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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송수정의 사진 속으로

사이드 B

이민지, ‘Side B’ 연작 중 Stranger, 2014

이민지가 아르바이트를 간 곳은 토익 시험장이었다. 전공을 바꿔 사진을 업으로 삼기 시작했고, 딱히 정규직과 비정규직을 나눌 수 없는 작가로서의 인생을 시작하려는 길목에서 그도 일자리가 필요했다. 시험장으로 쓰인 어느 교실, 수험표에 알알이 박힌 증명사진들은 마치 취업 원서까지를 겨냥한 듯 반듯했다. 검은색 정장에 깔끔한 머리 모양은 개성 없이 복제된 청춘들 같았다. 토익이라는 것 자체가 개인의 능력을 점수화시키는 방편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시험에 몰두하는 얼굴들은 증명사진보다는 훨씬 다채로웠다. 그 순간 자신을 포함해 그 공간에 있는 수험생과, 또 그들과 엇비슷한 인생을 살아가는 자신의 친구들이 떠올랐다.

 

작업 제목은 ‘사이드 B’. B급 인생, 중심이 아닌 변방으로서의 ‘Beside’ 등 알파벳 B로 시작하는 단어에는 어정쩡한 그들을 가리키는 말들이 꽤 있었다. 사진은 자신과 친구들의 집에서 혹은 그들과 동행하는 길에 촬영했다. 전자기타가 놓인 곰팡이 핀 자취방, 하릴없이 평행봉에 매달리는 어둑한 저녁, 바람에 휜 나무가 몸을 삼킨 축축한 날들의 사진은 나른하면서도 묘한 심리적 긴장감을 뿜어낸다. 대신 사진에서는 아무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사건이야말로 어떤 결과를 전제한 움직임일 텐데, 그런 사건조차 일어나지 않는 일상이란 더 무기력하고 불안할 뿐이다. 흐르다 문득 멈춰버린 것 같은 그들의 시간 속에는 어눌함, 불안정함, 그리고 그 못지않은 어떤 뜨거움까지 함께 뒤엉켜 있다.

 

송수정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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