건 없다.

 

네쉬린 코드르는 베이루트의 야외 풀장에서 흘러가는 하루의 절반을 영상 속에 붙잡았다. 어둠을 뚫고 화면을 가로지르는 어떤 움직임과 물살을 가르는 소리로 영상은 시작한다. 지구 자전의 속도에 맞춰 붉은 기운이 어둠을 서서히 걷어내면 순식간에 날이 밝는다. 수평의 평평한 프레임 안에 포착한 야외 풀장 너머 지중해가 잔잔하게 펼쳐져 있고 그 위로 푸른 하늘이 시원하다.

 

작가는 야외 풀장에서 줄기차게 헤엄치고 있다. 일정한 속도로 코스를 오가는 그는, 규칙적으로 프레임 안을 헤엄쳐 프레임 밖으로 빠져나갔다가 어느새 다시 돌아오기를 반복하는 중이다. 태양이 표준 자오선을 지나는 정오에 한 시간 남짓 풀장을 벗어난 것을 제외하고는 계속 수영했다. 수영하는 작가의 움직임 너머 지중해에서는 간혹 보트가 떠 있다가 지나가고, 수영하는 사람들이 첨벙거리다 지나가고, 파도가 일렁이다 지나간다. 풀장도, 바다도, 하늘도 푸르게 고요한데, 그 지독하게 잔잔한 12시간 동안 세상의 모든 푸른색이 알아차릴 수 없는 속도로 눈앞에서 지나간다. 여전히 지구는 정신없이 돌고 있지만, 세상의 소음을 뒤로한 채 잔잔한 그 푸르름 앞에, 지난하게 반복되는 작가의 몸짓 앞에 느긋해지는 마음의 속도가 불편하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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