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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근대적인 미술시장의 탄생-해방과 속박의 경계에서

글 정준모(국민대 초빙교수, 2011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시감독)

 

James Gillray가 그린 크리스티 풍경 캐리커처.(1796) - 배우 엘리자베스 패런(Elizabeth Farren)과 더비 경이 그림을 샅샅이 살펴보고 있다.

 


예술이 권력으로부터 해방되기까지

예술이 종교적, 봉건적 권력으로부터 해방되기까지 수백 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그리고 그렇게 얻은 해방을 지키기 위해 많은 이들은 결벽증에 가까울 정도로 예술과 돈과의 관계를 멀리 유지하려했지만 결국 그들의 해방은 다시 경제적 세력과의 해방과의 싸움을 알리는 시작에 불과했다. 이렇게 돈과 예술이 결합하는 것이 오늘의 새로운 현상은 아니다. 만족을 모르는 인간의 욕망이 경제와 산업발전에 원동력이 되어주었던 것처럼 이들의 욕망은 예술에서조차 만족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예술은 언제나 돈으로 거래되었다. 예술품에 대한 욕망은 이미 기독교가 공인을 받기 전인 로마시대에도 존재했다. 오늘날 예술품 시장이자 미술시장을 대신하는 경매(Auktion)가 등장한 것은 로마시대이다. 요즘 사용하는 경매(Auction)라는 명칭은 라틴어 'actio'에서 비롯된 것이다.



성물거래로부터 비롯된 옥션과 성서고고학

요즘 예술품 시장과 유사한 시장의 초기형태는 중세에 호황을 누리던 성물 거래에서 찾아볼 수 있다. ‘예수님의 십자가’, ‘가시 면류관’, ‘성의’나 ‘순교자의 유골이나 유물’을 숭배하는 ‘성물숭배사상’은 그리스도나 성인으로 추대된 사람 또는 순교자들의 몸의 일부나 유품은 신성한 힘을 지닌 물건으로 여겨졌다. 그래서 많은 이들은 이러한 성물들을 소유하기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고 때로는 성자들의 신체는 사후 나누어 가지는 경우까지 생겨났다. 또 이러한 성물을 소장한 성당들이 위치한 도시는 많은 신자들이 찾는 순례지가 되었다.

성물 거래는 성서고고학을 잉태시켰다.



이후 성물숭배사상은 미국의 고고학자 윌리엄 F. 올브라이트와 그의 제자 G. 언스트 라이트를 통해 성서에 나오는 내용들을 고고학적으로 분석하는 ‘성서 고고학(Biblical Archaeology)’이라는 학문을 개척하도록 하는 동기가 되었다.


하지만 인간의 그릇된 종교적 열망이 성물소유를 위한 행동의 동기가 되었고 권력자나 성직자, 부호들에게는 성물을 소장하기위해 경매 물품 목록을 뒤적이는 것이 일상이 되거나 습관이 되었다.
루이 13세를 등에 업고 무소의 권력을 행사했던 리슐리외 추기경( Armand-Jean du Plessis, cardinal et duc de Richelieu, 1585~1642)은 이탈리아에서 팔려고 내놓은 골동품을 그린 스케치가 들어있는 책을 보고 귀중한 물건을 선택했다. 영국의 국왕은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누가 좋은 그림을 가지고 있는지 파악하는 것이 여행목적 중 하나였다.


그리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소장가들에게 접근하여 작품을 구입해왔다. 1328년부터 1707년까지 약 400년간 만토바를 지배한 이탈리아의 귀족 가문 곤차가 가문도 이러한 영국국왕의 손아귀에서 벗어날 수는 없었다. 용병대장들이 노획해온 전리품을 팔아 전비를 마련했던 곤차가 가문의 어려운 재정상황은 결국 영국 왕에게 많은 귀한 미술품을 넘겨주어야 하는 처지로 전락하고 말았다.

이렇게 열심히 수입을 통해 미술품을 모은 영국에 드디어 17세기 말이 되자 최초의 본격적인 미술시장이 형성되었고 이는 곧 국경을 넘는 활기로 이어지면서 미술품이 국경을 넘거나 주인이 바뀌는 일이 많아졌다.


미술관 보다 앞서 형성된 미술 시장

이렇게 근대적인 의미의 미술시장은 미술관의 역사보다 일찍 형성되었다. 최초의 근대적인 미술관이라 칭하는 루브르가 루이 16세가 처형되던 1793년 개관한데 반해 최초의 미술품 경매회사 크리스티는 이보다 27년 앞 선 1766년 런던에서 문을 열었다.

Thomas Rowlandson and Augustus Puginn , <크리스티의 옥션 룸 Christie's auction room in London>(1808-11).


미술시장이 문을 열자 많은 미술품들이 몰려들었고 화상들은 미술품을 중개하고 화가와 소장가들의 사이를 연결시키기 위해 바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미술품 수장가들은 후원자에서 수집가로 입장을 선회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유명하고 아름다운 미술품 수집은 나라간의 경쟁으로 까지 번져나갔다. 이는 자신의 국가의 위신이나 국격을 상징한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미술품 수집에 열을 올린 러시아의 카타리나 여제(예카테리나 2세)



그래서 러시아의 카타리나 여제(Catherine II of Russia, 예카테리나 2세, 1729~1796)는 1764년 러시아 대사 돌고루키(Dolgoruky)의 주선으로 베를린의 화상 고츠코우스키로부터 유럽회화작품들을 구입했다.

돌고루키가 베를린에서 사들인 225점 중 Jacob Jordaens가 그린 '가족초상화'(1615)



돌고루키가 베를린에서 사들인 에르미타주 컬렉션 중 FransHals가 그린 <장갑을 쥐고 있는 청년의 초상 portrait of a Young Man Holding a Gove>(1650)


이후 외교관들의 임무중 하나는 북유럽의 베니스인 상트 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에르미타주 궁전에 미술품을 구입하는 일이었다. 

Karl Beggrov가 그린 <에르미타주 궁전 Hermitage_Museum, View_of_the_Palace_Embankment)>(1826)

카타리나 여제의 자금력을 바탕으로 그의 연인이자 심복이었던 드미트리 고리친의 지휘로 10여 년간의 수집을 통해 그녀의 ‘겨울궁전’에는 약 2천여 점의 미술품으로 가득하게 되었다.


오늘날의 러시아 에르미타주 미술관

 

이것이 모태가 되어 오늘의 에르미타주 미술관이 탄생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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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