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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된 사진들

새까맣게 태워도

세 명의 청년이 오른팔을 들고 구호를 외친다. 그들의 목소리를 들려줄 수 없는 사진은 대신 벽에 적힌 구호를 보여준다. “노조인정”, 글자 아래에는 창업주로부터 80년간 ‘무노조경영’ 방침을 이어온 회사의 이름이 보인다. ‘삼성’, 한 글자는 이미 새까맣게 타버렸다.

 

1989년 1월19일 서울 삼성본관에서 노조인정을 요구하는 시위가 열렸다. 삼성중공업 거제조선 소속 노동자 5명과 고려대 등 8개교 대학생 20명은 낮 12시부터 삼성본관 3층 베란다에서 농성을 벌였다. 이들을 해산시키려고 경찰이 접근하자 삼성중공업노조 홍보부장 변성준 등 5명은 극약을 먹거나 몸에 시너를 뿌리고 극렬하게 반항하다 경찰병원으로 이송되었다.

삼성본관을 점거하고 노조인정을 요구하는 노동자들, 1989·1·19. 경향신문사

 

 

이제 시간이 흘렀고, 세상은 조금 더 나아졌을 테니 극약을 먹거나 시너를 뿌리는 등의 극단적인 선택은 불필요할 것만 같다. 그러나 2013년 삼성전자서비스 천안센터의 최종범은 노조활동을 하다 표적감사의 대상이 되었고, 노조에 “도움이 되길 바란다”며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불과 33세, 첫돌을 앞둔 딸이 있었다.

 

2014년 삼성전자서비스지회 양산분회장 염호석은 노조 설립 후 사측의 압박을 받다가 최종범을 뒤따랐다. 그의 죽음은 ‘마스터플랜’ ‘그린화 작업’ 등으로 불린, 이른바 노조와해 공작의 실적으로 포함됐다고 한다. 그런데도 세계일류니 또 하나의 가족이니, 기만적인 구호는 새까맣게 태워도 시원찮다.

<박지수 보스토크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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