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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그림, 세속으로 내려오다


 글/ 정준모(2011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시감독, 국민대 초빙교수)

 

왕권이 강화되던 시기에 등장한 게 바로크(Baroque, 17세기)이다. 이 시기는 교황과 가톨릭 교회가 종교개혁운동으로 인해 그 영향력이 현저하게 약화된 시기이자 신교와 구교의 갈등이 커지기시작한 때이다. 이 때 자신의 권위와 우아함을 백성들에게 각인시키고자 하는 왕과 과거의 영광을 재현하고자 하는 가톨릭 교회는 새로운 미술품의 주문자인 동시에 소비자였다. 따라서 어느 정도 실력을 갖춘 화가나 조각가들은 기사작위를 얻는 등 신분상승과 함께 황실과 가톨릭 교회로부터 주문이 쇄도하면서 유례없는 호황을 만나게 된다. 


14세기 이전 실질적으로 유럽을 지배한 것은 교황이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이탈리아 북부를 중심으로 부유한 상공인 시민계급이 등장하고, 십자군 전쟁의 실패로 교황의 권위는 몰락하고 점차 프랑스 등 유럽 국가에서는 왕권이 강화되면서 일일이 로마와 대립하는 일이 많아졌다.

특히 교황의 허락 없이 프랑스 내 교회에 임시세를 부과하면서 교황과 왕의 대립은 한층 격렬해 졌다. 프랑스가 교황의 고향 아나니에 머무는 교황을 습격하는 아나니 사건(Anagni Incident, 1303년)이 일어나고 이후 프랑스인이 교황으로 임명되자 곧 교황청을 프랑스 남부의 작은 마을 아비뇽으로 옮겼다. 이곳에 새로운 고딕풍의 궁전과 교회를 짓고 약 70여 년 간 교황들은 프랑스왕의 수중에 있었던 셈이다. ‘바빌론 유수’ 또는 ‘아비뇽의 유수’(Avignonese Captivity, 1309~1377)라고 기록되는 사건이 그것이다. 하지만 끊임없이 편지를 썼던 시에나의 성 카트린느(Catharina de Siena, 1347~80)의 노력 덕에 다시 교황청은 로마로 돌아왔다.    




#교황의 궁전 건축과 면죄부 판매 


현재 교황청으로 쓰이는 오늘날의 라테란 궁전


 
로마로 돌아 온 교황의 궁전인 라테란(Lateran Palace)은 이미 낡고 파 헤쳐져 당장 거처할 곳조차 없었다. 그래서 교황은 성 베드로 성당에 임시로 자리를 잡아야 했는데 지금까지 이곳에 거처하고 있다. 당시 교황이던 니콜라우스 5세(Nicolaus V, 1397~1455)는 낡고 황폐회한 교회를 할고 새로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교회는 새로운 교회건축을 위해 면죄부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이는 죄를 지어도 돈만 내면 된다는 것과 다르지 않았다. 율리우스 2세와 미켈란젤로와의 갈등도 결국 성당의 신축 또는 개축, 증축자금 즉 돈이 문제였던 때문에 교회는 온갖 이유를 동원해서 면죄부 판매에 박차를 가하게 된다. 사태가 여기에 이르자 아우구스티노 수도회 소속의 마틴 루터(Martin Luther, 1483~ 1546)는 95가지의 이유를 들어 면죄부 판매를 반박했고
1530년 아우크스부르크의 신앙고백 이후 결국 교회는 가톨릭과 프로테스탄트 즉 신교로 나뉘게 되었다. 

 신교도들은 교회가 하느님의 성전이라는 사실을 인정하지만 교회를 장식하고 치장 하는 일은 최소화하는 청빈과 검소를 기본으로 했다. 이런 신교도들의 주장에도 일부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교황 파울루스 3세(Paulus Ⅲ)는 트렌트 공회의(Tridentine Council)를 소집하여 종교 개혁 후 등장한 신교에 대응하여, 교리의 확인과 교회 내부의 쇄신을 위해 3회에 걸쳐 개최하면서 반 종교개혁운동이 시작된다.

이 회의는 성모숭배와 비적(Sacrament) 신앙을 확인하는 동시에 1563년 말 공포된 교령의 의거 신교의 성상파기 또는 성상을 부정하는 것에 대해 가톨릭교회는 성상과 성 유물의 보호를 결정함으로서 바로크 미술의 뚜껑을 열었다. 그리고 도상(iconography)에 관해 엄격하게 규정하였으며 그림을 글을 읽지 못하는 문맹자들에게도 교리와 복음을 전파 하는 수단으로 자리 잡았다. 성 그레고리우스 1세의 말처럼 미술은 선교의 수단으로 ‘문맹의 성서’가 되었다. 이런 가톨릭교회의 미술에 대한 인식은 교황 니콜라우스 5세가 1455년 선종 당시에 남겼다는 말에서 잘 드러난다.


“교양이 부족한 대중의 정신에 견고하고 안정된 신념을 심어주기 위해서는 시각에 호소하는 무엇인가가 있어야만 한다. 교리에만 의존하는 대중의 신앙은 미약하고 동요될 수밖에  없다.....인상적인 비례를 갖추고, 기품과 미가 조합된 훌륭한 건축물은 교황의 권위를 고양시키는 데, 막대한 기여를 할 것이다.”


교회는 신이나 교황을 위한 수단인 동시에 민중을 교화할 목적으로 활용하기로 하면서, 공의회의 결의에도 불구하고 성당은 더욱 화려하고 호화로워졌다. 하지만 그림은 여전히 알기 쉬운 내용을 사실적으로 묘사하는 동시에 정서적인 호소력이 강해야 한다는 조건을 충족시키는 신앙에 봉사하기위한 그림이어야 했다. 


 새로운 일감으로 사기가 충만해진 당시의 예술가들을 더욱 고무시킨 것은 이그나티우스 데 로욜라(Ignatius de Loyola, 1491~1556)였다. 군인이었던 그는 전쟁에서 부상을 당하고 병상에서 하느님을 만나 누구 못지않은 신앙심의 소유자가 되었다. 그는 결국 예수회를 조직하여 신의 병사가 되었다. 그는 비록 가난할 지라도 교회에 갈 때는 교황의 친인척에 버금갈 만큼 화려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교회에도 대리석과 금장식, 그림과 조각, 천정화와 화려한 치장벽토가 필요하다고 믿었다. 또 예수회 회원들은 교회가 신의 거주지인 동시에 신도들이 자유롭게 쉬었다 갈 수 있는 휴게실의 역할을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예수회는 적극적으로 속세에 파고들어 일반 신도들을 구원하고자 했다. 이들은 학교와 병원을 지어 현실적인 수단을 통해 신의 은총을 경험할 수 있도록 했다. 그리하여 당시 제작된 조각이나 그림은 영혼과 육체가 일체를 이루어 ‘법열’의 상태에 이른 극적인 표현들이 많았다. 이런 법열의 상태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작품으로는 로마 산타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에 있는 베르니니(Gian Lorenzo Bernini, 1598~1680)의 <성녀 테레사의 법열> (The Ecstasy of St. Teresa, 1646~52, 대리석 높이 350cm, 산타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 로마) 이 있다.


             Gian Lorenzo Bernini, <성녀 테레사의 법열> 1646~52, 로마 산타마리아 델라 비토리아 성당


 

하지만 이 작품의 극적인 상황과 묘사 때문에 성스러움과 에로틱의 경계에 놓여있다는 점에서 논란거리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시기 고위 성직자들의 선교수단으로서의 미술에 대한 분명한 인식으로 인해 확실한 후원자로서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베르니니 <바티칸 성 베드로 성당의 제대를 가려주는 발다키노(천개天蓋)>(1624-33)



하지만 이런
종교에 봉사하는 바로크에 대한 반발로 영국에서 고딕스타일이 등장하였고 이는 점차 유럽일대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도 이즈음의 일이다.


교회와 신도들의 지갑이 화가 등 예술가들을 향해 열려있던 시절 가장 많은 돈과 높은 명예를 누렸던 이는 이미 31세에 로마에서 가장 유명한 예술가가 되었던 베르니니이다. 그는 천재적인 재주와 함께 남다른 전략과 반종교개혁운동 정신에 입각해서 은총과 용서의 날이 임박했음을 알리는 일에 정성을 다했다. 그는 <추기경 보르게세의 흉상>(Cardinal Borghese, 1632, 대리석, 높이 78cm, 보르게세미술관, 로마)을 만들어 그의 눈에 들면서 추기경의 사금고에 들어가는 돈보다 베르니니의 금고에 쌓이는 돈이 더 많을 정도로 성공을 거둔다. 


베르니니, <보르게세 흉상>( 1632, 대리석, 높이 78cm, 보르게세미술관 로마)



하지만 동시대에 베르니니의 라이벌로 돈보다는 예술가로서 세상의 잡다한 일보다는 자신의 예술에 매달렸던 사람이 있다. 보로미니(Francesco Borromini, 1599~1667)가 바로 그사람이다. 베르니니와 보로미니는 당대 최고의 예술가였다. 하지만 한 사람은 세속적인 성공을 생전에 이루었고, 그에 반해 보로미니는 예술가로서 자존심은 세웠지만 결국 세상과 타협하지 못하는 성격 때문에 결국 68세의 나이에 자살로 생을 마감했다. 

 

보로미니<산 카를로 알레 콰트로폰타네의 돔>(1634-1641, 로마)



교회의 재건과 부흥 특히 예수회의 회화관은 많은 화가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고 사회적인 지위를 누리게 해 주었고 신을 대신해서 인간을 통치한 속세의 왕들은 자신의 권위를 위해 화가들에게 벼슬을 내리고 예의를 갖추었지만 이는 일부 잘나가는 화가들의 몫이었고 여전히 무명의 화가들은 춥고 배고픈 처지였다. 그리고 여전히 미술품의 소비처는 교회와 왕 그리고 제후 등 지배계급에 국한되었다. 어찌보면 부유한 시민계급이 주 고객이었던 르네상스시대의 피렌체 보다 더 퇴보한 상황이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프랑스의 경우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표방하면서 태양왕 루이 14세(Louis XIV of France, 1638~1715)에 이르러서는 화가 등 예술가들의 자발적인 모임이던 미술아카데미까지 국가행정조직에 편입시켜 여러 가지 권한을 부여하는 한편 공적인 미술품 주문은 이곳 아카데미 회원들에 한해서 수행할 수 있도록 했다. 단 아카데미회원은 개별적으로 그림을 주문받거나 팔수 없다는 전제아래.     



 하지만 여전히 미술은 하느님의 것이거나 제후들을 위한 것이었다. 물론 고대 그리스나 르네상스의 이탈리아 북부, 혹은 17세기 네덜란드에서의 예외는 있었다 할지라도 진정한 근대시민사회가 성립된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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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