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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칼럼=====/송수정의 사진 속으로

싸움



연필 공장을 개조했으나 여전히 창고나 다름없는 건물에서 재수를 하던 늦봄, 친구가 찾아왔다. 신촌에서 대학을 다니기 시작한 친구는 말수 없던 평소와 달리 잔뜩 상기되어 있었다. 그날 친구는 대화의 절반을 소개팅이 아니라 강경대의 죽음과 그 뒤 이어진 대규모 규탄 집회에 대한 내용으로 채웠다. 말 속에서 최루탄 냄새가 풍겼다. 친구가 다녀간 뒤로 운동권의 거듭된 분신이 이어졌다. 그러나 이듬해 신입생이 되어 마주한 대학가에는 단순히 시위만 있지 않았다. 대동제는 1987년 민주화 정신 계승이라는 말로 긴장감이 넘쳤으나 동시에 패배주의와 X세대라는 말도 등장했다. 운동을 하던 선배들이 각종 고시를 준비하는 일도 더는 낯설지 않았다.


신념에 찬 운동권의 등장으로 시작해 애매한 남편 찾기로 막을 내린 <응답하라 1988>은 우리가 통과한 이 시대에 대해 조금만 응답을 해줬을 뿐이다. 마치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최근 흔치 않은 사진집 한 권이 나왔다. <싸움>이라 이름 붙인 이 책은 우연찮게도 드라마 속 배경인 1989년부터 1993년까지의 시위 현장을 보여준다. 당시 카메라를 들고 거리에 합류했던 젊은 청춘들은 한글학자이자 사진가인 박용수 선생 밑에 모였고, 자연스럽게 ‘민족사진연구원’이라는 모임을 꾸렸다. 찍은 이를 별도로 구분하지 않은 사진들은 이 모임의 다섯 구성원이 찍은 10만여장의 필름에서 솎아낸 것들이다. 징그러울 정도로 많은 싸움이 있었던 셈이다. 이 사진집은 왜 하필 지금 소환되었을까. 책의 서문은 ‘이길 수 있었지만 이기지도 못했고, 지면 안되었기에 지지도 않았던 싸움’이라고 그 시절을 설명한다. 그런 싸움이라면 과거형으로 치부하기 곤란해진다. 오늘의 현실정치는 아직도 그 그늘 속에서 응답을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송수정 | 전시기획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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