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닻의 아카이브


골목에 들어앉은 집들은 번듯하지도, 반듯하지도 않다. 담장 너머로 기웃거리면 마당에 빨래를 널었는지, 장독대 위 화분에다는 뭘 키우는지 정도는 금세라도 알아차릴 수 있다. 원래 담벼락을 붙이고 사는 집들은 전날 밤 어떤 일이 있었는지를 아는 것보다 모르는 척하기가 더 어려운 법이다. 다들 고만고만한 살림들이라 딱히 감출 것이 많지 않기도 하다. 김승택은 이런 집들을 사각형 안에 옹기종기 붙여 놓아 구경하는 재미를 더 쏠쏠하게 만든다. 작품 속에서 길들은 생략되고, 바라보는 위치도 아래로 옆으로 다양해 그야말로 전방위적으로 훔쳐볼 수가 있다. 전봇대를 지나 세탁소 안을 기웃거리고, 지붕 위에 걸린 운동화 한 짝까지도 죄다 눈에 들어온다. 딱히 순서랄 것도 없이, 작품 속에서 눈길이 간 집들을 타넘다 보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온다. 사람살이란 본래 시작과 끝이 없다는 듯이.



김승택, 산수동, 2014



시간과 기억이 켜켜이 쌓은 장소들에 주목하는 김승택의 작업을 뭐라 규정하기는 곤란하다. 사진 이미지를 바탕으로 마우스로 그림을 그린 뒤, 색을 빼기도 하고 칠하기도 한 이 작품은 사진과 일러스트가 합쳐진 콜라주다. 좁은 장소의 구석구석과 그 속에 깃든 사물까지를 섬세하게 보여주되 선형적인 나열을 벗어나려는 그의 전략이기도 하다. 통의동 보안여관에서 열리는 ‘닻의 아카이브’ 전시에서 소개한 김승택의 작품 속에서는 이렇듯 소박하고 가볍고 정겨운 삶들이 닻을 내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