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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연의 미술 소환

기억의 잡초

 

홍범, 기억의 잡초, 2016, 혼합재료, 가변설치


‘기억의 궁전’은 장소에 기억을 심는 기술이었다. 사람들이 장소에 관한 특별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다는 믿음에 기대고 있는 이 기억술은 책이 없던 시절, 구두로 정보를 전달해야 했던 사람들이 애용했다. 방법은 이렇다. 내가 생생히 떠올릴 수 있는 장소와 동선을 생각한 후 동선에 따라 기억해야 할 정보를 이미지화해서 배치한다. 기억을 꺼내고 싶다면 이 궁전에 발을 들인 뒤 동선을 따라 걸으면 된다. 궁전에 들어서지 않으면 그 기억은 다시 만날 수 없다. 기억하기 위해 본인이 만든 공간 안으로 반드시 들어서야 한다는 것이 이 기억술의 치명적인 단점이긴 하지만, 기억을 오래 묶어 두기에는 매우 유용한 방법이기 때문에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거나 외국어를 공부하는 이들이 이 기술을 익힌단다. 클레오파트라가 즐겨 사용했고, 셜록 홈스도 기억의 궁전을 여러 채 지었다 했다.

 

기억의 주인이 어떤 이유로든 자신의 궁전을 더 이상 찾지 않는다면 어떻게 될까. 공간 곳곳에 새겨 넣었어도 쓸모를 다한 기억이라면, 흔적도 없이 사라질까. 공간에서 파생된 기억, 경험, 감정을 표상하는 작업에 집중해 온 홍범에게 기억은, 한때 다른 이의 인생이 흘렀을 곳, 어떤 생명이 성장하고 소멸했을 곳에서 무성하게 자라 공간을 가득 메워버리는 잡초 같다.

 

아주 선명하게 떠올릴 수는 없을지라도 특정 공간에서 시간을 담고 남아 있는 기억들은, 내 의지와 무관하게 다른 이미지들과 연결되고 증식하면서 유기체처럼 자라 공간을 뒤덮는 것 같다. 홍범은 이런 가정 아래, 공간과 그것을 인식하는 관찰자 사이 어디에선가 자생하고 있을 알 수 없는 기억들을 잡초의 형태로 표현했다. 그렇게 원주인의 기억망을 벗어난 이 잡초들은 공간에 영롱한 그림자를 드리우며 새로운 기억의 표상을 새기는 중이다.

 

김지연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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