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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송수정의 사진 속으로

공상 영화처럼


Peter Leighton, Man lives through plutonium blast


만약 인류가 멸망한다면 환경 때문일까, 아니면 인류의 어리석음 때문일까. 훨씬 진화한 신인류가 그렇게 멸망한 현생 인류의 흔적을 사진을 통해 발견한다면, 우리네 문명에 대해 어떤 해석을 내릴까.

미국 사진가 피터 레이턴의 작업은 이런 상상에서 시작한다. 어렸을 적, 어머니가 극장에 떠맡기다시피 해서 관람한 공상 과학영화는 하필 인류가 핵폭발을 겪고 살아남는다는 내용이었다.

엉뚱한 상상력과 달리 레이턴은 꽤 나이가 많은 작가이니 그 영화는 오래전의 조잡한 영화였는데도 그때의 시각적 경험은 늘 그를 쫓아다녔다. 하필 인류는 그 영화의 예언처럼 핵으로부터 점점 더 자유로워지지 못하고 있기까지 하다.

하지만 <핵폭발을 견뎌낸 사람>이라는 제목의 작품은 반드시 핵이 가져올 재앙에 관한 것만은 아니다. 핵을 다룰 만큼 뛰어난 인류라 해도, 그것으로 망할 만큼 어리석기도 하며 심지어 참을 수 없이 가벼운 사건사고 속에서 살아가기 때문이다. 이를 표현하기 위해 작가는 옛날 앨범 사진들을 합성해 일상 속 우연하고 엉뚱한 사건들을 만들어낸다. 마치 옛날 무성영화의 한 장면과도 같은 사진들은 모두 뜬금없거나 우스꽝스럽다.

텔레비전에서는 핵폭발을 견뎌낸 사람들의 문명을 발견했다는 기사가 나오고, 사람들은 마당에서 피난처로 쓸 땅을 파고 있는데 표정들은 모두 코미디의 한 장면 같다. 그렇다면 그가 이런 ‘쓸데없는 짓’을 하는 진짜 이유는 뭘까. 물론 그도 몇만 년 후 자신의 사진이 발굴되지 못할 것이라는 것쯤은 안다. 대신 그에게 사진이란 심각하고 객관적으로 사건을 기록하던 시대를 거쳐 이제 파편적인 기억과 이미지 놀이의 일부일 뿐이다. 어리석은 인류라도 디지털 시대와 함께 사진 문명을 그 정도로는 즐길 줄 알았던 것이다.



송수정 |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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