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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6144 ×1024

극장에서 상영 중인 마거릿 혼다의 작품 ‘6144×1024’는 그저 ‘색’이었다. 영화 전체를 한 컷에 담고 싶어서 영화 상영시간 내내 카메라 조리개를 열어놓았던 사진작가 히로시 스기모토가 필름에 포착한 스크린이 하얀 색이었다면, 영상의 의미에 다른 방식으로 다가가고 싶었던 마거릿 혼다의 작품은 색의 스펙트럼이었다. 하나의 색이 다른 색으로, 또 다른 색으로 일정한 속도에 맞춰 변해갔다. 어둠에 몸을 묻고, 스크린에서 펼쳐지는 이야기와 영상에 몰입할 기대감으로 극장을 찾는 이들이라면 불편할 수도 있는 화면이었다. 서사의 개연성이랄 것도, 미장센이랄 것도 없는 이 영상에서는 1초에 24프레임씩 약 300만장의 컬러 스펙트럼이 36시간22분2초간 흘러갔다.

 

마거릿 혼다, Spectrum Reverse Spectrum, 2014 ⓒ마거릿 혼다

 

경험을 지배하는 물질의 세계와 그 과정을 깊이 살펴보는 작업에 집중하는 마거릿 혼다는 기술이 지시하는 지침을 고스란히 수용하기보다 그 기술의 예측 가능한 기능을 배반하거나 극대화하는 방식으로 상상을 풀어내는 실험을 즐긴다. 최근 디지털 영화 프로젝터에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이 작가는 디지털 영화 프로젝터로 구현 가능한 모든 색을 펼쳐보이고 싶었다. 적색 청색 녹색이 만들어낼 수 있는 거의 모든 조합 6144종의 색을, 1024단계에 달하는 거의 모든 명도로 볼 수 있는 영상을 완성했다.

 

시작과 끝이 있기야 하지만, 시작도 끝도 큰 의미가 없는 이 작품이 상영되는 동안, 관객들은 끊임없이 극장을 들락거렸다. 누군가는 1분 만에 극장 밖으로 나갔고, 누군가는 1시간 이상 모노크롬 회화처럼 펼쳐지는 스크린을 주시했다. 극장에 머무는 동안 만날 수 있는 색채의 스펙트럼은, 다시 돌아오지 않는, 그리고 거꾸로 흐르지도 않는 시간의 스펙트럼이 되었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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