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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송수정의 사진 속으로

다섯 단계의 모노드라마

임형태, I see, 180㎝×225㎝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 같은 일상은 예기치 않은 어떤 사건과 함께 변화를 맞이한다. 늘 작업과 씨름하며 살아가는 나날이기만 할 것 같았던 사진가 임형태에게 그 변화는 조금 놀랍게 찾아왔다. ‘암에 걸렸습니다’라는 진단과 함께. 그러나 그 당혹스러운 현실을 작업으로 풀어내는 작가의 방식은 우리가 드라마에서 흔히 보는 신파가 아니다. 그는 일단 암환자가 겪게 되는 다섯 단계의 감정 변화 중 첫 번째인 ‘부정’ 상태를 작업으로 풀어내기로 결심했다. 작품 제목인 ‘I see’는 분노의 단계를 일컫는 영어 표현이기도 하다. 일반적으로는 자신이 암에 걸렸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하는 단계가 부정이지만, 작가는 이 감정을 훨씬 재치 있고 상상력 넘치게 형상화한다.


지천에 널린 고기는 놔둔 채 어망 가득 탁구공만 잡아서 돌아오거나, 신호등이 들어온 숲 속에서 양복 차림으로 커피를 마시며 걸어가는 식이다. 얼핏 보면 명료한 행위들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이뤄질 수 없는 혹은 실패한 장면의 연속이다. 매 순간 열심히 살아왔지만 매번 엉뚱한 길로 들어선 듯한 자신의 허무함을 임형태는 이렇게 자연 속에 홀로 놓인 모습으로 묘사해 낸다. 상황극으로 꾸며진 모든 장면 속에는 작가 본인이 직접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합성을 하지 않기 위해 여러 날 발품을 팔아 촬영 장소를 찾아내고, 신호등을 직접 주문 제작하는 등 모든 소품도 꼼꼼하게 챙겼다.


다섯 단계의 감정 변화를 작업으로 완성시키는 게 목표인 작가는 이제 두 번째 감정 단계인 ‘분노’에 관한 작업을 얼추 마무리하고 있다. 그가 사진으로 만들어내는 섬세한 내러티브는 문득 나의 감정을 들킨 것 같은 착각마저 들게 한다. 그래서 그의 모노드라마는 실패하거나 외롭다고 느끼는 이들을 위한 위로처럼 보이기도 한다.




송수정 |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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