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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된 사진들

119시45분

119시45분, Pigment print, 100×70cm, 2012 ⓒ유영진


아무도 없는 운동장에 쪽빛과 보랏빛이 물먹은 잉크처럼 번진다. 서서히 밤이 내려오는 무렵으로 보이지만, 이상하게도 하늘은 지나치게 환하다. 그제야 주의를 기울여 천천히 사진의 구석구석을 살핀다. 낮처럼 보이는 하늘과 밤처럼 보이는 땅의 부조화에서 초현실주의 화가 르네 마그리트의 그림 <빛의 제국>을 떠올린다. 공존할 수 없는 낮과 밤처럼 사진 속 그림자도 무언가 개운치 않다. 금세 농구대와 철조망 그리고 건물까지 그림자의 방향이 제각각이라는 것을 눈치챈다.

 

유영진의 연작사진 ‘Nowhere’ 중의 일부인 이 사진은 다양한 시간대에 촬영한 여러 사진을 한 장으로 조합한 것이다. 작가는 폴란드 그단스크의 한 초등학교 운동장 풍경을 일주일 동안 여러 차례 나눠서 촬영했다. 그리고 13시5분, 18시15분 등 각각 촬영된 시간대를 모두 더한 ‘119시45분’을 제목으로 삼았다. 한 곳을 여러 차례 방문해 빛의 기울기에 따라 달라지는 풍경을 촬영해 조합하는 과정은, 작가에게 어떤 장소를 사적인 기억 안에 자리매김하는 의미로 간직된다. 하지만 그런 의도와 별개로 흥미로운 것은 한 장의 사진에 여러 시제가 공존한다는 점이다.

 

흔히 순간 포착의 미학으로 대변되는 사진은 보통 단일한 ‘과거형’ 시제만을 지닌다. 그러나 이 사진에는 마치 영어의 ‘대과거’처럼 다층적인 과거형 시제가 공존한다. 과거의 한순간이 아니라 여러 순간의 빛이 중첩된 사진은 묘한 울림을 준다. 마치 저마다 다른 시기에 이미 사라졌을 별들이 지금 여기 내 눈앞의 밤하늘에서 동시에 반짝이는 것처럼. 그 점멸하는 빛들을 바라보면, ‘과거-현재-미래’ 선형적으로 다가오고 사라진다는 시간관념이 과연 온전한 것인지 곱씹게 된다. 어쩌면 시간이란, 이 사진처럼 그 어딘가에 겹겹이 쌓여 제 빛깔을 스스로 그려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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