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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인상파 이전의 인상주의자, 화상 폴 뒤랑 뤼엘 


글/ 정준모(2011 청주국제공예비엔날레 전시감독, 국민대 초빙교수)
 

근대산업사회로 발걸음을 옮겨가고 있던 19세기 중반 프랑스 화단을 지배하는 것은 여전히 서사적인 고전주의나 목가적인 자연주의나 사실주의가 주류를 이루었다. 오늘날 근대적인 조형의식과 색채와 미학의 총체라 인식되는 인상주의는 적어도 당시로서는 설 자리도 전시할 장소도 얻기 어려운 천덕꾸러기에 불과했다.

그래서 이들은 파리 교외를 전전하며 그림을 그렸고 파리 시내에 자리를 잡는다면 사창가나 다름없는 허름한 몽마르트의 피갈(Pigalle)거리였다. 이즈음 누구하나 눈길조차 주지 않던 인상주의자들의 혁명적인 그림을 혁신적인 시각으로 바라보고 있었던 이가 있었으니 이 사람이 바로 폴 뒤랑 뤼엘(Paul Durand-Ruel, 1831~1922)이다. 


르느와르가 그린 폴 뒤랑 뤼엘의초상화(1910)


1830년 처음 미술품 재료상으로 출발한 그의 아버지 장 뒤랑 뤼엘(Jean Durand-Ruel)의 화랑은 화가들에게 물감이나 종이, 기름, 수채화물감, 이젤 등을 주고 그림을 받는 화방을 겸하고 있었다. 늘어나는 신흥 부르주아 계급을 보면서 장은 그들을 그림을 사는 고객으로 만들어야 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당시 테오도르 제리코(Jean Louis André Théodore Géricault, 1791~1824)나 들라클로와(Eugene Delacroix, 1798~1863) 같은 이미 아카데믹한 부분에서 검증을 받은 화가들의 작품을 주로 취급하면서 그림을 대여하기도 하는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화상으로 활동했다. 1833년 보다 많은 고객들이 사는 쁘띠 상스(Petits Champs)로 이전했다 

                                들라크루와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1830, 유화, 260*325cm)


다시 1846년 보다 번화한 슈아젤가(Rue de Choiseul)로 사업을 확장해서 이전한다. 이때 그의 아들이며 19세기 최고의 화상이 된 폴 뒤랑 뤼엘이 합세한다. 하지만 1848년 2월 22일 발발한 프랑스의 2월 혁명으로 인해 잠시 소강상태를 맞이하기도 했지만 아버지와 아들의 끊임없는 노력으로 1855년 파리 세계박람회 기간 중에 개최한 들라클로와의 전시회는 대 성황을 이루었다. 화랑은 더욱 번창해 1856년 드디어 오페라좌와 아름다운 파리의 중심 뱅돔광장(Vendôme)이 있는 페가(Rue de la Paix)에 보다 큰 화랑을 구해 이사하는 중에도 그의 성공의 밑거름이 된 화가들과의 긴밀한 관계는 꾸준하게 유지한다. 그리고 아버지로부터 일을 배우면서 프랑스는 물론 유럽전역을 여행하면서 견문을 넓혔고 그림을 사고팔고 발견하는 안목을 갖추었다. 
 

르느와르 <찰스 & 죠지 뒤랑 뤼엘의 초상>(1882, 유화, 65*81cm)


그리고 1862년 그는 에바 라퐁(Eva Lafon)과 결혼을 하게 되는데 이후 슬하에 다섯 아이를 두었다. 이후 나폴레옹 3세의 명에 따라 낙선자전시회가 마련되면서 인상주의자들의 존재도 세상에 조금씩 얼굴을 내밀기 시작했다. 32세가 되던 그해 뒤랑 뤼엘은 처음으로 경매에 참여하면서 경매사로서의 꿈을 키우기도 한다.   


1860년대부터 바르비종파 화가들의 그림을 주로 취급하면서 크게 성공을 거두었고 나름 안정적인 위치를 점하기 시작한 아버지의 화랑에 1865년부터 본격적으로 뒤랑 뤼엘은 화랑의 모든 일들을 주도해나가기 시작했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코로(Corot)와 바르비종(Barbizon school)파 화가들의 작품을 주로 다루었지만 인상주의 화가들을 만나면서 이들 그룹과 새로운 관계를 형성해 나가기 시작한다. 


이즈음 그는 화상으로서 “참된 화상은 또한, 필요하다면 자신의 이익을 희생하는 것도 마다하지않는 이해심 깊은 애호가여야 한다.” 고 말하며 어떤 것으로부터도 예술을 방어하며, 화가의 작품에 최상의 가치를 부여하며, 개인전을 통해 작가와 컬렉터들을 이어주고, 화랑 간의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강화하며, 자신의 갤러리와 자신의 집을 무료로 개방하여 그림을 감상할 수 있도록 하며, 언론을 통해 화가들의 작품을 최대한 홍보하는 동시에 금융권과 미술계를 접목시킨다는 나름의 근대적인 화랑으로서의 철학과 원칙을 세운다. 


그는 일반적으로 그림을 화가들로부터 위탁판매하거나 미술품을 구입한 후 일정한 이문을 붙여 파는 일반적인 화상들과는 달리 자신이 관심 있는 화가들에게 일정하게 매월 또는 매주 급료를 지불하는 소위 전속계약이라는 제도를 통해 화가들을 후원하고 전적으로 화랑이 지원해서 개인전을 열어주는 공격적이면서 새로운 방식으로 화랑을 경영했다. 집중적으로 특정작가의 작품을 매집하고 때로는 앞으로 그릴 그림까지 선점하는 공격적인 방식을 택했다. 이는 금융권을 미술시장에 끌어들인 탁월한 그의 능력덕분이었다. 예를 들면 그는 1866년 테오도르 루소(Théodore Rousseau, 1812~1867)의 작품 70여점을 구입한 후 루소의 회고전을 열고 언론과 관객들을 동원하여 커다란 이익을 얻었고 이듬해 루소가 사망하고 열린 경매에서 또 다시 그의 작품을 수집하는 등의 수완을 발휘한다.   

 
그는 이렇게 ‘인상주의’라는 말을 사용하기 전부터 인상주의를 지원하고 후원한 화상이 되었다. ‘탕기아저씨’가 단지 마음씨 좋은 후원자였다면 뒤랑 뤼엘은 후견인을 자처하고도 남을 상재와 경영능력을 갖추었던 이로, 인상주의 화가들의 진보적인 성향과 전통적인 미학에 대항하는 새로운 조형의지가 만나 최대의 시너지효과를 거둔 것이 인상주의라 할 것이다.        


그는 1867년 파리의 라파예르 거리로 화랑을 이전하고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그림재료와 화구, 가구와 고미술품까지 잡다한 화랑의 취급품목을 그림과 판화만으로 한정해서 집중한다. 그리고 이미 컬렉터로 활동하던 귀족이나 부호들이 아니라 양적으로 성장한 신흥 부르주아 계급들을 새로운 미술품 구매층으로 확대시키고자 노력했다. 하지만 1870년 발발한 프로이센-프랑스 전쟁(1870~71) 즉 보불전쟁이라 불리는 프랑스와 독일의 전쟁으로 말미암아 그는 피난을 떠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피난 중에 런던의 본드가 168에 새롭게 화랑을 열고 화상으로서의 업무를 재개하는데 이때 그는 바르비종파 화가들의 그림을 다루는 전문 화랑으로 자리 잡았다. 1970년 12월 그는 찰스 데샹(Charles Deschamps)과 함께 투자하고 판매하는 공동 마케팅으로 제 10회 프랑스 예술가 협회전을 개최해서 미술시장의 기린아로 등장한다. 그는 이때 영국으로 피난 와 있던 샤를 프랑수아 도비니(Charles François Daubigny,1817~78)의 소개로 클로드 모네(Claude Monet,1840~1926)를 알게 되고, 모네는 다시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18 30~1903)를 소개해 주어 이들과 교유하면서 전쟁이 끝나기를 기다린다.


도비니 <발몽도와 근처 와즈 강에서 빨래하는 여인>(1865)

도비니 <와즈강변의 보트들>(1865)


당시 모네와 피사로는 바르비종파 스타일로 어느 정도 인지도를 지닌 작가였다. 뒤랑 뤼엘은 이들 두 화가의 작품을 집중적으로 구입했다. 그는 아직 제대로 인정받지 못했던 두 사람의 작품을 구입한 후 런던에서 개인전을 열어 성공을 거둔다. 이렇게 그는 아직 인정받지 못하는 ‘잠재력 있는’ 작가들을 주목했으며 이런 그의 화상으로서의 방식은 매우 유효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는 그림을 고객들에게 대여해 주고 다시 이 작품을 판매하거나 클럽이나 고객들과 접하기 쉬운 공간에 작품을 걸어 놓는 등의 전략을 구사하면서 화상으로서 승승장구한다. 


전쟁이 끝난 1871년 다시 파리로 돌아 온 그는 모네와 피사로를 그의 파리 고객들에게 소개한다. 그들은 시간이 흘러 파리 컬렉터들에게도 인지도가 올라가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작품은 이미 그의 수중에 있었다. 1872년 런던의 뒤랑 뤼엘 화랑에서 아직 결성되기전 인 인상주의 화가들 즉 카페 게르보아에 모이던 일군의 젊은 작가 즉 바티뇰 그룹과 바르비종파를 모은 전시를 개최한다. 이렇게 그는 유명작가와 신진작가들을 한데 모아 전시하는 것을 하나의 전략으로 삼았는데 꽤나 효과적이었다.


이때 미국 화가로 런던에서 활동하고 있던 제임스 맥닐 휘슬러(James Abbott McNeill Whistler, 1834~1903)도 함께 참여한다.

 
제임스 맥닐 휘슬러 <Nocturne in Black and Gold-The Falling Rocket>(1875 유화 60.3 x 46.6 cm)
 
 
휘슬러는 이때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구입하여 뉴욕으로 가져갔는데 이를 계기로 미국에도 인상주의 바람이 부는 계기가 된다. 이때 마네의 작품 23점을 한꺼번에 구입하면서 한때 재정적 위기에 처할 만큼 미술품을 확보하는데 무모한 일면도 지녔던 그는 성공의 배경이 되어 줄 탄탄한 고객이자 인상주의의 옹호자였던 컬렉터들이 함께 있어 이런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바리톤 오페라 가수로 우리에게 더 알려진 장 밥티스트 포레(Jean-Baptiste Faure,1830 ~1914)는 모네의 후원자이자 뒤랑 뤼엘의 고객인 동시에 인상주의의 후견인이었다. 그는 마네의 대표작인 <풀밭 위의 식사>나 <피리 부는 소년> 등 대표작을 포함해 67점을 그리고 모네의 <아르장퇴유의 다리>를 비롯한 62점의 작품을 소장한 대 수장가였다. 여기에 드가, 시슬리, 피사로, 장 오귀스트 도미니크 앵그르(Jean Auguste Dominique Ingres, 1780 ~1867), 피에르-폴 프뤼동(Pierre Prud'hon, 1758~1823) 등의 작품을 소장하고 있었다.  

 

마네 <풀밭 위의 식사>


부유한 사업가이자 루브르 백화점 주인이기도 했던 에르네 호슈데(Ernest Hoschede, 1837 ~1891)도 그의 고객이었다. 그 또한 모네를 비롯한 인상주의 화가들의 후원자였다. 그는모네에게 자신의 집 장식을 의뢰할 정도로 좋아했지만 그의 아내가 마네의 두 번째 부인으로 동거를 시작하면서 인간적인 갈등에 싸이기도 한다. 1877년 그는 파산하고 그의 소장품은 경매에 붙여져 흩어지고 말았고 그의 아이들은 어머니에게 보내져 모네의 슬하에서 자랐다. 1891년 그가 세상을 떠나자 모네는 호슈데의 아내였던 엘리스와 정식으로 결혼식을 올린다.


이외에도 인상주의를 후원했던 이들로는 비평가이자 문필가였던 테오도르 뒤레(Théodore Duret,1838~1927), 은행가 샤를 에프뤼시(Charles Ephrussi,1849~1905), 루마니아 출신의 의사로 인상파화가들의 주치의나 다름없었던 조르주 드 벨리오 (Georges de Bellio, 1835~1894)등이 있다. 그는 1874년 제 1회 인상주의 전시회에서 모네 그림을 소장했으며 1878년에는 <인상-해돋이>를 단돈 20프랑에 소장했다.



    모네  <해돋이 인상>


1894년 조르주가 사망하자 그의 딸 빅토린(Mademoiselle Victorine de Bellio)은 아버지가 소장했던 150여 점의 그림을 1957년 일명 마르모탕 모네 미술관(Musée Marmottan Monet)이라 불리는 마르모탕미술관(Museum Marmottan)에 기증했다. 젊은 인상파 화가들을 당시 최고의 화가였던 들라클로와 동등하게 보았던 그는 인상파의 철저한 지지자였던 퇴직 세관원 빅터 쇼케 (Victor Chocquet,1821~91)의 존재도 매우 중요하다.  


 
오늘날의 명성과 달리 인상파화가들의 삶은 처절했다. 집시나 보헤미안의 삶과 다를 바 없었다. 이들의 생활고를 해결해 줄 생각으로 1874년 3월 24일, 뒤랑 뤼엘이 경매인으로 나서 드루오(Drouot) 경매장에서 르누아르, 모리소, 시슬레,  모네의 작품 163점을 경매에 붙였다. 하지만 이들의 그림은 통렬한 야유 속에 형편없는 가격에 낙찰되어 수중에 별로 남는 것도 없는 결과를 낳았다. 그리고 그해 4월 카퓌신가(Boulevard des Capucines) 나다르 사진관에서 처음으로 인상파전시를 개최했다. 당시 이들 전시의 명칭은 ‘화가, 조각가, 판화가 등 예술가들의 유한협동조합’이었다. 모네와 바지유(Jean Frédéric Bazille,1841~1870)의 생각은 피사로의 강력한 지지를 얻으며 마침내 전시로 드러났다. 29명의 젊은 화가들의 165점이 전시된 이 전시는 한 달간 3,500명의 관람객이 방문할 정도의 참패로 끝났다. 여기에 ‘인상파’라는 비아냥조의 이름을 루이 르루아(Louis Leroy)로부터 얻었다. 

바지유 <바지유의 콩다뱅가의 화실>(1870, 90×128.5cm, 파리 오르세이)
 
세상이 ‘정신 나간 화상’이라고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뒤랑 뤼엘은 1876년 3월 30일부터 4월 30일까지 그의 화랑에서 두 번째 전시를 열었다. 20명의 252점이 출품된 이 전시회도 역시 “여자까지 하나 낀 대여섯 명의 미치광이 집단”들의 전시라는 악의에 찬 평가를 들어야만 했다. 하지만 일부 언론과 특히 시인 말라르메(Stephane Mallarme, 1842~1898)의 글은 그들을 고무시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이렇게 두 번째 전시부터 어느 정도 세상이 인정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시 참여했던 화가들의 생활은 궁핍하다 못 해 처절한 것이었다.  

1877년 3회 전시는 인상주의의 가장 중요한 시기로 평가받는다. 18명의 230여점이 전시된 3회전은 관람객도 늘었고 비평의 강도도 약해졌다. 이후 분열을 거듭하며 6회까지 지속되지만 인상주의자들 간의 입장과 이해 때문에 그 결속력은 극도로 떨어졌다.   


##비평의 등장 
 
 이 시기 미술계는 커다란 변화를 만나게 된다. 이제 더 이상 화가와 컬렉터 또는 소장가들의 관계가 아닌 화가와 비평가 그리고 시장과 컬렉터의 구조로 바꾸어 나간다. 특히 비평의 힘은 새로운 매체로 자리 잡았던 신문이나 잡지의 성장과 관련이 있다. 근대화와 산업혁명으로 새롭게 등장한 도시노동자층과 중산층들에게 정보를 제공해주는 기능을 수행했던 매체의 미술비평은 화가들을 세상에 알리는 중요한 수단이 되었다. 

 
이런 미술비평과 매체의 중요성을 인식한 뒤랑 뤼엘은 보불전쟁이 끝나고 파리로 돌아온 1890년『두개의 예술』(L'Art dans les deux mondes)을 창간하나 다음 해에 폐간하고 만다. 하지만 이 잡지를 통해 그는 르느와르와 피사로 등을 소개했다. 그리고 1899년 다시 『예술과 호기심의 국제저널』(La Ravue internationale de l'art et de la curiosité)을 라아무도 모르게 자금을 지원해서 창간하여 화실에서 작가와의 인터뷰를 싣고, 비평가들에게 평론을 의뢰해서 실었으며 화집을 발행해서 작가들을 홍보하는 새로운 방식을 도입했다. 

 
뒤랑 뤼엘은 많은 인상파화가들의 작품을 수장하고 있었지만 일부 컬렉터를 제외하고는 거들떠보지도 않던 시절, 창고를 가득 채우고 있는 인상파 화가들의 그림은 1870년대 중반과 1880년대 초 두 번이나 결정적으로 그를 재정적인 위기를 맞는다. 1970년대 중반 불어 닥친 경제위기는 그의 화가들에게 월정 급료를 지불하기 힘들 정도로 어려움을 맞았지만 곧 위기를 극복할 수 있었다. 

어떤 화가의 작품가격이 급속하게 상승하면 이익을 얻었다가 후원자가 파산하거나 전력을 다해 구입한 작품이 팔리지 않으면 파산지경이 이르는 재정적 기복이 심했지만 크게 게의치 않을 만큼 매우 통이 큰 사람으로 자신이 좋다고 생각하거나 전망이 밝다고 판단되면 그 작가의 작품 전체를 사들이기도 했다. 1873년 그는 마네의 화실에서 본 23점을 3만 5천 프랑에 사들였다. 그는 후에 이 작품들을 각각 4,000프랑에서 2만 프랑 또는 그이상의 가격으로 팔아 막대한 이익을 올리기도 했다. 1881년 1월에는 피사로가 보여주는 작품 모두를 구입하고 앞으로 그릴 작품도 모두 구입하기로 했다. 그로부터 한 달 뒤 외젠 부댕(Eugène Louis Boudin, 1824~1898)에게도 같은 제안을 했다. 이후 미국의 백만장자들이 인상파 그림을 사기위해 몰려들자 프랑스 소장가들에게 팔았던 작품을 되 사들여 한 점당 10만 프랑이라는 어머 어마한 금액으로 되팔아 큰 이익을 남기기도 했다. 

 
하지만 1882년 들어 자금을 지원해 주던 뤼니옹 제네랄 은행(Le Union Générale bank)이 1882년 파산하면서 뒤랑 뤼엘은 다시 심각한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 여기에 1870~80년 경 많은 바르비종파 화가들이 사망하면서 그들의 작품이 대량으로 시장에 몰려나오면서 경제적 위기는 더욱 더해졌다. 하지만 위기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화가들과 신의를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미래는 너무도 암울해 보입니다. 회의에 사로잡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습니다. 더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라는 1882년 9월 18일, 모네가 보낸 편지에 그는 언제나처럼 관대하게 돈과 풍부한 충고로 성실하게 답했다.

그리고 그의 집을 장식하는 일을 모네에게 맡겼고 그런 중에도 뒤랑 뤼엘은 런던과 베를린에서 모네의 전시를 개최하고 10월에는 노르망디에서 그린 20점의 작품을 구매했다. 하지만 위기는 역시 기회였다. 

 
1883년 마네가 사망하고 그의 유작들이 경매를 통해 호평리에 팔려나가고 공립미술관 등지에 소장되면서 바로 회고전으로 이어졌다. 이로 인해 어느 정도 경제적 위기에서 숨통은 튀였으나 뒤랑 뤼엘의 화가들은 다시 살롱전에 참여하거나 새로운 화상들을 찾아나서야 했다.  

 
그의 이런 재정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준 이는 다름 아닌 미국출신의 여성화가  메리 스티븐슨 카사트(Mary Stevenson Cassatt,1844~1926)였다. 주식중개로 돈을 벌어 부동산 업자가 된 아버지와 은행가의 상속자인 어머니 사이의 유복한 집안에서 태어난 그녀는 화가가 되기로 하고 파리에 정착해서 인상파의 대열에 합류한다.

 

 

[##_'2C|cfile10.uf@130C7D474DB124721B4D9A.jpg|width="370"_##](1879, 종이에 파스텔)|cfile5.uf@150C7D474DB124731CED74.jpg|width="370" height="493" alt=""|메리 스티븐슨 카사트 <아이 돌보기>(유화)'>

그녀는 1979년 인상주의 전시에 참가한 이후 뒤랑 뤼엘의 재정적 위기 때 많은 도움을 준다. 미국 펜실바니아 철도회사 사장이었던 오빠 알렉산더 카사트(Alexander Cassatt, 1839~1906)도 큰 고객이 되어주었다. 설탕업자 해리 하버마이어(Henry Osborne Havemeyer, 1847~1 907)와 1883년 결혼한 그녀의 친구 루이진 엘더(Luisine Elder)도 매리 카사트의 조언으로 인상파 작품을 대량으로 수장하여 뒤랑 뤼엘을 도왔다. 현재 이들 소장품 대부분은 현재 뉴욕의 메트로폴리탄 미술관에 기증되어 전시중이다. 이외에도 카사트는 미국 필라델피아 미술관을 비롯한 유수의 미술관에서 인상주의 작품을 소장하도록 설득해서 뒤랑 뤼엘이 경제적 위기를 극복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1890년대 초 르느와르와 피사로의 전시가 호평을 받으며 파리화랑도 다시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이런 호전된 상황에 고무된 뒤랑 뤼엘은 독일의 10개 도시를 순회하는 인상주의 전을 시작으로 독일에 인상주의 컬렉터들을 양성하고자했고 이와 함께 세계로 인상주의를 수출하고자 노력했다. 소위 국제화를 시도한 셈이다.      
 

1885년 뒤랑뤼엘은 미국미술협회(American Art Association) 회장 제임스 수톤(James F. Sutton, 1843~1915)의 인상파 최전성기작품을 모은 전시회로 모든 경비는 미국 측이 지불하고 작품이 팔리면 일정부분 커미션을 주는 조건의 제안을 해왔다. 그는 이 제안을 수용했다. 자신의 경제적 위기를 극복해 줄 것이라는 믿음을 가지고. 하지만 상업적으로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비평가 반응은 좋았다. 이에 용기를 얻은 뒤랑 뤼엘은 이듬해인 1886년 뉴욕에 지점을 열어 인상주의 화가들의 그림을 미국의 컬렉터들에게 소개한다. 이로 인해 인상파 화가들 그림이 미국에서 고가에 팔리는 전환기를 맞는다. 이 전시회에서 가능성을 발견한 그는 1886년 4월 뉴욕에 뒤랑 뤼엘 화랑 분점을 열고 약 300여점의 작품을 가지고 <제1회 파리 인상파 화가전>을 열었다. 

 
그는 이미 몇몇 파리의 화상들과 함께 1883년 보스턴만국박람회를 계기로 열린 해외작가전을 개최한 바 있다. 이때가 그의 첫 미국방문이었다. 1884년 프랑스는 미국독립 100주년을 기념하여 ‘자유의 여신상’을 선물하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여신상은 제작되어 미국에 도착했지만 좌대가 없는 채 였다. 좌대제작경비를 마련하기위해 195점의 프랑스 공예품과 미술품으로 구성된 전시를 국립디자인미술학교(National Academy of Design)에서 열었다. 하지만 미술품은 미국 소장가들이 출품한 3점의 마네와 1점의 드가작품 그리고 3명의 미국화가들의 작품이 전부였다. 

 
이어 1866년 4월 뉴욕에서 대규모의 인상파전을 개최하면서 미국에 인상주의를 본격적으로 상륙시켰다. <파리 인상주의들의 유호와 파스텔화>라는 제목으로 열린 전시는 뒤랑 뤼엘이 지니고 있던 289점의 작품으로 이루어졌다. 전시가 끝난 5월에는 미국의 일부 인상주의를 신봉했던 컬렉터들의 작품을 추가해서 국립디자인미술학교로 순회하였다. 당시 전시를『더 스튜디오』(The Studio)지는 “뒤랑 뤼엘과 몇몇 소장가들은 우리에게 더 할 나위없는 선물을 주었다.”고 할 정도로 매우 호의적으로 다루었다. 

 
하지만 1887년 그는 장애에 부딪혔다. 1886년 개최한 인상파전의 통관 및 관세문제를 제기한 뉴욕일부화랑들의 제소로 판매했던 그림을 파리로 반출했다 다시 뉴욕으로 반입하면서 관세를 납부하는 뻔 한 절차를 거쳐야했던 것이다.  
 
1890년 화랑을 하버마이어가 소유한 건물로 이전한 후 많은 소장가들과 연을 맺고 인상파 화가들을 소개해 나갔고 당시 미국으로 유입된 작품들 대부분은 오늘날 미국 주요 미술관의 소장품으로 남아있다. 1905년에는 약 300점에 이르는 인상파 작품을 가지고 런던에서 전시회를 열었는데 이 전시회는 인상파 최고의 전시로 평가된다.

1910년에 다시 런던의 그라프톤 화랑(Grafton Galleries)에서 대규모 인상파화가들의 전시를 개최하는데 이 전시회는 <마네와 후기인상주의자들>(Manet and the Post-Impressionists) 이라는 이름으로 열렸다. 이 전시회에서 폴 고갱과 고흐 그리고 세잔을 주목한 영국의 형식주의 미술평론가 로저 프라이(Roger Eliot Fry, 1866 ~1934)는 앙리 마티스(Henri Matisse, 1869~1954), 피카소(Pablo Picasso, 1881~1973) 까지 인상주의의 영역을 확대시켜 정의했다. 


 
 인상주의와 후기인상주의를 오늘의 위치에 올려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뒤랑 뤼엘은 1922년 2월 5일 눈을 감았다. 1891년부터 1922년까지 31년간 그가 구입한 작품은 약 12,000점에 달했다고 한다. 약 1,000 이상의 모네, 1500점이 넘는 르느와르, 400여점이 넘는 드가와 시슬리, 800여점의 피사로, 약 200여점 가까운 마네의 그림 그리고 400여점의 메리 카사트의 작품 등이 대부분이었다. 

 
당대 사람들이나 후대의 사람들이 어떻게 평가하던 간에 그는 19세기 프랑스 인상주의의 가장 성공한 화상이자 경제적인 지원자의 위치에 있었다. 이런 그의 유럽과 미국을 아우르는 화상으로서의 성공은 에드가 드가(Edgar Degas), 에두아르 마네(Édouard Manet), 클로드 모네(Claude Monet), 여성화가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 1841~95), 카미유 피사로(Camille Pissarro), 오귀스트 르느와르(Pierre Auguste Renoir), 알프레드 시슬리(Alfred Sisley) 등이 있어 가능한 것이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유명하지 않은 막심 드토마 (Maxime Pierre Dethomas, 1867~1929)나. 위그 메를(Hugues Merle, 1823~81) 등 여러 작가들까지 챙겼다. 그는 1880년대 들어서서 두 아들 요셉(Joseph)과 조지(George)를 전면에 내세웠고 이들은 파리와 뉴욕을 번갈아가면서 책임을 맡았다. 그리고 그 손자대에 이르기까지 뒤랑 뤼엘 화랑은 인상주의와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바탕으로 성장했지만 파리의 화랑은 1975년, 뉴욕화랑은 1950년 문을 닫았다.

 
인류의 근대미술발전에 기여했지만 그가 죽기 2년 전 프랑스 최고의 훈장이라고 수여 받은 레지옹 도뇌르 훈장(Légion d'Honneur)의 수여 이유는 아이러니하게도 국제교역에 공을 세웠다는 것이었다. 근대미술의 발전에 공로를 세운 것이 아니라 말이다. 예나 지금이나 화상들을 평가하는 척도는 결국 ‘돈’이란 말인가. 
 
하지만 이러한 천하의 뒤랑 뤼엘에게도 라이벌이 있었는데 그보다 무려 25살이나 어린 파리의 또 다른 화상 조르주 쁘띠(Georges Petit, 1856~1920)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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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Kh-ar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