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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송수정의 사진 속으로

미장센

 광장에는 무수한 말들이 떠돈다. 절실함으로 가득 찬 이들이 찾는 이 열린 공간에서는 설령 혼자서 말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외침이지 독백이 아니다.

그러나 정작 광장 자체는 말이 없다. 극우 기독교 단체의 구국 기도회와 해고 노동자의 복직 투쟁은 같은 장소에서 돌림노래처럼 퍼져나간다. 백만명을 끌어모은 나치의 정치쇼도 북한의 화려한 매스게임도 월드컵을 뜨겁게 물들였던 붉은악마의 응원도 모두 광장에서 일어났다. 카메라를 든 사람이라면 한번쯤 찾아오기 마련인 집회장에서 노기훈은 언제부터인가 사람이 아니라 장소에 주목하기 시작했다.



노기훈, 미장센 #20131228, 2013


뜨겁지만 멀리 퍼지지 못하는, 혹은 서로 다른 말들이 부딪치며 아수라장이 되는 그곳이 그에게는 마치 연극 무대 같았다. 광장은 모두에게 열린 공간이라는 환상을 심어주며 신고된 일정에 따라 집회가 막을 올리고 내린다. 그 무대 위에서 말의 무게나 가치와는 상관없이 어떤 집회는 흥행하고 어떤 집회는 쓸쓸하게 끝을 맺는다.

노기훈은 집회장을 찾아다니며, 사전 접수된 집회 시간과 동일하게 장노출을 주어 사진을 촬영했다. 한 번의 집회에서 얻어진 단 한 장의 사진 속에서 사람들의 움직임은 완전히 흐릿해지고, 주변의 경관과 광장만이 또렷하게 남는다.

2013년 12월28일, 그가 서울시청 옥상에서 찍은 ‘민주노총 총파업 결의대회’의 사진에는 행렬과 함성은 사라지고, 그 겨울을 즐기던 스케이트장과 무심한 목격자로서의 호텔 창문만이 선연하다. 말들과 행위를 시간 속에 삼켜버린 노기훈의 시선은 꽤 중립적인 것 같지만, 광장이 유토피아가 되지 못하는 시대를 의심하는 섬뜩한 냉소가 숨어 있다.



송수정 |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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