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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계급의 등장과 미술의 변화 

미술이라는 장르가 시민들의 품으로 다가온 것은 산업혁명(18C말~19C전반)의 과실을 손에 쥔 도시 중산층들 즉 ‘부르주아’들이 등장하면서 부터이다. 이들은 생산을 통해 경제적 기반을 닦으면서 신분과 문벌을 넘어 세상의 주역으로 등장했다. 영국에서는 빅토리아 시대(1837~1901), 프랑스에서 루이 필리프(Louis-Philippe Ier, 1773~1850)의 7월 왕정이후인 1830년대부터 19세기 후반의 일이다. 이 시기에 들면 도시가 확대되면서 농촌인구가 유입되어 인구는 늘고 철도가 발달하고 대중적인 신문이 발행되면서 시민계급이 확실하게 권력의 주체가 되어갔다.


 이들은 경제적인 성공에도 불구하고 취미의 전통이나 문화적 교양이 부족해서 스스로 열등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자신이 ‘교양인’이라는 사실을 보여주기 위해서라도 거실에 걸어들 ‘걸작’을 필요로 했다. 따라서 이들은 작품보다 화가의 지명도나 위치가 중요했으며 그것이 작품의 가치를 재는 척도이기도 했다. 물론 이 시대 모든 부르주아 계급들이 그랬던 것은 아니다. 현재 오르세미술관의 일부를 차지하고 있는 화가이자 컬렉터인 동시에 미술사학자이기도 했던 에티엔 모로 넬라톤(Adolphe Étienne Auguste Moreau-Nélaton, 1859~ 1927) 같은 이의 경우 대단한 안목을 지녔던 것으로 정평이 나있다. 
 


 이렇게 사회중심을 이루는 세력의 교체가 일어나면서 자연스럽게 미술은 궁전이나 교회를 떠나 가정으로 이동한다. 이렇게 시민계급이 등장하면서 화가들도 변화한 환경에 적응해야 했는데 우선 가장 큰 변화는 작품의 크기이다. 일반 시민들의 거실에 100호(162x131cm)이상의 대작을 걸어두는 것은 아무리 경제적으로 성공했다하더라도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서 이미 17세기 네덜란드에서 있었던 일이긴 하지만 작품의 크기가 그림이 걸릴 실내를 감안해서 작아진다. 그리고 또 다른 변화는 신화, 역사, 종교를 주제로 했던 그림들이 쉽고 친근한 주제로 바뀌어 가족의 초상이나 풍경으로 옮아가며 사실적인 화풍이 주를 이루게 된다.


앵그르 <나폴레옹의 초상>(유화,1804)

윌리엄 브로그 <돌아온 봄>(유화,1886)



 특히 초상화의 경우 프랑스 살롱전에 출품된 작품 수만 보아도 알 수 있다. 1841년 약 2,000점의 출품작 중 약 25%에 이르는 500점 정도가 다시 1884년에는 673점의 초상화가  출품될 정도로 시민사회의 기호와 취미에 따른 그림들로 대체된다. 



#풍경화와 정물화의 유행

 여기에 풍경화도 시민들의 공감을 얻기 시작한다. 17세기 이미 장르화로 자리 잡은 풍경화지만 산업혁명과 함께 영국 풍경화를 기반으로 19세기에 들어서면서 터너(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1775~1851), 존 컨스터블(John Constable, 1776~1837),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Caspar David Friedrich, 1774~1840)그리고 바르비종파(École de Barbizond)로 이어지면서 현격한 변화와 발전을 가져오고 이는 인상주의로 이어진다.      


카스파 다비드 프리드리히 <빙해-좌초된 희망>(유화, 1823~4, 96.7×126.9cm 함부르크 쿤스트할레)


윌리엄 터너 <비, 증기, 속도와 대 서부철도>(유화, 91x122cm, 1844 런던 내셔널 갤러리)


컨스터블 <브라이톤 해변가를 항해하는 배>(유화, 149×248cm, 1824, 런던 V&A 미술관)



 17세기 푸생(Nicolas Poussin, 1594~1665)이나 클로드 로랭(Claude Lorrain, 1600~ 1682)류의 풍경화가 고전적이고 이상적인 이탈리아 풍경이었던 데 반해 19세기의 풍경화는 일상의 주변풍경으로 대체되었다. 이런 풍경화의 변화는 살롱전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는데 1835년 살롱에 출품된 460여점의 풍경화중 고전적인 이탈리아 풍경은 전체의 10%에 불과한 46점이었고 전에 볼 수 없었던 프랑스 픙경화가 336점이나 되었던 사실이 이를 증명해준다. 물론 이런 변화를 살롱은 이미 감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1817년부터 풍경화를 살롱에 반영했는데 다만 그 권위를 지킬 속셈으로 일반분야인 ‘역사화’는 매년 공모한데 반해 4년에 한번씩 ‘역사적 풍경화’부문을 공모하는 것으로 방향을 선회했다. 



 이와 함께 시민들과 친근해진 장르는 정물화이다. ‘교양’이나 ‘취미’등 인문학적 취향 때문이기도 하지만 시민들의 가치관은 대단히 현실적이었다. 따라서 익숙하고 친근한 인물이나 자연, 사물을 사실적으로 그리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이들에게 ‘진짜와 똑 같아 보이는’것은 그림을 이해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 되었다. 따라서 신화나 역사와 성서의 내용을 사실적으로 그린 작품이 환영을 받았다. 일상적인 초상, 풍경, 정물화의 다른 편 즉 살롱에서는 역사화와 우의화가 인기였다는 사실이 이를 반증한다. 이는 사실적인 그림이 시민들의 취향에는 맞지만 전통이 없다는 열등감을 해소하고자 역사나 우의를 다룬 사실 풍을 선호한 것이다. 이들은 비너스를 빌어 관능적으로 그린 누드를 선호했고, 예술이라는 이름의 ‘우의’를 통해 자신들의 세속적 고상함(?)을 위장(Camouflage)한 것이다. 



여기에 그림의 강력한 라이벌이 될 것으로 보았던 사진술이 등장하면서 화가들은 위기의식을 느꼈지만 이내 인간이 보지 못하는 것을 볼 수 있도록 도와주는 사진과 이내 친하게  되면서 이런 우려는 사라졌고 그림은 더욱 풍성해졌다. 하지만 사진의 발달은 그림의 보도, 기록, 기념, 교육 등의 기능을 가져갔다.  


 이렇게 시민계급이 미술에 그림을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중산층으로서의 경제적 여유와 교양인을 선망하는 태도 같은 것에서 기인한 것이기도 하지만 19세기 중엽이 되면서 미술관이 일상화되었다는 사실이다. 미술관이 오늘의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프랑스 혁명(1787~ 1799)이후의 일이다. 혁명정부는 1793년 미흡하나마 국민들에게 루브르 궁문을 활짝 열어 미술관으로 개방했다. 그 후 혁명기간 중에도 화가인 위베르 로베르(Hubert Robert, 1733 ~1808)에 의해 루브르 본전시관 전시계획안이 발표되었지만 구체화하지 못하다  나폴레옹 (Napoléon Bonaparte,1769~1821)에 의해 오늘날의 미술관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나폴레옹은 프랑스는 물론 이탈리아, 스페인, 오스트리아, 근동지방에 이르는 작품들을 모았다. 그는 전쟁으로 정복한 나라들과 평화협정을 체결하는 조건으로 배상금대신 미술품을 요구했으며 이때 많은 미술품과 유적지 주요작품들을 조직적으로 파리로 옮겨와 결국 1802년 미술관의 이름조차 ‘나폴레옹미술관’으로 바꾸었지만 결국 이 미술관은 ‘루브르미술관’으로 오늘의 이름을 찾아 지금에 이르고 있다. 또 나폴레옹은 ‘전쟁미술관’을 만들었고 지방의 주요도시에도 미술관을 개설했다. 1795년부터 1805년까지 10년 동안 파리에 4개의 미술관, 지방에 22개소의 미술관이 문을 열었다.

이는 나폴레옹1세가 대제국을 구축한 제 1제정시대(1804~1814) 이후 즉 왕정복고시대인 루이 18세 시대에도 뤽상부르미술관을 현대미술관으로 운영토록 했는데 이것이 오늘날 파리국립근대미술관(Musée National d'Art Moderne)의 효시이다. 그런 점에서 오늘날까지 유효하지는 않지만 중앙집권제도와 예술을 애호하는 정신이 결합한 성공적인 사례이다. 프랑스의 이러한 선도적인 미술관 건립은 다른 유럽 국가들을 자극했고 그래서 탄생한 것이 암스테르담의 국립미술관(1800년 개관), 밀라노의 브레라 미술관(1809년개관), 마드리드의 프라도 미술관(1819년 개관), 런던의 대영박물관(1823년 개관), 독일의 프로이센미술관(현 베를린국립미술관, 1830년 개관) 등이다. 


 미술관의 등장으로 이제 더 이상 교회와 황제의 미술이 아닌  순수한 ‘예술’로서 , 오늘 날에는 당연한 것처럼 여겨지는 미적 감수성을 위한 예술의 자율성을 획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에밀졸라(Émile François Zola, 1840~1902)의『목로주점』에서 주인공 제르베즈가 자신의 결혼식 날 오후에 하객들과 함께 루브르를 가는 것처럼 일상화하는 것이다. 



 이렇게 예술이 대중화함으로서 크게 발전한 것은 판화이다. 르네상스 이래 미술품 보급의 가장 쉽고 값싼 수단이었던 판화는 18세기말 석판화(Lithograph)기법이 등장해서 일반화되면서 미술품을 갖고자 하는 사람들 모두의 욕망을 해소시켜 줄 수 있는 방편이 되었다. 당시 미술품 수집은 신분이나 수입의 고하를 막론하고 모두의 열망의 대상으로 소장가들의 숫자가 급증했다. 



1830년대 이런 현상을 프랑스의 한 저널리스트는 “유화로 그린 초상화를 가진 시민은 수채화 초상 밖에 갖지 못 한 시민을 경멸하고 석판화 초상을 가진 사람에게는 인사도 하지 않는다.”라고 쓰고 있을 정도로 이제 미술품 소장정도와 내용이 신분의 고하를 결정짓는 도구가 되었다.

하지만 19세기 중반에 들어서서 정교한 복제판화가 등장하면서 대중화가 이루어지자 이제 전문으로 판화만 제작하는 작가들이 등장했다. 석판화가 오노레 도미에(Honoré Daumier,1808~79), 오딜롱 르동(Odilon Redon, 1840∼1916), 동판화의 메리옹(Charles Meryon, 1821~68)이나 르돌프 브레댕(Rodolphe Bresdin, 1822~85), 석판과 목판을 자유스럽게 구사했던 뭉크(Edvard Munch, 1863~1944), 그리고 툴루즈 로트렉 (Henri de Toulouse-Lautrec,1864~1901)과 피에르 보나르(Pierre Bonnard,1867~1947) 등은 유화작품에도 남다른 성과를 남겼지만 판화에 더욱 더 열중했다. 

도미에 <트랑스노냉 거리, 1834.4.15>(석판화, 1834)

브레뎅 <죽음의 코메디>(석판화,1854)


르동 <나는 인간의 모습을 한 안개를 보았다>(동판화, 1880년대)

메리옹 <뱀파이어>(동판화, 1853)

뭉크 <절규>(판화, 1895)



 이와 함께 캐리커처 즉 삽화와 포스터도 등장했다. 시각매체로서 삽화와 포스터는 보도나 기록, 선전을 위한 도구인 동시에 새롭게 등장한 화보 중심의 일간 또는 주간신문의 중요 언어가 되었다. 또 풍자와 익살, 조롱을 담은 캐리커처는 정치적 입장이나 주장을 선전하는 수단으로 그리고 사회를 비판하는 방편으로 활용되었고 만화로까지 진화했다. 윌리암 호가스(William Hogarth, 1697~1764)나 18~19세기 스페인의 격동기를 스페인의 궁정화가로 살았던 고야(Francisco José de Goya y Lucientes, 1746~1828)의 <카프리초스>(Los caprichos)나 <전쟁의 참화>같은 판화는 예리한 풍자와 날카로운 비판은 판화나 캐리커처의 가치를 심화시킨 역작이다. 
 

고야 <카프리초>(동판화, 1797-98)

보나르 <목욕탕> (석판화,1800년대)



 또한 소비를 전제로 하는 산업혁명은 많은 선전수단을 필요로 했는데 당시 판화는 소비자들에게 어필하는 가장 중요한 광고수단 중 하나였다. 이런 광고용 판화 즉 포스터를 예술의 경지로 이끈 사람은 로트렉이다.

로트렉 <물랑 루즈, 먹보>(1891, 석판화)

로트렉 <아리스타드 브뤼앙>(1892,석판화)



 그는 1891년 몽마르트의 카바레 ‘물랑루즈’를 위해 대형 다색판 포스터를 석판화 기법으로 제작했는데 파리 시민들을 열광시켰고 이후 아리스타드 브뤼앙(Aristide Bruant,1851~1925) 이나 메이 밀튼(May Milton), 잔 아브릴(Jane Avril, 1868~1943) 같은 연예인들을 위한 포스터를 만들어 사람들을 유혹했다. 이렇게 미술은 이즈음에 들어서야 본격적으로 시민들의, 중산층의 손으로 들어와 근대라는 새로운 시대를 함께 열어갔고 이와 함께 미술시장의 문도 훨씬 넓어졌다.              

글/ 정준모(2011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시감독, 국민대 초빙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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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